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거 품
이 재 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언제나 처럼 우편함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우편물을 뽑아들고 엘리베이터 로 들어갔다. 안에서 내용을 살펴보니 어느 문학단체 에서 온 동인지 같았다.
평소에 나는 보내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 꼭 읽는 버릇이 있기에 집에 돌아온 후 몸을 대강 씻고 책상 앞에 앉았다.
문인협회 ㅇㅇ지부라 적힌 표지를 본후 책장을 열었다. 그리고 한편 한편의 시들을 음미하며 읽어갔다.
그런데 유독 나의 마음을 묶어놓은 시가 있었다.
나는 감탄했다. 아...! 이렇게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은 대체 누굴까.
시속에 투영된 시인의 모습을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려 보면서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이튿날. 차를 몰고 무조건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평소 스피드 광 이란 말을 흔히 듣던대로 백 4.5십km를 밟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뇌리에는 각인된 어느 이름 모를 여류시인 에 대한 동경과 존경과 거대한 흠모의 염으로 가득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경부 고속도로 를 접어들어 여산휴게소 였다. 나는 잠시 내려 허리운동을 한뒤 좌판기 에서 봉지커피 한잔을 뽑아듣고 차로 돌아왔다.
나의 뇌리에는 오직 미지의 여류시인 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 뿐이었다.
다시 차는 고속도로를 쾌속 질주하고 있었다. 도로변의 전신주들이 주마등 처럼 스치고 스러진다. 또, 얼마를 달렸을까. 중부고속 도로를 들어섰다.
속초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혼자서 가슴 설레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속초는 비교적 평화로운 도시였다. 치열한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있는 대도시 와는 달리 푸른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져서 인지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한동안 백사장을 거닐면서 그녀에 대한 첫 인상을 그려 보고 있었다. 4십대 후반쯤의 시인 . 그는 분명 이 시대에는 흔치 않는 시인이 분명할 것이었다. 혼자만의 치열한 고독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시인은 천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백사장 저편에서 하얀 머플러를 휘날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인을 발견했다. 가슴은 설레었고 심장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속물근성 이라 하더라도 가슴 저변에서 꿈틀대는 연모의 정은 어쩔수 없는 것이었다.
"전라도에서 오신 선생님 아니세요 ?"
그녀의 음성은 해조음과 섞여 아름다운 하머니를 이루고 있었다.
" 네..제가..."
어째서 갑짜기 작아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네 . 먼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선생님."
" 아니요 평소에 돌아 다니는걸 좋아해서 이것쯤 별것 아닙니다."
"네. 그러시군요. 근데 식사는 하셨어요?"
그리고 나를 뻔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하며 만개한 꽃송이가 벌어질 때 마다 하얗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며 그리고 우수에 젖어 있는 듯한 검은 눈망울 또, 잔잔한 겨울밤바다 처럼 소리없이 얼굴 가득한 미소에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을것만 같은 향기를 느꼈다.
"식사는 요. 속초는 오징어가 유명하다기에 전라도 에서 굶고 왔습니다."
"어머 . 그러시군요. 그럼 우리 식사하러 가요 선생님 !"
"그렇게 하시죠."
우린 오랜 지기처럼 함깨 차를 타고 비교적 시 외곽지역 의 한가한 도로를 달리고 있을때 횟집 한곳이 눈에 들어왔다.
"저리 들어 가시지요."
차에서 함깨 내려 횟집의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 인 듯한 40대 후반쯤의 아주머니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비교적 조용한 방으로 찿아 들었다. 그 방은 참 멋있게 생겼다. 다섯평 쯤 되는 실내에 탁자 몇 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커튼을 여니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저 수평선 끝에는 희미한 물안개가 일렁거려 그야말로 환상적 이었다.
내가 풍경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있을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앉으세요 선생님. 먼 길에 수고 하셨구요."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모습을 응시하며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근데 선생님은 생각 했던 것 보다 젊게 사시는 분 같아요."
"아니 그럼 늙었다는 말씀인가요? 섭 한데요. 저 이래도 정신연령 은 사십대 초반입니다."
"미안해요. 실례 했으면 이해 하세요"
마주 앉아서 본 그녀는 교양과 지식을 겸비한 완연한 미모의 여인 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런 시인으로 평할수 밖에 없는 마력의 소유자 였다.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때 그녀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
그러자 나는 화들짝놀라,
"아 아니요. 아무것도..."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모를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하나 가득 껴안고 안타까운 사랑을 토로해 보지만 그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환영에서 깨어나 본연으로 회귀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음식이 들어왔다.
"본래 이곳이 고향 이 십니까 ?"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네. 순수 토박이지요."
"네. 그러시군요. 저의 형님께서 6.25때 여기 고성지구 전투에서 전사 하셨습니다.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계시는데 그 당시 학도병으로 자원 하셨어요. 제주도 제1 훈련소 에서 일주일 간 훈련을 받고 M1 소총 방아쇄 만 당길 줄 알면 총알받이로 갔지 않습니까."
