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림사 제 21장 독고황(獨孤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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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으리!"
매군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미처 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무영종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영종은 담담히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매군. 당신이 북단(北檀)의 흑룡단주(黑龍檀主) 위전풍의 처제였
다니 정말 뜻밖이군."
그 말에 매군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녀는 뒷걸음질치며 부르짖듯
외쳤다.
"다... 당신은 모두... 보았군요?"
문득 매군은 자신이 알몸임을 의식한 듯 수치감에 몸을 웅크렸다.
무영종은 그녀에게서 돌아서며 미소 지었다.
"염려하지 않아도 좋소.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테니."
그의 말투는 어느새 변해 있었다. 매군이 위풍전과 관계가 있는
이상 비녀처럼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매군은 안색이 이전과는 다르게 창백하게 변하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챙그랑!
그녀의 손에 있던 비수가 그 바람에 바닥에 떨어졌다. 무영종은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왜 그러시오?"
"도... 독(毒)이......."
"독?"
매군의 얼굴에 검푸른 기운이 번지는 것과 함께 그는 그녀의 동공
이 급격히 응축되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매군은 고통스러운 듯이 이를 악물었다.
"만묘선랑은... 저에게... 독을...... 지금 첫 발작이......."
무영종은 가산의 정자에서 만묘선랑 장염하가 환약을 그녀에게 복
용시키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마음이 침중해져 말을 잊고 말았
다. 매군이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 나으리, 소녀에게 온정을......."
매군의 안색은 차라리 처절해졌다. 그녀는 호소하듯 무영종을 올
려보며 말했다.
"저... 에게도 어느 여인 못지 않게 자존심이 있어요. 그러나 그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언니가......."
무영종은 그만 갈등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매군의 두 눈이 절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만약... 오늘 밤... 당신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해약을 얻지
못해 저는... 날이 새기 전에 죽고... 말아요."
이러는 동안 차츰 매군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절혼칠독
산의 첫 발작이 지나간 것으로써 그녀의 고통스런 얼굴은 차츰 평
온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무영종의 얼굴은 내내 무표정했다. 그는 적어도 겉으로 보
기에는 마치 매군의 애원을 귓전으로 흘리는 듯한 인상이었다. 마
침내 매군은 그에게서 절망감을 느꼈다.
"아아, 결국 안 되겠군요."
매군은 탄식과 함께 온통 쓸쓸하고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날이 새려면 앞으로 두 시진. 나으리께 더이상 강요하진 않
겠어요."
매군은 몸을 돌리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언니, 저도 더이상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제 만묘선랑을 찾아가
그녀를 죽이고 해약을 찾는 수밖에. 그리고 그것이 실패한다면 죽
는 수밖에 도리가 없군요.'
한편 무영종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었다.
'위형. 당신은 나에게... 너무도 큰 짐을 지우는구려.'
매군은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매군."
무영종의 음성이 그녀를 움찔하게 했으나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
은 채 침착하게 물었다.
"또 무슨 일인가요? 나으리."
무영종의 부드럽고 다감한 음성이 들렸다.
"매군. 두 시진밖에 안 남은 시간이라면 헛되이 보낼 수 없지 않
겠소?"
매군의 몸이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
다. 그녀의 눈물에 젖은 두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
"나으리... 그 뜻은."
무영종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대같이 아름답고 착한 소녀가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소."
"아!"
매군, 그녀는 그 순간 보았다.
거대한 산이 자신을 포용하려는 것을.
그토록 험하고 장중하여 영원히 오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산
이 양 손을 활짝 벌리고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을.
"나... 나으리!"
매군은 그 산을 향해 작은 새처럼 몸을 날렸다.
"흐흐흑!"
그녀의 참고 참았던 설움이 진한 흐느낌이 되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매군은 울었다. 마음껏.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크나큰 기쁨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당장 내일의 죽음을 면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한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언니를 살릴 수 있게 되어서만도 아니었
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꿈에도 염원하던 그런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
었다.
무영종은 매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가슴 옷
이 흥건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매군의 눈물이 그의 옷섶을 흠뻑
적신 것이었다.
"매군."
