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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스크랩 몽골 몽골 기행산문15 - 다리강가의 실린보그드 산과 돌사람
이시백 추천 0 조회 29 10.11.18 15: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리강가의 실린보그드 산과 돌사람

 

 

박 태 일

 

 

지도에 있는 마을 이름을 짚으니 이미 사라졌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몽골 들은 그렇다. 자연이 사람을 덮어버리는 곳. 지워진 사람과 시간이 얼마일 것인가. 모든 것을 흩고 그저 자연 그대로다. 텅텅 사람 빈 들이다. 터엉 텅 소리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동몽골 초원에서는 어디서나 흔한 어워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 드물게 눈에 드는 것도 쌓아 올릴 마땅한 나무나 돌을 찾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집터나 공사장에서 나온 듯한 벽돌로 만든 어워도 있다. 쓰레기를 치워 놓은 꼴이다. 그러나 몽골 사람들에게는 느낌이 다르다. 어워제를 올리고 신성한 헝겊인 하닥을 감으면 그곳은 어김없이 성소로 올라선다. 어워는 막연히 복빌곳이나 여정의 안전을 비는 표지가 아니다. 집짐승이 오갈 들을 깨끗이 치워주고 들풀을 제대로 자라게 하는 일까지 맡는 게 아닐까. 동몽골 너른 초원에서는 어워조차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셈이다. 모든 것이 자연, 들과 풀 아래 놓인다.


 

 

실린보그드 산을 향하여

 


동몽골 남쪽 수흐바아타르 아이막 소재지 바롱우르트를 떠난 때는 8월 8일 아침이다. 목표는 다리강가 솜. 거기서도 먼저 실린보그드 산을 첫길로 삼아 나섰다. 가을빛이 누렇게 내리기 시작한 들에서 흔히 눈에 드는 풀은 허물이라고 일컫는 달래다. 무서운 생명력을 지닌 이 놈은 산이고 사막이고 몽골 어디서나 가득하다. 빛도 하양에서 연분홍까지 여러 깔을 지녔다. 한국 사람들이 야생파라 일컫는 이 달래를 몽골 사람들은 소금에 절여 반찬으로 삼는다. 양이나 염소 고기가 내는 독특한 맛에는 이 달래가 한 몫 거든다.


달래 다음으로 많이 볼 수 있는 풀은 아그라 일컫는 향초다. 이 놈 또한 달래에 질세라 초원 지역을 뒤덮는다. 우리의 박하에 견줄 만한 놈이다. 몽골 사람들은 냄새가 진한 이 풀을 끓여서 고뿔약으로 쓴다. 봄에서 여름까지 몽골 들과 능선을 채우는 아그의 부푼 듯한, 졸음에 겨운 듯한 푸른빛은 뭉게뭉게 아름답다. 멀찍이 보는 이들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빛깔이다. 게다가 차바퀴가 지나간 자리나 걸음을 빨리해 달아나는 집짐승의 발굽 뒷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이 아그 내음이 물컹 피어오른다. 몽골 들은 그대로 향기 나라며 꽃마을인 셈이다. 전형적인 초원지역 수흐바아타르에서도 달래와 아그는 자랑스럽게 제 모습을 뽐냈다.


들길은 어지럽다. 한 시간 달려 아스가트 솜이다. 펑크 난 바퀴를 바꾼다. 그리고 가게에 들러 바퀴 충진제에다 다리강가 알탕어워에 바칠 몽골 증류주 아르히를 준비했다. 아스가트 마을을 벗어나 길을 묻기 위해 가까운 목민 게르로 차를 몬다. 기사인 초카(촐롱바아타르, 45살)가 길이 수상하단다. 여름철 내내 사람들이 다리강가 지역을 오간 까닭에 옆으로 벗어나고 갈라져 있어 바른 길을 찾기 어려웠나 보다. 매가 한 마리 날아갈 생각도 않고 길 옆에 앉아서 깃털을 다듬고 있다. 우두머리 새답게 당당하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도 겁이 없다. 시속 60-80킬로미터로 들을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눈에 담는 풍광은 편안하다. 날아올랐다 금방 눈길 바깥으로 벗어나는 종달새는 날갯짓이 힘겨워 보인다. 바람 탓인가. 다시 내려앉는다. 이쁘다.


멀리 야생 염소 지르가 떼로 보인다.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기사 초카는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빠짐없이 손으로 가리켜 준다. 놈들은 겁이 많고 매우 빠르다.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겨울철이면 총으로 잡기도 한다. 가다 보니 썩고 있는 놈의 시체도 뜨인다. 하얀 뼈가 드러났지만 멋스런 대가리뼈와 뿔은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햇살에 살이 녹고 있는 송아지 주검도 하나 스친다. 독수리에게 뜯기기도 앞서 상한 것인가. 저렇듯 온전하게 살이 녹아내린 놈은 저승길을 우머우머 다시 기어 다닐 수 있을까. 검은 빛돌이 많아지고 길도 거칠어진다. 구멍 뚫린 화산암이다. 몽골 대표 화산지대 다리강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다. 차는 느려졌다 빨라졌다 길에 맞추어 가락을 탄다.