나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앞에 놓인 회 접시를 그녀 곁에 밀어놓았다.
"어서 드십시요."
" 술도 한잔 하셔야지요 ? "
"아닙니다. 아직 일몰 전인데 술은 이릅니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근데 참 이상 하지요 ? 처음 뵙는데 오랜 지기같은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요.?"
" 그것이 문학 하시는 분들의 공통점 입니다. 순수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종의 무장해제 라고 보면 될 겁니다.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음을 여는 것이지요. 어딜 가나 문인단체 모임을 가면 그럽니다."
"그러시군요. 근데 선생님은 슬하에 자녀를 몆이나 두셨어요 ? "
" 평소 개으른 탓에 또, 잠도 많아서 일평생 낳아도 하나밖에 낳지 못했습니다. "
" 호호호. 농담도 잘하시군요."
대화 자체가 영양가 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은 필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엮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는 한 뇌리에 불필요한 잡념들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행복감에 젖어 있는지도 몰랐다.
"여기서 강릉이 멀어요 ? "
"강릉은 왜요 ? "
" 네. 대학 동문 후배 가 그곳에 있습니다."
“ 네,,,, 얼마 멀지 않아요 . "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안갯속 같은 신변 문제가 궁금해졌다.
" 저 , 부군께선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 "
갑짜기 검은 구름이 얼굴 가득 스치더니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었다. 나는 마음이 불안했다. 근데 오래도록 그녀는 고개를 숙여 비감에 젖은 채 말이 없었다.
" 아 실례를 했다면 사과 할깨요. 죄송합니다. "
" 아니예요. 괜찮아요 . "
그러고는 또 고개를 숙이더니 가늘게 흐느끼는 것이다. 나는 당황 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연이 궁금했다.
나는 그녀의 흐느낌에 내심 미안했다. 한참을 그렇게 고개숙여 말이 없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당황 하셨지요 선생님?."
"아 아닙니다. 근데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딱한 사연이 있으시나 보군요 ?"
"별것 아닐수도 있는데 곁에 선생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 울컥 ! 참지 못할 슬픔이 밀려 왔어요."
“아. 네 그러셨군요."
그녀는 먼 수평선 쪽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육지에 계시는 분들은 저 말없는 바다가 낭만일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바다에서 살고 바다 위에서 생을 마감 하는 뱃사람들 에겐 어찌 생각하면 한 (恨 )서러움 자체 랍니다. "
나는 그녀의 옆 모습만 응시하며 그녀가 중얼 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잠시후 또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사연인즉 이랬다.
사납게 우는 바다를 향해 배질을 한것이 화를 불렀다. 그날이 아내의 생일이라서 몸소 바다에 나가 펄떡이는 생선 몆마리 건져 와서 세 식구 마주 앉자는 것이 남편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성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로 나갔고 멀리 가물거리던 고깃배는 영 영 돌아오지 않았다. 때로는 무모한 짓을 하는게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평소의 실력으로 아무 위험부담이 없다던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황천길이 됐단다. 아이하나 남겨놓고 가버린 남편을 몹시 원망도 했으나 팔짜 소관이라 치부했다.
사납게 울던 파도가 평온을 되찾고 잔 물결이 찰랑 데던 그 바다 끝에서 남편은 부서진 조각배의 흔적과 함깨 바닷가로 밀려왔다. 그 뿐이었다.
장례를 치루고 며칠이 흘렀다. 그러나 아이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들이 그녀를 모질도록 독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혼자라는 것과 자신이 무너지면 아이의 장래까지 보장할수 없다는 불안한 상황 하에서 그녀는 독한 맘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 지금이 옛날시대도 아닌데 정조를 지킨다 해서 열녀문 세워 줄 사람 없어.. 그러니 좋은 자리 있을때 재가 하라구....."
유혹도 많았고 자리도 많았으나 외면했다. 깊은 밤 남편의 넓은 품이 그리워 그 한밤을 뜬눈으로 지세워도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그녀가 여기까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어 가더니 대뜸,
"선생님 우리 술한잔 하실래요 ? " 하는게 아닌가.
이상할 것은 없겠으나 과거를 반추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것 같아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후 소줏병이 들어왔고 컵에 따라진 술을 단숨에 비워버린 그녀는 나를 한없이 쳐다보았다.
" 선생님 . 제 청하나 들어 주시겠어요 ?"
갑짜기 부탁을 들어 달라니 내막을 알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약간 취기어린 시선으로 내 얼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저...손좀 꼭 잡아 주세요."
그녀의 모습에서 간절함 같은게 엿보였다. 나는 망서릴 필요를 느끼지 않아 식탁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두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손은 따뜻했다. 그녀의 체온에서 발생하는 짜릿한 감정들이 벽을 타고 흘러 벽 너머 머언 동해바다 위에 질펀히 깔려 출렁 거렸다. 그리고 막바지엔 두 사람의 감정을 휘감고 넘쳐 서로의 호흡을 불규칙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인채 말이 없었다. 나는 무슨말 인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 참 .손이 따뜻하군요. ..몹시 외로웠던 것 같아요....."
