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절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러면 보아스의 밭이 하나만 있다는 말씀입니까? 다른데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다른데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의 베는 밭을 보라 오늘 이 밭에서 다 베면 저쪽 밭으로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 밭에 보리 베는 일이 끝났다 그러면 보아스의 보리밭은 보리만 심어 놨으니까 그것을 다 베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그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보아스에 속한 보리밭이지만은 그 교인들이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보리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익어서 벨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인 백 명이 이 믿음에 섰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백 명 교인 앞에 똑 같이 증거 하지만은 이 말씀을 믿는 신부의 자리까지 올라오는 교인이 많을까요 올라오지 못하는 소녀의 자리에 있는 자가 많을까요 그렇지 못하면 이 말씀도 받지 못하고 누구 한데 물어 보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던데 이 말씀은 이단이라고 하던데 하는 교인들이 많을까요 보리 베는 것이 끝나는 것을 잘 보아야 됩니다.
이 말씀을 증거 하는 보리 베는 자들이 한 교회에 계속해서 오래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밭에 보리 베는 일이 끝나면 다른 밭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따라 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 동안 그 말씀을 증거 하게 하시고 받을 사람이 다 받고 나면 또 다른 밭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 다른 밭으로 보내심을 받는 베는 자들 그 종들도 마음 깊이 명심하는 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말씀했지요 그러면 보리가 되어서 베임을 받는 교인 수 보다 말씀을 받지 못하는 교인 수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쫓아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슬퍼하지 말고 또 다른 동네로 피하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보리밭이 또 있을 것입니다. 그리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 곳에서도 또 말씀 증거 하는 일이 끝나면 또 쫓겨날 것입니다. 또 쫓아내면 또 다른 곳으로 피하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있으려고 애쓰지 말고 피하면 네가 몇 밭에서 쫓겨나서 몇 밭을 돌아다니든지 네가 다 돌아다니기 전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을 잘 들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저는 늘 최 권능 목사님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데 최 권능 목사님이 일흔 몇 군데를 개척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 예수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 그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신유 은사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안수 해 병도 고치고 전도를 열심 해서 교회 하나가 이루어집니다.
교인이 몇 십 명되면은 그 때에 평양 신학에 다니던 분들이 학비도 조달해야 되겠고 말씀도 전해야 되겠는데 무엇이 앞설까요 말씀 전하고자 하는 열심이 먼저 앞설까요 학비 조달이 앞설까요 학비 조달이 앞서지요 어디 가서 교회 하나 맡아야겠는데 개척할 힘은 없고 연구해 봅니다.
옳지 최 권능 목사님 시골에 가서 개척해서 몇 십 명 모아 놨다고 하니까 거기나 가 보자 그것이 겉옷을 가지러 가는 자나요 속옷을 가지러 가는 자나요 속옷 가지러 오는 자예요 갈 때에 설교 말씀을 멋지게 하나 만들어 가지고 찾아갑니다.
최 권능 목사님은 말씀의 은사는 없으니까 설교하기 참 힘들거든요 말씀은 전해야 하는데 말씀이 있어야지 그런데 나 평양 신학 3학년에 다니는 아무개 조사입니다 인사하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설교하기 힘드는데 아이구 조사님 오늘 저녁에 말씀 좀 전해 주세요 그것 하러 왔으니까 그럼 하지요 그래 설교를 한번 잘합니다.
그럼 교인들이 누구 한데 따를까요 아이구 이번 오신 조사님 설교 재미나게 잘하더라 그 조사님에게 쏠려 가지고 압살롬이 다윗을 쫓아내듯이 최 권능 목사님을 쫓아냅니다.
그 최 권능 목사님 마음으로 내가 피땀 흘리면서 세우고 사랑하는 성도들인데 떠날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섭섭했을까요 그 분도 사람인데 섭섭했지요 또 괘씸한 생각도 들어 갔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그것뿐이니까 또 나와서 또 교회를 세우면 또 그렇게 해서 또 빼앗깁니다.
