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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의 정자를 찾아서
<합천의 함벽루>
합천!
가야산을 품고 있는 합천은 대전에서 무척 멀다.
예전 가야종주를 위해 지나쳤지만 수려한 풍광을 간직한 이 고을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른 아침 김천을 거쳐 내륙고속국도를 지나 합천으로 향한다.
김천과 성주는 온통 참외를 기르는 비닐하우스로 하얗다.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아카시아 향기가 짙다.
합천의 첫 인상은 무척 청결하고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황강을 끼고 있어 깨끗하고 소박하며 어수선하지 않은 조용한 고을을 연상한다.
삼국시대 이곳은 너무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싸웠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후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가 나라의 흥망성쇠를 걸고 최후의 일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는 이곳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신라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운 곳이다.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와신상담 복수를 노렸고, 결국 삼국통일의 대업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게 한 곳이다.
신라 장수 죽죽의 장렬한 전사가 가져온 대야성 전투는 합천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인식하게 한다.
가장 중요한 요충지 대야성을 잃고 신라는 군비 증강과 훈련 그리고 외교력을 동원하여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압박하게 된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대야성에서 사위와 딸을 잃은 복받친 원한을 풀기 위한 다짐 때문이다.
<함벽루에 걸려 있는 시인묵객들의 현판>
대야성을 찾아 나선 발걸음에서 만난 황강은 크고 유려함에 반한다. 황강은 가야산과 수도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함벽루 현판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이는 황강을 말하는 것이다.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남덕유산(南德裕山 : 1,507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며, 합천호(陜川湖)를 이루었다가 심하게 곡류하여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일대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주요지류로는 위천(渭川)·대천(大川)·가천(加川)·가야천(伽倻川) 등이 있으며, 유역에는 산간분지가 발달하고 있다.
황강 주변에서는 쌀·맥류·잡곡·사과·누에고치·완초(莞草) 등이 생산된다.
합천은 수려한 가야산을 품고 있어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세운 정자가 많다.
합천 근처 함벽루와 호연정 그리고 해인사 입구 농산정이 있는데 뇌룡정, 황강정과 함께 꽤 알려져 있다.
강폭이 넓고 유속이 느려서인지 대야성 건너편에는 야영장과 휴게시설이 들어서 있다.
죽죽정이라는 표지석이 있어 의아했는데 국궁 활터였다.
죽죽정을 지나면 우측으로는 연호사 일주문이 있고,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조금 걸으면 함벽루가 황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서 있다.
뒤편으로 산을 배경으로 황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치가 가히 천하제일강산이다.
함벽루 남쪽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자에서 보이는 황강과 주변 경관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절벽에 새겨진 ‘함벽루’ 각자는 오랜 세월을 지나친 흔적이 역력하고 우암 송시열이라는 각자가 왼쪽에 선명하다.
<함벽루에 걸려 있는 시인묵객들의 현판 - 왼쪽 아래 정이오의 글이 보인다>
조선시대 초기 세종과 문종 때 예문관 대제학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1347∼1434)의 시가 기록돼 있는 편액 1점도 있다.
<함벽루>
함벽루(涵碧樓)는 고려 시대인 1321년(충숙왕) 합주 지주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5량(樑) 구조의 팔작지붕 목조 와가이다.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는 배치로 유명하며 내부에 이황, 조식, 송시열, 송병준의 글이 씌어진 현판이 있다.
누각 뒤 암벽에는 ‘함벽루(涵碧樓)’라고 각자한 글씨가 있는데 이것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날 마루에 앉으면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진주 촉석루나 밀양 영남루보다 더 오래된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건축물 배치에 있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원래는 누각지붕의 물이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도록 건립했지만 생태공원과 산책로가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강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함벽루에 관한 현판 내용과 알려진 시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喪非南郭子 江水渺無知 欲學浮雲事 高風猶破之.
(상비남곽자 강수묘무지 욕학부운사 고풍유파지)
남곽처사를 슬퍼하는 것은 아니나, 강물은 아득히 흘러 끝 간 데를 알 수 없구나.
학문이란 뜬구름 같은 게 아닌가 하는데, 함벽루의 고풍이 이런 생각을 못 하게 하네. (한시작가작품사전, 2007.11.15, 국학자료원)
함벽루를 시로 읊은 표근석(表根碩)
春山曉雨洗藤蘿(춘산효우세등라) 봄 산의 새벽 비는 등라(등나무)를 씻고
寺下寒流晩更多(사하한류만경다) 절 밑의 시냇물은 저녁 되어 더욱 많다.
