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영무(影無), 그는…….
어느 새 봄이 무르익고 있다.
감숙(甘肅)의 난주(蘭州) 거리를 따라 거닐다 보면, 멀리 천산(天山)의 웅
자가 푸른 물감을 지천으로 뿌린 듯한 창궁(蒼穹) 아래 백두노옹(白頭老
翁)으로 고집스레 머물러 있는 게 보인다.
난주는 금성(金城)이라고도 한다. 난주는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요충지로
써 상업이 발달된 곳이다. 고대 왕조 시절에는 난주를 둘러싸고 숱한 혈
전이 치루어진 바 있다.
난주성 외곽 지역.
법륭사(法隆寺)로 접어드는 길목은 매화(梅花)에 뒤덮이고 있었다. 바람이
슬쩍 불기라도 하면 매화 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내려, 길은 매화로
뒤덮이게 된다.
법륭사는 난주의 대찰(大刹)로, 인근 천 리 안의 불제자들은 법륭사를 대
본산(大本山)으로 여기고 치성을 들인다.
사막을 건너고자 하는 대상(隊商) 가운데 불제자(佛弟子)라면 법륭사에
들러 길고 위험한 대장정 가운데 위험이 없기를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석
가세존에게 기원하며, 적족(赤足 : 시줏돈)을 듬뿍 맡기는 것이다.
저녁 공과(供課)를 알리는 범종(梵鐘) 소리가 피 뿌린 듯한 황혼의 허공
을 질타한다.
법륭사 뒤뜰.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수행자(修行者)들의 방이 세워져 있는 곳인지라,
다른 곳과는 달리 향화객(香花客)의 발길이 통제되어 있다.
관음보살이 연화를 밟고 비천(飛天)하는 그림이 선방의 벽에 벽화로 남아
있다.
고색창연한 벽화가 문득 인간을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뜨린다.
한 청년, 그는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삼(灰衫)을 걸친 채 벽화를 바라보
고 있었다.
몹시 고독한 눈길이다.
그의 눈에는 삼라만상이 필연적으로 주는 백여덟 가지 번뇌가 그득 침전
(沈澱)되어 있었다.
이제 나이 약관(弱冠)이 갓 넘었을 정도.
저녁 바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할 때마다 나타나는 얼굴 윤곽이
또렷하기 그지없다.
특히 굳강해 보이는 아래턱의 선이 상당히 다부진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그의 전체적인 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해 보였다.
그가 멍한 눈빛으로 벽화만 보고 있을 때.
"영무(影無), 거기 있었는가."
뒤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구레나룻이 아래턱을 휘어 감은 용맹한 용모의 행자승(行者僧)이 그를 향
해 다가서고 있었다.
"자광(慈廣), 무슨 일이지?"
영무라 불린 청년은 신형을 느릿 틀었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숨결이 전혀 없는 밀랍인형이 움직이는 것과 비슷
하다고 자광은 문득 생각한다.
'혼백이 없는 듯한 눈빛이야!'
자광은 청년을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행아(行我)가 낙성했네. 발목뼈가 빠져 버린 것 같네. 자넨, 의술에 정통
한 인물이 아닌가?"
자광은 스물다섯의 행자승이며, 법륭사의 장문인에게 수좌(首佐) 노릇을
하고 있는 비구였다.
영무는 행자승도 아니며 향화객도 아니다. 그는 몹시 기구한 연분으로 법
륭사에 몸담고 있는 고독한 청년이었다.
지난 겨울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난주성을 휩쓸고 있는 날, 그는 피투
성이가 된 채 산사 뒤쪽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열닷새 내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으며, 그 후 이 곳에 머물
러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것은 전혀 밝히지 않았다.
그가 밝힌 것이라면, 자신의 이름이 영무라는 것이었다.
영무라면 그림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던가?
다른 곳이라면 그의 과거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본시 산사라는 곳은 사연이 많은 사람들이 번뇌를 씻기 위해 보
이는 곳인지라, 그의 과거에 대해 캐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무는 하릴없이 밥만 축내는 게 미안한 듯, 금어(金魚 : 사찰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 노릇도 하고, 수행 중 병이 난 사람들에게 침도 놓아 주었
는지라, 승려들은 그가 다재다능한 문사(文士)라 여기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의 의술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특정한 약재가 없어도
고질병을 자유롭게 치료했다.