  
초원의 땅금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 보일 따름이다. 그 밑에 도사리고 있을 세월은 두터운 슬픔이다. 양철 지붕 위로 떨어지는 여름 햇살처럼 가벼우나 뜨거운 마음. 서쪽 알타이 묏줄기, 북쪽 삼림지대를 젖혀둔 거의 모든 몽골의 강 또한 그렇다. 넓은 땅을 흘러내리다 보니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소리도 지워졌다. 그러나 강물은 빠르게 마르고 깊숙이 흐른다. 신음 소리가 크다. 햇살에 끓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몽골 초원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게다. 그런 강을 스쳐 지나고 들을 건너니 높낮은 능선이 푸른 실루엣처럼 내려앉았다. 한 눈에 불로 된 오름임을 안다. 저 가운데 가장 높은 데가 실린보그드 산이리라. 그러나 거기 닿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가야 할까. 다시 능선 아래로 내려앉는 오름들. 흰 소금물 차강 호수가 길게 나타났다 차창 곁을 스쳐간다.


몽골에서는 집짐승을 닮은 사람과 사람을 닮은 집짐승이 한 마을을 이룬다. 그런 마을이 띄엄띄엄 구름처럼 흐르고 그런 곳을 풀이 덮어준다. 살아서 걸어 다니는 들, 저 혼자 흐르는 마을이 있다. 보이지 않는 그 마을 어느 곳에 차를 세웠다 다시 달린다. 바람 쪽으로 방향을 틀어 식히고 물을 채우곤 달린다. 실린보그드 산에 가까워지면서 풀들은 더욱 세차게 자랐다. 화산지대가 지닌 기름진 흙 탓이다. 키가 크고 푸름도 윤기가 짙다. 8월, 어느새 가을빛이 돌기 시작하는 북쪽과는 다르다. 그래도 발목 치맛잎들은 땡볕에 하나같이 마른 모습이다. 힘든 듯 줄기를 흔든다.

 

뒤를 돌아보니 흘러 온 길이 길다. 구불구불 솟았다 내려앉는다. 마른 핏줄 같이 붉은 황톳길이 푸름 위를 기고 있다. 삶의 뒷자리도 저렇듯 부드러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늘 검은 피딱지가 말라붙어 아련한 삶. 들이 파도처럼 서에서 동으로 넘어지고 있다. 죄 한 초록 같은데 찬찬히 보면 다르다. 진하고 옅고 두텁고 얇다. 촉촉하고 마르다. 그들을 뭉뚱그린 느낌은 싱싱함. 사이사이 구름 그림자가 그 변주를 더욱 다채롭게 이끈다. 그러고 보니 구름 그림자는 초원의 성자다. 무리지어 어슬렁거린다. 그의 발바닥에 밟힌 들이 잠시 출렁거린다. 내 어깨도 촉촉해진다. 차의 라디에이터가 쿨럭쿨럭 목을 축이는 사이에도 그들은 들을 건너선다. 그것도 휴화산의 기억을 머금은 짙은 푸름.

 

1시, 바롱우르트에서 다섯 시간 들길을 달린 끝에 실린보그드 산 게르캠프에 닿는다. 산을 21킬로미터 남겨둔 곳이다. 크기가 작다. 손님을 위한 게르는 모두 일곱 개뿐이다. 그러나 시설은 나름대로 갖추려고 애썼다. 텔레비전까지 보인다. 밥 없이 하루 숙박비가 5000투그릭이니 싼 쪽이다. 밥은 한 끼 2000투그릭. 네 철 내내 이곳에서 게르캠프를 열고 있다는 주인 바트후를은 다리강가에 있는 돌사람에 대하여 묻자 이내 나를 안으로 이끈다. 작은 중국 사과에 마른 빵과 과자, 징키스한 보드카와 아이락, 게다가 포도주도 두어 병 차려 둔 식당 게르였다. 그는 두 주먹을 모은 것보다 더 커 보이는 돌 조각상을 하나 꺼내 보인다. 그의 말로는 옛날 것이라고 하나 알 도리가 없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을 줄여 가게에서 파는 기념품과 닮았다. 구멍 뚫린 화산암으로 짜임새 있게 다듬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보여준 뒤 은근히 사기를 권한 것이겠다. 나는 값을 묻지 않고 일어섰다.


실린보그드는 해발 1778미터 휴화산이다. 가까이 숱한 오름을 크작게 거느린 채 수흐바아타르 아이막에서 가장 높이 솟은 성스러운 산이다. 차는 둘레가 300미터나 됨직한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 중턱에 이른다. 거기서부터 꼭대기로 가파르게 걷는다. 마음이 마구 기울어진다. 뛰듯이 실린보그드 꼭대기를 바라본다. 제주도 오름과 꼭 닮았다. 검은 화산암 구멍 숭숭한 옆으로 갖가지 여름꽃이 빛깔을 흩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오른 꼭대기에는 커다란 어워가 하나. 그 곁으로 작은 돌탑이 여럿 널렸다. 중심 어워는 오랜 세월 단단하게 손질이 되어 한 눈에도 우뚝하다. 나라에서 소중하게 모셔왔던 것답게 웅장하다. 그리고 산 아래 네 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작은 오름과 들. 드디어 나는 아름답다는 말이 제대로 어울리는 풍광을 만난 것인가.