그러나 말이 없던 그녀는 살며시 나의 손 아귀 에서 자신의 손을 빼더니 따라 놓았던 소줏잔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알수 없는 여자라 하시겠지요 . 그러실 거예요. 그것도 무리는 아닐 테니까요."
" 아닙니다. 긴긴 날을 인내 해야 했던 보상 이라도 밭고 싶어 하는 마음 같아 안타깝다 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우리는 서로 모르는게 너무 많아요. 선생님은 현직이 무엇 인가요 ?"
그녀의 얼굴은 이제 적당히 붉게 채색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아까 보다는 밝은 모습 이었고 명랑해 보이기 까지 했다.
"언론인 입니다. 또. 지방대학 겸임 교수구요 .그 중에서도 제일 비 인기학과 지요."
" 너무 구체적이 시군요. 지방대학 이면 어떻고 비 인기학과는 또 어떤 의미 인가요. 전 차이가 없을거라 생각 하는데...."
"물론 지방 자치시대 니까 그런 개념이 불필요 하다고 볼순 있겠지요. 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교육에 관한 한 중앙 집중적 사고를 탈피하지 못해서 너 나 없이 서울로 좋은 대학을 선호 하는게 현실입니다. 그러자니 입학 시즌만 되면 심지어 교수까지 동원해서 학생을 모으는게 관례가 돼버렸지요."
듣고 있던 그녀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마음 저편에 깔려있는 자존심 들을 조금은 풀어 버렸다는 생각에 야릇한 감정이 교차했고 따라놓은 소줏잔을 단숨에 비우고 그녀에게 술잔을 권 했다.
"선생님. 오늘 주무시고 내일쯤 가시겠지요.? 어쩐지 수십년 지기 같은 다정한 친근감이 느껴져요."
"이제 술을 입에 대었으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데나 좀 쉬어 가는수 밖에....!"
" 그러시면 저기 바닷가 끝편에 현대호텔이라고 있는데 그곳을 제가 잡아 놓을깨요."
서서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완전히 홍당무 처럼 얼굴 전체가 붉게 타고 있었으나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닌 걸로 보아 주량이 대단함을 알수있었다.
그럴수는 있다. 남편 없는 수많은 긴긴 날을 고독에 겨워 울어야 했던 한 서린 밤들이 어쩌면 오늘 한잔 술로 용해되고 나를 남편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생님 제 술 한잔 따라 주시고 이제 우리 비우고 나가요."
그녀는 얼굴색만 붉었을 뿐 전혀 술끼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늠름했다.
"네. 그러지요. 너무 오래 앉아 있는것 같아요."
우리는 술잔을 들어 부딧친 뒤 단숨에 잔을 비우고 유리벽 너머 광활한 동해 바다를 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향해 나가려 는데 갑짜기 그녀가 비틀 거리며 쓰러지려 는 게 아닌가. 나는 빠르게 달려들어 그녀를 부측 했는데 그녀는 완전히 나에게 몸을 의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 돌발적 상황이라 동작을 옮겼을 뿐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를 나의 품에서 떼어 놓으려했다. 그런데 그녀의 바램은 그게 아니었다.
"조금만 그렇게 계셔주세요. 조금만 요."
그리고는 더욱 깊이 고개를 내 가슴에 파 묻었다. 나는 그것이 이성적인 행동이 아닌 긴긴날 고독에서 비롯된 반사적 목마름 으로 치부했다. 아 ! 얼마나 외로움에 절였으면 이리 쉽게 취하는가.
어찌 생각하면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서서히 품에서 그녀를 떼어 놓았다. 그것은 다음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녀는 좀 미안한 표정으로 문을 나서며 말했다.
"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결례를 했지요 ? 이해 해 주세요."
"별말씀을 요. 괜찮습니다. 근데 취하시진 않은것 같아요?"
"물론이예요. 선생님 만 괜찮으 시다면 가서 한잔 더 했으면 좋겠어요. 일생에 이런 기분 처음 이예요."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동해바다 에서 부는 해풍은 향긋했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사이로 찰삭 대는 잔 물결이 아름다운 소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바다 의 을씨년 스러운 정경들이 어쩌면 더욱 낭만적일 것도 같았다. 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현대호텔 이라는 곳 으로 향했다.
그녀는 나의 얼굴을 지긋이 처다 보면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오늘은 우리 아무 말 하지 말아요. 그리고 우린 행복한 밤을 만들어요 .아주 멋있는 밤 말이예요"
"그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인지 알수가 없는데요 . 좋은 밤. 멋있는 밤의 의미가 하도 포괄적 이라서...."
"일단 제가 하는데로 두고 보세요. 추억을 만드는 데는 천부적 소질이 있어요. 그리고 모든것이 끝나버린 이후에 오는 허전함에 울면서 도 말이예요.."