그는 제멋대로 자라는 잡초(雜草)를 이것저것 골라서 즙을 짜내어 탕을
만들어 고질병을 시원스레 고쳤기에, 벌써 신의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영무는 자신이 신의로 소문나는 게 부담스러운 듯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의술을 펼쳐 보이려 하지 않되, 많은 사람이 그를 믿고 그에게 치료를 의
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날만 해도 그러하다.
행아라고 하는 사미승이 좌선(坐禪) 하던 중 심마(心魔)에 빠져 선방을
헤매다가 오 장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며 발목이 꺾어져 버린 것이다.
행자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자광은 문득 영무 생각을 하고 그를 허
겁지겁 찾아온 것이다.
석실(石室) 안.
영무는 행아의 발목 부분을 잡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탈골되었을 뿐이지, 부러진 건 아니네. 내가 뼈를 맞추어 줄 테니, 아프
더라도 잠시 참게."
"으으… 으으……!"
행아의 얼굴이 구슬땀에 뒤덮인다.
그의 나이 이제 열일곱 살.
사실, 그는 승려가 되기에는 심약한 성격이었다.
그는 정혼녀의 죽음을 감내하지 못하고 허무감에 빠진 나머지 행자승이
되었는 바, 속세 생활에 연민의 정을 끊지 못하고 가끔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행아의 양 팔은 건장한 체격의 승려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행아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공포에 겨워 하고 있었다.
영무는 무정해 보였다.
행아가 피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것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
그는 행아의 발을 힘껏 끌어당겼으며, 행아의 입에서는 단말마의 비명 소
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사지를 뒤틀며 몸부림칠 때.
"참아, 잠시뿐이야."
영무는 단호히 말한 다음에 탈골된 뼈 부위를 정교한 솜씨로 짜맞추었다.
몹시 어려운 접골이었지만, 영무는 간단히 뼈를 맞출 수 있었다.
'대단해!'
자광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마음의 강단이 보통이 아니란 말이야. 행아가 죽겠다는 듯 울부짖는 데
에도 눈 하나 깜짝 않다니?'
자광은 영무를 힐끗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권태감을 일으키는 일에 불과하다는
듯.
'혹 뛰어난 의원으로 살던 가운데,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사람이
아닐까!'
자광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승려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
었다.
주지승은 만허(卍虛)였다.
그는 포단(蒲團) 하나로는 만족치 못하는 인물.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증축하고 길을 닦기 위해 시주를 많이 받아야 한다
고 여기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불심이 대단한 학승(學僧)이라는 것에는 의심을 할 수 없는 인물
로서, 어딘지 모르게 오연한 기질을 지닌 영무가 법륭사에 장기간 머무는
걸 내심 좋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무가 방장실로 접어들자, 합장을 하며 앉으라는 표정을 했다.
영무는 단아한 자세로 앉았다.
방 안에는 향내가 그득하다.
불단 위에서는 향이 흰 머릿결을 풀며 한 치 한 치 죽어 가고 있었다.
"시주의 학식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게다가 의술이 빼어나 벌
써 이백여 명을 치료해 주었다고 들었네."
"미미한 것입니다."
"헛허… 겸손한 성품이 마음에 드네. 노납, 법륭사 주지의 입장으로 시주
같은 인재가 법륭사의 식솔로 머무는 걸 환영하고 있네.
"
주지승은 영무가 떠나는 걸 걱정하고 있었다.
"……."
"그러니 달리 갈 데가 없다면, 떠나지 말게. 바란다면, 매달 얼마 간의 은
자를……."
그 때, 이제까지 말이 없던 영무가 입술을 떼었다.
"제가 여기에 머무는 이유는, 갈 곳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영원히 머물러 살 생각은 없습니다. 언제고 가게 된다면 가겠습니
다. 그 때까지 거처만 빌려 주신다면, 의술을 써서 병자를 고치는 일을
보수 없이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헛허… 강직한 성품이로군."
만허선사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영무에게 향차(香茶)를 권했으나, 영무는 사적으로 할 일이 밀렸다
며 차 마시며 담론을 나누는 걸 사절했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밤하늘이다.
강한 바람이 먼지 구름을 날려 보냈는지라, 야공(夜空)이 청정하기 그지
없다.
영무의 거처는 행자들의 숙소와 백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마련되어 있었
다.
그는 창문만 열어 둔 채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게 너무나도 달라졌다.'
