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소요공자와 그의 여인들
마옥은 순박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사내였다.
손불이는 성미가 좀 급한 편이긴 하지만 예전아 남편이었던 마옥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조
심성 있게 처신하는 여인이었다.
"우리 출가한 사람들은 자비를 우선으로 하기에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대신 저 소저를 내
놓아라!"
손불이가 한껏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매초풍은 여전히 냉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단 조건이 있다."
"조건?"
"날 이겨야만 한다."
전진칠자에게 감히 도전을 하는 사람은 강호에서 불과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매초풍이 나
선 것이었다. 손불이는 부아가 치밀었다.
"좋다, 우리 전진교의 무공을 보여주마!"
손불이는 곧장 매초풍을 향해 장을 내뿜었다.
매초풍이 얼른 장을 피하며 갈고리로 만든 손을 높이 쳐들며 달려들었다. 손불이가 얼른 옆
으로 몸을 숙이며 매초풍의 아랫배를 질렀다. 매초풍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공중으로 어느새
치솟으며 손불이의 얼굴을 향해 장을 뿌렸다.
장이 터질 때마다 흙바람이 일었다. 매초풍의 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 손불이는 조심하
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수십 합을 넘게 싸웠다. 차츰 매초풍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손불이의 무공은 구처기보다는 못한 편이었다. 구처기 무공은 악처후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
만 악처후의 무공은 흑풍쌍살에 비하면 그다지 나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손불이가 매초
풍을 쉽게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매초풍은 소리를 연신 지르며 갈고리 같은 두 손으로 구음백골조를 쓰려 했다. 그녀는 손불
이의 머리를 움켜쥐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린 손불이는 겨
우 몸을 피했다.
참지 못한 손불이가 드디어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전진검법이었다. 바로 선인
지로(仙人指路)의 초수였다.
매초풍은 코웃음을 날리며 슬쩍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다른 병장기는 사용하지 않았
다. 오로지 양손으로 손불이의 두개 골에 구멍을 낼 심사였다.
손불이의 전진검법도 매초풍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마옥이 매초풍과 손불이 사이로 뛰어들었다. 마옥은 매초풍의 손을 노려 힘껏 차버렸다.
"사매, 어서 물러나!"
마옥이 소리쳤다. 손불이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매초풍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두 사람은 금슬 좋은 부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부럽군. 그렇게
붙어다니니 정말 부러워."
진현풍도 비아냥거렸다.
"아무리 도사라고 하지만 어디 밤에는 도도하게 그냥 잘 수 있겠어?"
참을성 많은 마옥이었지만 그 말에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매초풍을 향해 장을
날렸다.
상대의 초수를 알지 못한 매초풍은 그저 평범한 장으로 알고 피했다. 그러자 마옥이 뒤를
이어 한 장 더 뿌렸다. 그것은 곧장 매초풍의 왼쪽 어깨를 향해 휘몰아쳤다.
매초풍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오른손으로 마옥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또 왼손으로는 마
옥의 가슴을 노렸다. 이때 마옥은 장을 쓴 손을 얼른 거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순간 매
초풍에게 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마옥이 장을 내민 손을 당기며 매초풍의 오른쪽 팔꿈치의 곡지혈(曲池穴)을 쳤다. 매초풍은
마음을 놓으며 오른팔을 거두고 왼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마옥의 얼굴을 움켜쥐려고 했다.
두 사람은 사오십 합이 넘게 싸웠다. 매초풍의 무공은 사악하고 교활했다. 반면 마옥의 무공
은 깊이가 있었다. 두 사람은 쉽게 승부를 내지 못했다.
한대웅이 외쳤다.
"저런 악마들에겐 강호의 도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 요절을 내라!"
그러자 거렁뱅이들이 다시 타구봉을 휘저으며 진현풍에게로 돌진해 갔다.
손불이도 약간 망설이더니 검을 꼬나들고 매초풍에게 공격했다. 가뜩이나 마옥과 싸우는 것
이 생각처럼 되지 않던 차에 손볼 이까지 합세하니 매초풍은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진현풍은 개방의 제자들을 장으로 내치고는 얼른 손을 여소교의 목에 갖다 댔다.
"이 놈들, 또 달려들면 이 계집을 당장 죽일 것이다!"
순간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멈췄다.
진현풍은 여소교의 목에 손을 댄 채 그녀를 안고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매초풍도 그를
따라 자리를 옮기며 소리쳤다.
"한 발짝이라도 따라오면 이 계집을 죽일테다!"
한대웅이 안타까워 자기 가슴을 쳐댔다.
"저 사악한 연놈들을 그대로 보내다니……, 분하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도 어쩌지를 못하고 속수무책 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매초풍이 안전하게 거리를 확보하자 이쪽에 대고 빈정댔다.
"이 거렁뱅이야, 그렇게 분하면 와 봐라. 우린 끝까지 개방과 전진교를 상대로 싸울 것이
다!"
그리곤 유유히 멀어져 갔다.
이때였다. 쌍지팡이를 짚은 젊은 사내 하나와 거인 하나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멀리 사라
져 가는 흑풍쌍살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이 이를 바드득 갈아했다.
"어디 두고 보자. 네 놈들이 얼마나 더 그 짓거리를 하는지!"
한대웅이 읍을 하며 물었다.
"흑풍쌍살과 어떤 원한이라도……?"
"놈들은 우리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들이오. 우리의 원수일 뿐 아니라 사부님을
배신한 놈들이오."
젊은 사내가 말하자 거인도 한마디했다.
"이 사람은 도화도 도주 황 선배님의 제자인 육승풍이고, 저는 막가권의 장문 막여인입니다.
우린 오래 전부터 저 흑풍쌍살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마옥이 육승풍에게 읍을 했다.
"그러고 보니 육세형(陸世兄)이 아니십니까?"
"아. 마 도장님! 잘되었습니다. 우진 힘을 모아 저 놈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한대웅도 그 말에 동조를 했다.
"우리 개방 사람들도 흑풍쌍살을 꼭 처단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육 공자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마 도장님, 전진교에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옥이 좀 머뭇거렸다. 대신 대답하고 나선 것은 손불이였다.
"물론 우리도 나서야지요 구차기 사형과 왕 사형도 이 일을 알면 꼭 찬성을 할 겁니다."
도를 닦는 사랑의 조용한 성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마옥도 그 말에는 잠자코 묵인을 했
다.
흑풍쌍살은 십 리 밖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태호 주변에 이르러서야 숨을 가다듬었다. 매초
풍은 여소교를 등에서 내려놓으며 입을 놀렸다.
"망할 계집, 내가 네 년의 말이 되었구나."
"피, 내가 언제 업어 달라고 했어요?"
풀밭에 길게 누우며 여소교가 투덜거렸다.
"개방 거렁뱅이와 전진교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매초풍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약이 올라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언니는 말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한 사람은 자청해서 할걸요."
여소교가 입술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누구?"
"저분……."
여소교가 가리칸 사람은 진현풍이었다.
"허튼소리……!"
그러자 여소교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배를 움켜잡았다.
"저 사람은 날 업고 싶어도 언니가 시샘을 할까 봐 싫다고 할 거예요."
그러자 매초풍이 여소교의 뺨을 후려쳤다.
"요 발칙한 년, 또 그 따위로 주둥이를 놀려댔다가는 네 년의 간을 빼내 찢어발겨 버릴 거
다!"
여소교는 뺨을 감싸 쥐고는 훌쩍훌쩍 어깨를 들썩거렸다.
"사매, 그럴 것까지 없잖아?"
진현풍이 여소교를 두둔하고 나섰다.
"왜 가슴이 아픈가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 말은 그런 일에 화를 내면 몸만 상한다는 뜻이야. 그대를 생각해
서 하는 말인데……."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
"사매, 이제 태호만 건너면 소요관인데 여소교를 정말 악처후에게 넘길 셈인가?"
