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1] 윤준식(尹俊植) - 만세 반석 열린 곳에 5. 울산 거쳐 제주도로 - 2
11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협회 본부에 다녀와서 나를 달랬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들은 제가 맡을 테니 꼭 갑시다. 선생님께서 뜻이 있어 보내시는 거래요” 결국 나는 아내의 정성과 노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2 개척자! 남들이 외관상으로 볼 때는 아무런 고통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았지만 내면에는 이 이상의 어려움이 많았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마음을 정리한 후 보따리를 챙겨 들었다.
13 네 살짜리 큰아들은 큰집에 맡기고 그 밑의 동생들만 데리고 심한 파도에 시달리며 임지에 도착했으나 지역장을 맞이해 줄 식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돈을 물 쓰듯 쓰고 돌아가는데 하늘의 외로운 사정을 붙들고 일해 줄 사람이 없으니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14 나는 아내와 같이 한라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바위 위에 앉아 고교 시절 등반하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하늘 앞에 기도를 드렸다. “아버님, 잠시나마 염려를 끼쳐 죄송하옵니다. 이제 아무 두려움 없이 제주도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수평선 너머 아버님이 손짓하며 용서해 주신다고 웃으시는 것만 같았다.
15 제주도에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지만 특히 ‘제1회 아시아 수렵대회’는 좀 더 하늘과 가까이 인연 맺을 수 있는 기회였다. 국내의 엽사(獵師) 5백여 명이 제주도에 모여 수렵 대회를 가졌는데 선생님께서 친히 교회를 찾아오시어 식구들에게 “육지를 남편 삼아 그리워할 줄 아는 식구가 돼라”라는 요지의 말씀을 해주셨다.
16 그리고 우리 부부를 조용히 부르시어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부부상(夫婦像)이 돼라”라는 말씀도 아울러 해주셨다. 이 말씀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보화로써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17 그리고 또 한 번은 선생님께서 일본의 간부 식구 70여 명을 거느리고 제주도에 오셨는데 우리도 같이 선생님을 모시고 지귀도(地歸鳥)에 가게 되었다. 이 섬은 앞으로 세계 수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구입해 놓은 한국 최남단의 섬인 것이다.
18 우리는 세 척의 배를 타고 오전 일찍 섬에 도착하여 오후 4시까지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일본 식구들의 심정이 간절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실제로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짧은 시간 속에서 실지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 그들은 선생님이 앉으셨던 자리에 서로 다투어 앉으려고 하면서 한국의 풀과 흙을 봉투에 담아 넣는 것이었다. 진리의 조국인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 한 포기 풀, 한 줌의 흙도 새롭다고 말하는 그들은 천진난만한 아이들 같았다. “어린아이들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느니라”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20 선생님께서 앞으로 국제 수련장을 만들어 세계통일 식구들을 제주도에서 교육 하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실 때 나는 제주도에 와서 일하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21 제주도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닮기 위해 노력한 지도 7년이 지났다. 이렇다 할 실적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제주 복귀를 위해 큰 실족함 없이 살아왔던 곳, 나는 그곳에서 벌써 5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