그는 계속 흐느낌을 그치지 않는 그녀를 번쩍 안더니 방 한 쪽의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침상에 곱게 매군을 눕히고는 신중
한 손길로 그녀의 몸에서 가볍게 옷자락을 거두어내고 있었다.
옷은 쉽게 벗겨지고 매군은 다시 알몸이 되었다.
나신(裸身). 그것은 완벽한 예술품으로 솟을 곳은 적당히 솟아오
르고, 평평한 곳은 알맞게 기름진 채 고운 선을 이루었으며 꺼질
곳은 미묘하게 꺼져 있었다.
무영종은 그러한 매군의 나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런 잡욕
도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한편 매군은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그녀는 실상 스스럼없이 그의 앞에서 여러 번 옷을 벗었다. 그러
나 지금의 그녀는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확확 달아
올랐다. 그녀는 비록 눈을 감고 있었으나 무영종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뜨겁게 몸이 타오르는 듯했다.
무영종은 그녀의 나신을 한동안 내려다 보다가 자신도 옷을 벗었
다. 그리고 침상에 올랐다. 아니, 매군의 육체 위에 자신의 육체
를 실었다.
뜨겁고 탄력있는 젊은 두 육체는 마침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
되었다.
"아아!"
매군의 입에서 희열인지 오열인지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매군."
무영종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육체의 한 부분이 매군의
소중한 부분과 뜨겁게 결합되었다.
두 남녀의 신음은 점차 고조되었다. 정점을 향하여.
침상은 후끈한 열기에 사로잡혔다. 뜨겁게 달은 두 육체는 본능적
으로 율동을 시작했다. 하늘과 땅이 합일(合一)하여 서로의 존재
를 확인하고 통일시키기 위해 숨가쁜 열기를 계속 토해냈다.
"아... 아흑!"
뜨거운 열풍이었다.
"으음."
무영종과 매군의 동정(童貞)과 순음지체(純陰之體)가 깨지는 순간
이었다.
매군의 아름다운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는 몇 올의 머리칼이 엉겨붙어 있었다. 그녀는 무영종의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에 안겨 뺨을 묻고는 행복감에 잠긴 듯했다.
무영종은 그녀의 육체를 안은 채 손으로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매군이 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나으리께선... 소녀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아시나요?"
"모르오."
매군은 탄식하더니 섬섬옥수로 무영종의 넓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의 원래 이름은 매교랑(梅嬌 )이에요. 그리고 저는 고아였지
요."
매교랑은 고아였다.
그녀는 철이 들기 이전부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학대와 굴
욕을 받으면서 마치 잡초처럼 살아왔다.
그녀는 한 끼의 식사를 걱정해야 했으며 하룻밤의 잠자리를 근심
하며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십 세 때, 그녀는 한 조각의 만두를 훔치려다 객점주인
에게 채 피지도 못한 순결을 무참히 짓밟힐 뻔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그 자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치다 눈보라 속에서 쓰
러지고 말았다. 얼어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그녀는 세상과
하늘을 원망했다.
그때에 극적으로 한 명의 여인을 만났다. 빙혈미인(氷血美人) 고
설한(古雪恨)이라는 냉막한 미녀를.
그런데 빙혈미인은 뜻밖에도 죽어가는 매교랑에게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알고 보니 고설한의 처지도 매교랑과 무척이나
비슷했던 것이었다.
빙혈미인 고설한도 역시 고아출신이었다. 매교랑과 다른 점이 있
다면 고설한은 흑도(黑道)의 무림고수였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매교랑에게 있어 고설한은 그 순간부터 마음의 신(神)이
요,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언니가 되었다. 매교랑은 고설한에
게 새 삶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무공도 익혔던 것이다.
그 후 빙혈미인 고설한은 선풍마서생(旋風魔書生) 위전풍을 만나
게 되었다. 결국 같은 사도 출신의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 혼인
을 했다. 그리고 매교랑은 고설한의 안배로 그녀와 함께 있을 수
가 있었다.
당시 위전풍은 사도제일의 기재로써 이미 삼십 세가 되기 전에 흑
룡단(黑龍檀)을 창설하여 사파의 북무림(北武林)을 장악했다. 북
단은 그의 뛰어난 무공과 탁월한 지혜로 강성해졌다.