동남으로 몇 킬로 바깥부터 중국 쪽 남몽골과 국경이다. 그러나 가슴 뛰는 일은 저 너머 어딘가부터 흥안령 묏줄기가 누워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몽골에서 부여, 고구려 옛 땅을 눈으로 가늠한다. 몽중 국경에도 아랑곳없이 들은 흥안령 용맥으로 밀려 간 뒤, 다시 한참 만주 땅을 건너 흰 소머리 백두산 우뚝 솟은 땅으로 내려설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푸른 여름이 몸매를 마음껏 다듬고 있을 터. 눈 밑으로 열린 풍광은 억 숨을 멈추게 할 듯 장대하다. 거기다 어느 곳에서나 구름 그림자가 짙푸른 사발을 엎어 놓은 듯 높낮은 오름을 밟고 있다. 미끄러운 범무늬를 찍었다. 나는 천천히 어워를 세 번 돈다. 동몰골 남쪽 끝에서 여름빛이 빚어낼 수 있을 으뜸을 겪게 해 준 모든 인연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 미국에서 왔다는 늙은 부부도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바람이 어워에 매달린 헝겊 풍마를 때린다. 말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새떼가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와 옮겨 다닌다. 이미 이 오름 풍경을 즐기는 데 이골이 난 탓인지 나는 데에도 가락을 넣는다. 꼭대기 남쪽에 붙어 있는 자그만 굴까지 내려간다. 반디라는 의적이 청나라 지배자들을 피해 숨어 살았던 곳 가운데 하나. 어느 나라에 가나 침략자, 수탈자와 맞서 싸운 의적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동몽골 남쪽 국경지역에서는 반디가 대표적인 위인인 셈이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등에 진 채 실린보그드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디 조각상과 강가 호수가 있다는 다리강가 마을로 길을 잡으면서도 산 둘레를 떠나지 못했다. 사람 키를 훌쩍 넘을 엉겅퀴들이 계집아이 주먹 만한 자줏빛 꽃을 피워놓고 억새 숲에서 들썩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 엉겅퀴 꽃술에 걸음을 한참 빼앗긴 뒤에야 차를 출발시켰다. 다시 파란 하늘 푸른 들이다.

 

 

 

의적 반디와 강가 호수

 

 

두 시간. 소떼와 양떼 그리고 흰 목민 게르. 강가노르 곧 강가 호수 못 미쳐 강가 산에 있는 반디 기념상에 이른다. 1999년에 만든 것이다. 산허리에 앉아 멀리 남쪽으로 강가 호수와 그 너머 모래띠 언덕 몰쩍엘스를 내려다보는 자세다. 뒤로는 중국 땅 남몽골. 그가 눈을 멀리 둔 곳이다. 소젖차 잔을 들고 있다. 밑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커다란 쇠솥까지 하나 마련해 놓았다. 200년 앞선 시기에 만든 것이라 하지만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사람들 오간 흔적이 둘레에 역력하다. 놓아먹이는 낙타 두 마리가 가까이서 어슬렁거리다 능선을 넘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이룬 곳인 만큼 몽골로 볼 때 반청 의적이었던 반디 조각상은 뜻이 크다. 그가 청나라 지배자들을 어떻게 골리고 괴롭혔던가를 알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리강가 높낮은 오름처럼 곳곳에 살아 있을 터이지만 알 도리가 없다. 그저 초카가 반디 조각상에서는 어느 곳보다 즐겁게 카메라 앞에 서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는 수흐바아타르 아이막을 벗어나 동몽골 초원지역의 대표적인 남자상으로 올라섰는가 싶다. 웃고 선 초카를 보면서 지기 싫어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몽골 남자들 속에 들앉아 있을 반디를 느낀다.


 

멀리 20킬로나 벋어 있다는 몰쩍엘스는 부드럽게 햇살을 튕겨내며 출렁인다. 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오랜 세월 쌓여 파도 띠를 이룬 언덕. 그리고 그 앞에 놓인 강가 호수는 8월 이후 철새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내려가 살피니 생각보다 크기가 작다. 몽골 다른 호수처럼 점점 말라가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다. 수흐바아타르 아이막을 대표하는 명승지답게 사람들이 몰려들어 쉬고 있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벌건 모습으로 낮술을 즐긴다. 사진기를 들이대니 불쾌한 낯빛이다.


 

호수 한가운데서는 말떼가 몸을 식힌다. 이리저리 진흙 물가에 흩어져 있는 새 발자국과 눈을 맞추며 걷는다. 점점 해가 빠지는 강가 호수 건너 쪽에는 하얀 고니떼. 그들도 더위나기에 즐겁다. 물가에 바짝 붙은 모래샘에서 사람들은 물을 마시거나 길어가기 위해 통을 들고 서 있다. 호수 둘레에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하나만 남은 게다. 호숫가 밑물이 흘러 되솟은 것일 터. 둘레에 붉은 함초가 널렸다. 염분이 많은 호수라는 뜻이다. 마시기에 적당치 않아 보이지만 더운 날씨에 사람들은 열심히 샘물을 즐긴다. 철새가 가장 많이 내려앉는다는 9월에 호수는 어떤 모습일까.