진현풍이 얼른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정이 깊은 사람들인데 그렇게 해야지요."
그 말에 뜻밖에도 진현풍이 탄식을 했다.
"소요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여인을 노리갯감으로만 아는 사람이라구. 그런
데……, 소요공자가 여소교를 실컷 데리고 놀다가 버리기를 바라는 모양인데 틀렸어. 만약에
그가 정말로 여소교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쩌겠어?"
"그런 염려는 마세요. 소요공자가 한 계집을 석 달 이상 데리고 노는 걸 봤어요? 그가 여소
교를 사랑하는 척하는 목적은 따로 있다구요. 여소교를 데리고 재미 좀 보겠다는 것도 있지
만 원래 목적은 소녀공을 알아내려고 그런 거라구요."
"그렇다면 결국엔 악처후가 소녀공을 알도록 내버려두겠다는 거야?"
매초풍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속으로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소녀공은 여인이 사내의 진기를 빨아내는 채양보음지술인데 악처후가 알아내야 무슨 소용
이 있단 말인가. 악처후가 여인으로 변한다면 또 모를까!'
푸른 태호의 수면 위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눈부신 오후의 태양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은
빛 주단을 깔아 놓은 듯했다.
진현풍이 일어서며 소리쳤다.
"사공, 배를 이리로 대시오!"
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노를 젓는 사람은 반백의 늙은이였다. 몸엔 도롱이를 걸치고
불그레한 얼굴에 근엄함이 약간 있어 보였다.
"건강한 늙은이인데. 내가 저 나이가 되어도 저렇게 몸이 좋을 수 있을까?"
진현풍은 노인을 부러워하며 중얼거렸다.
늙은 사공이 배를 기슭에 대고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태호의 경치를 구경하려고 그러십니까요?"
"아니오, 태호의 서안에 가려고 합니다."
늙은 사공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창 안에 대고 소리쳤다.
"아생아, 어서 나오지 못해!"
그러자 선창 안에서 열일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년이 뛰어나 왔다. 잠방이에 위에는 소매
가 없는 등걸이만 걸친 소년은 근육이 제법 불거져 있어 건장해 보였다. 소년은 튼튼한 팔
로 널판지 하나를 들어다가 배와 기슭 사이에 놓았다. 그리고는 흑풍쌍살과 여소교를 보곤
하얀 이를 가지런하게 내보이며 히죽 웃었다.
세 사람은 널판지를 타고 배 위로 올라섰다.
"서안까지 이십 문(文)인데요."
늙은 사공이 뱃삯을 불렸다.
"돈은 염려 마시오."
진현풍이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태호를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넓은 수면을 보니 동해 도
화도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널판지를 올리고 소년이 삿대를 힘껏 밀자 배가 수면 위로 미끄러져 갔다.
"밖에 늪바람이 세니 선창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 안에서도 풍경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요.
창문이 있으니까요."
아은 사공의 말에 매초풍과 진현풍은 여소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서안에 가면 악처후를 만나게 될 게다."
매초풍의 말에 여소교가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이에요?"
"악처후가 있는 곳이 바로 소요관인데 바로 저기에 있거든. 어서 화장이나 좀 해라."
여소교는 가슴이 뛰었다. 악처후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좀처럼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매
초풍은 그런 여소교의 심정을 읽고는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비웃음을 실었다.
배가 호수 중간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사공이 노를 젓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 진현풍
이 물었다.
"왜 배를 세우시오?"
늙은 사공이 헤헤 웃으며 딴전을 피웠다.
"소요관에 있는 소요공자님이 어떤 분인지 아시우?"
"그렇다면 노인도 강호 사람이군요?"
매초풍이 반색을 하자 늙은 사공은 수염을 내리쓸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눈치가 제법이군!"
흑풍쌍살은 늙은 사공의 어투가 변한 것이 몹시 귀에 거슬렸다. 그런데 뱃머리에서 있던 소
년도 다가와 한마디 툭 던졌다.
"예쁜 계집이 둘씩입니다요. 꽃같이 어여쁜 계집이……."
"오늘은 복이 통째로 굴러들어왔어."
"늙은 자라, 당신은 여인이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 사람이니까……."
"아직 머리에 쇠똥도 안 벗겨진 놈이 감히! 작은 게, 넌 딴생각하지 마. 저 두 계집은 모두
내 차지라는 걸 명심해!"
"글쎄, 다른 계집이면 몰라도 저 두 계집은 안 되겠어요. 내가 왜 넘겨줘요?"
그들은 그들의 별명인 듯한 늙은 자라와 작은 게라고 서로를 호칭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솟구치는 화를 애써 참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들어 보니, 노인은 그런 일에 경험이 많으신 것 같은데 어째 저 소년은……?"
"그런 말 마시오. 나 작은 게는 이제 열일곱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여인들 배꼽 위에서 뛰오
논 지는 벌써 서너 해도 넘는다우."
소년이 이죽거리며 다가와 매초풍의 뺨을 만지려고 했다. 매초풍이 소년에게 살짝 눈을 흘
겼다. 소년, 아니 작은 게는 그만 그 자태에 정신이 아찔해져 히히 웃었다. 그리곤 얼른 매
초풍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순간 손목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아 소년은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어느새 매초풍의 매끈한 다섯 손가락 이 소년의 손목에 박혀 있었다.
매초풍이 미소를 지으며 힘을 죽었다. 그러자 소년의 손목이 끊어지면서 피가 솟구쳤다.
"어어……!"
매초풍이 소년을 옆으로 휙 밀었다. 소년은 어어 하는 소리만 내지르다가 호수에 처박혔다.
금방 호수가 피로 물들었다.
"이런 지독한 계집이 있냐!"
늙은 자라가 놀라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진현풍이 장을 한차례 날렸다. 눈치 빠른
늙은 자라는 얼른 몸을 날려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어느새 물 속으로 가라앉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출렁이는 물결 위로 핏물만 점점 엷
게 번져 가고 있었다.
"분명 물 속으로 달아난 것 같아!"
매초풍이 고개를 내젓고 있는데 갑자기 선창 안에서 여소교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 왔다.
"물이 새요!"
흑풍쌍살은 급히 선창으로 뛰어 들어갔다. 선창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서 물
이 무서운 속도로 들어왔다.
매초풍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구멍은 놈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게 분명해!"
"자기들 배일 텐데 아깝지도 않은가 봐!"
여소교가 그들을 따라 선창에서 나오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배를 마음대로 가라앉혔다가 다시 끌어올리는 재간도 갖고 있어."
진현풍이 짐작되는 바를 얘기했다. 그러자 여소교가 눈웃음을 치며 그를 칭찬했다.
"오라버니는 아는 것도 많네요."
진현풍이 우쭐해서 헤헤 웃었다.
"강호에 다니는 사람인데 그쯤이야 기본이지. 내 언제 시간이 있으면 강호에 대한 여러 가
지 얘기를 들려주지."
"참, 우리가 저 구멍을 막으면 될 게 아니에요?"
여소교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자 매초풍이 가소롭다는 듯이 면박을 주었
다.
"알지도 못하면서 난리군. 이런 도적놈들 배는 배 밑에 언제나 망치와 끌을 달고 다니지. 지
금쯤은 아마 그들이 망치와 끌을 풀어 지니고 있을 거야. 우리가 구멍을 막으면 놈들은 다
시 여러개의 구멍을 뚫을지도 몰라."
아닌게아니라 조금 후에 호수 위로 두 개의 머리가 튀어올랐다. 늙은 사공과 소년이었다. 그
들의 손엔 정말 망치와 끌이 쥐어져 있었다. 이쪽에 대고 그들이 고함쳤다.
"잘 봤겠지? 그래도 항복하지 않겠어?"
매초풍이 침을 탁 뱉었다.