그녀의 말 속에는 이제 적당한 취기가 베어 있었다. 당당해 지고 더욱 도도해 졌다. 나는 그런 그녀가 밉지 않았다. 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잠시후 차는 현대호텔 앞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그녀가 프론트 에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고 이내 열쇠 꾸러미를 들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 를 타고 6층에 도착했고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 서는 순간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호텔이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동쪽 벽면은 완전한 통유리로 붙여서 커튼을 열자 넓은 동해 바다가 펼쳐 지는데 파도소리 가 귓가에서 들리는 게 아닌가. 그뿐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밤 바다 위에 대낯 처럼 불을 밝히며 오징어를 잡는 어선의 모습 들은 환상적 이었다. 그때 헨드백을 탁자위에 놓고 그녀가 내 곁에 다가 와서는 내 어깨 위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 선생님 ! 우리 오늘밤 아무말 하지 않기로 해요."
그녀는 더운 열기를 내 뿜고 있었다.
나는 열기로 가득한 뜨거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가만히 속삭였다.
"이 밤은 깁니다 . 그리고 우리의 밤을 난도질 할 아무도 없어요. 우리의 멋있는 밤이 될 것입니다. 천천히...아주 천천히 ...."
그녀가 돌아서며 하는말은 ,
"선생님! 우리 밖에 나가서 한잔 하구 바닷가를 걸어요. 밤으로의 해변이 얼마나 낭만 적인줄 아세요."
그리고는 이내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싫지 않은 기분에서 따라 나섰다.
밤바다 . 해변이 지척 이었다. 호텔이 바다와 근접해 있어서 몆분 걷게되니 바닷가 백사장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몆 쌍의 젊은 남녀들이 뜨겁게 포옹하고 서서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어둑한 백사장을 따라 걸었다. 바다멀리 휘황찬란한 조명 속에 조업하는 어선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서 한 폭의 명화를 연상하기에 충분 했다. 입자같은 모래가 파도에 휩쓸려 왔다가 조용히 밀려가곤 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화한 온기가 백사장에 질펀히 깔려 바다로 흘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내 생에 마지막 로맨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먼 훗날 이 잊지 못할 추억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아 생의 자양분으로 남길 원했다. 아니, 내일 곧 슬프디 슬픈 이별이 온다 해도 어쩔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가 고요를 난도질 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잊지못할 사랑을 해보신 경험이 있으세요 ?"
누군들 없겠습니까. 짝사랑이라도 눈물로 밤을 지세며 읽었던 러브스토리 가 존재하는 거겠지요."
그녀는 어둠속에서 나의 표정을 훑고 있었다.
“우리잠시 앉아요 선생님 "
“그래요 앉읍시다."
나는 그녀의 어깨위에 팔을 끼고 앉았다. 마치 한 마리 의 참새가 손아귀 에서 팔딱이는 듯한 기분 이었다. 그리고 여인에게서 나는 고독에 베인 듯한 내음이 나의 코끝을 자극했다. 밤의 해변은 물결의 고요한 속삭임으로 깊어 가고 있었다. 내가 무의식 중에 어둠속의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는 이미 내 모습을 한없이 쳐다본 뒤였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내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밀착 시킨 뒤 나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이미 뜨거운 호흡 속에 그녀가 갈망하는 간절함이 무엇인지 나는 안타까이 알수가 있었다. 내가 사랑한 (사랑이란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지만) 다면 그것은 하등의 문제 될것이 없다고 생각 했을 때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그녀의 입술위에 나를 포개어 가고 있었다. 아... 그 달콤함. 전율처럼 온몸에 퍼져오는 극도의 행복감 에서 우린 백사장에 그대로 누워 뜨거운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 고마워요."
해풍은 우리를 감싸고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었으며 속삭이는 잔 물결 소리도 우리의 사랑위에 흐르고 흘러 넘쳤다. 그때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선생님 . 이제우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 그다음은 저도 모르겠어요."
더운 열기 가득한 그녀의 호흡에서는 그동안 잠들었던 침묵의 영혼이 생동감 있게 살아 팔딱이는 듯 했다. 나는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더욱 맹렬히 포옹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으켜 앉혔다. 우리는 밤의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서로의 사랑에 갈증을 풀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내 어깨위에 고개를 기댄 채 말이 없었고 시간은 잔물결 속에 흐르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걸어요 . 그리고 아바이 마을 쪽에 가서 냉면두 먹고 한잔하고 돌아와요 .”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팔짱을 끼고 따라왔다.
“아바이 마을까진 거리가 있을테니 차를 가져 가야죠?”
“선생님두 참. 그러시면 우리 한잔할 수가 없잖아요. 의미깊은 밤에 무드조성도 필요한 거예요.”
“ 역시 영리하신 분들은 훨씬 앞서 간다니까.... 그래서 이 시대를 두뇌경쟁 시대라 하지 않습니까.”
“아이 참 . 그건 각본에 없는 대사예요. 그냥 한 말을 그러시면 면목이 없잖아요. ”
“웃자고 한 말입니다. 편히 생각 하세요..........”