 

더위를 식힌 다음 서쪽으로 십 리쯤 떨어져 있는 다리강가 마을로 들어간다. 멀리 마을 뒤로 돋은 알탕어워 불 오름이 바싹 눈 안에 든다. 내일 아침 올라가볼 성소다. 다리강가 마을은 내 짐작과 달리 너무 피폐했다. 이름 높았던 불꽃 도시, 금은세공의 풀무질 화려했을 다리강가 마을이 아닌가. 가까스로 작은 호텔을 하나 찾았다. 1층에 식료품 가게를 두고 2층은 방 4개로 호텔을 꾸리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는지 일꾼 아가씨가 허둥거린다. 어렵게 찾은 열쇠 또한 잘 열리지 않는다. 나갔다가 한 참 뒤에 돌아와 다시 연다. 열쇠가 바뀌었나 보다. 방 안에는 몇 가지 기물이 널려 있다. 포대기를 풀어 이불닛을 꺼내 준다. 지난 해 손들이 왔다 간 뒤 씻어 넣어 둔 것이리라. 텔레비전도 하나.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 처음부터 쓸모가 없다. 그래도 더 나은 방이라며 6000투그릭을 받는다. 기사 초카와 통역 뭉그(몽금줄)가 묵을 방은 한 사람에 4000투그릭이다. 작은 방 안에 침대를 서너 개 채워 놓은 전형적인 몽골 시골 호텔이다. 그나마 이것이라도 있어 다행스럽다. 호텔이 없었더라면 몽골 기사들이 장거리 여행에 준비해 다니는 간단한 숙박 용구를 써서 차 곁에서 잠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촛불을 켠 호텔 2층 방안에서 창 바깥으로 밀려드는 다리강가 풍광은 내다본다. 개와 아이들은 컹컹 짖으며 웃으며 푸른 달빛 속을 떠다닌다. 다리강가는 청나라로 오가는 사신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 기념품이며 선물용으로 많은 금은 세공품을 만들 사회경제적 조건은 든든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다리강가가 지닌 공예 전통을 설명하기에 모자란다. 화산지대여서 일찍부터 불을 다루는 법에 익었을 터이지만 이들은 어떻게 뛰어난 공예술로 나아갔을까. 노을빛이 타다 마지막 까만 재를 하늘에 흩고 꺼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리강가의 피폐를 온몸으로 느낀다. 불꽃 식은 뒤 어두운 삶의 고난만 눈을 치켜 뜬 곳, 다리강가에서 밤은 늦게까지 오지 않았다. 촛불 아래서 수첩을 끄집어내어 또박또박 일정을 떠올린다. 달빛이 달빛에 쓰는 일기다. 10시가 넘어서야 옛 도시 다리강가 마을은 잠이 든다.


 

 


 

알탕어워 불 오름


 


 

6시 일어남. 새가 운다. 가볍게 차려 입고 마을로 나선다. 소젖을 짜는 여자들. 네 꼭지 가운데서 앞 쪽 두 개만 짠다. 뒤 쪽 젖은 송아지 몫이다. 젖을 짠 소들은 우리와 달리 그냥 두면 들로 나간다. 벌써 마을 너른 골목을 벗어나고 있는 소떼가 장관이다. 이 집 저 집에서 나오는 소들. 이제 다리강가 여자들은 소똥을 치울 차례다. 하나하나 주워 소똥 더미에 올린다. 말려 겨울 내내 땔감으로 쓸 것이다. 벽에 발라 바람벽을 만드는데도 쓴다. 강가 족 여자가 서서 얼굴을 씻는다. 조그마한 그릇에 물을 담아 나와서 한 손으로 얼굴을 훔치고는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게르 앞에 멀찌막이 떨어져서 그 일을 차례차례 쳐다본다. 아마 그녀는 아침부터 웬 낯선 놈이 얼씬거리는지 매우 불편했으리라.


 

게르 앞은 지나다니지 않는 법, 나는 빙 둘러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호텔로 왔다. 여덟 시. 불이 식은 마을 다리강가에 아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개도 빠짐없다. 밤새 짖어대던 개들은 소가 빠져나간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싼 뒤를 즐기기도 한다. 어릴 때 시골에서 보았던 먹이사슬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다. 마당은 어느새 깨끗해졌다. 소똥은 어머니가 거두어들이고, 아이들 뒤는 개가 청소해 주니 이 어찌 생태적인 완성이 아니란 말인가. 벌써 울타리 가까이 붙어 배를 깔고 누워버린 개도 있다.


