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廣通橋) (2)
광통교는 예부터 서울에서는 큰 다리로 알려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양반, 중인, 상민, 부녀자 등의 많은 남녀가 이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보름날 밤 답교놀이는 고려조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되어있다. 태평할 때에는 매우 성하여 남녀들이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으므로 법관들이 금해서 체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 다리를 밟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유득공(柳得恭)이 기술한 『경도잡지(京都雜誌)』를 보면 고려 때에도 있었던 답교놀이는 서울지방, 특히 광통교와 수표교에서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경지략』에는 답교놀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집단놀이로 원래 중국 연경(燕京)의 풍속이며, 우리나라는 조선 초 중종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서울의 다리는 청계천에 많이 놓여있었으므로 도성 사람들은 답교놀이를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 광통교가 소광통교․수표교와 함께 답교놀이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날 밤 종루의 통행금지를 알리는 보신각 인경소리에 맞추어 열두 다리를 지나다니면 그 해 열두 달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고 액(厄)도 면한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을 믿었다. 이 날 밤에는 여인들도 답교놀이를 하기 위해 청계천 다리로 몰려들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조선말에 씌어진 『동국여지비고』에 보면 서울 8곳의 뛰어난 경치인 국도팔영(國都八詠) 중 ‘통교제월(通橋霽月)’ 즉 ‘광통교에서 보는 비 개인 후의 맑은 달’을 꼽았으므로 광통교가 그만큼 유명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많은 남녀가 이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이었다.
광통교에 관한 속담으로 ‘광통교 선사(禪師)의 점(占)’이 있다. 조선 초에 점쟁이로 유명한 늙은 소경[선사] 김을부(金乙富)가 광통교 다릿목에 살았는데 그의 점이 잘 맞지 않았으므로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점괘를 반대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이 날 처녀들은 자기 저고리의 옷고름을 몰래 떼어서 청계천에 내버렸다. 이는 자기 몸에 있는 액(厄)을 옷고름에 담아 없애겠다는 액막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날 12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주백병(走百病)’이라는 말과 같이 100가지 병을 물리치고 건강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월 대보름에 답교놀이가 사람들로 붐비자 양반들은 하루 전 14일 밤에, 부녀자들은 16일 밤에 다리 밟기를 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풍속편 답교조(踏橋條)에 보면
「정월 대보름날 밤의 놀이 중 성행되었던 것은 연등놀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특히 태종 이후에는 연등놀이 대신 다리 밟기가 이 날 밤에 성행하였는데 특히 서울에서 더 했다.
장안의 남녀들이 종가로 모여들어 보신각의 저녁 종소리를 듣고 나서 각 곳에 있는 다리로 흩어져 가서 밤새도록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였다. 서로들 어깨와 허리가 부딪힐 정도로 붐비면서 날라리와 장구를 울리고 시를 읊기도 하며 물에 비친 달을 보며 1 년 동안에 좋은 일이 있길 빌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서민들이 붐비는 15일 밤을 피하여 그 전 날인 14일 밤에 다리 밟기를 하였다. 이를 가리켜 ‘양반답교’라 하였다.
부녀자들은 14 · 15일을 피하여 16일 밤에 행하였다. 조선 중엽 이후에는 부녀자의 문 밖 출입을 심하게 단속했으므로 부녀자들의 다리 밟기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고 하였다.
광통교는 1953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서쪽 부분이 덮이고, 1958년에 동쪽 부분마저 덮였으므로 복개된 지하에서나 볼 수 있었다. 1994년 7월 18일, 서울 정도 600년을 맞아 조흥은행 본점에서 1/4로 축소한 광통교를 정문 부근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2005년 10월에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으로 광통교는 52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으나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 쯤의 위치 SK 본사와 한국관광공사 사옥이 있는 곳에 옮겨 놓았다.
이 다리의 원형복원을 위하여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부분과 창덕궁 및 탑골공원에 흩어져 있던 교량 난간 중의 7개의 석주(石柱)부분을 찾아내어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