백사장을 빠져 나와 상가가 줄비한 야경을 보며 걸어갈 때 빈 택시 한 대가 우리곁에 멈춰 섰다.
“아바이 마을로 가주세요.”
차는 우리를 내려놓고 이내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우린 주위를 살피면서 어느 식당으로 들어섰다. 비교적 조용한 곳이었다. 우리는 여늬때와 같이 조요한 방을 찾아 들었다. 이내 오십대 초반의 아주머니가 물과 컵을 탁자위에 내려놓고 주문을 권했다.
“이분이 시골에서 오신 분인데 오징어 무침허구 아무튼 맛있는 거루 주세요.”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고 나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여 웃고 말았다.
“아니, 왜 웃으세요 ?”
그녀가 이상 스러워 물었다.
“제가 그렇게 시골티가 납니까...? 그러시면 함깨 시골사람이 되시는 군요..하하하하”
“그건 순진무구 를 강조 하려다 보니 그런 거예요. 별뜻 없으니 오해 마세요.”
그녀는 따라놓은 물을 한모금 마신 후에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슬에 젖은 듯한 검은 눈망울은 새벽 별 처럼 유난히 반짝였고 입술을 지나 가지런한 치아는 수 많은 전설을 토해 낼것 같은 질서정연 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와락 ! 께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러한 통속적 인 감정들을 잠재우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근데 본래 속초가 고향이 신가요?”
나는 하나 하나 의문의 실마리를 풀기위해 떠 오르는 데로 말을 걸었다.
“ 저는 그래요. 근데 부모님 고향은 이북이세요. 두 분이 한국 동란때 내려 오셔서 이곳에 정착한 뒤 우리를 낳게 된 거죠. 말하자면 우리가 실향민 2세인 셈이지요.”
“그렇군요. 그러시면 학교도 여기서 나오셨구 대한 문인협회 는 언제 들어 가신 겁니까?‘
“제가 시를 써서 발표하고 작품집을 만들고 ㅇㅇ일보 신춘문예 와 강원지방일보 신춘문예 에 당선하고 그러다 보니 대한 문인협회에 몸을 담게 됐어요.”
“대단 하시군요. 그런 수련을 거치다 보니 실력이 작품에 나타나는 거 군요.”
“아직 팡파레를 울리기는 이릅니다. 이제 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가 술과 회 무침을 쟁반에 올려 들어왔다.
우리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기다렸다가 아주머니 가 나간 후에 서로를 보면서 오랜 연인처럼 속삭였다. 주로 화제는 서로의 신변에 관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탐색 인 셈이었다. 서로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을 연다는 건 풋 사랑이요 지속성이지 못하다.
“문학에서 미래를 재시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예언입니다 .1930년대 에 우리 한국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 났다가 사라진 큰별이 소설가 김유정 선생이 아닙니까. 물론 강원도 태생이구요. 그 당시의 미래를 보는 눈은 지금도 놀랄 정도지요. [금 따는 콩밭] 같은 경우. 오늘날의 투기꾼을 의미 한게 아닙니까. 조용한 시골에 콩밭을 세 내어 금맥이 있다며 콩밭을 파 헤치고 땅값이 올라가고 그러다가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사기꾼들 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흥미 이상의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할수 있지요.”
“그래요. 소설자체가 미래를 꿰 뚫어본 것이지요.”
오늘날의 지식사회 속에서도 소설이 가지는 진지한 네러티브 는 정평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
그녀는 술을 따라 내 앞에 잔을 놓고 자신도 술잔에 하나 가득 따른 후에 나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금방 지식....하셨는데 대채 지식(知識)은 어떤 거예요..?
“그게 그리 어렵 습니까 ? 그렇다면 말하지요. 국어사전 의 정의대로 한다면 지식이란, 사물에 대한 명료한 의식과 판단..또는 배우거나 연구하여 알고있는 내용.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는 지식사회니 지식사회 속의 두뇌경쟁 시대니 하는걸 가만히 음미 해보면 지식이 시사하는 의미는 이해가 갈 겁니다. 즉, 우리처럼 알고있는 것을 지식이라 하고 그것을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도 통칭 지식인 이라 보면 될 겁니다. 조금 이해가 가요 ?”
“네......그렇군요. 전문 지식을 가진 한 분야의 종사자도...?”
“그렇지요. 한 직종에 종사하는 분도 지식인 인 셈이지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따라놓은 술잔을 단숨에 털어 비우고 잔을 채웠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면 하필 이 자리에서 딱딱한 화두로 이야길 나누어야 하는가 자책해 보았다.
술이 몇병 비워지고 밤도 따라 흐른 뒤에 우리는 취기를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차거운 밤 하늘 에는 무수한 별들이 야화(夜)花)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인적드믄 해변 길을 비틀 거리며 걸었고 우리의 어깨위로 밤안개가 촉촉이 나렸다. 걷다보니 바다 가운데로 만들어 진 방파제 였다 . 조그만 등대가 있고 희미한 가로등 하나가 시름없이 졸고 있었다. 그녀는 내 옆구리에 잔뜩 기댄 채 모든 걸 내게 맡기고 있었다.