 

아침밥은 가까운 가게에서 보쯔 만두로 때웠다. 이제 금은세공사, 곧 다르항을 만나볼 순서다. 어제 마을에 이르자마자 집은 물어둔 터다. 다리강가 마지막 세공업자인 다르항후를의 게르는 호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혹 집을 비울까 싶어 일찍 문을 두드린 셈이지만 그는 게르 안으로 친절하게 이끌어 준다. 한국 사람은 처음 만나는 그다. 5대째 세공업을 한 집안. 안은 깔끔하게 손질되어 여느 유목민 게르와 다르다. 그것이 그의 취향인지 아내의 살림 솜씨인지는 알 수 없다. 갖가지 무늬로 화려한 가리개도 눈길을 잡는다. 손수 풀무질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아뿔싸 여름에는 더워서 일을 하지 않는다지 않는가. 봄, 가을, 겨울 세 철만 불씨를 피운다.


 

“만들어 둔 물품이 있으면 한 번 보고 싶은데.”


 

“달리 좋은 것은 없습니다.”


 

아내에게 준 것이라며 은팔찌 하나와 전통 옷인 델에 붙이는 금단추를 꺼낸다. 섬세한 맛은 적었지만 그로서는 매우 아끼는 듯했다. 마을 다른 다르항들은 모두 아이막 소재지 바롱우르트로 나갔거나 더 큰 울랑바아타르로 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손으로 다듬기보다는 기계로 만드는 일로 들어섰다. 그러니 참된 뜻으로 가내수공업을 하는 이는 다르항후를 한 사람 뿐이다. 주제넘지만 그에게 오래도록 일을 버리지 말 것을 부탁하고는 자리를 떴다.


 

9시를 넘어 다리강가 대표 경관이자 불의 정수리인 알탕어워로 향했다. 멀리서 보면 중년 어머니의 젖꼭지처럼 편안하고도 둥글게 돋은 불 오름이다. 잘 생긴 호박을 반쯤 잘라 엎어 놓은 것 같다. 몽골에서는 성소에 오를 때 그곳이 눈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입으로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는 금기가 있다. 그곳 또는 저곳이라 대이름씨를 써야 한다. 섬기는 자세를 으뜸으로 올려 세우는 방식인 듯싶다. 알탕어워도 마찬가지다. 산 아래 이르니 작은 라마탑이 보인다. 먼저 거기부터 참배하고 걷기 시작한다. 뭉그는 탑을 넘어 산에 오르지 못한다. 남자들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여자들은 차를 타거나 걸어서 알탕어워가 있는 산 둘레를 오른쪽으로 세 차례 돌아 참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알탕, 곧 금을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 신성한 어워는 2년에 한 번씩 크게 어워제를 모신다.


 

어제 신린보그드 산에 오를 때는 기사 초카보다 내가 먼저 꼭대기를 밟았다. 바쁜 마음에 그리했지만 오늘은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침 알탕어워를 밟는 첫 기회를 그에게 주기로 하고 나는 걸음을 일부러 늦춘다.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곳에 모처럼 참배를 오게 된 그로서는 얼마나 경건할 것인가. 그도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숨을 헐떡거리며 앞서 걷기 시작한다. 화산탄 조각이며 검은 흙이 다리강가 지역 화산의 역사가 오래지 않음을 보여준다. 2-300년 앞까지 화산 폭발이 있었던 듯 아직까지 땅이 식지 않은 느낌이다. 가파른 비탈에 짙은 자줏빛 용담이 떼로 피어 있다. 꼭대기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까마귀 두 마리가 난다. 느긋하게 날아올랐다 앉았다 하는 품이 어워에 둥우리를 틀고 사는 지킴이 까마귀임에 틀림없다. 몽골 사람들은 만주족과 달리 까마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렇듯 성소를 지키는 큰 까마귀야말로 바로 우리 겨레의 표징 가운데 하나였던 삼족오는 아니었을까.


 

알탕어워 꼭대기는 아예 시멘트로 탑을 만들어 굳혔다. 19세기에 세웠던 옛 탑 자리에 이즈음 새로 올린 것이다. 전통 어워와 많이 달라진 셈이다. 둘레로 오간 사람들이 쌓은 작은 돌탑도 즐비하다. 참새가 두터운 지푸라기처럼 휙휙 날고 있다. 사방으로 트인 곳이다. 다리강가 마을이 아침 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다. 북쪽 멀리 보이는 공동묘지. 서쪽으로는 몰쩍엘스 모래띠 모습. 그리고 작은 호수가 하나, 하늘에서 툭 떨어져 내린 양 파랗다. 알탕어워 오름을 중심으로 갈래갈래 벋어나간 길들이 가늘게 꿈틀거린다. 그 길로 차들 행렬이 이어진다. 수흐바아타르 아이막 지사를 비롯한 관료들이란다. 어제 실린보그드 산에 이르렀을 때 나보다 먼저 올라갔다 내려오는 모습을 본 일행이다. 이제 아침에 다시 만난 셈이다. 경건하게 어워 참배를 마친 초카가 차츨을 했다. 약지로 술을 하늘로 세 번 튀겨 올리는 일이다. 우리가 하는 고시레와 빼다 박았다. 나는 우리 방식대로 어워 동서남북 네 곳에다 술을 붓고 마지막 음복하는 것으로 참배를 마무리한다. 초카도 내가 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쳐다본다. 술까지 한 잔 받는다.