그는 유성이 사선(斜線)으로 비행하며 떨어져 내리는걸 물끄러미 바라봤
다.
인간의 목숨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젊었을 때 찬란하게 타오르던 생명의 환희는 속절없이 스러져 버리고, 어
느 순간 덧없이 스러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번뇌는 청년의 상징이 아니라 노년의 상징이다.
청년 시절에는 야망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무는 늘 번뇌에 휘
어 감기고 있었다.
그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번뇌의 깊이는 다른 행자승들이 측량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에게 걸머지워진 업(業)은 대자대비한 석가세존도 풀지 못할 정도로 깊
은 것일지도…….
'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인가?'
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문득 방 안이 한기(寒氣)에 뒤덮였다.
그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지며 방 안 공기가 냉각이 되는 것이다.
'한(恨)을 풀지 못하고 이대로 묻히는 것인가?'
그의 얼굴이 대춧빛으로 물들었다.
직후, 그의 미간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우욱! 기혈(氣血)이 역류(逆流)한다."
그의 낯 빛깔은 자색으로 물들었으며, 입술 사이에서 시뻘건 핏물이 흘러
나왔다.
그는 썩은 집단이 무너지듯 스르르 나뒹굴었으며, 반시진 가량 비지땀을
흘리며 가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낙하할 때 중내상(重內傷)을 입었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가닥가닥 끊
어지고 말았다!'
그는 천 근 바위에 깔린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의원 노릇을 하고 있으되,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중환자였다.
그의 내장은 자리를 바꾸었다가 겨우 제자리를 잡았으되, 경락(經絡)이
새끼줄 얽히듯 뒤틀려 버린 것이었다.
'다시는 무공을 쓰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진다.
문득 맺히는 건 눈물인가?
그의 입가에 매달리는 건, 고졸(古拙)되기 이를 데 없는 미소였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무공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이제까지 배워
온 모든 무공은 나의 원수들이 가르쳐 준 무공. 그 따위 무공은 다시 쓰
지 않으리라. 그래, 나의 허상(虛像)은 새 등에서 떨어지며 죽어 버린 것
이다!'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이 죽어 가고, 그의 가슴 속에서는 번뇌가 잉태되고 있는 것
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새벽에 산사 뒷산에서 샘솟는 약수(藥水)를 마실 때의 기분보다 더한 청
량한 기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영무는 돌을 갈아 만든 호로로 약수를 떠서 메말라 버린 목젖을 축였다.
약수가 목젖을 따라 흘러 뱃속으로 접어들자, 전신이 냉동되는 듯하다.
이 곳은 법륭사의 뒤쪽 산이다. 영무는 매일 이 곳에 와서 산보를 하는
것이다.
'아직도 알아 내지 못했다.'
영무는 뒷짐을 진 채 이 곳 저 곳을 거닐었다.
사찰 경내는 단정히 정돈되어 있지만, 뒷산, 용화봉(龍華峯)에는 자연의
풍취가 그대로이다.
제멋대로 얽히며 자라나는 칡이며, 막 피어나는 야화(野花)들.
모든 풍광이 어지럽기 짝이 없으되, 그 모습이 차라리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대체 누가 날 구할 것인지……?'
영무는 입술을 질겅 씹었다.
그는 백 일 전, 피투성이가 되어 법륭사로 접어들었다.
당시 그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미궁이었다.
누군가 그를 구해 응급조치를 취해 준 다음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목에 그를 눕혀 주어, 지나가던 승려가 그를 구하게끔 했던 것이다.
영무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용화봉을 돌며 자신을 구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신발 아래 이슬이 밟혔다.
이슬은 발목을 넘어 정강이 부분까지 차 올랐다.
옷자락에 이슬이 묻자, 몸에 오한이 일어났다.
그는 추위를 느끼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한겨울에도 홑옷 한 벌로 지내던 내가, 봄날 이슬에 추위를 느낄 정도로
허약해지다니…….'
그는 심한 좌절감에 휘어 감겼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본시 허약한 체질이라 여기고 있으나, 전혀 달랐다.
그는 강철보다 단단한 근골을 지니고 있으며, 수화불침지신(水火不侵之
身)에 도달했던 인물.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내공이 흩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풀잎을 밟으며 덤불 사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늘도 만나지 못하는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의 눈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적개심
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은둔해 버려야 한단 말인가?'
이마 위에 식은 땀방울이 맺혔다.