“선생님! 추워요. 술을 마셔서 그런지 떨리네요.”
“ 아....그래요? 그러시면 이제 돌아가야 지요. 안개 낀 부둣가의 야경이 너무 좋아서 매료됐어요.”
“그 야경이 얼마나 좋으셨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외면하게 만드셨어요. 전 야경이 미워요..”
“아.....그런가요..하하하”
우리가 호텔로 돌아 온 것은 밤 세시가 지난 뒤 였다. 취기는 절정에 달했고 더운 내부의 기온으로 더욱 열기는 올랐다. 그녀는 실내에 들어서자 마치 뱀처럼 두 팔로 내 목을 휘어 감고 입술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음처럼 선생님을 반복하며 나의 하반신 으로
그녀의 손이 내려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품에서 그녀를 떼어 놓으며 속삭였다.
“자. 서둘지 말아요. 오늘밤은 단 둘만의 아름다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어요. 나, 샤워하고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그리고는 외투를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다. 오늘밤은 우리만의 시간이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추억을 잉태하는 찬란한 밤이 될 것이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나의 육신의 쌓인 노폐물을 씻어내어 가슴으로 마음으로 흘러 내렸다.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동작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이내 몸을 닦고 밖으로 나 왔다.
그런데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화장실 문을 노크해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었고 마침내 신발을 확인 했을 때 그녀가 사라졌다는 걸 실감할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동해 바다가 펼쳐진 벽 쪽으로 걸어가서 조그만 냉장고 를 열어 캔 커피를 꺼낸후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나마 몽상에서 헤매었던 그녀와의 혼란한 방황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은 마음을 동반하고 동반한 마음의 저변에는 경솔한 나의 자화상만 누더기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이미 어쩌지 못할 상황 까지 와버린 현실 앞에 후회는 바보짓이었다.
과연 외로워하던 그녀가 참사랑을 원했을까. 긴긴날을 고독 에 울어야했던 그녀가 절규처럼 토해낸 사랑한다는 그 말들이 사실이 었을까? 아니면 나의 자의적 판단으로 그녀는 외로웠기 때문에 나를 원한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지금의 경솔한 결말이 온건 아닐까. 머릿속은 생각의 꼬리를 끊어야할 적당한 기회가 주어 지지 않아 괴로웠다.
커피 한모금 으로 기도를 적시고 창밖에 출렁이는 밤바다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처럼 너울대며 춤을 추는 바다는 마치 내 어리섞은 짧은 시간의 경거망동을 나무라는 듯 했다. 멀리 섬 하나를 형성한 밤배들이 파시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허무한 밤은 고요속에 저물어가고 있었다.
들고있던 커피를 단숨에 비워버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여섯시가 가까웠다. 이렇게 허무의 밤이 속절없이 가버리다니 몹시 실망 스러웠다.
어찌 해야 하나. 이것이 내가 바라던 결과 였을까. 물론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물고있는 관계 여서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고 단언 할수 없다. 머릿속에 지식깨나 들어 있는 식자층은 “정신이 위에 있지”라고 말한다. 굳이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말도 아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듯 육체를 하대하고 정신만 늙어가면 거푸집 없이 집짓는 건물의 다름 아니고 존재 가치가 없을 것이다.
나는 한때 퇘계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참사랑을 나는 흠모했다. 퇴계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참다운 선비였다. 그런 근엄하고 학덕깊은 학자가 9개월간의 단양군수 로 있던시절 두향(杜香) 이라는 어린 기생과 사랑에 빠진다. 아.....참사랑은 이런것인가.
나는 사라진 그녀를 생각하다가 바보스런 나를 의식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나와 호텔의 주차장으로 갔다. 펼쳐진 동해바다는 어제의 물빛과 다름 없었으나 내 곁에는 있어주어야 할 그녀는 없었다.
안정 할수 없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느 적당한 장소를 찿다가 그녀가 속초의 자랑 이라며 침을 튀기며 설명하던 해돋이 공원]을 찿았다. 그곳엔 예술미 만점의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고 잡힐 듯한 청빛 바다가 바로 그 아래에 있었고 이내 황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바다 위에는 아름다운 해돋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진한 갯내음 속에 어디선가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연주가 들리는 듯하여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허전한 내 마음을 위로 하지는 못했다.