漁笛數聲天氣冷(어적수성천기냉) 고기잡이 피리소리에 날씨가 차가운데
隔江遙見兩三家(격강요견량삼가) 저 멀리 강 건너에 두 세집이 보인다.
* 표근석 : 호는 龜岩 중종 때 사람으로 벼슬은 참봉
* 함벽루 위치 : 경남 합천군 합천읍 죽죽길 80(전화 055-930-3176)
<연호사>
함벽루 옆에 연호사가 있다. 종교적으로 보면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고 있다.
연호사(烟湖寺)는 서기 642년 와우선사가 대야성 싸움에서 숨진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의 가족과 장렬하게 전사한 장병 2,000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원사(願寺)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연호사에는 폭 20.9㎝의 비단과 42.4㎝의 비단을 꿰매어 만든 신중탱화가 있다.비단 바탕 위에 제석천과 권속들을 묘사한 한 폭의 탱화이다. 색채가 약간 변색되어 있지만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이증영 유허비>
이증영 유허비는 일주문을 넘으면 산비탈에 비석군이 있고 그 중에 눈길을 끈다.
유허비는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 합천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이증영(?~1563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비문은 1554년에서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냈던 이증영이 1554년의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해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했다는 내용이다. 비석은 조선 명종 14년(1559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남명 조식(1501~1572년)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고산 황기로 (1521~1567년)가 썼다.
<신라충신죽죽비>
유허비를 둘러보고 대야성이 있다는 산정으로 향한다.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제법 펑퍼짐한 곳에 오래된 소나무와 평지가 나온다.
여기저기 산성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마침 중년 부부가 산책 후 쉬고 있기에 위치를 물으니 북동쪽으로 내려가면 있다고 한다.
두리번거리며 찾아간 곳은 처음 함벽루를 찾았을 때 보았던 죽죽비가 있던 곳이다.
결국 대야성의 흔적은 이곳에서 볼 수 없었다. 석축과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며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다만 황강 건너 호연정을 찾으며 본 대야성 위치가 요새였음을 인식할 뿐이었다.
<신라 충신 죽죽비>
이 비는 642년(선덕여왕 11)에 대야성에서 전사한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신라의 대야성은 642년에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검일(黔日)이 창고에 불을 질러 성안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전의를 잃은 김품석은 부하인 죽죽의 만류를 뿌리치고 항복하였다.
그런데 백제군이 항복하러 나온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자 김품석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이 고을 출신 사지 죽죽(舍知 竹竹)이 동료 용석(龍石)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남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백제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추울 때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항복하리요”라고 말하고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죽죽의 이런 충절과 용맹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에게 급찬(級湌)의 관등을 내리고, 그 처자들을 왕도로 옮겨 살게 하였다.
높이 1.4m, 폭 54cm의 화강암으로 세운 이 비석은 죽죽의 충절을 기리고, 그 뜻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1644년(인조 22년)에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에 의해 건립되었다.
비문은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1591~1658)가 지었다.
대야성(大耶城)은 신라 시대 서부 지역 요새였던 곳이다. 신라는 진흥왕 23년(562)에 대가야국을 멸망시킨 뒤 수륙 교통의 요충지인 합천의 대야성에다 도독을 두고 백제 침공을 막아 가야국 유민들을 평정하려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신라와 후백제 및 고려가 각축을 벌였던 대표적인 접전 지역이었다.
642년(선덕여왕 11년)에는 백제 장군 윤충의 침공으로 함락되어 성주인 도독 김품석(김춘추 사위)과 그 부인(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죽고 신라인 1,000여명이 포로가 된 곳이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인 920년에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 뒤 고려가 점령하였다가 다시 후백제에게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성은 936년에 최종적으로 고려가 차지하였는데 강변을 이용해 해발 90m의 취적산(吹苖山) 정상 부근에 흙과 돌로 쌓아 올렸다.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약 3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는데 찾을 수 없었다.
성의 동쪽 산기슭에는 642년에 이 성이 백제에 함락 당할 때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신라 장수 죽죽(竹竹)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야성 싸움의 충격으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함벽루 입구에 있는 활터 죽죽정>
<황강에 위치한 대야성과 함벽루>
<호연정 입구>
함벽루와 대야성을 살펴본 후 호연정을 찾아 황강을 건넜다. 황강 건너에서 보이는 대야성과 함벽루는 너무도 잘 어울렸다.
흡사 밀양의 영남루와 위치와 배경이 많이 닮았다.