'나의 적들이 중원천하(中原天下)를 양분한 채 나의 어머니를 유린하며
활보하고 있거늘, 난 변황 구석진 곳에서 의원 노릇이나 하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의 눈알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바로 그 때, 쇠북 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끌끌… 미련한 중생(衆生)이로다. 제 목숨이 바람에 휘말려 버린 한 점
티끌만도 못하게 변화되었거늘, 가슴 속의 살검(殺劍)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아……!"
영무의 입이 딸 벌어졌다.
근처에 사람이 하나도 없거늘, 대체 누가 어디에서 말을 건네는 것인가?
'이것은 천리회성술(千里廻聲術)이다. 먼 거리를 격하여 목소리를 전하는
…….'
영무의 입술이 바싹 타 들어갔다.
'놀라운 일이다.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살기(殺氣)를 느끼다니? 이런 곳
에 천기를 읽는 기인이 있단 말인가? 혹시, 그가 나를 구했단 말인가?'
그는 여러 가지 번뇌에 휘말려들었다.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영무는 말한 사람을 찾아 한 시진 넘게 숲을 뒤졌으나 발자국 소리에 놀
라 덤불 속으로 튀어 들어가는 들쥐 몇 마리를 발견했을 뿐, 인기척도 찾
지 못했다.
그 날 밤, 영무는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끈 채 침상 위에서 결가부좌를 틀
었다.
그는 정종토납공(正宗吐納功)을 천천히 운용하기 시작했다.
'진기가 산산이 흩트러졌다. 진기를 되살리지 못하는 한, 내상을 회복하
지 못한다. 진기를 일 성 가량만 되찾는다 하더라도, 요상대법(療傷大法)
을 써서 내공을 회복할 수 있다.'
그는 불가정종(佛家正宗)의 토납좌공(吐納坐功)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
는 구결을 되풀이 외우며 삼백육십오 개 혈도로 진기를 모으고자 했다.
사지백해(四肢百骸)에 산산이 흩트러진 진기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순간부
터 격렬한 고통이 일어났다.
전신이 바늘에 찔리는 듯, 온몸에 화전(火箭)이 퍼부어 대는 듯, 살 속까
지 열기가 느끼어진다.
구슬 땀방울이 점점 더 커졌다.
극심한 고통이 일어났으되, 그는 중단하지 않고 운기행공을 거듭해 갔다.
어느 한순간, 그는 발바닥 가운데 용천혈(湧泉穴)에서부터 천령개(天靈蓋)
까지 반으로 쩌억 갈라져 버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그대로 졸도해 버
렸다.
"쿠욱!"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검붉은 피가 게워져 나왔다.
그가 의식을 상실하는 찰나, 누군가 거영(巨影)을 흘리며 바로 곁으로 떨
어져 내렸다.
"어리석은 녀석! 무공을 회복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목숨을 버릴 각
오까지 서슴지 않는 것인지……."
괴인은 영무의 완맥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그는 침중한 눈빛을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서운 일이야. 이 어린 녀석의 몸 안에는 세 종류의 다른 진기가 머물
러 있다. 그것이 흩트러져 버리고 말았지만, 다시 모인다면 엄청난 잠능
(潛能)이 된다."
괴인은 영무의 맥을 더욱 세심히 짚었다.
그의 몸 안에서 뇌전(雷電) 같은 기운이 느끼어진다.
기운은 세 가지로 이룩되었다.
하나는 도가(道家) 태청진기(太淸眞氣)의 종류, 또 하나는 천축(天竺)의
마하공(摩詞功), 마지막 하나는 가장 미세하되 가장 끈질긴 진기였다.
괴인이 무영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마지막 진기의 비밀 때문이었
다.
"어이없는 일이다. 숭산절학(崇山絶學)이 어이해 이 녀석의 몸 안에 머물
러 있단 말인가?"
괴인은 탄식하며 타혈(打穴)을 하기 시작했다.
격공점혈(隔空點穴)의 솜씨는 가히 신기에 가깝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탄지점혈되는 가운데, 영무의 얼굴빛이 붉
게 달아올랐다.
추궁과혈(追宮過穴)은 반시진에 걸쳐 계속되었다.
괴인은 영무의 혈도를 찌를 때마다 반탄력을 느꼈다.
'선천강기(先天强氣)까지 익히고 있단 말인가?'