"이 할미가 네깐 놈들이 무서워 항복할 것 같으냐? 어서 이리로 올라오너라. 내가 귀여워해
줄테니!"
그러자 늙은 자라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반백의 머리를 가로로 저었다.
"미쳤어. 너희들은 이제 물을 실컷 먹고는 쭉 뻗을 것이다. 그 때 가서 재미를 봐도 늦지 않
을텐데."
소년도 한마디 보탰다.
"나도 그때 재미를 봐야지. 안심하라구.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네 년들처럼 예쁜 계집들을
왜 죽여? 평생 데리고 놀아도 부족 할텐데."
선창에는 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배는 점차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세 사람의 발목까지 물
이 차올랐다.
겁에 질린 여소교가 진현풍의 팔에 매달렸다.
"어떡해요?"
진현풍은 사내답게 여유를 찾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겁내지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지 않느냐?"
매초풍은 두 사람의 수작에 배알이 뒤틀렸다. 그녀는 여소교의 팔을 확 비틀었다.
"망할 년,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수작을 부리는 거야!"
그 바람에 배가 뒤뚱거렸다.
"어어……."
순식간에 배가 뒤집혔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여소교는 사지를 내저으며 연신 물을 먹었다. 하는 수 없이 매초풍이
여소교의 사지 혈도를 눌러 등에 업고는 헤엄을 쳤다.
"이봐 작은 게야, 이거 난처하게 되었는걸. 저것들이 가라앉지를 않고 헤엄을 치고 있잖아?"
늙은 자라가 투덜댔다. 작은 게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저런 헤엄으론 얼마 못 가서 늘어진다구요."
그 말에 늙은 자라가 눈을 번쩍 떴다.
"하긴 네 말도 옳다. 물에서야 우리에게 당할 자가 없지. 저년이 네 손목을 끊어 놓았으니,
넌 저 년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려라."
두 사람이 서서히 흑풍쌍살에게로 헤엄쳐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진현풍이 말했다.
"놈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게요. 우린 동해 바다에서도 나비처럼 헤엄치며 살았는데 이 정도야……!"
둘 사람은 크게 웃었다.
이때 늙은 자라와 작은 게는 물 속으로 헤엄쳐 두 사람에게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들이
막 흑풍쌍살의 다리를 아래서 잡아당길 판이었다.
"난 여소교를 돌봐야 하니까, 당신 혼자서 저 두 놈을 처치하세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이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짓더니 자맥질을 시작했다. 물 속으로 들어간
진혈풍은 늙은 자라와 작은 게를 찾았다.
진현풍의 능숙한 헤엄 솜씨를 본 늙은 자라와 작은 게는 몹시 놀랐다. 그래도 그들을 어렸
을 때부터 태호에서 자란 자신들의 실력을 과신했다. 두 사람은 양쪽에서 진현풍을 협공하
려고 슬슬 다가왔다.
진현풍이 기다리고 있다가 번개같이 작은 게를 덮쳤다. 작은 게는 뭐라고 욕을 퍼부으려다
가 얼른 잠수를 했다. 그 틈에 늙은 자라가 진현풍의 뒤를 쫓아왔다. 들고 있던 쇠망치로 진
현풍의 머리를 막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진현풍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으로 쇠망치를 받
아 쥐었다. 그리곤 힘껏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늙은 자라의 몸이 이끌려 질현풍 앞으로 옮
겨 왔다.
그런데 이때 다시 헤엄쳐 온 작은 게가 왼손에 든 끌로 진현풍을 찔렀다. 진현풍이 급히 늙
은 자라를 방패로 삼았다.
"악!"
작은 개의 끌은 늙은 자라의 엉덩이에 박혀 버렸다. 작은 게가 급히 끌을 뽑은 덕분에 늙은
자라는 크게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
댔다. 그 바람에 그는 많은 물을 먹게 되었다.
화가 난 진현풍이 쇠망치를 빼앗아 늙은 자라의 이마를 후려쳤다. 화들짝 놀란 늙은 자라는
급히 달아났다.
물 안에 있는 시간이 오래 되자 늙은 자라와 작은 게는 숨이 차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수
시로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쉬었다.
하지만 내공이 센 진현풍은 물 속에서 한 시간도 버틸 수가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다리를
하나씩 거머쥐고는 천 근의 힘으로 잡아당겼다. 늙은 자라와 작은 게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려고 발버둥을 쳐댔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에겐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연신 물을
먹었다.
진현풍은 두 사람에게 실컷 물을 먹인 다음 물 위로 끌고 올라왔다. 얼굴색이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시퍼렇게 변한 두 사람은 맥없이 축 늘어졌다.
그 꼴을 보고 매초풍이 고소해서 까르르 웃었다.
"오호호, 자라와 게도 물을 무서워하네."
두 사람이 먹은 물을 토해 내고 겨우 정신을 차리자 진현풍이 위엄 있게 말했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어떤가? 따를텐가?"
"한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 아니 백 가지라도 해드리겠습니다요."
늙은 자라는 아직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사정을 했다. 작은 게도 마찬가지였다.
"꼭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손자 놈입니다."
매초풍이 한마디 던졌다.
"너희 같은 색마들을 손자로 삼을 우리가 아니다. 다른 일이 아니라 가라앉은 배를 다시 띄
워 우리를 태워 달라는 거다. 그러면 너희들을 살려 주겠다."
"두 분의 존함이……?"
늙은 자라가 읍을 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린 흑풍쌍살, 동시와 철시다!"
그러자 늙은 자라와 작은 게는 사지를 부르르 떨더니 두말없이 물 속으로 들어갔다. 가라앉
은 배를 찾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배는 다시 물 위로 올라왔다.
흑풍쌍살을 알아본 두 사람은 숨도 크게 못 쉬며 설설 기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
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을 두 사람은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늙은 자라!"
매초풍이 그를 불렸다.
"예, 소인 여기 대령했습니다요."
늙은 자라가 급히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아까 넌 우리가 소요공자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지? 그래 너희들은 그자와 어떤 관
계냐?"
"소인들은 소요출자의 부하들인데 태호의 동정을 살피는 소임을 맡고 있사옵니다요."
"그래서 이따위로 순찰을 하는 게냐?"
진현풍이 코방귀를 날렸다. 그 말에 늙은 자라가 비위 좋게 히히 웃으며 번죽을 떨었다.
"예, 이따금씩 밑천 안 들이는 장사를 좀 하지요 다른 재미도 좀 보고오."
"나쁜 놈들!"
늙은 자라가 계속 히죽거리며 너스레를 떨자 그를 향해 욕설을 퍼부은 것은 놀랍게도 여소
교였다.
"아이구 죄송합니다요"
늙은 자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여소교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여인은 장차 네 주인의 부인이 될 몸이시다."
진현풍이 설명해 주자 늙은 자라가 다시 한 번 여소교를 살펴 보았다.
"믿을 수가 없는뎁쇼. 소요공자님께서는 어떤 여인과도 사흘을 넘게 있어 본 적이 없는
데……."
여소교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매초풍이 얼른 눈짓으로 늙은 자라를 나무랐다. 그리곤 여소교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소요공자가 풍류객이긴 하지만 마음씨는 비단결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언니가 너를 왜 이
곳까지 데리고 왔겠어?"
그러자 눈치 빠른 작은 게가 헤헤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이지요. 요사이 우리 공자님이 늘 우울하시던데 이제 보니 이분을 기다리느라고 그러
신 모양입니다."
이윽고 배가 태호 서안에 이르렀다.
청산녹수(靑山綠水)에 꽃들이 만개한 경치 좋은 곳이었다. 배에서 내린 흑풍쌍살은 걸어가면
서 소요공자가 아주 명소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붉은 담장에 둘러싸인, 처마가 아주 높은 기와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대문 위에 '소요관(逍遙館)'이란 세 글자를 금빛으로 써놓은 편액이 보였다.
