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五章 上官礎敬
방.
사방 벽이 온통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방은 중앙의 탁자에서 은은히 타오르는 촛불과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들로 인해 실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방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침대.
역시 화려한 보석과 은은하게 붉은빛이 도는 휘장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니 아마도 여인의 것인 듯했는데, 그곳에선 지금 두 명의 남녀가 한데 엉켜 열락에 겨운 몸짓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내.
언뜻 보기에 이십대 정도로밖에 안돼 보이는 사내가 우람한 동체를 드러낸 채 여인의 온몸 구석구석을 정복하고 있었다.
바로 제서용(齊緖勇)이 아니던가!
“하악……!”
그의 정력이 어찌나 절륜한지 여인은 그의 어깨 밑에 깔린 채 죽을 듯한 얼굴로 마구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제서용의 밑에 깔린 채 쾌락에 겨운 몸부림을 치고 있는 여인.
이제 겨우 삼십이 될까 말까 해보이는 나이에 봉긋한 젖가슴과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가냘퍼 보이는 체구에 비해 매우 발달한 엉덩이를 지니고 있는 여인은, 색기(色氣)가 줄줄 넘치는 얼굴로 제서용의 율동에 맞춰 요사스럽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눈초리가 오히려 더욱 요염(妖艶)해 보이는 여인은 은어 같은 두 팔과 미끈한 두 다리로 제서용의 몸뚱어리를 친친 휘감은 채 더욱더 깊이 사내를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아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는 정력이 좋기로 소문난 제서용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요염하고 자극적이었다.
그는 그녀와 정사를 나눌 때면 새롭고 엄청난 쾌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의 이십 년을 함께 살아 왔지만, 그는 아직도 그녀와 잠자리를 할 때면 소년처럼 마음이 설레곤 했다.
그만큼 그녀는 항상 요염하고 언제나 신비로웠다.
“흐응……”
제서용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단내를 토해 내는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보자 아랫배 쪽에서 뭔가가 용솟음치며 빠져 나가려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윽……”
동시에 여인 또한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질러대며 허우적거렸다.
“아흑……!”
두 사람은 잠시 경직된 몸부림을 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친 얼굴로 침대에 털썩 널브러졌다.
엄청난 열기가 휩쓸고 지나간 실내는 이내 폭풍 전야 같은 적막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죽은 듯이 있던 제서용이 잔뜩 지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진(耀眞)! 매번 느끼는 거지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여자야!”
여인, 운명이 정요진(鄭耀眞)이라 이름한 그녀는 제서용의 품에 안긴 채 뱅어 같은 손가락으로 그의 우람한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깔깔거렸다.
“호호호,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에서 나를 만족시켜 줄 만한 남자는 아마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정신적(精神的)으로나 육체적(肉體的)으로나 말이에요.”
제서용은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쁘고 가느다란 얼굴과 땀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묘한 색감(色感)을 불러일으켰다.
제서용은 또다시 하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건 그렇고, 사부께 당신이 생각한 것을 말씀드렸더니 아주 기뻐하시는 눈치더군.”
“흐응……”
정요진은 아무 말도 않고 몽롱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제서용의 손길을 받자 선천적으로 색기(色氣)가 강한 그녀의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다시 반응을 한 탓이다.
정요진의 몽롱한 얼굴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근 이십 년간을 함께 살아 왔지만, 제서용은 도무지 그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한없이 순수하고도 착한 여인 같았다가, 또 어떤 때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녀(惡女)가 되는 것이 바로 그녀였다.
지금도 그랬다.
아무리 남남이 된 사이라지만,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이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음에도 어찌 저처럼 태평한 얼굴이란 말인가?
아니, 이제는 오히려 그녀가 나서서 그의 기업을 망치려 하고 있지 않는가?
제서용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악녀(惡女)로군…… 그들 사형제(師兄弟)가 몰살한다 해도 당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지?”
정요진이 여전히 몽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와 약혼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미 지난 일이에요. 더군다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대정회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머리를 제서용의 하체로 가져갔다.
“……!”
어이없는 표정으로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제서용은 온몸을 관통하는 쾌락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는 텅 비어 갔고 단지 본능만이 그의 모든 사고(思考)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아!”
“헉!”
또 한 번의 열풍이 실내를 휩쓸었다.
* * *
용문산(龍門山)을 지나 섬서성(陝西省)으로 들어오면 하나의 계곡을 만난다.