괴인은 영무의 신체에 대해 불가항력에 가까운 신비를 느끼고 있었다.
'대체 누구이기에, 흑도 백도의 제반 내공을 두루 익히고 있단 말인가?'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세에 영무만한 귀재(鬼才)는 없다. 마치 한 마리 천룡(天龍) 같다!'
어쩌면 영무는 난세가 바라는 영웅일지도, 그리고 그가 불가능하다고 여
기는 대업(大業)을 성취해 줄 인물일지도…….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을 영무에게 쉽게 터놓을 수 없다고 느꼈다.
'살기가 너무 짙다. 게다가 이 녀석의 몸 근처에서 발견된 거조(巨鳥)는
옥천산(玉泉山)에서 날아왔다. 옥천산이라면, 연환마교라는 마굴이 세워진
곳이 아니던가?'
그는 회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자야(子夜).
영무는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누군가 나를 구했다.'
그는 사지백해에서 열류를 느꼈다.
누군가 그를 위해 내공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누군가 추궁과혈해 주었다. 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주화입마(走火入
魔)에 처해져 불구자가 되었을 것이다. 암중에 날 보호하면서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무는 누운 채 몽상에 잠겼다.
백 일째 그는 걸어 다니는 시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는 돌아가야 한다. 그는 중원에 가야만 한다.
중원에서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 더러운 악마의 손에서!'
그의 눈에서 살기가 치솟는다.
그는 쪽지 한 장을 쥐고 있었다.
그를 구한 사람이 손에 쥐어 준 쪽지인데, 거기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적이 없는 한, 무공을 회복하지 못한다.
마음 속 번뇌를 버리고 평화롭게 살아라. 네 자신의 운명에 적응하는 게
최선이다.>
운명(運命).
무엇을 일컬어 운명이라 하는 것인가?
아버지는 벗으로 여겼던 자들에 의해 협공당해 쓰러지고, 어머니는 천하
거마의 제일부인 자리에 머문 채 한을 씹어 삼키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원수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한 나머지, 한 여인을 겁탈하듯 취한
채 새에 태워져 추방되고 말지 않았는가?
그는 일생 내내 좌절하며 산 것이다.
'이제까지 난 철저히 농락당했을 뿐이다. 흑도 백도의 지배자들은 모조리
나의 원수들이다. 그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눈에서 핏발이 선다.
백무영(白無影), 그는 이런 모습으로 겨울 하나를 보낸 것이다.
그는 함백의 안배에 의해 무림에서 교묘히 추방되었다.
그는 새들에 태워지기 전에 제혈되었으며, 새를 타고 날아가던 가운데 새
가 광풍에 휘말려 떨어졌기에… 큰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그는 겨울 내내 무수한 얼굴을 증오했다.
함백(涵伯), 잠풍(潛風) 등…….
그들을 베어야 한다. 그래야만 파괴된 가문의 한을 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복수해야 한다. 복수할 방법이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
그게 백무영의 요즈음 번뇌였다.
'두 여인에게 미안할 뿐이다. 냉약빙과 산호부인…….'
그의 눈빛이 힘을 잃는다. 그는 두 여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버린 것이
다. 그에게 순결한 육신을 바쳐야만 했던 두 여인이 있지 아니한가?
냉약빙과 산호부인, 그네들에게 있어 백무영은 첫남자였다. 백무영이 첫
남자가 아니라면, 마음 속에 번뇌가 가득 차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냉약빙, 그녀에게…….'
냉약빙의 마지막 눈길이 기억된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자신을 노려봤었고, 눈빛 가득 한이 저미어 있었다.
'비록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그대에게 진심으로 연민의 정
을 품고 있다는 걸 잘 알아주기 바라오.'
냉약빙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연약해진다.
솔직히 그녀와 교접했던 이유는,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음양대법을 쓰지 않을 경우,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녀의 육체를 탐내는 듯 가장하며 그녀를 범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상념이 한꺼번에 닥쳐 든다.
그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건, 함백에 대한 인간적인 좌절감 이라 할
수 있었다.
'함백은 나를 철두철미하게 패배시켰다.'
함백은 백무영을 멋대로 조종한 인물이다.
그는 백무영이 자신이 죽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 두었으며, 자신의
형식적인 부인과 육체관계를 맺게 조장하고 어디든 가서 평화롭게 살라
고 새 등에 태워 날려 보낸 것이다.