파도는 멀리서 출렁이며 다가와 이내 철썩이며 바위에 부서지고 하얀 거품이 물위에 스러지는 걸로 생을 마감하고 또 반복되고 있었다. 관광객 들로 보이는 몆 쌍의 중년들이 공원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차를 몰아 하행하고 있었다. 미련에 가슴 아파 한다 해서 돌아올 그녀도 아니라면 잊어 버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속력을 내어 달렸다. 만남이란 해어짐을 전재로 이며 인생사가 상봉과 이별의 순환이 아니던가. 어찌 생각하면 그녀의 시(詩)를 좋아했고 그 사색의 공원에서 그녀를 그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지 몸바쳐 사랑하고 육체적인 욕구충족 의미 에서는 아니었으니 잊어야 한다고 몆번을 중얼거려 보았다. 나도 모르게 두볼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랬다 어쩌면 난 바보였지. 바보구 말구....미워할수 없는게 사랑이라면 처절한 고통을 인내하면서 까지 잊지못해 우는 건 왜 인가. 나는 도리질을 했다. 대체 나 답지않게 무슨 짓이냐 자책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찿아 갈때는 가까웠던 길들이 올때는 한없이 멀었다. 잠못 드는 밤은 길기도 하며 지친 나그네 에겐 길도 멀다는 건 진리였다.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번의 일들이 도덕적인 관점에서 흠으로 남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이해할 부분 인것 같았다. 최소한 사랑에 대한 감정 에서는 그럴 것이었다. 저. 대학자 셨던 퇴계도 사랑 앞에서는 학자이길 포기할 정도로 몸 바쳤던 걸 보면 결코 도덕 적인 것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마음이 놓였다.
그때 휴대전화의 벨이 요란히 울렸고 낮익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
“ ................”
“ 여보세요?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지요......”
“............선생님 . 저예요. ”
그녀였다 .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
“ 만나서 말씀 드릴깨요. 아침에 호텔로 갔더니 않계시더군요. 우리 만나요. 만나면 모든걸 말씀 드릴께요. 네...선생님 ! ”
그녀의 음성은 떨고 있는 듯 했고 매우 다급했다. 오던 길 되돌아 가려면 한시간은 달려야 했다.
나는 인터 체인지 를 빠져나와 다시 오던 길을 달렸고 속초에 도착 했을 때는 정오가 지난 시간이었다.
그녀와 내가 다시 만난 곳은 속초였고 잔잔한 바닷가에 태공들의 세월 낚기 가 한가로웠다. 이따금 부상했다가 사라지는 해녀들의 물질을 보면서 그러나 낭만적 인 감정을 갖지못한 내가 미워 고개를 저었다.
바다는 뽀얀 카푸치노 닮은 포말을 그리다가 스러짐의 반복으로 편치 못한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때 ,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이 샤워 하실 때 전화를 받았어요. 외국에서 유학하는 외동딸인데 속초에 도착 했다는 연락이었어요. 이번에 저의 남편과의 이혼문제를 완전히 매듭짓고 거간 사정을 나눈 후에 아침에 다시 출국한 거예요. ”
그녀는 먼 바다 끝을 응시하면서 담담히 말했다.
“아..그러셨군요. 난 말없이 사라진 예의 없는 행동을 많이 미워했습니다. 그런 중대한 일이 있는 줄도 모르구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무언가 깊은 상념에 몰입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위로해야 할것 같아 화제를 좀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다는 구체적인 안은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혼자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다보니 사는데도 이력이 붙었어요. 외로운 것 빼고는 요.”
“ 그래요. 고독 ..그것이 문제지요. 외로움에 묻혀 있을 때 뒤 돌아보면 혼자 뿐이라는 절대의 고독 앞에선 어쩔수 없이 처절히 싸울수 밖에 없지요.”
그녀는 나를 한번 처다 보더니 나의 손을 잡았다.
바다는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채 파도를 만들고 그 파도는 밀려왔다가 또 부서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 식사해야지요. 배가 고픈데....?”
그녀는 대답대신 귀엽게 고개를 상하로 끄덕이며 따라왔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을 발견했고 이내 궁금증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기로는 그녀가 분명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익사했다는 거 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이 이혼은 또 무 슨 수수깨끼 같은 사실인가. 나는 가능하면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 하나 물어볼 말이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남편께선 익사 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그녀는 종종 걸음으로 따라오며 나를 힐끔 쳐다본뒤 말했다.
"맞아요. 그랬어요. 그리고 지금에 남편과 재혼을 했지만 정을 붙이지는 못했어요. 그후 계속 별거를 거듭한 거죠."
" 참, 운명적 이군요. 무슨 드라마 같군요."
"제 뇌리에는 그래서 전 남편에 대한 그리움 뿐 이번에 헤어진 분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이었어요. 그래서 딸아이가 왔을 때 서둘러 제 주변을 말끔히 정리 하게 된 거예요."
이제야 그녀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마음고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둘만의 횟집에서 그동안의 쌓인 회포를 마음 껏 풀었다. 몆접시의 안주가 바뀌고 맥주에서 소주로 바뀌면서 점점 감정이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까지의 휴가를 생각했으나 지금의 나로써는 별 방법이 없었다. 그녀역시 취기어린 모습으로 이따금 젖은 눈망울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벌써 창밖에는 겨울 석양이 드넓은 동해 바다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일어납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선 그녀는 온 몸을 나에게 기대며 따라 나왔다. 차를 몰아 호텔로 돌아올때 까지 우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호텔방에 입실 하자마자 그녀는 저돌적 이었다. 언제 누가 술에 취했느냐 였다. 갑자기 두 팔로 나의 목을 감고 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온몸은 이미 고열로 끓어 넘고 있었다. 나도 그녀의 앞선 분위기에 젖어가고 있었다.