대문 양옆에는 돌사자가 한 마리 씩 있었고 그 곁에는 위풍이 당당한 거인이 한 명씩 서 있
었다.
'소요관'이란 편액을 보자 여소교의 마음은 어느새 악처후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봐 늙은 자라, 오늘은 사냥감이 좋은데?"
문을 지키고 있던 거인 하나가 늙은 자라를 보고 물었다. 그의 시선은 매초풍과 여소교의
풍만한 가슴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늙은 자라가 대답하려는 것을 막고 진현풍이 소리쳤다.
"여씨네 가문에서 소저가 왔다고 소요공자께 알리시오!"
그러자 문을 지키고 있던 거인이 다른 거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약간 늙은 사내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늙은 자라는 진현풍의 매서운 눈초리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 옴쭉달싹하지 못했
다.
"어서 이분 말씀대로 전하기나 해."
늙은 자라가 주눅든 목소리로 다그쳤다.
거인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악처후가 부하 여덟을 데리고 나타났다. 부하들은 각기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날카
로운 눈빛만은 한결같았다. 소요관의 팔대 금강(八大金剛)이라 일컫는 고수들이었다.
흑풍쌍살을 발견한 악처후가 흠칫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매초풍 곁에 서 있는 여소교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 진 공자님과 매 소저가 오셨군요. 여 소저를 데리고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순간 여소교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자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애닯은
가슴만 쓸어안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그동안 겪은 고생이 떠올라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
려고 했다. 여소교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악처후가 얼른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흑풍쌍살이 아무래도 무슨 계략을
숨겨 놓은 것 같아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저, 왜 그러시오?"
매초풍이 여소교를 안으며 대신 대꾸했다.
"소요공자를 만나니 너무 좋아 안 그러나?"
악처후가 두 팔을 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서 이리로 와요."
여소교가 겨우 눈을 뜨고는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정말 가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여소교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내 악처후에게로 달려갔다.
악처후도 앞으로 달려나오려 여소교를 안으려고 했다. 이때 매초풍이 번개처럼 날아와 여소
교의 앞을 가로막았다. 악처후가 사태를 짐작하고는 장을 날렸다. 매초풍도 재빨리 몸을 숙
이면서 장으로 맞섰다.
장과 장이 마주치며 사방에 흙바람이 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장에 밀려 뒤로 멀리 미끄
러져 갔다.
여소교는 이미 매초풍의 손에 잡혀 있는 뒤였다.
"매초풍, 대체 어쩌겠다는 게냐?"
악처후가 눈을 부라렸다. 매초풍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가지 묻겠소. 여씨네 가문은 모두 몰살당하고 이 소저만 남았는데 소요공자께선 어떻게
보살펴 주실지 궁금하오?"
"나 악처후를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아시오? 그 소저를 어떻게 보살피든 그건 내 일이니
간섭하지 마시오?"
"우린 잔칫술을 얻어먹을 일만 기다리겠소. 풍류객인 소요공자가 정말 한 소저에게만 정을
붙이는지 두고 보겠소."
매초풍이 여소교를 소요공자에게로 밀었다. 여소교를 급히 받아 안은 악처후가 부드럽게 물
었다.
"어떻소 괜찮아요?"
악처후의 품에 안긴 여소교는 너무 행복해 그만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봄밤의 한 시각은 천금이라고 하던데 잘들 있으시오. 우린 이만……."
매초풍이 깔깔 웃으며 한마디 던지고는 진현풍과 함께 돌아섰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훌쩍
몸을 날려 그 자리를 떠났다.
"공자님, 바로 저것들이 흑풍쌍살입니다요. 어서 쫓아가서 죽여 버리든지 할 게 아닙니까
요?"
이때서야 늙은 자라가 호들갑을 헐었다.
"쫓아가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난 저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네."
악처후가 웃으면서 여소교를 안고는 돌아섰다.
소요공자가 오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을 거라 예견했는지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각자 흩어졌다.
악처후는 여소교를 품에 안고 화원에 있는 누각으로 갔다. 악처후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
가 떠나지를 않았다.
아리따운 시녀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두 사람을 맞았다.
"공자님께서 또 미인을 얻으셨네. 축하해요. 호호호……!"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소리에 악처후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시녀들의 볼을 살짝 꼬집
었다.
"실없는 소리. 이 소저는 너희들 주인이 되실 몸이시다. 어서 정중히 모셔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 드려라."
"아니, 전……."
여소교가 부끄러움에 몸을 꼬았다. 악처후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여긴 안전한 곳이니 안심을 하시오. 어서 몸을 씻고 새옷으로 갈아입어요. 그런 다음에 우
리 두 사람이 마주앉아 밀린 이야기를 나눕시다."
비로소 안심을 한 여소교는 두 시녀를 따라갔다.
여소교가 몸을 씻는 모습을 상상하던 악처후가 하인들에게 분부했다.
"어서 누각에다 주안상을 마련해라!"
저녁에 악처후는 말끔하게 단장을 하고 나온 여소교의 손을 이끌고 누각으로 갔다. 누각에
는 주안상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에 분홍색 명사옷을 입은 여소교의 한들거리는 자태는 아
주 매혹적이었다.
"자, 앉아요."
좀처럼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못하는 악처후가 권했다. 여소교가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악처후가 그녀 곁으로 옮겨 앉으며 시녀들을 물렸다.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만남을 자축하는 건배를 했다.
처음에는 서로 농을 주고받다가 차츰 침울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여소교는 그동안 흑풍쌍살
에게 겪은 고초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곤 서럽게 울었다. 악처후는 그녀를 위로하는 척하
면서 자꾸만 술을 권했다.
시간이 흐르자 여소교는 취기로 눈앞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저, 전 취했나 봐요."
악처후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나도 취했소. 난 그대를 보자마자 취했는걸."
부끄러움으로 여소교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가 양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
굴을 감쌌다.
"공자님은 사람을 달아오르게 할 줄밖에 몰라요. 그런데 왜 흑풍쌍살이 날 못살게 굴 때는
가만히 계셨나요?"
"가만있다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하며 찾아 다닌 줄 알아? 난 무림의 벗들을 모두 불러다
그들을 죽이고 그대를 구하려고 노력했었지. 그런데 그들이 그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올 줄
이야.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보지. 그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하늘이 보살핀 거라구."
그의 입발림 말에 감동이 된 여소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정말이지요?"
"물론이지. 하늘이 굽어보고 있는데 내가 거짓말을 할까 봐 그래? 나 악처후가 그대에게 다
른 마음을 먹는다면 천벌을 받을 거야. 벼락을 맞아 가루도 남지 않을걸."
여소교는 손으로 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제가 믿으면 되잖아요."
그러나 여소교는 모르고 있었다. 소요공자 악처후가 자신에게 마음을 둔 어여쁜 소녀들에게
이런 맹세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이런 맹세쯤은 그에게 있어서 식은죽 먹기였다.
악처후는 여소교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을 마구 빨아댔다. 여소
교는 온몸이 짜릿해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런 일에 매우 숙달돼 있는 악처후는 혀끝을
그녀의 입 속에 넣고는 그녀를 마음껏 희롱했다.
악처후의 입술이 그녀의 볼과 귀를 훑었다. 여소교도 허리를 한껏 비틀며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저……."
악처후의 손이 서서히 그녀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우람한 손이 그녀의 봉긋한 젖가
슴을 움켜쥐었다.
"아……!"
그의 손길을 막으려면 여소교는 그만 포기를 하고 말았다.
악처후의 손놀림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그의 손과 입술은 여소교의 몸을 마음껏 주물렀다.
그녀의 숨소리가 자라지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듯싶자 그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그녀
의 속옷 을 벗기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손을 잡으며 저항을 했다.
"이, 이러지 마세요……."
그러나 악처후의 손은 이미 그녀의 속옷을 벗겨낸 후였다. 여소교는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기분에 양팔을 휘저었다.