그런데 약 오 년쯤 전, 위전풍은 암중(暗中)에 수라궁(修羅宮)이
태동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무공산 천마봉에 거대한 토목공사가 진행됨을 염탐하고 막연
하게나마 불안을 느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북단의 수하 중
뛰어난 자 아홉 명을 골라 은밀하게 수라궁에 침투시켰다.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아는 극비사항으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단 흑룡단이 사도무림을 남맹과 함께 양분한 것도
이와 같은 치밀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 한 가지 불행한 사건이 터졌다.
그의 아내인 빙혈미인 고설한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갑
자기 실종된 것이었다.
위전풍은 그녀를 끔직히 사랑했다. 그는 크게 상심하여 당장 북단
의 삼천 명 고수들을 풀어 전 강호를 이잡듯이 뒤졌으나 고설한의
종적은 바다에 빠진 돌맹이처럼 감감 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한 가지 짐작에 이르렀다.
'수라궁!'
수라궁 밖에 그런 일을 벌일 집단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벌써 삼
년 전 밀파시킨 수라궁의 아홉 수하들에게 은밀히 고설한의 종적
을 알아보도록 밀명을 내렸다.
그 결과 그의 추측은 적중했다. 고설한은 과연 수라궁에 갇혀 있
었던 것이다.
위전풍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으나 그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했
다. 자신의 아내가 아무리 중하다 한들 흑룡단 전체와 맞바꿀 수
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부심 했다.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매교랑이 나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녀는 그에게 간청해 스스로
수라궁에 침투하겠노라고 했으며 위전풍은 일단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매교랑의 결심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한몸을
희생시켜서라도 기필코 일생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희망을 불러
일으켜준 고설한을 구출하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내 위전풍은 탄식하며 승낙했다.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위전풍의 뛰어난 안배로 그녀는 수라궁에
잡입하여 만묘각(萬妙閣) 소속이 되었다. 어렵지 않게 만묘칠십이
미랑대 속에 일원이 될 수가 있었다.
매교랑의 활동은 그때부터 은밀히 시작되었다. 수라궁에 파견된
아홉의 흑룡단 고수들에게 자신과 함께 십비(十秘)라는 명칭을 붙
인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구비(九秘)의 인원을 조종하는 일비, 즉 대비(大秘)로서
고설한의 행적을 찾았다. 그리고 최근에야 그녀가 있는 곳을 어렴
풋이 알아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녀는 자부신군 무영종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각
주의 명령과 함께 옥쇄령을 받아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매군의 말은 여기서 끝났다. 무영종은 큰 감명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매군이라는 여인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매군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매군. 이 여인은 잡초와도 같다.'
악착같이 살면서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이를 위해서는 흙탕물
속에 빠지면서까지 갚으려는 여인.
무영종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매군의 턱을 치켜들었다. 매군
의 아름다운 두 뺨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 고인 눈으로 무영종을 응시했으나 곧 부끄러움을 느
낀 듯이 얼굴을 붉히며 두 눈을 감았다.
"매군."
무영종의 입술이 그녀의 감은 눈을 덮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은
뺨을 흘러내려 매군의 작고 붉은 입술을 접했다.
매군의 나신이 바르르 떨었으나 그것은 잠시일 뿐, 그녀의 육체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영종의 손이 그녀의 육봉과 둔부를 애
무했기 때문이었다.
"으음."
무영종의 혀가 자신의 혀를 감자 매군은 온 몸을 비틀며 바짝 그
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무영종은 불타오르는 매군의 육체를 애
무하면서 자신도 역시 거센 욕화의 불길에 타는 것을 느꼈다.
이는 처음 겪는 일로 거센 열풍이 다시 한 차례 침상을 몰아쳤다.
젊고 뜨거운 두 육체는 하나로 연결된 채 우주일순을 지나고 있었
다.
매군은 침상에 걸터 앉아 옷을 입고 있었다. 무영종은 여전히 누
운 채 그녀의 고운 육체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애정의
빛깔이 어려 있었다.