황강 근처 호연정은 큰 은행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건축 양식과 호화롭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은행나무 밑 인지문이 반기는데 담벼락이 많이 허물어졌다. 기와에 뻗친 담쟁이 넝쿨이 그나마 고풍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지문을 통과하며 대하는 호연정은 넉넉함과 편안함이 배어있는 훌륭한 누각임을 알 수 있다.
안정된 구도의 팔작지붕과 자연적인 목재를 사용한 대들보와 석가레가 편안함을 준다.
대나무숲이 황강을 가려 시야가 무뎌졌지만 커다란 은행나무와 배롱나무가 운치를 더 한다.
대들보는 나무의 자연스런 모양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한 마리의 용이 꿈틀대는 모습이다.
주이가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대나무에 둘러 싸여 아름다운데 호연정 앞에 심어진 베롱나무는 청렴을 상징한다.
<인지문>
<호연정>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때를 만나면 조정에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귀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이때 귀향한 사대부들이 공들여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정자를 짓는 것이었다.
호연정(浩然亭)은 조선 중기 이락당(二樂堂) 주이(周怡 1515~1564)가 예안 현감을 사직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본래의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협소한 계곡 쪽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정자는 먼 곳을 조망할 수 있는 누각처럼 경관을 넓게 볼 수 있는 곳에 지었다.
이를 통해 건립자의 자연관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건물의 명칭과도 잘 어울린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팔작지붕 형식이지만,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매우 독특한 형태이다.
이처럼 기묘한 건축 방식 때문에 조산 시대 정자 중 특이한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각 부분의 자재 사용도 일반 건물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인공적 절제나 질서를 무시한 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호연정과 현판>
<호연정과 경(敬)자 현판>
호연정 천정에 달린 ‘敬’현판은 소수서원에 있는 백운동에 있는 경자바위의 글자를 연상한다.
아마도 이락당 주이도 주세붕과 이퇴계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음이다.
특히 주세붕이 건립한 것으로 전하는 경렴정(景濂亭)과 주세붕의 글씨로 새겨진 경(敬)자가 비교된다.
이밖에 세덕사, 영모사, 비각, 사주문, 협문 등이 있다.
* 호연정 위치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 224-1
<은행나무와 잘 어울리는 호연정 모습>
호연정을 보고 다시 합천읍내에 들러 점심 식사할 곳을 찾았는데 의외로 깔끔하고 정갈한 쌈밥집을 만나서 좋았다. 시골 된장과 어우러진 쌈밥과 돼지고기 볶음은 잘 어울렸다.
합천을 지나 가야산으로 향하는 노정은 사뭇 봄의 정겨움은 가고 녹음이 짙은 여름이 달려오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합천하면 가야산이지만 읍 소재지에서 꽤 멀다. 들녘에는 벌써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기온이 오르고 봄이 짧아지면서 모내기는 대략 보름 정도 빨라진 것 같다.
분주한 농촌 풍경을 보며 달리는 나그네의 마음은 조금은 멋쩍음이 엄습하지만 이내 가야산 기슭 홍류동으로 빨려든다.
항상 해인사나 산정 그리고 암릉을 찾아 가야산을 만났기에 홍류동 계곡을 걸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입구 매표소 근처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걷기로 마음먹는다.
<합천 우렁쌈밥집 상차림>
<홍류동 계곡 입구 농산정 모습>
가야산 자락, 해인사 경내로 드는 홍류동(紅流洞) 계곡은 이미 풍광 수려하기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홍류동은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 계곡 물까지 붉게 보인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단풍 좋으면 봄 신록도 좋다. 홍류동 계곡을 거슬러 경내까지 이르는 약 6km의 길이 소리(蘇利)길이다.
‘소리’는 불가에서 ‘이로운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극락으로 가는 길’이란 뜻도 있다.
여기에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세속의 시름 잊으라고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길 따라 계곡 따라 숲길을 지나고 다리도 건너며 걷는 재미가 있다.
何日文昌入此巒(하일문창입차만) : 최치원께서 언제 이 산에 들어왔던가?
白雲黃鶴渺然間(백운황학묘연간) : 흰구름과 황학이 아득히 어우러진 때 였도다.
已將流水紅塵洗(이장유수홍진세) : 이미 흐르는 물로서 세상의 때를 씻었으니
不必中聾萬疊山(불필중농만첩산) : 만겹 산으로 귀 막을 필요는 없으리라.