 

알탕어워에서 내려올 때도 나는 미기적거렸다. 오름 아래 라마탑에 미크로버스가 한 대 이르더니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내린다. 고령인 분도 보인다. 손수 산에 오르지 않고 탑돌이로 어워 참배를 시작한다. 나는 밑에서 기다린 뭉그를 위하여 차로 알탕어워를 돌기로 했다. 그러나 가다 보니 길이 끊겼다. 마을 둘레에 있는 돌사람을 목표로 차를 돌릴 수밖에.


 

 


후르긴훈디에는 돌사람이 산다


 


 

다리강가 마을 가까이서 훈촐로, 곧 돌사람은 모두 네 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꼴은 하나같이 닮았다. 다른 지역 것과 달리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아랫도리가 퇴화하고 남성 성기가 도드라졌다. 손에는 수태채 잔과 같은 그릇을 쥐었다. 모두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시멘트로 새로 올린 것도 있다. 그래도 마을 가까이 있는 덕을 보아 그런지 푸른 하닥을 친친 감고 있다. 머리가 왜 잘렸는가는 알 도리가 없다. 종교적인 이유거나 지배층 교체와 같은 정치적인 내력이 담겼을 것이라는 점만 짐작할 따름이다. 이제 후르긴훈디에 남아 있다는 돌사람을 만나 볼 차례다. 실린보그드에서 내려왔던 쪽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지만 어제와 길은 다르다.


 

실린보그드 캠프에 이르니 오늘은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후르긴훈디는 캠프에서 11키로 북서쪽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 지도에 약수터라 적힌 곳에서 차를 세웠다. 그러나 물이 말랐다. 깊은 우물 속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흐린 바닥 물이다. 도저히 먹기 어려울 것 같은데도 먼저 온 사람들이 거기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둘레에는 꽃잎 활짝 펼친 들풀이 한창이다.


 

후르긴훈디는 분지 지형. 집짐승을 놓아먹이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그래서 그런지 게르 몇 집이 보인다. 남북으로 길게 타원을 그리고 있는 야트막한 들이 넓은 정원 같다. 비가 올 듯 먼데서 구름이 짙다. 여름 날씨지만 시원한 점심때다. 1시 무렵 첫 번째 돌사람을 찾아 차를 세웠다. 넓은 들 안에 모두 다섯 개가 이저 곳에 흩어져 있다. 그런데 그들은 얼굴을 모두 들 가운데 쪽으로 향하고 있다. 초점을 맞춘 듯하다. 중요했을 장소가 거기에 있었던 까닭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돌사람이 무덤 표시 기능보다 왕의 방목지였을 이곳을 지키는 몫을 한 것이라는 생각도 낸다. 그럴 듯하다. 어쨌든 놓아먹이기 딱 좋은 분지형 초원이 예사 장소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의자에 앉은 아랫도리가 퇴화된 특징은 다리강가 마을에서 본 것과 같다. 앉은 자세로 1미터를 갓 넘는 키다. 성기를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점도 한결같다. 돌감이 화산암이라 어려웠을 터인데 그런 대로 얼굴 새김도 꼼꼼하다. 목이 떨어진 것, 몸까지 갈라져 누운 것, 떨어진 목을 다시 올려놓은 것도 있다. 표지판이 보인다. 서북쪽에 몰려 있었던 돌사람 유구를 발굴해 바롱우르트 박물관에 옮겨 놓았다는 뜻이다. 분지 안에서 돌사람 다섯을 만난 뒤, 구릉을 타고 북쪽으로 다시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가면 나머지 둘이 더 있다.


 

거기로 가는 도중에 비칙틴합찰, 땅이름대로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는 작은 골짜기에 잠시 머물기로 다. 그러나 글씨 바위를 찾을 엄두는 버린다. 이미 긴 벼랑 아래로 무너진 돌덩이들이 수북하다. 목부 둘이 양떼를 몰고 골짜기를 빠져나가다 우리 일행에게 관심을 보인다. 말을 한 번 타볼 수 있느냐 하니 선뜻 고삐를 넘겨준다. 그들이 양떼와 함께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차를 돌렸다. 길도 없는 들로 다시 오르니 목민 게르가 보인다. 점심밥을 부탁해 놓고 돌사람 쪽으로 갔다. 두 돌사람은 서로 30미터 남짓 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둘은 들 가운데로 향했던 분지 쪽 것과 달리 얼굴 방향이 모두 북쪽이다. 멀리 산봉우리가 돋은 쪽. 이것은 또 무슨 징표인가.


 

후르긴훈디 일곱 돌사람은 한 곳에 몰려 있어 눈길을 끈다. 거기다 다르강가 지역 돌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만든 시기를 13-16세기 무렵까지 길게 잡는 것들이다. 다른 지역에서 본 6-8세기 무렵 투르크 시대의 밋밋한 돌사람과는 맛이 다르다. 목민 게르 주인말로는 1999년에 한국 학자들이 와서 1달간 머물면서 조사를 했다 한다. 몽골 학자들은 다리강가 언저리 어디에 우리 고구려 동명성왕의 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돌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찾을 수 없다. 젊은 아내가 고르테셜이라는 양고기 칼국수를 내어 놓는다. 울랑바아타르에서 먹었던 것에 견줄 수 없이 맛이 좋다. 고기포(보르츠)를 넣은 것이다. 세 시를 넘어섰다. 다리강가 기점 65킬로미터 되는 곳이다. 이제 후르긴훈디를 떠나 바롱우르트까지 100킬로미터 남짓 올라갈 예정이다. 그리고 그 너머 또 울랑바아타르. 귀갓길이 기다린다.


