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는 어이가 없었다.
열흘도 너무 짧다고 발뺌을 하려 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길다고 하지 않는가.
공명이 제 발로 죽을 곳을 찾아드는 것 같은 느낌에
주유가 은근히 기뻐하며 물었다.
"그렇다고 선생께서 생각하시기는 며칠이면 되겠습니까?"
"사흘이면 화살 10만 개를 도독께 바칠 수 있겠습니다."
공명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재주가 빼어나다 해도 너무 지나친 큰소리 같아
주유가 굳은 얼굴로 공명을 나무라듯 말했다.
"군중에서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법이 없소이다."
그러자 공명도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제가 어찌 감히 도독께 우스갯소리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군령장을 써서 바치도록 해주십시오.
사흘 안으로 다 만들어 대지 못하면
어떤 중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주유가 보기에는
공명이 이미 죽기로 작정한 사람 같아 보였다.
공명이 몸을 사리고 들면 우격다짐으로 일을 떠맡기려 했는데
몸을 사리기는커녕 애초부터 짧게 잡은 기한조차 더욱 줄이고도
군령장까지 써서 바치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에 주유는 크게 기뻐하며
군정사를 불러 그 앞에서 공명에게 군령장을 쓰게 했다.
(이제 너는 죽었다!)
공명이 써준 문서를 군정사에게 맡기면서 주유는 속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술을 내어
공명을 대접하며 가장 생각해 주는 체 말했다.
"싸움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이 일에 보답하겠습니다.
오늘은 가볍게 마시고 돌아가 불행히도 군령장에 쓰인 약조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공명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주유가 생각해 주는 것도 귀담아 듣지 않고
귀한 사흘에서 또 하루를 줄여 버렸다.
"오늘은 이미 일을 시작하기에는 늦습니다. 내일부터 화살을 만들도록 하지요.
단 사흘째 되는 날에는 군사 5백만 밀어 주십시오.
강변에서 화살을 날아오는 데 필요한 듯싶습니다."
만들지도 못한 화살을 어떻게 나른단 말인가 싶으면서도
주유는 그 같은 공명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러자 공명은
두 번 다시 화살 만드는 일에 대해 말함이 없이 술만 몇 잔 비우고는 돌아갔다.
"저 사람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은 아닙니까?"
돌아가는 공명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그때 것 말없이 일이 돌아가는 꼴만 구경하고 있던 노숙이 불쑥 주유에게 물었다.
☆☆☆
주유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야 있소? 죽으려고 무엇에 씐 것일 게요.
하지만 제가 스스로 죽을 길로 찾아든 것이지 내가 핍박해서 그리 된 것 아니오.
여럿 앞에서 문서까지 남겨가며 한 조약이니
비록 양편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다 해도 날아서 달아날 길은 없을 것이오.
나는 화살 만드는 군사들과 장인들에게
가만히 영을 내려 일부러 일이 늦어지게 하고,
거기에서 기일을 어기게 되고 기일을 어기면 죄를 물을 수 있으니
설령 그를 죽인다 한들 달리 무슨 할말이 있겠소?
공은 다만 그의 거처에서 가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나 살펴보고 내게 알려주시오."
이미 일은 다 끝났다는 투까지 섞인 주유의 어조였다.
주유와 공명의 꾀 다툼에 좋은 구경꾼이자 심부름꾼 격인 노숙은
이에 다시 공명을 찾아가 보았다.
공명은 주유 앞에서와 달리 노숙을 보자 원망 섞어 푸념을 시작했다.
"일찍이 자경에게 내가 말하지 아니했소?
공근에게 내가 채모와 장윤의 일을 알고 있더란 말을 하면
그가 반드시 나를 해치려 들것이라고.
그런데 자경은 나를 위해 공근에게 그 일을 감추어 주지 않고 말해 버려
오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소이다.
우스갯소리에서 비롯돼 군령장까지 써 놓고 왔으니
이제는 내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소.
내가 무슨 수로 사흘 안에 화살 10만 개를 얻는단 말이오?
자경, 부디 나를 좀 구해 주시오!"
☆☆☆
노숙은 그런 공명에게 한 가닥 동정이 일었으나
몸이 매인 곳이 달라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자기 발뺌에만 바빴다.
"오늘의 화는 공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 아니오?
공근이 열흘을 준다 했는데도 사흘이면 된다고 큰소리 쳐놓고
이제 와서 나를 원망하면 어쩌자는 것이오?
또 설령 내가 도우려 한들 무슨 수로 공을 구해 낸단 말이오?"
"자경이면 할 수 있소. 힘든 일도 아니오."
그래도 공명은 거듭 노숙에게 매달렸다.
☆☆☆
노숙이 마지못해 물었다.
"무슨 일을 내가 할 수 있단 말이오?"
"바라건대 자경께서는 내게
배(船) 스무 척과 배마다 군사 30명만 딸려 빌려주시오.