그럼 몇 번 빼앗겼다는 말씀입니까? 일흔 몇 번 빼앗겼으니까 일흔 몇 군데 개척했지요 이 마음들을 늘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저 동네에서 또 너를 쫓아내거든 도피하라 이스라엘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이스라엘 동네로만 보리가 있으니까 그 보리를 베라고 보아스가 보내지요 다 끝나기 전에 인자가 신랑 예수로 너를 영접하러 오리라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22:10)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하셨는데 빈 동이 입니까? 물이 가득한 동이를 말합니까? 물이 가득한 동이를 가지고 지금 길에 다니고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영광의 복음을 증거 하는 보리 베는 자들인데 이 말씀을 그대로 증거 하니까 교단에서는 이단이라고 쫓겨 났습니다.
그 사람이 이 말씀을 교회에서 그대로 증거 하는데 못 듣는 교인의 수가 많으니까 이것을 당회장이나 사찰회에 가서 고자질합니다.
시찰회나 노회에서 와 가지고 아무개 목사, 전도사 이단이라고 교회 안에서 말하니까 이 말씀을 못 듣는 교인들이 정말 자기 교역자가 이단인 줄을 알고 쫓아냅니다.
교단에서 쫓아내고 교회에서 쫓겨났으니까 갈 곳이 있어야지 그러니까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자를 너희가 만나리라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그 사람을 만나게 하신 그 주님께서 그를 보게 하셨지요 그가 들어가는 교회로 가라고 하셨나요 그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나요 이제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집은 예비해 놓았습니다. 그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유월절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라 객실은 나그네들이 들어가는 방이 객실이지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하늘나라의 영광된 열매를 맺게 하신 나그네 생활을 하는 자라야 그 방을 볼 수 있으리라,
그러면 그가 큰 다락방을 보인다 인천에도 다락방이라는 기도원이 있고 삼각산에도 다락방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 다락방은 없습니다.
이상해요 이왕이면 다락방이라고 이름을 붙일 바에야 큰 다락방이라고 붙일 것 같은데 무슨 다락방, 무슨 다락방 간판은 붙이면서도 큰 다락방 간판은 못 붙이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큰 다락방이 어디 있느냐 순교자들과 십 사만 사천 인들이 함께 올라 갈 공중 혼인 잔치 자리가 큰 다락방입니다.
다락방은 이층이지요 아랫 층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어요 천년 왕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천년 왕국 위에 공중 혼인 잔치 자리가 큰 다락방으로 보이고, 거기 들어 갈 때에 이 유월절을 먹고 이 유월절을 먹을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에게 이끌려 빌라도의 관청에 오리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골고다 언덕까지 십리를 너희를 억지로 끌어가게 해 주시리라 그 순서를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소년들은 베는 자들과 함께 하면서 환난까지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는 소년들입니다. 소녀와 소년은 다릅니다.
소녀는 첫째 부활의 영광만 바라보는 소녀들이고 소년은 이제 그들이 자라면 베는 자가 되지요 그러면 이 소년들은 환난을 왜 예비 해 두신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 소년들이 길어 온 물이 환난 때 주시는 신령한 위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들은 소녀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올라가서 환난을 통해서 순교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녀와 소년의 차이를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그 소년들을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느니라 글자대로 본다면 소년은 남자이고 룻은 소녀이니까 이성으로 건드리지 말라 그런 말씀은 아니지요,
지금 영의 세계에서 말씀하시니까 왜 건드리지 말라고 말씀하나요 건드리면 괴롭힌다는 말씀이지요 왜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느냐,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했지요 내가 소년의 믿음으로 먼저 자라났다고 해서 아직도 소녀로 있는 그를 왜 모르느냐고 괴롭히지 말고 너보다 약한 자를 붙들어 주라고 내가 명했느니라,
그럼 그 때에 소년들에게만 하신 말씀입니까? 오늘 나와 여러분들에게도 명하신 말씀입니까? 한번 붙들어 주고 말아야 될까요 끝까지 붙들어 주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떡 다섯 개로 오 천 명을 먹이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 바구니지요 떡 일곱 개를 가지고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일곱 광주리라 그러면 광주리와 바구니의 차이가 뭡니까? 바구니는 작고 광주리는 큽니다.
