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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둘레 문화 답사 제 2구간(01)
일 시 : 2010년 2월 21일(일) 09 : 00 한밭 도서관 집결
코 스 : 한밭도서관 → 시루봉 → 헬기장 → 여경암,거업재,산신각 → 점심 식사 → 유회당 → 광영정 → 안동 권씨 종가 → 구완동 → 오도산 → 비파산성 → 광영지 → 봉강정사,영귀대 → 한천 → 사우당 → 이사동 종점 → 월송재 → 학현재 *소요시간 : 약 13km 약 9시간(문화재 관람 시간 포함)
◆ <한밭 도서관. 042 - 580 - 4114, e-mail은 hanbat@its.daejeon.kr>입니다. 대전광역시 중구 한밭도서관길 222번지(문화동)에 소재합니다.
1984년12월 11일 충청남도에서 한밭도서관 건립 계획을 확정하여 1985년 12월 16일 본관 건립을 착공하였습니다. 1987년 12월 02일 충청남도 한밭도서관 설치 조례 공포되었다가 충청남도로부터 대전직할시로 이관되어 1989년 01월 01일 대전직할시 한밭도서관 설치조례가 공포되었고 1989년 12월 20일. 본관을 준공하여 도서관을 개관하였습니다.(대출실, 참고열람실, 정기간행물실, 아동열람실, 향토자료실 개실)
◆ 2009년 12월 현재 622,862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대지 19,703㎡, 연면적 22,429.87㎡이며 본관(지하 2층, 지상 4층)에는 일반 열람실 4, 성인 열람실 4, 제1, 2, 3 자료실 각 1, 정기 간행물실 1, 디지털 정보센터 1, 기타 4로 구성되어 있으며 별관 (지하 1층, 지상 3층)에는 강당 584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09 : 20 <한밭 도서관>을 출발합니다. 모두 27분이십니다.
◆ <보문산.寶文山 시루峰>입니다. 대전시민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는 보문산은 다음과 같은 전설들에 의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첫째 전설로는 우화형인데, 옛날 지금의 보문산 기슭에 아들 오형제를 둔 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장성한 아들은 각각 자기 뜻대로 직업을 달리하여 분가를 하게 되자, 늙어 노인이 되도록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뭄이 들어 연못에 한 방울의 물이 없도록 마르자, 그곳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나와 농부 앞에 나타났습니다. 농부는 두꺼비에게 물을 떠다 주었더니 두꺼비는 물을 마신 뒤에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 해도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연못에 나가보니 작년의 그 두꺼비가 접시를 가지고 와서 농부 앞에 놓고 사라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접시에 담뱃재를 떨었는데 다음에 보니 접시에 재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이상한 조화라고 생각한 농부는 동전을 놓아 보았습니다. 이튿날 보니 동전이 또 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아들들이 다투어 돌아와 접시에 탐을 내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의 욕심과 시기를 염려한 농부는 그 접시를 몰래 뒷산에다 묻고 돌아오다가 숨이 차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접시를 찾았으나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물이 묻혔다하여 <보물산>, 다시 변하여 <보문산>이라 하였습니다. (최문휘, 한밭의 얼,262∼164쪽 참조)
둘째 전설은 효자형 전설인데, 옛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착한 나무꾼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그 소문이 이웃 마을까지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나무꾼에게는 술만 먹고 주정을 일삼는 형이 하나 있어 부모와 동생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은 나무를 한 짐 해가지고 내려오는 길에 조그마한 옹달샘 옆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때 샘 옆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무꾼은 재빨리 물고기를 샘물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물고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듯 까불까불거리면서 사라졌습니다. 조금 후에 눈을 돌려보니 물고기가 놓여 있던 곳에 하나의 주머니가 놓여 있었습니다. 