"정말 날 좋아하는 거죠?"
"물론이지."
그러면서 악처후의 손은 또 여소교의 아랫배를 타고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여소교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난 아직 숫처녀예요. 당신을 사랑하고는 있지만 화촉을 밝힌 다음에……."
여소교가 끝내 자신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악처후의 눈빛이 확 돌변했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바꾸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
다.
"내가 싫다는 뜻이겠지. 그대의 마음엔 내가 없는 게 확실해."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난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여소교는 급히 악처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악처후가 얼른 여소교의 몸 위로 자신을 포갰
다.
"날 사랑한다면 내 말을 들어줘."
그리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을 들이밀었다.
"아, 악……!"
그녀는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소요관을 떠난 흑풍쌍살은 남쪽을 향해 내려갔다.
"사매, 소요공자가 정말 여소교를 사랑할까?"
길을 걷다가 진현풍이 불쑥 물었다.
"또 여소교 생각이에요? 당신 마음을 누가 모를 줄 알고?"
매초풍이 눈을 잔뜩 흘기며 톡 쏘아붙였다.
"내 마음이 어떻단 거야? 난 그대의 계략이 제대로 실현될까 걱정이 돼서 묻는 거야."
매초풍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말아요. 지난 몇 년 같이 지내면서 내가 당신의 마음을 다 읽었
다구요. 당신이 꿈을 꾸면 난 해몽부터 하는 사람이에요. 아까 태호 배 위에서 왜 그 계집을
그런 눈 으로 쳐다보았지요?"
태호에서 다시 떠오른 배를 타고 악처후가 사는 곳을 향해 갈 때의 일이었다. 그때 여소교
는 진현풍 곁에 앉아 있었다. 금방 물에서 나온 그들 셋은 모두 젖어 있는 상태였다. 젖은
옷에 감싸여 있는 매초풍과 여소교는 온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래도 매초풍은 진기를 운행하는 바람에 옷을 빨리 말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소교의 입
장은 달랐다. 거의 알몸으로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진현풍은 누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돌아보았다. 여소교의 눈과 마주쳤다.
물에 젖은 옷 때문에 그녀의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진현풍은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에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젖가슴이 움직였고
아랫배와 허리 선이 꿈틀거렸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가 갑자기 묵지근해지는 것 같아 견
딜 수가 없었다.
이때 배가 출렁거렸다. 여소교가 진현풍에게로 쏠리면서 그녀의 젖가슴의 감촉이 전해졌다.
진현풍은 자신의 팔에 그녀의 젖가슴이 닿자 눈앞이 아찔했다.
한참 그 삼삼한 기억을 되새기고 있던 진현풍은 매초풍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할말이 있어요?"
매초풍이 다시 진현풍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는 시기와 복수의 빛이 함께 타올랐다.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
었다가는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했다. 머쓱해진 진현풍은 더 이상 아무
런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저만큼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으로 사라지자 사방은 서서히 어둠이 깔려 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깃
배에서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구성지게 들려 왔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길 양쪽으로 갈라져서 걸었다.
이때 멀리서부터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돌아보니 한 무리의 강호인들이 말을 몰고 달려오
는 중이었다. 말들이 흑풍쌍살 곁을 지나 앞으로 치달렸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길 옆으로 옴을 피했다. 두 사람은 영락없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았
다.
"가뜩이나 부아가 치밀어 줄겠는데 저런 놈들까지!"
진현풍이 멀어져 가는 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을 들은 강호인들이 말을 세웠다. 그들은 진현풍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네 놈은 누구인데 감히 욕을 하느냐? 죽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놈이로구나!"
"좋다, 어디 한번 해보자!"
그중 열 명 정도는 진현풍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금도채 채주 금도 임청과 그의 수하들
이었고 나머지 다섯 명은 생면부지였다.
임청도 진현풍을 알아보고는 놀라는 기색이었다. 한편으론 절정공자와 싸우던 자에기에 진
현풍을 잡아가면 절정공자가 좋아 할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현풍이 흑
풍쌍살의 한 사람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
"하하하, 누구신가 했더니 금도채 채준님이시군요."
진현풍이 속마음을 숨기고는 좋은 말로 인사를 건넸다.
임청이 대답하기 전에 수하 하나가 큰소리를 지르며 말을 몰아왔다. 임청의 신임을 받고 있
는 맹장 왕호(汪虎)였다.
몸이 거대하고 힘이 꽤나 있어 보이는 자였다. 그가 타고 있는 말도 다른 사람들보다 컸다.
그의 말은 별호가 코끼리였다. 왕호가 고삐를 잡아채자 코끼리가 앞발을 높이 들며 진현풍
을 깔아 뭉개려고 했다.
흑풍쌍살은 내공심법(內功心法)에 있어서 그다지 익숙한 편이 아니었다. <구음진경> 하반부
를 읽어 좀 늘기는 했지만 주로 외문(外門)을 수련했기에 온몸의 횡전(橫鍊)만 늘었을 뿐이
었다. 장을 내쳐 상대방의 내장을 파괴하거나 갈고리 같은 손으로 상대의 머리에 구멍을 내
는 무공은 모두 의문의 무공이었다.
그러나 진현풍은 코끼리라 불리는 그 큰 말이 앞발을 들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가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코끼리의 앞발을 하나씩 잡았다. 왕호까지 타고 있으니 그 말이 내
리누르는 힘은 천 근이 넘을 성싶었다. 웬만한 사람이면 한순간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현풍은 아무렇지도 않게 버티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 저마다 감탄을 했다.
그런데 이때 진현풍이 으슥 하는 소리를 내며 코끼리의 발굽을 힘주어 비틀었다. 코끼리가
중심을 잃고는 한 옆으로 쿵 하고 나자빠졌다. 그러자 왕호가 급히 말에서 뛰어내리며 자세
를 바로 잡았다. 곰같이 미련하게 생긴 자였지만 몸은 생각보다 날쌨다.
왕호가 주먹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진현풍이 슬쩍 피하며 비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왕호가
다시 주먹을 뻗으며 마구잡이로 공격해 왔다. 진현풍은 그럴 때마다 힘들이지 않고 피했다.
왕호가 눈빛이 날카롭게 빛을 뿜었다. 그는 서우망월(犀牛望月)이란 초수를 쓰며 팔꿈치로
진현풍의 옆구리를 쳤다. 진현풍이 얼른 두 손으로 공격을 막고 앞으로 밀어 버렸다. 황호가
넘어질 듯하면서 비틀거리더니 몇 발자국 물러섰다.
왕호가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엔 주먹을 내지르는 동시에 오른발을 전현풍에게 곧장 날렸
다. 왕호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그가 평생 익힌 무공을 총동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진현풍은 공격은 하지 않고 왕호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이렇게 십여 합을 싸우고 나니 진현풍은 왕호가 쓰는 주력을 만만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육합문(大合門)의 무적육 합신권(無敵六合神拳)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는 더 이상
싸울 흥미를 잃었다.
그는 되도록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왕초의 왼쪽 어깨를 겨냥하여 장을 날렸다. 왕호
의 어깨뼈가 일순 으스러져 버렸다.
"악!"
왕호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꺾었다. 두 사내가 말에서 뛰어 내려와 그를 부축했다. 그들이
임청에게 소리쳤다.
"채준님, 왼쪽 어깨가 박살이 났습니다!"
임청이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간단히 장을 날려 상대의 어깨를 부셔 놓다니……! 보통의 힘이 아니다!'
임청은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무공이 대단하시군요. 내 비록 둔재이긴 하나 한번 그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임청인 말에서 내리려고 했다.
이때 처음 보는 다섯 사람 중에 하나가 나서며 그를 만류했다.
"임 채주님, 우리 태호오교(太湖五蛟)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 진현풍과 마주했다.
"이 놈, 넌 머리가 열 개라도 되느냐? 감히 금도채 호걸들에게 도전을 해!"