산 사이를 흐르는 물이 마치 세 개의 문을 지나는 것 같다고 하여 삼문협(三門峽)이라 불리는 이곳은 물살이 거칠고도 웅장해 명승(名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철군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삼문협을 지나고 있었다.
휘익!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그에게서 여느 때와 다른 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입은 외상(外傷)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했고, 계속되는 격전의 와중에서 당한 내상(內傷) 때문에 이제는 내공(內功)을 끌어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나, 묵묵히 길을 가고 있는 철군악의 얼굴 어디에서도 힘들어 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계곡을 따라 반이나 왔을까?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리던 철군악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앞을 쳐다보았다.
사람.
보통 체구에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가진 중년인이 쓸쓸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철군악은 커다란 대못에 머리를 관통(貫通)당하는 듯한 격렬한 충격을 맛봐야 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의 눈에서 언뜻언뜻 뿜어져 나오는 밝고도 칙칙한 광채를 대하는 순간, 철군악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껴야 했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두려움이나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철군악으로선 정말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습군……’
철군악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천천히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의 질문에 중년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미소.
왠지 아주 우울하게 보였지만, 중년인의 입가에 매달려 있는 것은 분명 가느다란 웃음이었다.
철군악은 그의 미소를 대하는 순간, 사람의 웃음이 이처럼 쓸쓸하고 외로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중년인은 잠시 그를 마주보며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이 철군악이 맞다면……”
철군악은 아무 말 없이 중년인의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나타난 사람이 적(敵)이 확실한 마당에 쓸데없이 이런저런 말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실력이 모든 것을 말하는 사생결단(死生決斷)이 있을 뿐이다.
저벅! 저벅!
철군악이 검을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중년인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잠깐 내 말부터 듣게.”
유심히 철군악의 행동을 살펴보던 중년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철군악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철군악으로선 의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중년인은 잠시 철군악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을 보니 성검문(聖劒門)이나 제마궁(帝魔宮)의 계획이 모두 실패한 모양이로군?”
철군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렇군…… 그들은 모두 죽었나?”
“그렇소.”
“은섬창(銀閃槍) 문인(聞人) 대협(大俠)도?”
철군악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인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죽은 자에 대한 엄숙한 애도(哀悼)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숙고(熟考)하는 것 같기도 했다.
중년인은 한참 동안 그런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철군악은 그의 눈이 너무도 맑고 투명하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전설의 호수가 떠올랐다. 물이 너무도 맑고 투명해 도저히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기이한 호수.
왜 그것이 지금 떠올랐을까?
“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들어줄 수 있겠나?”
너무도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철군악은 그의 두 눈을 직시하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자네에게 삼성(三聖)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겠네.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아마 자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걸세.”
철군악은 고개를 들어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정연(整然)한 오관(五觀)과 넓은 이마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함의 상징 같았고, 꽉 다물린 입 매무새와 또렷한 눈빛에선 어떤 일에도 굴복하지 않을 장부(丈夫)의 기개(氣槪)를 엿볼 수 있었다.
비록 처음 보는 사이였고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지만, 절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좋소.”
“고맙네.”
중년인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부터 해야겠군. 자네는 삼성(三聖)이 이미 오래 전부터 힘을 합친 것을 알고 있나?”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군. 삼성은 삼성련(三聖聯)이란 가상의 단체를 만들어 도움을 주고받고 있는 상태네. 비록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암투(暗鬪)를 벌이느라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유사시에는 얼마든지 힘을 합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자네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걸세. 그리고 삼성은 자네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힘을 보유하고 있네. 여태까지 자네에게 심각한 위기가 없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경시했다가는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길 걸세…… 자네는 여태까지 만난 삼성의 인물 중 누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생각하나?”
철군악은 잠시 생각하더니 불쑥 내뱉었다.
“십존(十尊)이오.”
중년인의 얼굴에 가느다란, 그래서 더욱 쓸쓸해 보이는 그런 미소가 그려졌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겠지…… 자네 말도 틀리지 않네. 특히, 그 중에서도 삼대거두(三大巨頭)로 꼽히는 자들은 그 무공의 깊이를 추측하기가 어려울 정도지. 자네도 문인 대협을 만나 보았으니 충분히 내 말에 동감할 걸세.”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의 말대로 십존의 무공은 정말 대단했다.
특히, 삼대거두로 꼽히는 문인령 때문에 철군악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때 입은 내외상(內外傷)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가?