文昌(문창) : 신라 최치원
渺然(묘연) : 아득한 모양
紅塵(홍진) : 세상의 번거로운 일
<최치원선생둔세시비>
春風躑躅發層巒(춘풍척촉발층만) 봄바람에 철쭉이 온 산봉우리에 피어나니
膩漲臙指水鏡間(니창연지수경간) 거울 같은 물속에 붉은 연지 가득하구나.
若使重移楓葉景(약사중이풍엽경) 만약에 단풍 붉은 빛을 다시금 옮긴다면
溶溶錦浪半函山(용용금랑반함산) 크고 넓은 비단 물결에 반쯤은 잠기리라.
躑躅(척촉) : 철쭉꽃
層巒(층만) : 연 이어진 봉우리
臙指(연지) : 붉은 색 조화장
溶溶(용용) : 강물이 넓고 조용히 흐름
홍류동계곡에서 처음 만나는 곳은 신라말의 거유(巨儒) 고운(孤雲) 최치원이 가야산에 들어와 은둔하여 수도하던 곳인 농산정(籠山亭)이다.
정자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것은 고운 선생의 후손과 유림에 의해 1936년에 중건된 것이다.
이후 1990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정자의 건너편에는 치원대(致遠臺) 혹은 제시석(題詩石)이라 불리는 벽이 있고, 거기에는 고운의 칠언절구 둔세시(遁世詩)가 새겨져 있다.
최치원은 신라의 유교학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나라로 유학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떠나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농산정 현판과 둔세시비>
<농산정 현판과 치원대 제시석>
<농산정 현판>
정자의 이름도 그 시의 한 구절을 빌어 농산(籠山)이라 하게 되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아한 정방형 목조와가 건물이다.
정자 현판에는 김영한(金寧漢)이 쓴 농산정기와 찬양사 4수가 기록되어 있고, 고운 선생의 둔세시를 차운한 시 8수가 있다.
시 중에는 점필제(佔畢齊)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차운시(次韻詩)도 들어 있다.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항상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하여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짐짓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둘러싸네.
<홍류동계곡 농산정 모습>
비바람에 글자가 마모되고 차량 통행 등으로 인해 석벽이 갈라졌지만, 개혁의지가 벽에 부딪혀 좌절당한 고독과 고뇌가 여전히 배어 있다.
이 시를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고 하고, 이 석벽을 ‘제시석(題詩石)’이라 부른다.
이 석벽에는 이색, 점필재, 김종직 등 대유학자들이 다녀갔고 김시습, 한용운도 이 석벽을 찾았다고 한다.
“이 제시석을 1990년대 초에 도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신청을 했는데, 해인사 주지스님께서 이 시석은 낙관이 우암(尤庵)으로 되어 있어 재고해 달라고 해 보류가 됐다”고 하는데 제시석을 유심히 살펴보면 왼쪽 밑에 우암(尤庵)이라고 적힌 글씨가 보인다.
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라
山好如何腹出山(산호여하복출산)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속세의 어지러움에 다시는 휩쓸리지 않겠다는 최치원의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
◆ 전설로 읽는 최치원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는 고운의 마지막 흔적이다.
말년에 고운은 제자들 앞에서 학사대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살아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운의 마지막은 학사대 전나무에서 보듯 다분히 전설적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숲 속에 갓과 신발을 남겨둔 채 자취를 감춰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적멸보궁 앞 길상암 석가모니불상>
<길상암 적멸보궁>
<적멸보궁 뒷편 봉우리>
<합천 맛집>
▼ 고바우식당 : 산채정식,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055-932-7311
▼ 향원장식당 : 돌더덕구이정식,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055-932-7575
▼ 산사의 아침 : 사찰음식,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055-932-7328
▼ 토종흑돼지 : 삼겹살,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465-4, 055-932-6055
▼ 들꽃촌 : 송이밥∙흑태찜,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 1862, 055-933-7660
▼ 어신민물매운탕 : 어탕국수,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683-5, 055-931-1266
▼ 삼가대가식육식당 : 한우생고기, 합천군 삼가면 일부리 885, 055-933-8249
▼ 왕우렁쌈밥 : 한방약닭, 옻닭, 우렁쌈밥. 합천읍 055-934-3040
Everlasting - Stanton Lan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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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산님의 대단하신 역사의식과 산하를 바라보는 깊은 안목에 존경을 보냅니다.
어느한 곳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작은 곳에서도 그곳만이 지닌 내력과 의미가 담겨잇으니 진정 금수강산이 아닐수 없고
여기 이 땅에서 자유를 노닐수 잇는 우리는 정말 행복한 국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