주머니를 집어보니 그곳에 '은혜를 갚는 주머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나무꾼은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 동전 하나를 넣었더니, 순식간에 주머니에 동전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무꾼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형이 그 보물주머니를 빼앗을 욕심으로 동생에게 주머니를 한번만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착한 동생이 주머니를 형에게 보여주자 형은 주머니를 가지고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동생이 알아차리고 형을 쫓아 주머니를 도로 찾으려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형이 주머니를 발로 짓밟는 통에 그 주머니 안에 흙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주머니에 흙이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쏟아져 나와 쌓이고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쌓인 흙이 드디어 큰 산을 이루니, 그 산 속에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다 하여 <보물산>이라 하였고, 그 후 <보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大田市史 682∼683쪽 참조)
셋째로는 도승형 전설인데, 옛날 한 대사가 소제동 방죽을 지나다가 해가 저물었는데 갑자기 논두렁에서 ‘우리 백성이 3년 가뭄으로 다 죽겠으니 우리 성을 살려주시오'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니 용궁의 왕이었습니다. 이에 대사는 물고기를 모아 가뭄으로부터 구해줬습니다. 그러자 용궁의 왕이 그 은혜로 복조리 하나를 대사에게 주었습니다. 대사는 복조리를 망태에 다 간직하고 보문산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날이 어두워 불빛이 나는 집을 찾아가니, 단칸방에 일곱 자식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대사의 저녁으로 진수성찬을 차렸으나 아이들에게는 시래기죽을 주었습니다. 부인의 간청으로 저녁을 먹고 아랫목에서 하룻밤을 잘 지낸 대사는 이튿날 아침 부인에게 복조리를 건네주었습니다. 부인이 복조리에 쌀과 엽전을 넣었더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쌀과 돈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큰 부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복조리의 신통함을 알게 된 자식들이 그 복조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하였습니다. 부인은 복조리를 강변 모래에 묻었습니다. 그 때 복조리에 모래가 들어가자 다시 모래가 쏟아져 나와 점점 늘어가더니 큰 산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이 산은 <보물산>, 곧 <보문산>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大田市史,683∼684쪽 참조>
◆ 각자 서명합니다.
◆ 새로 단장한 시루봉 정자 <보문정.寶文亭>입니다.
◆ <정섭 짱>님입니다.
◆ 오늘 신입 회원들입니다.
◆ <어쭈그리>와 <산아>님이십니다.
◆ <신라의 달밤>과 <아마추어>님이 뒤늦게 올라옵니다. 아마도 <삶은 달걀>의 무게 때문인 듯 합니다.
◆ <질경이>님입니다. 대전 지역의 일기(日氣)가 저 눈 속에 있습니다.
◆ <호경>님이 끈질기게 오릅니다.
◆ 신입 회원님께 닉-네임 목걸이를 걸어줍니다. 노란 둘레 손수건도 아름답습니다.
◆ <헬기장>입니다. <아마추어>님의 삶은 계란이 금새 동났습니다. 손길이 부끄러워 3개 남았습니다. <신라의 달밤>과 <개동>님의 몫이 될 듯 합니다.
◆ 언제나 먹고 나누는 대화는 즐겁습다.
◆ <유회당.有懷堂>을 향해 긴 여정을 출발합니다. <개동>님은 보문산을 누비며 청소 중입니다.
◆ <용꼬리>와 이 길을 찾았다가 길을 잘못 든 곳입니다.
◆ <바른생활 아저씨>께서 힘차게 오르십니다.
◆ 일행들도 곧바로 꼬리를 잇습니다.
◆ <국사봉>입니다. 중앙의 전봇대 서 있는 곳입니다.
◆ <여경암.餘慶庵>입니다.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번지에 소재하며 1989년 12월 13일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보문산 남쪽에 위치한 무수동에 삼신산의 별명을 가진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첫째 무수동의 뒷산으로 운풍산(雲風山), 둘째 동남쪽에 봉래산(蓬萊山), 셋째 앞산으로 방장산(方丈山)입니다. 그 중 동남쪽의 봉래산 속에 거업재와 여경암이 있으므로, 근방 사람들이 부르기를 여경암을 일컬어 봉래암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이 와전된 말로 <동남절>이라고도 합니다.