중년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삼성련, 정확히 말해 제마궁(帝魔宮)에도 십존의 삼대거두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고수가 있다는 것은 몰랐을 걸세.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제마궁에는 원로원(元老院)이란 곳이 있네. 말 그대로 이미 강호에서 은퇴한 노괴물들이 머무는 곳으로, 거기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절세의 마인(魔人)들이 여럿 있다고 하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제마궁주(帝魔宮主)인 천마(天魔) 사공기(司空麒)의 사숙(師叔)뻘 되는 자들로, 삼대거두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네……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문인 대협보다는 훨씬 강하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네.”
“음……”
철군악은 내심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문인령이 비록 삼대거두 중 무공이 조금 뒤떨어지는 편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검문 최고의 고수인 삼대거두와 비교해서였다.
과연 당금 무림에서 그와 맞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절대 열을 넘지 못할 것이다.
한데, 그처럼 어마어마한 실력의 소유자인 문인령을 능가하는 고수가 도사리고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철군악은 중년인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원로원에는 전부 몇이나 있습니까?”
“글쎄, 정확한 인원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네. 극히 적을 수도 있고, 예상외로 많을 수도 있겠지.”
철군악의 기대와 달리 중년인도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철군악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삼성의 무공이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점이네. 자네는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몹시 궁금하겠지?”
철군악은 번쩍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이 지금 하려는 말은 철군악에겐 정말 중요한 얘기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듯 삼성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시피 한 철군악으로선 그들에 대해 자그마한 것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커다란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무리 많은 수하(手下)를 죽여도 그 우두머리인 삼성을 죽이지 못한다면 철군악이 여태껏 해왔던 일은 한낱 먼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철군악이 흥미로워하는 것을 눈치 챘는지 중년인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해졌다.
“물론, 나도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아 낼 도리는 없네. 하나 의부(義父)와 나를 비교하자면 아마 나 같은 사람은 둘이 있어도 결코 의부를 당해 내지 못할 걸세.”
철군악은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불쑥 물었다.
“의부가 누구요?”
순간, 중년인의 얼굴에 멋쩍은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군. 내 의부는 당(唐) 자 성(姓)에 문() 자 제() 자를 쓰시네.”
철군악은 그제서야 중년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상관초경(上官礎敬).
그는 바로 당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이자 군자라 칭송되고 있는 상관초경이었던 것이다.
철군악은 비록 자존심이 강하고 남, 특히 적에게는 절대 허리를 굽히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그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군악은 또렷한 눈으로 상관초경을 직시하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무림말학(武林末學) 철군악이 상관 선배께 인사드리오.”
돌연한 철군악의 행동에 상관초경이 쓸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허허, 이러지 말게. 나는 자네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네.”
철군악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가운데 기개 넘치는 얼굴이 그렇게 쓸쓸하고 우울해 보일 수 없었다.
육십이 다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겨우 사십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젊은 모습이었지만, 쓸쓸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얼굴에는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짙디짙은 음영(陰影)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하나, 상관초경은 쓸쓸한 모습과는 달리 제법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자네가 나와 겨루게 된다면 삼성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금방 알게 될 걸세.”
상관초경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꽉 다물고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할 말을 모두 한 것 같았다.
철군악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쓸쓸해 보이는 두 눈이 뭔가를 독촉하고 있었다.
철군악은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과의 결투를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철군악은 눈길을 돌리지 않고 계속 그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검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
불끈!
차가운 손잡이를 통해 기이한 열기가 꿈틀대며 올라와 그의 심장과 혈관을 터뜨려 버릴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철군악은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상관초경 또한 공력을 끌어올린 채 묵묵히 철군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을 든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쥔 채 상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실로 공기가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유(須臾)의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의 거리가 겨우 오 장(丈) 남짓 되었을까?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던 철군악의 신형이 돌연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쐐애액!
동시에, 막강한 음력쇄심(陰力鎖心)의 검기(劒氣)가 마치 자욱한 안개처럼 일어나며 상관초경의 전신을 난도질해 들어갔다.
쓰와와와……
상관초경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흡천십이검(吸天十二劒)이로군.”
하나, 그는 강력한 검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눈을 빛내더니, 허공의 일각(一角)을 향해 가볍게 한 손을 휘둘렀다.
슈욱……
그의 손에서 마치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나며 음력쇄심의 검기에 맞서 갔다.
그가 내뿜은 장력(掌力)은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미약해 보여 도저히 철군악이 펼친 검초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상관초경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미풍에 닿는 순간,
촤아악!