 

멀리 들 끝으로 비가 오는지 긴 구름 뿌리가 보인다. 몽골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워낙 넓고 트인 곳이라 한 곳은 비가 내리고 한 곳은 쨍쨍 햇살을 받는다. 그리고 비가 오는 곳에서는 무슨 가늘고 부드러운 발을 구름 밑으로 걸어놓은 것 같다. 여름 못물 위에 개구리밥이 떠 있는 느낌이다. 그 부드러운 빗발이 내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촉촉한 느낌을 멀리서 보는 즐거움. 거기다 우레까지 때린다. 깃이 아름다운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들로 번개가 내리꽂히면 풀과 집짐승들도 문득문득 놀라 목을 흔들리라. 새가 하늘에 흘리고 간 맑은 날개 짓도, 번개가 스친 자국도 다 안다는 듯이 의뭉스럽게 비가 듣다 말다 한다. 바롱우르트까지 가는 길은 오르고 내리며 부드럽다. 마냥 길다.


 

소련 지배 시기에는 그 쪽 사람들이 적지 않게 산 곳이 북쪽 도르노드 아이막 지역이다. 국경과 맞닿은 곳인 까닭이다. 그곳 출신인 기사 초카에게 사회주의 시기에 대해 몇 가지 말을 붙였다. 그 때와 달라진 점을 물으니, 대뜸 비 소식이 줄어들고 있는 일이라 답한다. 호수도 많은 곳이 말라 버렸다. 집짐승 가운데서는 낙타가 줄고 다른 놈들은 늘어나는 흐름이다. 협동농장 시기 공동 노역 때는 마음대로 쉴 수 없었으나 자유화가 되어 지금은 매우 행복하다는 설명이다. 입이 무거운 그에게 무당에 대해 물어보니 소련 지배기에도 비밀리에 그들을 찾아 점을 치곤했단다.


 

7시 30분. 아스카트 솜을 다시 지났다. 이제 바롱우르트가 가깝다는 표지다. 앞으로 40-50킬로미터는 그야말로 자로 눕혀 놓은 듯한 땅금이다. 길도 죽 한 일자로 넉넉하다. 전봇대가 그 길을 따른다. 한창 흙길 포장 공사를 하고 있다. 새 길이 닦이면 더욱 장관이리라. 더위에 차를 세우고 초카가 라디에이터에 물을 넣는 동안 가까운 전봇대에 다가가 귀를 댄다. 맹맹 맹렬한 전신주 소리가 들린다. 어릴 때 시골에서 즐겼던 놀이다. 부푼 맥놀이에 내 몸이 떨린다. 전봇대가 울고 웃는 소리를 가슴으로 받으며 그것이 실려 오는 쪽에 내 몸까지 얹는다, 바롱우르트. 이르니 8시다.


 

샤르가호텔 관리 아주머니는 즐겁다. 한국인이 잘 보이지 않은 곳인 탓인지, 아니면 몽골어를 더듬거리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 까닭이다. 저녁을 먹고 호텔 앞 길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수인사를 나누었다. 밝은 낯빛으로 학교에서 배운 몇 마디 영어와 일어를 내게 자랑한다. 나는 한국말을 몇 개 가르쳐 주었다. 우리와 달리 일본은 이런 벽촌에까지 자국어를 익힐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놓았다. 부럽다.


 

 


바롱우르트의 아이막 박물관


 


 

8월 10일. 6시에 기침하여 바롱우르트 시가지 걸음길에 나선다. 이곳 출신인 영웅 수흐바아타르의 동상이 서 있는 지역행정부 청사 앞을 지나 도심 동쪽에 있는 한갓진 언덕에 올랐다. 한눈에 바롱우르트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한창 몽골제국 800주년 기념탑을 마무리하고 있다. 아이막마다 너도나도 하나씩 커다란 기념물을 마련하는 바, 수흐바아타르에서는 특이하게 징키스한의 어머니 허엘룬 동상을 세우고 있다. 화살 하나는 쉽게 꺾이지만 여러 개일 경우에는 꺾을 수 없다는 일깨움을 빌려 형제의 우애를 가르쳤던 그녀다. 어린 징키스한, 곧 테무진이 화살 다발을 들었고 그 뒤에 그녀가 서 있는 2미터는 됨직한 동상이다. 이른 아침에 오가는 이들도 드문 남쪽으로는 어제 숨차게 왔던 들이 먼 땅금을 눕힌 채 파랗다.