그런데 떡 다섯 개 가지고 부스러기 열 두 바구니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떡을 나누어주게 하신 제자들에게 한 바구니씩 주었지요 한 바구니씩 떡을 받았으니까 혼자 실컷 먹으라고 그랬을까요 네가 떡을 먹으라고 돌려주었는데 못 다 먹은 자들이 있으니까 부스러기가 남았지요 누가 못 다 먹었느냐 못 다 먹은 사람 따라 다니면서 먹도록 먹게 하라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하라고 한 바구니씩 주었지 너 혼자 실컷 먹어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네가 떡을 나누어주었는데 못 다 먹은 자들이 있으니까 남지 않았느냐 네가 남은 부스러기를 들고 다니면서 그들이 먹도록 먹여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 책임이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하시니까 일곱 개 밖에 없습니다. 일곱 개 밖에 안 되는 것 보니까 다른 제자들은 다 팔아 먹고 일곱 사람만 한 개씩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요,(마15:34)
일곱 개 떡으로 일곱 광주리가 남아 있을 때에는 사 천명 밖에 못 먹었지요 그럼 먹는 자가 적어졌다는 것이지요 왜 먹는 자가 적었느냐 일곱 영의 역사로써 첫째 부활의 영광의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는 말씀의 단계가 떡 일곱 개인데 떡 일곱 개로 거두어 들인 것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다 그러면 열 두 바구니가 남았을 때에는 제자들 한 바구니씩 줄 수가 있었는데 일곱 광주리만 남지 않았습니까 누구에게만 주었을까요,
아까 처음에 떡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부스러기도 한 광주리씩 받아 가지고 또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명까지 주었지만 애당초 떡을 안 가지고 있던 제자들은 나누어는 주면서도 무슨 떡인지도 모르고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갈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두개인의 누룩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말씀하실 때에 배에 떡이 없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가 떡 가져오기를 잊었다 그때 배 안에 떡이 몇 개 있었나요 한 개 밖에 없지요 떡은 누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요한이 가지고 있는 떡입니다. (막8:14) 뭘 보고 아느냐 떡을 가지고 있던 요한은 십자가 앞에까지 와 있지요 그때 떡 가지고 있지 않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우리가 이 떡 한 개를 가지고 있어야지 잠시라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 떡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느 때를 말씀하느냐 주의 말씀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항상 내 속에 있어야지 그것이 없다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주를 위하여 충성하는 자가 되지 않겠느냐 떡은 내 뱃속에 있는 자와 내 뱃속에 없는 자를 구별해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찌니라"
추울 때 목이 마르나요 더울 때에 목이 마르나요 날이 뜨거우니까 목이 마르지요 그러면 보리 베는 때는 환난 때를 말하지요 환난 때는 목이 마를 것입니다.
목이 마르는데 그릇에 가서 하면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요 (요2:6)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는데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채우라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다 주라 말씀했는데 그 때는 돌 항아리로 보여 주셨는데 오늘 영의 세계에서 내 육체를 말합니다.
내 육체가 그릇이 되고 있습니다. 내 몸에 채울 줄을 알아야지 다른 그릇들을 보면 안됩니다.
(마25:4) 에서 등은 다 같이 가지고 있는데 기름을 가진 처녀와 기름을 안 가진 처녀들을 말씀하실 때에 그릇에 기름을 준비 한 다섯 처녀를 말씀하십니다. 그 그릇은 우리의 육체입니다.