이윽고 매군이 옷을 다 입자 무영종의 눈에 일말의 아쉬움이 스쳤
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는 담담히 물었다.
"매군, 만묘선랑이 그대에게 시킨 것이 무엇이오?"
매군은 돌아앉으며 부드럽게 무영종의 벗은 가슴을 만졌다.
"첫째, 당신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둘째는 이것을
복용시키는 것이에요."
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접지에 싼 흰 가루약을 보였다.
무영종은 의아하여 몸을 일으켰다. 금침이 흘러내려 그의 잘 발달
된 상체가 드러나자 매군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외면하지는 않았다.
무영종은 곧 가루약을 혀 끝에 대보고는 흠칫했다. 그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이, 이것은?'
매군이 급히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 약의 정체를 알아냈나요?"
"아... 아니오, 매군. 나도 잘 모르겠소."
무영종은 가루약을 다시 접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매군, 만묘선랑에게 이렇게 말해 주시오."
"어떻게요."
"자부신군 무영종은 적미천존(赤眉天尊)의 제자라고, 그는 백 년
전 해체되었던 현천교(玄天敎)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있으며,
이곳에 온 이유는 고수들을 포섭하려는 목적이라고 말이오."
매군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새겨 들었다.
"그리고 약은 이미 복용시켰다고 말하시오."
매군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고... 고마워요. 나으리."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그
녀는 돌아서면서 내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산 같으신 분....... 이 매교랑은 단 한 번의 맺어짐으로... 당신
을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당신의 장엄함의 높이에는 더
이상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것인가요? 아... 매교랑, 무슨 짓이냐?
너에게는 할 일이 있고... 또... 저 분에게 너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니 딴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녀의 마음은 끓고 있었다. 비록 사정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에게 십칠 년 간 고이 간직했던 순결을 바치지 않았던가?
여인이라면 누구나 일생 동안 첫 남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매군
도 단순히 이런 경우였을까?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무영종에
게 모든 것을 바쳤다.
바로 그녀가 자신의 과거와 극비사항을 죄다 말한 것이 그 증거였
다. 그녀는 많은 말들을 내심에 묻고 밖으로 사라졌다.
무영종은 매군이 나가자 곧바로 몸을 일으켰는데 그의 안색은 침
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이 가루약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다. 냄새도
맛도 색도 없다. 이것을 만일 모든 군웅들이 복용했다면.......'
급히 옷을 입는 무영종의 머리에는 한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그 자라면 이 가루약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수라궁 전체가 신비스런 분위기의 안개에 덮여 있었다. 아니 수라
궁뿐만 아니라 천마봉(天魔峯)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중천(中天)으로 떠오르려는 태양의 빛조차 안개에 가려 어슴푸레
하기만 했다.
화원(花園).
수라궁 곳곳에 있는 화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지 아름다운 느낌
뿐이었다. 그러나 군웅들은 그 화원들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어렴
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한 포기의 꽃, 풀, 나무까지도 수라궁에서
는 목적 없이 심어진 것이 없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무형중에 불가사의한 진(陣)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는 꽃의 배색까지도 일정한 순서대로 심어져 있었
던 것이다.
수라궁 동쪽에 위치한 한 채의 별원에도 화원이 있었다.
화원은 안개에 싸인 가운데 꽃향기가 심신을 몽롱하게 했다. 그
화원 한 쪽에 한 명의 흑의인이 서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흑의문사였다. 손에는 대조적으로 백색의 섭
선을 쥐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의 준수한 흑삼문사.
그는 선풍마서생(旋風魔書生) 위전풍으로 남맹북단 중 북단 흑룡
단의 단주이자 사도무림에서 손가락 꼽는 고수인 그는 지금 화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위전풍의 준수한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어려 있었다.
그는 꽃을 내려보고 있다가 문득 한 송이의 자전매괴화(紫電梅
花)를 꺾어들었다. 자색과 홍색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꽃이었으
나 위전풍은 꽃송이를 들고 이렇게 반문하고 있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하나 어찌 설한(雪恨)보다 더할 것인가? 꽃의
향기가 짙다지만 어찌 설한의 향기보다 짙을소냐? 꽃이 사랑스럽
지만 설한보다 사랑스럽겠는가?"