거업재와 여경암은 유회당(有懷堂)의 건립자인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1715년(숙종 41) 선묘(先墓)의 동쪽에 자질(子姪)과 제생(諸生)의 강학처로 세워졌습니다. 이 암자 명칭의 유래는 그가 자찬(自撰)한 『거업재기』에 적혀 있습니다. 즉 송나라 때 주자와 동시대인의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자제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강당을 지어 여경사(餘慶寺)라 지은 이름에서 취해 왔다고 합니다.
◆ <여경암.餘慶庵>의 현판입니다.
◆ 건물 뒤편에 본래의 모습으로 보이는 <여경암.餘慶庵>의 현판이 자리합니다.
◆ 자연미를 한껏 살린 주춧돌입니다. 이런 모습을 <덤벙 주추>라고 합니다. 자연과 하나이기를 추구했던 조상님의 마음을 짐작합니다. 그리고 문명에 찌들어 자연을 마구 파괴하는 현대인의 건방진 태도를 돌아봅니다.
◆ <여경암.餘慶庵>의 뒷마당입니다.
◆ 문화에 조예와 관심이 깊습니다.
◆ 속된 세상을 정화하려는 몸부림인가요? <목탁>은 잠시 휴식 중입니다.
◆ 그 안에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함부로 열지 말라'는 경고성 메세지가 참 순박합니다. 우리네 '창호지 문화'를 엿보는 순간입니다.
◆ <여경암 석조>입니다.
◆ <여경암 석조>의 좌측면에 새겨진 향연석정(香淵石井)이라 새겨 있습니다. '향기 나는 우물'이라는 뜻이겠지요. 석조 뒷면에 새겨진 <설립의례 별좌육청 석수영찬 건륭계해(設立儀禮 別座六靑 石手永贊 乾隆癸亥)>. 육청이라는 사람이 불사 시주를 하고 영찬이라는 사람이 돌을 깎깍아 만들었답니다. 건륭 계해는 조선 영조 20년으로 서기 1743년입니다. 지금도 건물 등을 준공후 시공자, 시행처 등을 적는데 같은 연유입니다. <가을 하늘>님의 해석입니다.
◆ <여경암 산신당.山神堂>입니다. 그 주련에는 보문산중진보처 항주대성산왕신(寶文山中眞寶處 恒住大聖山王神)이라 쓰여 있습니다. 보문산 속의 진짜 보배가 이곳에 있다. 성인인 산왕신이 항상 이곳에 머무신다.
◆ <신라의 달밤>님은 <여경암>에 심취했습니다.
◆ <거업재.居業齋>입니다. 재(齋) 앞에 연못을 파서 활수(活水)를 담아 독서한 후 이 못에서 마음을 맑게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이 재의 현판인 <居業齋> 3자는 그의 벗 박자임(朴子任)이 썼고 또한 박인경(朴麟卿)이 초서로도 써서 걸어 놓았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습니다.
◆ 은진 송씨 가문에서도 가문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원찰로 <비래암>을 지었고, <옥류각>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 그 후학들은 다들 어디로 떠났을까요? 이제는 '벌'들이 제자를 자처하고 떼로 몰려들어 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말 못하는 곤충이 똑똑한 척 하는 인간보다 훨씬 낫습니다.
◆ 햇빛 바른 무수동 여경암 뒷산에 자리하신 <용목. 容穆>님의 산소에서 점심상을 차립니다.
◆ <대둘>의 공식 지정곡 <산사람>을 제대로 부르지 않은 분들에게 벌칙입니다.
◆ 다른 분들의 <벌.罰>이 남은 분들에게는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 <신입 회원>들의 답례입니다.
◆ <돌까마귀> 대장님도 벌칙으로 한 자리 구성지게 풀어놓습니다.
◆ <용목. 容穆>님의 산소입니다. 오랜만에 손님들을 맞아 회포를 푸셨을 겁니다.
◆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선생 부친 묘소입니다. 그 부친은 <권유.權惟>이십니다.
◆ 유회당은 1707년에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선친인 증(贈) 찬성(贊成 )권유(權惟)의 묘(墓)를 모신 후, 부모 묘소의 첨배소(瞻拜所)로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독서(讀書), 강마지소(講磨之所)로 쓰기 위해 세웠습니다.