내 육체에 주시는 고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더하시는 기쁨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소년들은 그릇에다 물을 갖다가 붓는데 그 때에는 밭 모퉁이 어디에다가 그릇을 예비해 놓고 소년들로 하여금 물을 길어다가 붓게 하였겠지만 실상은 자기 몸이 그 그릇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날이 뜨거울 때에 목이 마르고 첫째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도 이삭을 줍는 자와 같은 네게 부닥치는 환난으로 연단 하실 때에 목이 마르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소녀의 자리에 있으면 첫째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만 있고 그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는 신랑 예수의 역사를 보지 못하니까 환난의 역사가 부닥치면 그 때에 목이 마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너보다 앞서 있는 소년들은 그 때를 위해서 예비 해 놓은 생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이 길어 온 물을 너희가 마시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릇이 준비되어 있고 소년들은 물을 길어다 물그릇에 채워 놓고 있으니까 슬기 있는 처녀들이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지고 있는 것과 뜻이 같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마25:4)
지금 이 밭에 있는 그 소년들은 자기들의 몸이 그릇이 되고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영광된 열매를 더하게 하시는 그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소년들은 자기들의 몸에 환난을 통하여 환난의 날을 예비하게 하시는 기쁨을 가지고 있고 자기들에게 환난이 임할 때마다 순교하게 하시는 그 순간까지 환난의 날에 찬송케 하시는 기쁨으로 채워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순교하게 하시는 그 순간까지 어떠한 환난을 더하시더라도 나를 때리게 하시는 몽둥이가 더 클수록 내 영광을 더하게 하시는 그 기쁨을 가지고 있는 자가 되어야지 그것이 감추어진 만나를 먹는 자가 되고 있느니라,
그 기름 가진 처녀들에게 기름 안 가진 처녀들이 좀 나누어 달라고 할 때에 내가 가지고 있는 기름을 네게 나누어주면 나도 너희도 다 쓰기에 부족할까 하노라 어떻게 보면 인색한 것 같지요 내가 기름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 나누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왜 안 나누어줍니까 네게 조금 나누어주면 너도 부족하고 나도 부족해 그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들의 믿음의 분량대로 몽둥이가 예비 되어 있는데 내게 있는 기름을 누구에게 조금 나누어주면 그 고난을 감당할 기쁨이 모자란단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이 말씀을 많이 증거 하는 목사님들과 이 말씀을 받은 교인들을 같이 붙잡아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악한 자가 누구를 더 때릴까요 이 말씀을 증거한 목사님을 더 때리지요,
그러면 목사님이 그 고난에 합당한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있는데 이 기름을 누구 한데 나누어주면 그때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겠느냐 그것입니다. 인색해서 안 나누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대추나무를 말씀 드리는데 대추나무는 다른 과목 나무와 달라서 하나 하나 따지 않고 막대기로 때립니다.
(요엘1:12)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은 가지가 매를 더 맞지요 열매를 조금 맺은 가지가 매를 덜 맞습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순교하는 자리에 같이 끌려갔지만 열매 많이 맺은 가지는 많이 맞을 것이니까 기름을 더 많이 준비해 놓아야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지 그 기름을 많이 준비해 놓지 못하면 그때 가서 넘어지지요 하나님께서 미리 기름을 채워 놓은 것입니다.
기름의 분량대로 때리게 하시고 몽둥이도 만들어 놓았단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마음에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몽둥이가 크면 클수록 영광을 더하게 하시는 것을 바라 볼 때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추었던 만나 입니다.
만약에 감추어진 만나를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그 기쁨을 가지지 못하면 무엇만 보일까요 큰 몽둥이만 보이지요 그럼 무서워집니다.