"넌 대체 누구나!"
진현풍이 되물었다. 그러자 상대가 앙천대소를 하였다.
"분명 넌 타관에서 흘러 들어온 놈이렷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모를 리 있느냐? 이 태호
삼백 리 주위에서 우리 태호오교를 모르는 놈이 없다. 넌 오늘 나 낭리교(浪里蛟) 주지청(周
志靑)이 어떤 인물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진현풍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몸은 가는 편이지만 왕호보다 내공이
센 자였다. 진현풍이 얼른 몸을 굴려 피했다.
흑풍쌍살도 이 태호 지역에 유명한 수적(水賊)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두
목들이 바로 태호오교인데, 그들은 낭리교 주지청, 농조(弄潮蛟) 서구광(徐九光), 번파교(飜
波蛟) 오비용(吳飛龍), 수상교(水上蛟) 하아모(夏阿毛), 교중교(蛟中蛟) 이명도(李明道)들이었
다.
자기가 내지른 주먹이 허탕을 치자 낭리교 주지청은 앞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교
미반법(蛟尾反法)의 초수로 진현풍을 쳤다. 그것은 일종의 뒷발질이었다. 이 초수는 상대방
이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행해지므로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누
구냐 하는 것이었다.
진현풍은 두 발을 굴려 솟아올랐다. 순간 왼손을 휘둘러 주지 청의 왼발을 거머쥐었다. 그런
다음 왼손을 뒤로 밀었다가 앞으로 획 잡아당겼다. 주지청은 옴쭉달싹 못한 채 그대로 넘어
지고 말았다.
그러나 주지청은 경공도 능숙한 편이었다. 그는 넘어지면서 두 손으로 재빨리 땅을 짚고 일
어섰다.
약이 바싹 오른 주지청이 다시 진현풍에게로 돌진해 왔다. 진현풍이 한차례 냉소를 보이더
니 슬쩍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어쿠!"
이번엔 어찌나 세게 넘어졌는지 주지청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진현풍은 그를 아
예 발로 밟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농조교 서구광과 번파교 오비용이 달려왔다. 그들은 석자 길이의 쌍갈래 고기 작살
로 진현풍의 목과 등 그리고 머리를 각각 겨냥했다. 그들은 각자 고기 작살을 두개씩 들고
있었다.
진현풍이 옆으로 뛰어가며 그 작살 네 개를 피했다. 주지청이 이때 벌떡 일어나더니 작살
한 쌍을 들고 또 달려들었다. 주지청과 서구광 그리고 오비용이 진현풍을 에워쌌다.
그들은 진현풍을 가운데 두고 사방에서 작살을 퍼부었다. 진현풍은 그럴 때마다 교묘하게
작살을 피했다.
다시 작살 하나가 진현풍에게로 날아들었다. 살짝 고개를 젖혀 피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맞은편 사내가 작살에 꽂힐 뻔했다.
세 사람의 초수를 알게 되자 진현풍이 서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진현풍은 오비용의 작살
대를 겨냥해 장을 뻗었다. 오비용은 그만 손이 감전이라도 된 듯 심하게 떨었고 그의 작살
은 두어 장 밖으로 멀리 날아갔다.
진현풍은 또 장을 써 제국광의 작살 가나와 주지청의 작살을 멀리 날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세 사람은 작살을 하나밖에는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작살 한 쌍을 쓰는 것에 습관이 돼 버
린 그들 로서는 영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상교 하아모와 교중교 이명도가 아우성을 치며 합세했다. 이 틈을 이용해 나머지 세 사람
이 작살을 다시 집어들었다. 다섯은 다시 작살 열 개를 만들어 진현풍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진현풍의 몸에 구멍 백 개라도 내버릴 듯한 기세였다.
혼자서 다섯을 상대하는 진현풍은 처음과는 달리 점점 힘이 들었다. 그는 싸우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들판을 이리저리 돌며 경공으로 다섯을 흩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보
이면 장을 뿌렸다.
이렇게 반나절 가깝게 싸움을 벌이고 나니 태호오교는 진현풍의 장에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했다. 또한 팔다리를 다친 자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
았다. 금도채 호한들 앞께서 체면이 깎일까 봐 그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진현풍의 절기를 본 임청은 상황이 위급함을 느꼈다. 그가 말에서 내려 금도를 쥐었다. 그는
진현풍과 태호오교 사이로 뛰어 들어 금도를 내리쳤다. 진현풍은 번개같이 그 칼을 피했다.
잠시 공격을 멈춘 임청이 태호오교에게 물었다.
"저자는 절정공자의 적이오 무공이 대단한 놈이니 어서 해치웁시다."
진현풍에게 애를 먹고 있던 태호모교들은 물론 그 말에 반대 할 리가 없었다.
"그럽시다. 놈을 해치우고 어서 객점으로 갑시다."
주지청이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임청이 가세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태호오교도 기운이 펄펄 나는 듯했다. 임청은 금도 일백
영팔식을 휘두르며 명렬히 공격했다. 태호오교의 작살 열 대도 진현풍의 전후좌우에서 틈을
엿보았다.
진현풍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는 독룡금편을 꺼내 사용했지만 상대가 모두 병장기를 들
고 있기에 큰 효력을 보지는 못했다.
다급해진 진현풍이 매초풍을 힐끗 돌아보았다.
'사매는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매초풍은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진현풍은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원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도와주지 않겠다는 표정
이 매초풍 얼굴에 역력했던 것이다.
진현풍은 궁지에 몰려 식은땀을 흘렸다. 금도채 무리들의 환성 소리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사매!"
급기야 진현풍이 매초풍을 불렀다.
"왜요?"
그녀는 뻔히 사정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순간 임청의 금도에 진현풍은 옷자락을 베이고 말았다.
"빨리 나를 좀 구해 줘!"
진현풍이 체면이고 뭐고 팽개치고 다시 외쳤다.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매초풍은 몸을 공중으로 높이 띄웠다. 갈고리처럼 만든 손으로 수
상교 하아모와 교중교 이명도의 뒷덜미를 노렸다.
하아모와 이명도는 강적이 뒤에서 기습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른 돌아섰다. 두 사람은
돌아서며 동시에 작살로 매초풍을 찔렀다. 매초풍이 손으로 작살을 거머쥐고는 힘껏 잡아당
겼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그들은 작살을 빼앗기고 말았다.
매초풍은 그 작살을 주지청과 서구광을 향해 던졌다. 이와 동시에 발길을 날려 오비용의 뒤
허리를 걷어찼다.
매보다 빠른 매초풍의 동작에 임청은 다시금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어디서 저런 사내보다 더 강한 여인이 나타났지?'
주지청자 서구광은 날아오는 작살을 자기들 작살로 막아냈다. 그러나 손아귀가 얼얼하여 하
마터면 작살을 놓칠 뻔했다.
오비용은 뒤에서 나는 바람 소리에 옆으로 넘어뜨렸다. 다행히 매초풍의 발길을 피하긴 했
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양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그의 면상을 그어대려
고 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서 달빛만 교교히 비쳤다. 낯색이 횐 매초풍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두 눈
을 부릅떴다. 매의 발처럼 구부러진 그녀의 양손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오비용이 기겁을 하며 작살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이르렀다.
"저건 마녀다!"
이때를 이용해 진현풍이 그 긴 독룡금편을 내리쳤다. 독룡금편이 서구광의 작살을 때리면서
그 끝이 임청의 앞가슴을 후벼팠다. 임청의 옷 앞자락이 부욱 찢어지면서 상처가 생겼다. 그
상처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놀란 임청이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고함을 질렀다.
"후퇴하랏!"
태호오교도 허둥지둥 말에 올라 임청을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금도채의 다른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흑풍쌍살은 뒤쫓아가서 몇을 죽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들은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두 사람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서로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승리의 쾌감이 피어
올라 그동안 맺혔던 불만 덩어리가 일시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진현풍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매가 날 구해 주지 않았다면 오늘이 바로 내 제삿날이 되었을 거야."