그리고 시묘소(侍墓所)인 삼근정사(三近精舍)와 지금은 장판각으로 쓰이는 별묘(別廟)를 지으니 모두 선친을 생각하는 뜻, 즉 유회이인(有懷二人 ; 부모를 생각함)이라는 뜻으로 집을 짓고 스스로 호를 <유회당>이라 하였습니다.
◆ 권이진의 자는 자정(子定), 시호는 공민(恭敏)입니다.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는 증조이고, 서구 탄방동 <도산서원>에 모신 탄옹(炭翁) 권시가 조부이며, 권시의 둘째 아들인 권유(權惟)의 셋째 아들입니다. 송시열(宋詩烈)은 그의 외조부입니다.
권이진은 22세까지는 외조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그의 부친 권유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누었고 권이진과는 사승(師承)관계로 연결됩니다.
◆ <가을 하늘>님은 우리 조상님네 사연을 해박하고 유창하게 설명합니다. <대둘>의 보배이십니다. <탄옹 권시>는 만회 권득기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주자(朱子)일변도의 성리학적 틀에서 벗어나 우주론(宇宙論), 예학(禮學), 경세론(經世論)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로 대표되는 노론계열과는 다른, 공적인 것과 실학정신을 강조한 남인계열의 학문을 추구했습니다. <탄옹의 아들 권유.權惟> (1625~1684, 인조 3년~숙종 10년)는 우암 송시열의 사위이며 전의 현감, 공주 진관 병마절제도위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부인 송씨는 우암이 출가하는 딸에게 아녀자로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손수 글로 써준 계녀서를 받은 주인공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참판, 호조판서, 우참찬, 평안감사 등을 역임한 유회당 권이진은 권유의 셋째 아들입니다.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도 맡은 바 소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도 보여준 유회당의 지극한 효성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 <유회당.有懷堂>입니다.
◆ <유회당.有懷堂>입니다.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번지에 소재하며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로 지정되었습니다. 1707년(숙종 33)에 조성되었습니다. 유회당 선생이 생전에 도화서 화공을 불러 그린 <무수동도無愁洞圖>를 살펴보면 시냇물에 돌다리 두 개가 놓여 있습니다.
◆ <유회당.有懷堂>의 <활수담.活水潭>입니다.
◆ <활수담.活水潭>에서 바라본 <유회당.有懷堂> 전경입니다.
◆ 당명(堂名)인 <有懷>는 명나라 말기 전목재(錢牧齋)의 <明發不寐 有懷二人. 二人은 부모를 지칭>이란 시에서 취해 쓴 것인데 이름 그대로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을 늘 품고자 하는 뜻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현판의 글씨는 권이진의 도의지교(道義之交)인 주암(朱庵) 박순(朴恂)의 글로 밝혀졌습니다.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선생(1668~1734)은 권유(權惟)의 묘소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묘의 동쪽에 문중 원찰인 여경암과 거업재를 지었습니다. 유회당 선생은 17세 되던 해(1684) 아버지 권유(權惟)가 세상을 떠나자 무수동(수철리)에 묘소를 마련하고 묘막을 지어 삼년상을 지냈습니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함평군수 등의 관직을 거치다가 40세가 되던 1707년 힘이 안 되어 미루었던 집 짓는 일을 가족을 이끌고 들어오면서 선친의 묘소를 현 위치로 이장하고 먼저 묏자리 아래 100보 되는 곳에 시신과 제기를 임시로 안치할 집을 지었는데, 때로는 시간이 늦으면 그곳에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이듬 해에 다시 묘막 서쪽에 두어 칸의 집을 지었습니다. 동쪽 방문을 열면 아침, 저녁으로 묘를 보면서 절을 할 수도 있었고, 비바람이 칠 때에도 제사를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문을 닫으면 쉬거나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집을 유회당(有懷堂)이라고 했는데, 명나라 전묵제의 시 ‘명발불매(明發不寐) 유회이인(有懷二人)’에서 따온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끝내 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 유회당에 마련된 좌우에 마련된 방은 불기재(不欺齊)와 구시재(求是齊)라 하였습니다. 67세가 되던 1734년 무수동에 돌아와 세상을 마감한 유회당 선생은 평생을 증조부 권득기의 가르침인 ‘매사필구시(每事必求是) 무락제이의(毋落第二義)’를 자경(自警)구로 삼았습니다. 선조께서 ‘모든 일에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여 두 번째 의리에 떨어지지 말라’ 하셨는데 가히 그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는 ‘시(是)’가 아닌 것을 ‘시(是)’가 아니라는 이 뜻을 헤아려 스스로 경계하였습니다.