위전풍은 들고있던 자전매괴화를 휙 던져 버렸다. 꽃은 일직선으
로 날아가 화원을 두른 담장에 박혔다. 담장은 단단하기 그지 없
는 청석(靑石)을 반듯이 깎아 쌓은 것이었다.
위전풍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설한,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소? 미칠 듯이 그립구려. 설한."
그가 낮으나 절실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의 등 뒤로 한 명의
녹의시비가 나타났다.
그녀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으리, 궁주님께서 찾으시옵니다."
"알겠다."
위전풍의 음성은 담담했다.
언제 그토록 애절하게 중얼거렸냐는 듯 그는 무심히 몸을 돌렸다.
한 커다란 방 안.
태사의가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 한 쪽에는 이미 한 명의 금포를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당당한 체구였다. 다만 그의 얼굴
에는 애석하게도 면사가 드리워져 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
다.
위전풍이 들어오자 금포노인은 대뜸 물었다.
"위단주, 그 동안 생각해 보셨소?"
위전풍은 그를 노려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수라궁주, 당신은 본인을 너무 핍박하는구려."
그렇다면 금포노인이 바로 수라혈신(修羅血神)이란 말인가?
위전풍의 말에 금포노인은 착 가라앉았으면서도 으시시한 음성으
로 말했다.
"핍박이 아니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본좌도 이런 짓을 하지
는 않았을 것이오."
"흐음."
"그만큼 위단주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오."
위전풍은 그 말에 대답치 않고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한은 잘 있소?"
금포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마시오. 귀빈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위전풍은 하나 남은 태사의에 앉더니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다
시금 금포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면사를 통해 시선이 금포노인의 눈빛과 부딪치자 위전풍은
탄식하며 말했다.
"궁주, 당신은 진정 무서운 사람이오."
금포노인은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위전풍은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섬뜩한
광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궁주, 나 위전풍은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오. 천하인을 모두 속일
지라도 이 위모 만은 속일 수 없소. 금선탈각지계(金蟬脫殼之計)
를 교묘하게 쓰긴 했으나 위모를 속이지는 못했소."
그 말에 금포노인은 흠칫했다. 위전풍은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바로 모두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석(石)......"
그의 말을 금포노인이 웃음으로 끊었다.
"헛헛헛! 과연! 이제서야 그 분이 위단주를 왜 그렇게 중시하는지
이유를 알것 같소."
'그 분?'
위전풍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천하를 독패하려는 야심을 품은
수라궁의 궁주인 수라혈신, 그가 그 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이 있단 말인가?
위전풍은 의혹에 싸였다. 그는 지금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수라혈
신의 내력을 알고 있었으나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오히려 미궁에 빠
지는 느낌이었다.
수라혈신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위단주, 잠시만 기다리시오. 위단주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소."
수라혈신은 이내 창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위전풍은 홀로 남은
채 명상에 잠겼다.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수라혈신이 그 분이라고 불러야 할 자
가?'
이때 소리 없이 그의 앞에 인영이 떨어졌다. 아니, 맞은 편 태사의
에 마치 무(無)에서 갑자기 생성된 듯한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위전풍은 크게 놀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경공술을 펼치는 음향도 그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줄곧 눈을 뜨고 있던 자신의 눈 앞에 환영(幻影)
처럼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청년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더욱더 놀랐다.
청년은 전신에 황색의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었으며 가슴에 두
마리의 흑룡이 교차되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늠름한 체격에 나이는 이십 칠팔 세 정도. 게다가 두 눈은 마치
두 개의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빛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물처럼 담담한 눈이었으나 웬지 부신 느낌이 드는 것이었
다.
준수한 용모였을 뿐 아니라 누구든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
는 특이한 기질을 청년은 갖고 있었다.
위전풍은 격동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났다.
"다... 당신은 독고황!"
독고황이라니, 그렇다면 곤룡포의 청년은 바로 지난 날 하란산(賀
蘭山)에서 하후성과 함께 천년고목에 우정의 이름을 새긴 독고황
이란 말인가?