매초풍이 눈을 가볍게 흡뜨며 웃었다.
"구경만 하려다가 청산과부가 되기 싫어 그랬어요. 그러니 오해 마세요."
진현풍도 따라 웃다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사매는 정말 아름다워. 달빛 아래서 보니 정녕 선녀 같군 그래."
그리고 그녀의 얼굴과 목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진현풍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봉긋한 젖가
슴을 더듬고 있었다.
"싸움을 하느라 온몸이 땀에 절었군."
그 말에 매초풍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자 진현풍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대는 땀냄새도 향기로워."
"아무리 여인이지만 땀냄새가 그럴까?"
매초풍이 살짝 진현풍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어딜 가려고?"
"난 몸을 좀 씻어야겠어요. 따라오면 안 돼요."
매초풍이 깔깔 웃으며 뛰어갔다.
진현풍은 갑자기 허전함을 느꼈다. 순간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가 목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매초풍은 한적한 곳을 찾고 있었다.
주변에 관목들과 갈대가 가득 피어 있는 호숫가에 그녀는 발길을 멈추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매초풍은 속옷만을 걸친 채 물에 들어갔다. 시원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그녀는 젖가슴과 아랫도리를 감싼 천마저 벗어 기슭으로 던져 버렸다. 알몸으로 헤엄을 치
며 그녀는 마음껏 피로를 풀었다. 오랜만에 누려 보는 평온한 기분이었다. 매초풍은 소녀로
돌아가 물장구를 치며 늘기도 했다.
문득 갈대 숲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아 그녀는 얼른 물 속으로 몸을 감했다. 그녀는 몹
시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그녀가 다시 살며시 머리를 내놓고는 준위를 살폈다. 분명 치사한
사내 놈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녀는 그 놈이 눈에 띄면 당장 장을 날려 죽여 버리겠다고 생
각했다.
이때 갈대 숲이 후드득 떨리더니 시커먼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다른 사람이면 몰랐겠지만
눈이 밝은 그녀는 그것이 물오리라는 것을 한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긴장을 풀며 피식
웃음을 날 렸다.
물오리에게 놀란 자신을 꾸짖으며 그녀는 다시 유유히 헤엄을 쳤다. 한참 물 속에서 놀던
매초풍이 얕은 곳으로 걸어 나왔다. 밝은 달빛에 드러난 자신의 알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
다. 그리고 희고 보드라운 피부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네가 남들이 말하는 마녀 철시란 말이냐? 너는 이렇듯 아름답지만 납들은 너를 독사보다
더 사악한 존재로 알고 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뿐이지. 어떻게 해서 너
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마녀가 되었단 말이냐?"
그녀는 자신의 몸매에 스스로 도취되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떨어버리려는 듯 머리를 들고 밝
은 달과 가물거리는 별을 바라보았다. 매초풍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달과 별은 나를 좋아하고 있겠지. 그래서 저렇게 나를 보고 웃는 거야. 내가 사람을 죽이는
건 무공을 연마하여 강호에 이름을 날리려고 그러는 거다. 만약 내가 무공이 약하다면 사람
들은 나를 업신여길 게 아닌가?"
이때 뒤에 있는 관목 숲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가 황급히 물 속으로 뛰어들며 소
리쳤다.
"누구니."
진현풍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매는 정말 아름다워……!"
진현풍은 숲 속에서 이제까지 매초풍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은 잠시 빠졌던 상
념이 깨지는 바람에 발끈 화가 났다.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보지 말라고 했더니 왜 왔어요?"
그러자 진현풍의 표정이 어둡게 굳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너무했다 싶은지 매초풍은 서둘러 기슭으로 올라와 옷을 입고 는 진현풍을 찾았다.
"내 말에 화났어요?"
진현풍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둠을 틈타 두 사람은 경공을 부리며 날아갔다. 눈앞에 등
불빛이 반짝거렸다. 제법 번화한 작은 움이었다.
두 사람은 주루 한곳을 찾아 들어갔다. 누 위에 올라 구석진 자리를 차지한 흑풍쌍살은 술
과 안주를 청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라 피곤하기도 하고 몹시 시장했다. 그들은 날라온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들 곁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무림의 동정을 떠드느라 왁자지껄하였다. 그들
은 천하에 모르는 일이 없는 듯 싶었다. 흑풍쌍살은 그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았다.
얼마 후 흑풍쌍살은 문득 두 탁자 건너 창문가에 있는 두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자기네 이
름을 들먹이는 것을 들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그들은 술을 마시며 연신 한담을 나누고 있
었다.
그중 공자건(公子巾)을 쓰고 몸에는 회색 도포를 걸친 중년의 서생이 말했다.
"글쎄 흑풍쌍살이 태호에 왔다고 하더라구. 뿐만 아니라 태호서안 소요관에 있는 소요공자
를 특별히 찾아가 만나기 까지 했다더군."
흑풍쌍살에게 등을 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등이 넓고 목소리가
우렁찬 것이 거구인 듯싶었다.
"흑풍쌍살이 왜 악처후를 찾아갔을까? 악처후는 기껏해야 계집질이나 하는 재주밖에는 없는
데……."
거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년 서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뿐인지 아나? 두 사람은 악처후에게 젊고 예쁜 소녀까지 바쳤다고 하더군."
"히히히, 아첨을 하는 걸 보니 악처후에게 무슨 이득을 보려는 모양이군."
"글쎄 그 점이 수상하다 이거야. 흑풍쌍살은 남에게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위인들인데
……."
그러면서 서생이 부채를 펼쳤다. 보통의 부채가 아니었다. 말을 하는 가운데 앞쪽의 거인이
그를 '하 공자'라 호칭하는 것 같았다.
매초풍이 그 소리를 듣고는 눈동자를 매섭게 굴렸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강호에서 일컫는 철선서생(鐵扇書生) 하종(何從)이란 말인가?'
그녀의 추측이 옳았다. 그 사람은 바로 하종이었다. 어려서 유명한 스승을 모시게 되어 '삼
십육로철선점혈(三十六路鐵點穴)'이라는 절기를 배웠으며 경공도 뛰어났다. 그래서 무림에서
그를 얕잡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종이 말했다.
"사흘 후 해검계(解劍溪)에서 무공을 겨를 때 악처후도 무슨 이득을 찾아 뛰어들지도 모르
지."
"이득이라니, 천 년 묵은 산삼 말이오?"
"쉿!"
하종이 급히 거한의 입을 막았다. 그리곤 주위를 한 번 살폈다. 흑풍쌍살이 시선을 피해 얼
른 고개를 숙였다. 하종이 다시 소곤거렸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그렇지 않으면 시끄러운 일이 생긴다."
거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흑풍쌍살이 왜 그렇게 악처후에게 아첨을 했을까?"
흑풍쌍살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렸다. 당장 그 놈의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
다.
하종이 입을 열었다.
"철시와 동시가 어떤 인물이라고 악처후에게 아첨을 하겠어? 악처후가 오히려 그들에게 아
첨을 하면 했지."
흑풍쌍살은 그 말에는 귀가 번쩍 뜨여 당장 달려가 술이라도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흑풍쌍살이 이번에 미녀까지 바친 걸 봐서는 분명 무슨 연유가 있긴 있는 것 같
아."
"연유?"
거한이 몸을 바짝 앞으로 가져가며 되물었다.
"악처후는 아주 수단이 좋은 풍류객이지. 그래서 이번에 또 성이 엽씨라는 오혈궁의 여인을
흘려냈거든. 그러니 그 처녀에게 해검계에서 무공을 겨루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냈을 거야."
"오, 알겠다. 그 무공을 겨루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내려고 흑풍쌍살이 미인을 악처후에게 바
쳤다 이거지?"