배들은 모두 푸른 휘장으로 둘러씌우고
그 안에는 묶은 풀 천 다발을 양쪽으로 갈라 쌓아 놓으면 되오.
그 배와 군사들만 있으면 내게도 묘책이 있어
사흘 안에 화살 10만 개를 얻어낼 수 있소이다.
다만 공근에게는 결코 이 일을 알려서는 아니 되오.
만약 이번에 또 그가 알면 내 계책은 실패하고 나는 목을 내주는 수밖에 없소."
제갈량이 엄살 섞어 그렇게 대답했다.
노숙이 원래 그리 모질지 못한 사람이라 어렵지 않은 그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동오의 녹을 먹고 있어 주유와 함께 그 이익을 지켜야 할 처지이지만
제갈량이 죄 없이 죽는 것까지는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공명의 청을 들어주기로 응한 노숙은
공명이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주유에게 돌아가 알렸다.
"공명은 대나무나 깃털이나 아교 따위를 쓰지 않고도
달리 화살 10만개를 만들어낼 도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공명의 당부대로
배 빌려주는 일은 전혀 말하지 않았다.
주유는 노숙의 말에 문득 의심이 일었으나
아무래도 공명에게 다른 방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사흘 뒤에 봅시다.
그가 어떤 꼴로 나를 보러 올지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는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주유와 헤어져 돌아온 노숙은 곧 공명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빠르고 가벼운 배 20척을 사사로이 뽑아
공명이 말한 대로 꾸민 뒤 배마다 군사 30명씩을 딸려 공명에게 보낸 것이었다.
☆☆☆
그러나 공명은 배와 군사가 마련돼도 얼른 움직이지 않았다.
첫날이 그냥 지나가고 다시 둘째 날도 일없이 지나갔다.
가만히 공명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노숙은 애가 탔다.
아까운 인재 하나가 속절없이 죽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셋째 날 4경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까지 꼼짝 않고 있던 공명이 몰래 사람을 보내 노숙을 자기 배로 불렀다.
갑작스런 부름에 노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르셨소?"
"화살을 얻으러 가려 하는바, 특히 자경과 함께 가고 싶어 번거롭게 했소."
공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노숙은 더욱 알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어디 가서 가지고 온단 말이오?"
"자경은 그만 물으시오. 함께 가보면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오."
공명은 그렇게 대답을 미뤄 놓고 곧 배에 딸린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배 스무 척을 긴 끈으로 모두 잇대어 묶고 북쪽 강 언덕으로 급히 저어 가라.
다음 일은 다시 내가 영을 내릴 것이다!"
노숙으로서는 도깨비놀음을 보는 기분이었다.
☆☆☆
그날 새벽은 몹시 안개가 끼어 하늘까지 아득히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장강 위에도 짙게 안개가 깔려 마주선 사람이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 앞사람이 대무수강부란 노래에서
<.....처음에는 보슬비 내리듯 침침하여 겨우 남산의 표범이나 숨을 만하더니,
차차 짙게 피어올라 북해의 곤(상상의 큰 물고기)이 숨어도 될 듯하다.
그 뒤 위로는 높이 하늘에 닿고 아래로는 두텁게 땅에 드리워
아득하기 그지없고 넓기는 끝간데를 모르겠구나.
고래는 물에서 솟아 파도 위에 뛰어 놀고
교룡은 물깊이서 신령한 기운을 토해 낸다...>라고
읊어 간 바로 그 장강의 대무였다.
그 짙은 안개 속을 헤치고 강을 타고 내려간 공명의 배들은
5경 무렵이 되자 조조이 수채 가까이 이르렀다.
공명은 스무 척의 배를 이물은 서쪽으로 두고,
고물은 동쪽으로 두게 하여 한 줄로 넓게 벌여 세운 뒤 또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뱃전으로 올라가 고함을 지르고 북을 두르려라!
되도록 크고 요란스러워야 한다."
그 갑작스런 명에 노숙이 깜짝 놀라 공명을 말렸다.
"조조의 군사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러나 공명은 껄껄 웃으며 노숙을 안심시켰다.
"이 짙은 안개 속에서 조조가 무슨 간으로 감히 군사를 내겠소?
우리는 술이나 마시며 즐기다가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 얼른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리고는 미리 마련해 간 술을 내오게 했다.
☆☆☆
그때 마침 조조는 수채 안에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함성이 크게 울리자
수군을 거느리고 있던 모개와 우금은 놀라 조조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둘 다 뭍에서의 싸움에서는 한다 하는 맹장들이지만
물위에서 싸움은 별로 아는 게 없어 먼저 조조에게 알리고
그의 명을 기다린 것이었다.
오래잖아 조조로부터 전갈이 왔다.
<안개가 짙고 강 위가 보이지 않는데 적군이 갑자기 몰려왔으니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다.
결코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수군 궁노수들로 하여금 어지러이 활과 쇠뇌를 쏘게 하며
적이 물러가거나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역시 수전에는 그리 밝지 못한 조조가 머리를 짜낸 끝에 내린 영이었다.