◆ ‘속이지 말고 옳은 것을 구하라’는 이 말은 증조부 만회 권득기의 유훈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부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이 집을 지었고, 선친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집 이름을 삼았으며, 조상의 가르침을 좌우에 붙여놓았습니다. 당(堂) 내부의 대청에는 우측에 <구시재.求是齋>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권득기의 십자훈(十字訓)과 권시의 ‘사필구시(事必求是)’ 훈계(訓戒)에서 따온 것입니다. 좌측에도 <불사재>의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외에 1720년 권이진이 지은 <명당실기.明堂實記> 현판도 달려 있습니다.
<기궁재.奇窮齋>는 선친 묘소의 재실(齋室)로 안동 권씨가 아닌 관리인이 종토(宗土)를 경작하여 제사를 모실 준비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산(山)의 관리인이 따로 있었으나 근래에는 재실 관리인이 산의 관리도 함께 합니다. <기궁재> 상량문에 의하면 1920년에 중건한 기록이 있습니다.
◆ <장판각.藏板閣>입니다.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번지에 소재하며 1991년 7월 10일 유형 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 1734년에 별묘로 지어 1822년 중건되었는데, 현재는 유회당 권이진 문집 판목(板木) 246판이 보존된 유회당의 부속 건물입니다. 판목은 유회당의 증손인 좌옹(左翁) 권상서(權尙恕)가 왼손으로 써서 순조 초(1807∼1827)에 판각한 전 12권으로 배나무와 소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문집에는 시(詩)·소(疏)·장계(狀啓)·의서(議書)등이 실려 있으며, 유회당이 재임하던 시기(1700∼1734)의 사료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대일본외교사료(對日本外交史料) 및 연행일기(燕行日記)등 성리학 관계 자료는 당시의 학문과 국제 정세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이 외에도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번지 소재하며 1989년 3월 18일 문화재자료 17호 지정된 <유회당 유물>이 있습니다.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현종9년 : 1668 ~ 영조10년 : 1734) 선생의 유품으로 홍패, 척채, 인장, 군 사령기, 군도, 친필일기, 교지류 등이 있습니다.
◆ <상지문.尙志門>입니다.
◆ <석조.石漕>입니다.
◆ <삼근정사.三近精舍>입니다. <삼근정사.三近精舍>는 유회당이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여 1715년(숙종 41) 부모의 묘소 가까이에 시묘소(侍墓所)를 세웠습니다. 삼근정사.三近精舍>, <수만헌.收慢軒>, <하거원.何去園> 등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삼근정사.三近精舍>입니다. <삼근.三近>이란 부모의 묘소와 물과 산을 가까이 두고 지낸다는 뜻입니다.
◆ <수만헌.收慢軒>은 범석호(范石湖) 시(詩)의 ‘송초영기고궁방방 천석종수만낭신(松椒永奇孤窮滂滂 泉石終收慢浪身)’에서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 <하거원.何去園>은 춘추전국시대에 타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선영(先塋)에 돌아오는 고사(故事)를 본 받아 선영을 지키라는 뜻에서 지은 명칭이라 합니다. 어버이 묘소를 끝없이 모시고 싶어 여경암 재사(齋寺)를 천금 들여 다시 지었네. 스님들 효험 있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나무꾼 아이들이 날마다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세. 네모난 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따로 집 하나를 지어 글을 읽게 하였네. 어버이 받들고 후진을 기르는 뜻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후세에 그 누가 내 고심을 알아주랴. <유회당집>에서
◆ <권이진> 선생 추모비입니다.