'지금이라도 마교에 신호를 보낸다면 나의 거처가 옥천산에 알려질 것이
며, 산호부인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된다.'
산호부인은 아름답다. 백무영도 그것만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순결한 여인이었다.
함백은 그녀에게 미안해 한 나머지, 백무영과 짝지워 주게 하고자 안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처리방법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그는 응징되어야 한다.
그는 백비룡을 무너뜨린 장본인, 그리고 소수미랑을 납치한 인물이 아니
던가?
그를 꺾지 못한다면, 백비룡의 한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번뇌가 깊이를 더해 간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이다.
백무영은 주머니 안에 은자가 들어 있음을 확인하며 몸을 일으켰다.
"안주는 없어도 좋다."
백무영은 매화나무 숲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점소이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백무영은 가끔 밤에 절에서 나와 술을 마시
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는 깡술만 먹고 안주는 먹지 않는다.
그가 마시는 술의 종류는 정해져 있다. 그건 독하디독한 백건주(白乾酒 :
빼갈)였다.
'하긴, 젊은 나이에 산사에 살려니… 얼마나 권태로울까?'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점소이는 나름대로 백무영의 처지를 이해하는
듯한 표정이다.
백무영은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백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을 일컬어 빙기옥골이라 하는 말은 매화에서 비롯되었다.
봄이 오기를 기다려 오며 겨울을 감내해 온 매화의 지조는 꽃 중에서 제
일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를 꽃 가운데 최고
로 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자, 매화꽃이 흰 비처럼 떨어진다.
마치 하얀 나비가 무리지어 추락하는 듯하다. 백무영은 고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금 그의 얼굴이 달빛에 젖고 있다.
지금의 얼굴은 본래의 얼굴은 아니다. 그는 아직도 역용을 풀지 않았다.
역용을 풀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본 얼굴을 우러르기 부끄럽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위선자들에 의해 철저히 농락되어 온 나의 일생이 수치스러울 뿐이다.'
백무영이 그러저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점소이가 술을 갖고 왔다.
안주를 따로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주 한 접시가 술과 함께 나
왔다.
점소이는 아무 말 말라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생긴 건 못생겼으되, 꽤나
귀여운 소년이다. 백무영은 자음자작하기 시작했다.
술병을 반 도 비우기 전에 취기가 얼큰히 전해졌다. 내공을 잃자, 술이
약해진 것이다. 얼굴은 숯불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으며, 숨결이 가빠지
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량이 한꺼번에 사라질 리는 만무. 그는 또 다시 잔을 비워 나
갔다. 술이 바닥이 날 무렵, 그는 문득 창 밖에서 까만 빛이 반짝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눈빛!'
백무영은 힐끗 얼굴을 쳐들었다. 까아만 눈빛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
다. 머리카락이 부수수하고 얼굴에 땟국물이 주룩주룩한 거지소년이 창
너머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나를 노려보다니?'
백무영은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후, 그는 거지소년이 노려보는 건 자신이 아니라 탁자 위에 무신경
히 놓여 있는 홍소육(紅燒肉) 한 접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허기가 졌군.'
백무영은 문득 동정심을 느꼈다. 거지소년은 배가 고픈 나머지, 홍소육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백무영은 술잔을 내리며 거지소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
로 부딪쳤다. 거지 소년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신형을 틀었다.
그가 화다닥 뛰어 달아나고자 할 때.
"들어와서 먹어라! 눈치 볼 것 없다."
"아……!"
거지소년은 몸을 주춤 세웠다. 그는 도망칠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는 창자
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풀죽은 표정을 지으며 문을 통해 주루 안으
로 접어들었다.
점소이는 거지가 접어들자 막고자 하였으나, 백무영이 슬쩍 눈짓을 하자
사정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고 만다.
거지소년은 주춤주춤 다가섰다.
그는 홍소육 한 접시만 주면 영혼이라도 팔아 버릴 듯 굶주린 표정을 지
으면서도 제법 단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힐끗 고개를 돌려 백무영을 쏘아봤다.
눈빛이 몹시 오만해 보이는 게 이채로웠다.
"먹기는 먹겠지만, 동정하지 말아요."
기가 막힌 말이다.
백무영은 술잔을 든 채 피식 웃고 말았다.
거지소년은 젓가락을 집어들자마자 홍소육 한 접시를 쉬지 않고 뱃속으
로 운반했다.