그런데 이번에는 흑풍쌍살 바로 곁에 있는 사내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난 오혈궁 궁주가 이긴다고 봐!"
"아냐, 난 탁운백이 이겨!"
"나도 오혈궁 궁주에게 건다!"
"절정공자의 절정검이 어떤지나 알고 그런 소리를 하라구!"
그러자 뚱뚱보가 나서며 그들을 뜯어말렸다.
"자 이렇게 떠들지만 말고 내기를 걸려거든 정말로 걸라구. 사흘 후면 누가 이기든 결판이
날 거니까. 그때 가서 내기에 지는 사람들은 절대 생떼를 써서는 안 된다구."
"모두 이 고장에서 일하는 태호오교네 사람들인데 생떼를 왜 부리겠어. 그러면 개자식이지."
누군가 그런 소리를 하며 크게 웃었다.
창가쪽에 앉았던 거한이 놀라며 하종에게 속삭였다.
"이거 이상하네. 해검계에서 무공을 겨루는 일을 저 사람들도 다 알고 있잖아?"
하종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 괴이하군. 누가 이 비밀을 누설했을까?"
내기를 하는 사내들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뚱뚱보가 계산해 보니 오혈궁 궁주가 이긴다고
한 사람이 여섯이고 탁운백 편은 넷이었다.
그런데 이때 칼을 찬 사내 하나가 검을 등에 멘 사내와 함께 누에 올라왔다. 그들도 사내들
이 떠드는 소리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이봐 황씨, 우리도 한번 낄까?"
칼을 찬 사내가 검을 멘 사내에게 말했다. 검을 멘 사내가 웃음을 띄며 말했다.
"전이(錢二), 그대도 손이 근질거리는 모양이군."
두 사람이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내기를 하시오? 우리도 끼면 안 되겠소?"
진현풍과 매초풍이 살펴보니 그 황씨와 전이는 모두 금도채 사람들이었다. 이 읍에 묵었다
가 심심해서 나온 듯했다.
"이건 우리끼리 하는 내깁니다. 사흘 후에야 이기고 지고가 판가름나지요. 같이 하시겠소?"
뚱뚱보의 말에 전이가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여긴 태호오교 지역인데다가 우리 형제는 태호오교 나리의 객인들이오."
"그럼 두 분은……?"
"금도채 사람들이오."
뚱뚱보가 반색을 했다.
"아이구 이거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한집안 사람이었군요 우리도 모두 태호오교 나리들의
수하입지요. 우린 지금 묘상과 탁운백 중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고 있던 중입니다."
"그래 어느 쪽이 더 많소?"
전이가 물었다.
"오혈궁 궁주가 이긴다는 사람이 여섯이고 절정공자 쪽이 넷 입니다."
"돈은 얼마씩 걸고 하는 겁니까?"
"한 사람이 은 다섯 냥입죠."
전이가 품에서 열 냥짜리 은괘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 두 사람은 절정공자 쪽이오."
"이렇게 되면 반반씩이 되는군요. 나도 탁운백 절정공자 편이지요."
이 순간 코방귀를 뀌는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모두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
았다.
층계로 올라오는 난간 옆에 있는 작은 탁자에서였다. 거기에 한 청년 하나가 붉은 장삼을
걸치고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청년의 외모는 깔끔하고 여인처럼 아주 곱상했다.
뚱뚱보가 투덜거렸다.
"젊은 사람이 그게 무슨 버릇인가?"
곱상한 청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술잔만 기울였다. 그의 앞에는 꽤나 비싼 술과 요리들
이 놓여져 있었다.
도대체 어느 집 자제인지 매초풍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청년의 외모에서 풍기는 고귀한 기
풍이 그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하지만 눈길만은 어딘가 싸늘하고 잔인함이 묻어 있는 듯
했다.
그때 누 아래서 심부름꾼이 손님을 맞이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서 오세요. 누로 올라가십시오."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 이어 나타난 사람은 어여쁜 소녀였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
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 얘기에 정신이 없어 미처 그 소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매초풍만
이 그녀의 출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란꽃의 화려함이나 수선화의 청수함이 아니라 한 떨기 백합꽃 같은 담백한 아름다움을 지
닌 소녀였다. 소녀는 새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색은 결코 수수하지가 않았다. 다른 소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허리에 유엽도(柳葉刀)를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 안의 사람들이 소녀를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한눈을 팔지 않았
다. 그녀는 누 안을 한 번 둘러보다가 문득 층계 곁에 있는 곱상한 청년에게서 시선이 멈추
었다.
그녀가 갑자기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누 아래로 다시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어느
새 날아왔는지 그 청년이 소리 없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여기에 있죠?"
소녀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기다렸지."
곱상한 청년이 간단명료하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잠깐 사이를 둔 다음 매우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소요관을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하는데 그대의 경공으로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을 거라 여
겼지. 지치고 시장도 하니 이곳으로 올 거라 예상했던 거지."
소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서 여기서 날 기다렸다는 건가요?"
"그렇지."
"남을 뒤쫓는 재간은 당신을 따를 자가 없을 거예요."
"엽 사매, 날 어떻게 불러야 한다는 걸 잊었나?"
"사형……, 죄송해요."
소녀가 고개를 힘없이 숙였다. 청년이 빙그레 웃었다.
"자, 앉아요."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소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날 데리러 왔으니 어서 가요."
소녀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청년은 그녀를 다시 앉혔다.
"왜 이리 급하지. 술도 아직 남았는데."
그는 술잔에 술을 부어 혼자 마시면서 연신 층계를 주시했다. 소녀는 무슨 걱정이 있는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밤이 어두웠는데 어서 가요. 객점이라도 들어가 숙소를 마련해야지요."
"잠자리는 걱정 마오. 내가 이미 정해 놨소. 이제부터는 아무런 걱정 말고 앉아 있기만 하라
구."
청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소작이었다.
"왜 이러는 거죠? 무슨 권리로 나에게 명령을 하는 거예요?"
"궁주님의 명이오 죽은 시체라도 좋으니 꼭 사매를 잡아오라는 명이었소."
청년이 층계 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사매의 목숨이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아시오!"
그 말에 소녀는 움찔했다.
뒤늦게 그들을 발견하고 지켜보던 하종과 거한은 소녀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청년이
궁주니 뭐니 하는 말을 떠드는 것을 듣고는 오혈궁 사람들임을 짐작했다.
거한이 목소리를 낮추며 하종에게 말을 건넸다.
"저 소저는 소요공자 악처후에게 흘린 바로 그 엽……."
"바로 엽청청(葉靑靑)이지!"
곱상한 청년이 말을 가로챘다. 청년은 두 사람이 나누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거
한이 벌떡 일어서며 노려보는 청년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종이 얼른 부채를 펼치며 그를
막았다. 거한에게 가만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녀도 연신 입술을 깨물며 안타깝게 앉아 있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매우 흐뭇했다. 악처후가 오혈궁 소녀를 흘려 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흥
미로운 일이었다. 여소교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런 사실을 알면 마음이 어떨까? 매초풍은 상
상만으로도 고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곧 등에 숙동간(熟銅 )을 멘 사내가 올라왔다. 그를
본 소녀가 황급히 한쪽으로 돌아앉으며 얼굴을 감추려고 했다.
"왜 그래?"
청년이 소녀를 바로 앉히려고 애를 썼다.
숙동간을 진 사내가 소녀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사내는 소녀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소인 장이가 인사올립니다."
"왜 이러세요? 잘못 아셨어요. 난 모르는 사람이에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녀가 외면했다.
장이는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소인은 아가씨를 소요관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고 왔는뎁쇼.
아가씨를 모시지 못하면 전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요."
청년이 받아쳤다.
"소요공자가 우리 오혈궁을 우습게 보고 있군. 기껏 이런 노복 하나만을 보냈단 말인가?"
청년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