오직 천하에서 그 만이 이런 기질을 갖고 있었다. 곤룡포를 입고
담담히 위전풍을 바라보던 독고황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위형, 산해관(山海關)에서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이 년이 되었
소이다."
위전풍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다.
"다... 당신이 바로?"
독고황은 미안한 듯이 말했다.
"위형, 결코 위형을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없었소이다."
위전풍은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수... 수라궁의 진정한 주모자는 바로 당신이었단 말이오?"
독고황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시인을 의미하는 것이
었다. 위전풍은 마침내 깨달은 듯 말했다.
"그렇군! 내 아내를 납치해간 것도 당신이로군."
독고황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위형,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주시오. 나는 진정으로
위형에게 지기(知己)로써 협조를 구하고 싶은 것이오."
"이럴 수가......!"
"흑룡단을 원하는 것이 아니오. 그 정도 단체라면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단 한 달 정도면 세울 수 있소. 그러나 위형과 같은 인
재는 천하에서 다시 얻을 수 없소."
독고황의 말은 줄곧 담담하여 음성의 높고 낮음이 없이 내내 평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듣는 이에게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매력
과 함께 묘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위전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년 전 눈 내리던 날 산해관(山海關)에서였다.
흑룡단의 산해분타(山海分陀)에 사고가 생겨 그것을 처리하고 돌
아가는 길에 그는 한 객점에서 독고황을 만났다. 그리고 첫 눈에
그는 독고황이 풍기는 마력(魔力)에 가까운 매력에 반해 버렸다.
당시 독고황은 마치 낭인(浪人)처럼 떠돌이 무사의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위전풍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끼고 그와 더불어
한 밤을 지새면서 삼십 병도 넘는 독한 설로주(雪露酒)를 마셨다.
자신의 생각과 이치, 그리고 온갖 얘기를 나누며.
이튿 날 그가 술기운에서 간신히 깨어났을 때 이미 독고황은 사라
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위전풍의 머리 속에 독고황이란
존재는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를 이 년 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수라궁에서.
위전풍의 안색은 갈등으로 여러 번 변했다. 그는 독고황을 바라보
며 신음하듯 물었다.
"만약... 내가 그대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독고황의 안색이 가볍게 변하는가 싶더니 곧 담담히 말했다.
"위형이 거절한다면 나도 더이상 할 말이 없소. 위형의 부인과 위
형을 이곳에서 보내 드리겠소."
위전풍의 얼굴에 미묘한 빛이 떠올랐다. 그가 이토록 쉽게 말할
줄은 짐작조차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한 독고황의 말은 그를 얼어붙게 만들고 말았다.
"그 이후에 위형과 본인이 만났을 때, 그대 목숨은 내 것이오."
위전풍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등 뒤가 축축이 젖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그 어떤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을 위전풍
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의 상대는 독고황이 아닌가?
수라궁이라는 가공할 단체를 뒤에서 조종하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마력의 소유자, 그가 한 번 뱉은 말이라면 그것은 곧 지옥 염왕의
선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위전풍의 안색은 몇 차례나 변화를 거듭했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
다.
"만약... 그대를 만난 후 또 한 명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 나는
그대에게 넘어 갔을지도 모르오."
독고황의 담담한 두 눈에 언뜻 의혹이 스쳐갔으나 그 인물이 누구
인가는 묻지 않았다. 그것은 천하에서 자신과 비견될 수 있는 자
는 없다는 그의 자부심 때문이었다.
위전풍은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나에게 며칠 간의 여유를 주시오. 최소한 수라궁의 개파대전까지
만이라도."
독고황의 얼굴에 매력 있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잘 생각하셨소, 위형."
그는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발산하며 말했다.
"무림 수천 년 사상 무림을 진정으로 통일한 자는 단 한 명도 없
었소. 그러나 나는 통일할 것이오, 그것도 영원히 말이오."
독고황의 모습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가 앉아 있던 태사의도 텅 비었다. 위전풍은 그 자리에서 화석
처럼 굳어버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또 독고황을 만난 후 다시 만났다
는 한 명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오직 자신 만이 아는
일이었다.
첫댓글 항상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