조조는 또 뭍에 있는 진채에도 사람을 보내 영을 내렸다.
<장료와 서황은 각기 궁노수 3천을 거느리고 급히 수채가 있는 강가로 가라.
가서 수군을 도와 강 위로 몰려온 적군에 활과 쇠뇌를 퍼붓도록 하라>
그렇지 않아도 동오의 배들이 수채로 뛰어들까 걱정이 된 모개와 우금은
조조의 그 같은 영이 이르기도 전에 이미 궁노수를 있는 대로
수채 앞에 벌여 세우고 활과 쇠뇌를 고함소리 나는 쪽으로 퍼붓는 중이었다.
조조의 영이 이르자
한층 기운을 얻어 화살 아까운 줄 모르고 마음껏 쏘아 붙였다.
오래잖아 장료와 서황이 이끄는 궁노수가 또한
수채가 있는 쪽 강 언덕에 이르렀다.
만 명이 넘는 그들도 수군과 마찬가지로
무턱대고 고함소리 요란한 곳으로만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이 비오듯 공명이 몰고 간 스무 척의 배 위로 떨어졌다.
배마다 가득 짚단이며 풀 다발을 싣고 있어
날아온 화살들은 촉 하나 상하지 않고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뱃머리를 돌린다. 이물을 동쪽으로 고물을 서쪽으로 가도록 하라!"
공명이 다시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한쪽 편 풀 더미에 충분한 화살이 박혔다고 생각되자
다른 편 풀 더미로 화살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뱃머리를 돌린 공명은
다시 군사들에게 크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게 했다.
조조군에서는 좀 전과 똑같이 활과 쇠뇌를 퍼부으니
이쪽 뱃전의 풀 더미에도 화살들이 비오듯 날아와 꽂혔다.
어느덧 해가 높이 솟고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제야 공명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배를 거두고 동오의 수채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 사이 조조군이 어지럽게 쏘아붙인 활과 쇠뇌로
스무 척의 배에 실은 풀 더미는 모두 화살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게 바로 대나무도 깃털도 아교나 옻도 쓰지 않고
화살을 만드는 방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공명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조의 수채 앞을 떠나기에 앞서 공명은 군사들에게 목소리를 합쳐 소리치게 했다.
"조승상님, 화살을 주어 고맙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조조의 군사들은 곧 안에 있는 조조에게 전했다.
조조는 비로소 그날 아침에 있는 공격이 무슨 뜻에서였는지를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적군의 배는 가볍고 물살은 빨라 어느새
20리나 달아난 뒤라 배를 내어쫓아 봤자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를 갈며 자신의 헤아림이 모자라는 것을 분해할 뿐이었다.
☆☆☆
한편 돌아오는 배 위에서 공명은
아직도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노숙을 보고 말했다.
"배마다 화살이 5∼6천은 될 것이니
동오로서는 반푼의 힘도 들이지 않고 10만 개의 화살을 얻은 셈이오.
내일 이 화살을 조조군에게 쓸 것이니 그 아니 편리한 일이오?"
그제야 노숙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잊고 있던 찬탄을 쏟아놓았다.
"선생은 참으로 신인이십니다!
어떻게 오늘 이처럼 짙은 안개가 낄 줄 알았습니까?"
"장수 된 사람이 천문에 통하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며,
기문(술수의 일종)을 모르고 음양을 깨닫지 못하며,
진도를 볼 줄 모르고 병세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보 잘 것 없는 재주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양은 이미 사흘 전에 오늘 크게 안개가 낄 것을 헤아려 놓고 있었기 때문에
사흘 말미만을 얻었더랬소."
공근은 반드시 자기 자랑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말투로 조용히 노숙의 말을 받았다.
노숙은 감동되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러졌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배들은 어느덧 동오의 진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가에는 주유가 이미 5백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화살을 운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빈손으로 돌아온 공명을 잡아
누구에게도 거리낌없이 군법을 시행하려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번거로움을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화살은 이 배들에 실려 있습니다."
공명은 그런 주유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주유가 군사를 시켜 스무 척의 배에 꽂힌 화살을 거두어 보니
10만을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도대체 공명이 어디서 그 많은 화살을 가지고 왔소?"
화살을 중군장에 거두어들이게 한 뒤 주유가 노숙을 불러 가만히 물었다.
노숙은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듣고 난 주유가 깜짝 놀라며 탄식했다.
"공명은 실로 하늘이 낸 사람이구려.
그의 빼어난 재주와 놀라운 헤아림을 내가 어찌 따를 수 있겠소!"
결국 주유가 손을 들고 만 셈이었다.
오래잖아 공명이 주유를 보러 들어왔다.
전과는 달리 주유가 장막 밖까지 나와 공명을 맞으며 감복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의 귀신같은 헤아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선생을 우러르게 만드는 데가 있소."
"속임수 같은 보잘것없는 계책을 어찌 놀랍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공명이 정색을 하며 겸양의 말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