“아 ....선생님 ! 저를좀,”
그녀는 나의 입술을 더듬어 몸부림 치면서 신음처럼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침대위에 밀어 넘어 뜨린 뒤 나의 외투를 하나씩 벗겨갔고 나는 그녀가 하는데로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이내 내가 알몸이 됐을때 그녀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내 가슴위에 덮여 사랑의 애무를 시작했다. 그것은 심한 갈증의 그리움 이었고 육체의 불타는 염원의 본능적 행위의 다름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고갈된 진실한 애정의 염을 확인할수 있었고 몸바쳐 이세상의 사랑을 섭렵할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증거 이기도 했다.
입술은 이미 정복 당하고 그녀의 두 손은 나의 깊은 곳에 머물러 유희하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더 거친 동작으로 변하여 나를 절정에 도달토록 만들었고 거친 숨소리 뜨거운 입김은 이내 실내에 가득 흘러 내 가슴 깊은 곳에 응고 되어 버렸다.
나도 이제는 더 인내 하는데 한계를 느꼈고 신음하는 그녀를 으스러 지도록 포옹했다.
“선생님.....! 절 . 어떻게 해주세요. ...어서요 !”
차라리 그것은 그녀의 처절한 절규였고 더는 견딜수 없는 극점에 도달하여 그녀의 깊은곳에 나의 손은 침입하고 있었다. 그런 후 간절히 바라는 그녀를 향해 나를 묻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거센 몸부림으로 나를 포옹한 채 요동쳤다. 신음으로 토해내는 비명들에서 그녀의 간절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수 있었다.
“아....선생님 ! 더요....! 왜이리 황홀 한가요 ..네 ..선생님 !”
그녀는 처연한 몸부림으로 환희를 만끽하고 있었다.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어느 따뜻한 봄날. 그녀는 왕비. 나는 왕자가 되어 코끝에 진한 꽃향기를 맡으며 자연속에 몸을 묻는 아름다운 환상 속으로 우리는 훨훨 날고 있었다.
전신의 세포는 이완되어 흐느적 거렸고 그녀가 내뿜는 절정의 하소는 침대가득 흘러 방안 전체를 흥건히 적시었다.
그녀는 마침내 까무라 치는 것 같았고 심한 전율 속에 선생님을 입속에서 부르짓고 있었다.
우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뒤 두 손을 꼬옥 잡고 서로의 사랑에 대한 배려에 만족했다.
잠시후 그녀가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몸을 씻고 타월을 들고 나와 나를 사랑의 눈빛으로 닦아 주었다. 물론 이후에 냉장고의 켄 커피 한잔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녀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면서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의 한쪽 팔을 베고 누워 정 넘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언제 가실 거예요 ?”
나는 마시던 커피를 잠시 멈추고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 날이 밝는데로 가야 할것 같아요. 어제로 휴가는 끝인데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 종적을 감추었 느냐고 따질 것 같아서 불안해요. 그러지 않아도 요즘 지역 신문사 폐지론 까지 대두되는 판인데...”
그녀는 창밖의 출렁대는 밤 파도를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우리에겐 너무 짧은 운명 같은 만남이군요. 서로의 사랑 을 넘치도록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에 어떻게 그리쉽게 가신다는 말씀을...”
“글쎄 나도 함깨 있고 싶은건 숨길수 없는 사실 이지만 현실이 그렇게 야박하니 어쩔 수가 없잖 겠오.”
말을 끝마치고 그녀를 보니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녀를 위로해야 겠다는 생각에 지긋이 껴안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귓가에다 속삭였다.
“사랑해요.”
미시령을 넘어 오면서 나는 지난밤의 정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녀의 향긋한 체취가 온몸에 베어 있어서 오래도록 그 밤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고독이 싫다던 그녀. 외로움은 형벌 이라던 그녀. 사랑 하노라던 그녀. 가시면 않된다던 그녀를 뒤에 두고 나는 안타까운 귀향길에 접어 들었다.
잠시라도 지난밤을 잊기 위해 라디오 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뉴스에서는 야당이 분열위기에 처해 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흘렀으며 불안한 전도에 대해 당 잔류파 들이 탈당만은 막아야 한다며 묘안을 모색 중 이라 했다. 또, 새누리당 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다고도 했다.
이어 오늘오전 11시경. 속초시 ㅇㅇ동 oo호텔 10층 객실에서 어젯밤 중년 남자와 함깨 투숙했던 사십대 중반의 여인이 객실 창문을 통해 투신자살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니 사십대 중반의 여인. 그러면 어찌 된거야 ! 혹시???? 나는 온몸에 심한 전율을 느꼈다.
[끝]
한국문인협회 理事//국제pen클럽한국본부 理事// 소설가. 문학평론가.010-3602-9002
|
첫댓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감동 깊게 잘 읽었습니다. 이재신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