(마24:12) 이것을 보지 못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게 되리라 말씀했는데 불법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의 권세가 일어나서 성도들을 대적하고 죽이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순교하므로 써 첫째 부활의 영광을 주신다는 것도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닌 것은 불법입니다.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신 이가 신랑 예수이시니 그 예수께서 나를 순교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지요,
하나님의 법안에 있는 자들은 환난이 더 크면 클수록 사랑이 더 뜨거워지고 나를 기쁨으로 순교하게 하시기 위해서 첫 삼년반 환난까지 주신 사랑을 깨달을 때에 자꾸 사랑이 뜨거워지고 순교하는 자들에게 첫째 부활의 영광을 준다는 것을 보게 되면은 내가 순교하려니까 그 환난이 무서워진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사랑이 식어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법과 하나님의 법을 구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베드로와 같은 자들이 많아요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는 그 때에 첫째 부활의 영광을 주신다는 것은 베드로의 법입니다.
내가 죽을찌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죽는데 까지 주를 따라 가겠나이다 내 목숨을 주를 위하여 버리겠나이다 하는 이것은 베드로의 법이고 예수의 법은 그게 아닙니다.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신 신랑 예수께서 찬송하면서 순교하게 해 주시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요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말씀했지요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때가 추운 겨울이라는 말씀이 아니예요 그 때가 춥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추운 때입니다. 무섭다는 말이지요 세상 권세가 무서우니까 덜덜덜 떨려 그러니까 춥다는 말씀입니다.
(마24:20) 겨울에나 안식일에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셨는데 왜 겨울이냐 추운 때라는 말이지요 환난의 날이 무서워지면 추울 때이지요 하속들이 숯불을 피워 서서 쬔다 공관 복음에서는 그냥 불을 피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숯불이라 분명히 밝혔는데 왜 숯불일까요,
숯불은 한번 탔지요 또 타는 것은 숯불이지요 이게 둘째 사망입니다. 첫 번째 사망이 있으니까 두 번째 사망이 있지요 왜 하속들이 숯불을 쬐고 있습니까 추우니까 불을 쬐는데 베드로도 거기 서 있습니다.
하속들은 세상 권세가 무서우니까 나도 예수를 붙잡아 오는데 공을 세운 하속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금 서서 쬡니다. 앉아서 쬐면 얼굴이 가리워 져서 모를까 봐 나도 예수 잡아오는데 공을 세운 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서서 불을 쬐는데 베드로도 왜 서서 쬡니까? 나도 예수 잡아오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서서 쬐고 있습니다.
무서우니까 숯불을 쬐는데 이 숯불이 무엇을 태우는 숯불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늘나라의 영광을 불태우는 숯불이 되고 있느니라 이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삼년반 환난을 무서워하면은 겨울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은 아직도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여 그 때의 징조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살전5:3)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오늘 비가 오겠나 안 오겠나 날씨를 쳐다보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120년이 되리라고 하신 그 연도를 가르쳐 주셨으니까 앞으로 몇 해 몇 년만 알았지 달과 날은 몰라요 노아는 모르니까 칠일 전에 말씀해 주었지요 그러나 120년쯤 되리라 하는 그 연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그 날이 가까워질수록 부지런히 일하고 해 쳐다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를 쳐다 볼 위험성이 많습니다. 걸프 전쟁이 일어나니까 이게 첫 삼년반 환난을 알리는 삼차 대전이 아닐까 좀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것 같더니 또 안전해지니까 아직 때가 남았나 보다 마음들을 놓고 있습니다.
마음을 푹 놓고 있으니까 지금 무엇들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쌓기 바쁩니다. 전에 92년 10월에 휴거 한다고 떠들면서 부지런히 다니던 그들을 통해서 권고하셨는데도 지나고 나니 다시 주저 앉아 있습니다. 세상 잠들을 자고 있으니 그들보다 더 미련하지 않습니까? 빨리 준비해야지요 우리들을 위해서 그들도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삼하23:15) 다윗이 베들레헴 우물물을 사모했지요 이 베들레헴 우물물에서 길어 온 것을 보아야 됩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환난의 때에 기쁨으로 찬송케 하시는 그 물을 길어 오는 소년들이 있고, 그 그릇은 그들의 육체니 너도 네 몸에 그 물을 채우는 자가 되라 그러면 그 소년들이 될 때에 또 베는 자들로 역사 하게 해 주시는 그 단계를 우리가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