접시가 텅 비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 더 먹고 싶으면 말해라. 내가 가진 돈이 있으니
까, 먹고 싶은 대로 사 주겠다."
백무영은 측은지심을 일으켜 그렇게 말했다.
"날 동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거지소년은 사나운 눈길로 백무영을 쏘아봤다.
눈빛이 몹시 맑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게 된 백무영은 문득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
었다.
'땟국물이 가득하기는 하나, 아름다운 용모다!'
추레한 옷차림의 거지소년은 정말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있었다.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용모.
깨끗한 옷을 걸친다면 절세적인 미남자로 단숨에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왜 너를 동정해선 안 되지?"
백무영은 한 잔의 술을 비웠다.
"동정 받을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거지소년은 소매섶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더러운 옷자락이 흘러내리며 뽀얀 손목이 나타났다.
기이하게도 팔목에는 옥환(玉環)이 채워져 있었다.
'귀한 물건이다!'
백무영은 찰나지간에 거지소년에게 여러 가지 신비가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첫째, 그의 얼굴은 더럽지만 속살은 몹시 깨끗하고 희다는 것.
둘째, 손목이며 귀에 여자의 장신구가 매달리어 있다는 것.
그리고 더러운 거지 옷 속에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어디 그뿐이랴?
백무영의 눈길은 거지소년의 목젖에 머물렀고, 그의 목젖에 남자에겐 의
당 있는 돌기가 없음을 보고 그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계집이군!'
거지소년은 남장여인이었다.
보통 사람은 알아보기 힘들 것이되, 백무영은 자객으로 숙련되었기에 재
빨리 알아볼 수 있었다.
'왜 역용을 하고 숨어 다닐까?'
백무영이 그러저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노형(老兄), 기왕 얻어먹은 김에… 나… 술 한 잔 사 줄 수 있어요?"
남장소녀는 깜찍한 눈빛을 던졌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사람마다 다르지.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실 경우, 기분이 보다 우울해지
지."
"하여간 술 한 잔 사 줘요."
"한 잔만 마시겠다면……!"
"한 잔이면 돼요."
남장소녀는 방긋 웃었다.
땟국물 가득한 얼굴이되, 총명하고 서글서글하게 보인다.
백무영은 잔에 술을 부어 남장소녀에게 건네 주었다.
남장소녀는 대뜸 술잔을 쥐고 냉수 마시듯 술을 들이마셨다.
직후.
"으음, 너무 써……!"
남장소녀의 오만상이 벌레 씹은 듯 찡그려졌다.
"핫핫… 내가 뭐랬어? 술은 고약한 거라고 했잖아."
"피이, 쓰긴 하지만 뱃속을 화끈하게 하는 게 마실 만하군요. 또 한 잔
줘요."
"한 잔뿐이라고 했잖아."
"한 잔만 더 마시고 갈게요."
"고집이 세군."
백무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잔 술을 따라 주었다.
두 번째 잔도 재빨리 비워졌다.
그리고 잔이 또 내밀려졌다.
"또 줘요."
"안 돼."
"줘요."
"줄 수 없어."
"그럼 내 팔찌를 줄 테니, 술을 줘요."
남장소녀는 팔목에서 팔찌를 꺼냈다.
짧은 사이, 취기가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리고 숨결이 뜨거워지
고 있는 모습이 보기 가관이었다.
백무영은 엄한 눈빛이 지으며 꾸중하듯 말했다.
"왜 술을 마시고자 하는지 모르겠지만, 술로 세상 만사가 해결되진 않
아."
"피이, 노형도 밤을 세우며 술을 마시고 있지 않는가요?"
남장소녀는 상당히 당돌했다.
"어쨌든 안 돼."
"내게 명령하듯 말하지 말아요. 이래봬도……."
남장소녀는 자신에 대해 뭔가 말하고자 하려다가는 입술을 꽈악 다물었
다.
'사연이 깊군.'
백무영은 그녀의 눈빛에 서린 고독과 우수의 앙금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어떠한 사연이기에 거지로 변장하여 밤새 도망쳐 다니고 있는 것일까?
"이제 돌아가거라. 너의 거처로!"
"갈 수 없어요. 가면……."
남장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눈물이 흘러내린 부분은 본래의 흰 살결이 나타났다.
이 밤, 백무영은 변황 깊은 곳에서 해괴한 인연에 휘말려들기 시작한 것
이다.
첫댓글 r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