 

아이막 박물관은 시가지 남서쪽에 극장과 나란히 서 있다. 9시에 문을 여는데 조금 이른 시각이어서 밖에서 기다린다. 문을 여자 마자 안으로 들어갔다. 후르긴훈디 발굴 유구와 껴묻기, 두 돌사람이 눈길을 끈다. 거기에 묻혔던 사람뼈까지 고스란히 되살려 놓았다. 나름대로 잘 갈무리된 박물관 안에는 다리강가 지역의 금은 세공품은 물론 수흐바아타르 지역 주요 바위그림 사진을 죽 걸어 두어 눈길을 잡는다. 집짐승의 젖을 발효시켜 만드는 아이락 통에 돔브라 적혀 있다. 우리말 물 둠벙, 물 두무와 닮았다. 거기다 우리의 다리미를 몽골에서는 인두라 일컫는다. 몽골 말과 우리말 사이에 닮은 것들이 한 둘 아니건만 돔브란 말을 새로 익힌다.


 

 


동몽골에서 돌아오는 날

 


 

박물관을 나와 금은세공업자 가게를 물으니 짐작대로 한 곳도 없다. 울랑바아타르에게 가지고 온 기계 제품 파는 곳은 있을 거라는 답변만 돌아온다. 세상이 급하게 돌아가니 몽골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제 다리강가에서 다르항후를을 만나 본 일로 위안을 삼는다. 버스정류장에서 울랑바아타르로 나가는 정기버스를 찾으니 이미 떠나고 없다. 그러나 다른 차편이 있을 거라는 말에 시장으로 갔더니 뜻밖에 어제 다리강가 알탕어워에서 내려올 때 보았던 그 미크로버스다. 다리강가에서 바롱우르트를 거쳐 울랑바아타르로 나가는 걸음인가 보다. 그들도 밤은 바롱우르트에서 묵고 오늘 손님을 마저 채워 떠날 참이었던 게다. 딸 둘에다 연로한 어버이를 모시고 가는 다리강가 족 젊은이 가족이 중심이다. 12시가 되어서야 사람들을 모두 태운 차는 떠났다. 가다 무한 솜 길식당에서 잠시 점심 요기를 했다. 어느 골짜기에 마차까지 꼼꼼하게 그려진 바위그림이 있다는 곳이다. 4시가 되어서야 헨티 아이막 소재지 운드르항에 이른다. 동몽골 도르노드 초이발상으로 나가는 길과 수흐바아타르 바롱우르트로 나가는 길이 갈라지는 도시다.


 

해가 떨어지고 있다. 같이 온 일행과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을 넣었더니 기사는 좋은 자리로 이끌겠다며 기다리란다. 헤를렝 강가에 차를 세운다. 그런데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내려 세수를 하고 옷매무새를 다잡는 것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한 장 찍고 싶었는데 이들은 나에 대한 예의를 한껏 차려준 셈이다. 해가 많이 떨어져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지 않았지만 거듭 몇 장을 찍었다. 강가 족 노부부는 그 사이에도 손을 꼭 잡고 있다. 나이들 수록 더 깊어진 정이겠다. 사진을 찍은 뒤 헤를렝 강을 건너는데 경찰이 차를 잡는다. 사람을 너무 많이 태웠다는 시비다. 그런데 기사가 스무 명 정원에서 넘치는, 뒤쪽 두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짐짝이라 재치 있게 대답을 한다. 차안에서는 한바탕 웃음보가 터진다. 교통경찰도 웃으며 그냥 보내준다. 아마 노부부가 탄 까닭이었으리라.


 

햇살이 금빛으로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차안에 탄 사람들도 점점 입을 다문다. 곧 저녁이 끝나고, 긴 밤이 이어질 것을 아는 까닭이다. 풀들이 금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서로를 지탱하고 서 있는 들이 곱다. 노을 위로는 집짐승이 낮에 걸어 다니며 냈을 발걸음 소리가 아직 남았다. 아장아장 쿵쿵, 또는 후닥닥 걸음 바꾸는 소리다. 멀리 북쪽으로 한헨티 묏줄기가 철렁 철렁거리며 차를 따라온다. 해가 죄 떨어지지는 않은 여름밤은 넓은 백야다. 밤을 낮꿈처럼 사는 시각. 오가는 차들이 먼지를 아랑곳 않고 달린다. 몽골 시골에서는 낮 더워를 피하기 위한 까닭인지 밤에 오가는 차들이 훨씬 많다. 내가 탄 차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태운 까닭에 속도를 제대로 내지 않는다. 그리고 비.


 

창문으로 비가 들치기 시작한다. 어둠 속으로 달리고 비 속으로 달렸다. 새벽 네 시 무렵에야 울랑바아타르 교외 날라이흐 마을 불빛을 만난다. 이제 늦어도 1시간만 더 가면 울랑바아타르다. 4시 50분 서쪽 보타닉 공원 곁 게르판자촌 마을에서 노부부 가족이 먼저 내린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을 집집마다 데려다 준다. 늦은 시각에 울랑바아타르에 닿는 차들이 베푸는 친절이다. 나는 기숙사 앞길에서 내렸다. 첫새벽에 문을 따준 관리인은 내 행색에 놀란 낯빛이다. 방에 들어 씻고 누우니 6시. 평소 일어날 시각에 나는 천천히 늦은 잠자리에 든다.


 

 

 

 

Message Of Love / Don Benne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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