◆ <유회당.有懷堂> 전경입니다.
◆ <달집>입니다. 정월 대보름을 기념해서 그 전날 소원을 비는 풍속이지요. '쥐불놀이'도 하고요. 설날은 보름까지라고 했습니다. 보름에는 연에다가 소원을 적어서 하늘 높이 띄웠습니다. 보름 이후에도 놀이에 급급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이후부터 농사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오는 2월 27(토)일겠네요. <박경리> 선생의 <토지.土地>에 상세한 풍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광영정.光影亭>입니다. 최근에 복원 공사를 해서 정감이 덜하지만 유회당 선생의 맏아들 권형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光影亭>은 지나는 누구나 잠시 쉬어가게 하는 정감을 지녔습니다. 시냇물을 끌어들여 앙증맞은 폭포를 만들고 못 안에는 연꽃을 심어 마음을 가라앉히며 더운 여름철에는 족탁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동쪽으로 수월난(受月欄), 서쪽으로 관가헌(觀稼軒), 남쪽으로 광영정(光影亭), 북쪽으로 인풍루(引風樓)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정자에서 바라본 四方의 정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종가 앞뜰에서 땀 흘리던 농부도 잠시 허리를 펴고 누울 수 있고 길을 지나던 여경암 스님도 잠시 쉬어가는 곳입니다. 해마다 이엉을 해 씌우는 수고를 마다하고 초가지붕을 고집하는 무수동 권씨의 미학적 안목도 돋보이지만 개인 소유의 정자에 담장이 없어 누구나 부담 없이 쉬어갈 수 있고, 방향만 돌아앉으면 네 개의 정자가 되니 그 효용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동쪽의 수월난(受月欄)입니다. 초저녁 동녘으로 돋아보은 달빛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겠지요.
◆ 서쪽의 <관가헌(觀稼軒)>입니다. 자기 집쪽을 바라본다는 의미이겠지요.
◆북쪽의 <인풍루(引風樓)>입니다. 북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자로 끌어온다는 뜻이겠지요.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입니다.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299-1번지에 소재하며 2001년 6월 27일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 지정되었습니다.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 1668~1734) 선생이 처음 터를 잡았던 유회당 종가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88년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에 옮겨 지은 것입니다.
◆ 이 가옥은 보문산 남쪽을 배경으로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산과 내를 벗하여 생활함으로써 청결하고 참된 선비의 경지를 이루겠다는 생활 철학이 담겨진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건물의 규모를 작게 하고, 건물 간의 사이 공간을 여유롭게 배치한 유회당 종가는 낮은 잡석 기단 위에 구성한 ㄱ자형 안채의 온건함, 아담한 크기의 사당, 마을 공동체의 구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모정, 그리고 자연 공간과 어울린 정원 등이 다양한 공간 구성을 보여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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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과 사진 감사드립니다.
자세한 설명과 사진으로 문화답사 눈으로 하고 갑니다
멋진 사진과 글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용머리님>>
자세한설명과 사진을 보고 공부열심히 하고 갑니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니 더욱 생생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못가서 아쉬웠는데, 용머리님 설명과 사진을 보고 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용머리 님,가을하늘 님 두분다 대둘의 보배입니다.
많은 것을 알고 배우고 가며,
소중한 글 퍼가겠습니다.
같이한 답사길 즐거워고요. 항상 상세한좋은자료을 올려주는덕택으로 많은것 알고가게해주어즐감하고가며 감사합니다
함께 못한 아쉬움을 용머리님의 답사기로 달래봅니다. 아마도 갔더라도 이리 상세히 보지는 못했을것이므로... 그저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잘 보고 느끼고 마음에 담아 갑니다. 고맙습니다.
함께하진 못햇지만 님 덕분에 공부도 하고 풍경도 즐기고 많은것을 가져갑니다.수고하셨읍니다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 직접가서 한번 둘러보고 와야 겠다는 마음입니다.
그저 입만 벌어집니다.....................많이 배우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좋은 코스를 개발해주신 돌 까대장님께 이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