철군악이 펼친 음력쇄심의 검기가 속절없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가뜩이나 무표정한 철군악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며 눈에서 섬뜩한 광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검을 기이하게 휘둘러 이번에는 검파멸절(劒波滅絶)의 초식을 시전했다.
쓰쓰쓰승……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듯 시퍼런 검기의 막이 상관초경을 향해 빠르게 몰려갔지만, 이번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스윽!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손이 다시 휘둘려진 순간,
콰르르르……
흡천십이검에서도 가장 강력한 검초 중 하나인 감파멸절이 너무도 허무하게 와해되는 것이 아닌가?
철군악은 여태껏 수많은 고수와 싸움을 해왔지만, 자신의 검초(劒招)를 이처럼 간단히 파해(破解)할 수 있는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나, 철군악은 별로 놀라지 않았는지 두 눈을 빛내며 빠르게 상대에게 다가가 검을 힘차게 좌우로 그어댔다. 순간,
과아아아아……
보기만 해도 오금이 떨릴 만큼 엄청난 검기가 시퍼런 빛을 띤 채 사방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섬뜩한 검기는 천지를 집어삼킬 듯 마구 요동치더니 일순 상관초경을 향해 빠르게 덮쳐 오는 것이 아닌가?
콰우우우우……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정말 해일이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철군악은 흡천십이검 정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상대를 어쩌지 못할 거라 판단하고 광해삼검의 광해일령(狂海溢靈)을 펼친 것이다.
과연 광해삼검은 매우 뛰어난 위력을 지니고 있어 상관초경도 감히 만심(慢心)하지 못하고 신중하게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검초의 변화를 노려보더니 어느 순간 허공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쑤아앙……
살짝 말아 쥔 주먹에서 거무스름한 권풍(拳風)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뿜어져 나와 광해일령의 검세(劒勢)에 맞서 갔다.
그 엄청난 기세나 위력으로 보건대 결코 광해삼검보다 못하지 않았다.
천수암권(千手暗拳).
상관초경이 수없는 실패와 좌절을 맛본 후에야 완성했다는 무적(無敵)의 절예(絶藝)가 드디어 그 위대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막강한 천수암권의 권력(拳力)과 무시무시한 광해일령의 검기가 허공에서 맞닥뜨린 순간,
파파파파팟……
너무도 강력한 천수암권의 위력에 광해일령의 검세 한구석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철군악의 두 눈에 희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상관초경의 실력이 이 정도인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지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슈우욱……
천수암권의 무지막지한 권력(拳力)이 어느새 사방을 뒤덮으며 철군악을 향해 몰려들었다.
철군악은 눈을 빛내며 광해일령의 초식을 재빨리 노도광란(怒濤狂亂)으로 변화시켰다.
우우우우웅……
검이 무섭게 떨림과 동시에 칼날 같은 검기가 사방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파앗!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검기가 미처 닿기도 전에 상관초경의 한쪽 소매가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상관초경은 안색을 굳히며 손을 기이한 각도로 쳐냈다.
주먹을 쥔 것도, 그렇다고 손을 완전히 편 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양의 수도(手刀)가 철군악의 검세를 마치 도끼로 찍듯 내려친 순간, 실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따당! 땅!
“음……!”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쇳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며 철군악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철군악은 원래 무표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적의 검예로 생각했던 광해삼검이 이처럼 간단히 무너질 줄이야 그가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철군악이 놀란 얼굴로 멍청히 있자 상관초경은 여세를 몰아 빠르게 다가오며 한 손을 떨쳐 냈다.
쾌액!
그의 손에서 뭔가 불그스름한 기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나오더니 철군악을 향해 몰려갔다.
그 속도며 기세가 어찌나 빠르고 대단하던지 철군악은 피하고 자실 것도 없이 검을 들어 그것들을 막아야 했다.
쩌정! 쩡!
빠르게 다가오던 불그스름한 기운들은 미처 검막을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덕분에 철군악은 손목이 시큰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다시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유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쇳조각.
마치 홍옥(紅玉)처럼 붉게 빛나는 자그마한 쇳조각이 땅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철군악은 그제서야 그 붉은 쇳조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크기는 겨우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정도였고 특별히 날카롭게 생기거나 별다른 특징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바로 당문이 천하에 자랑하는 오대암기(五大暗器) 중 하나인 귀왕자(鬼王刺)였다.
단지 붉은빛이 희끗한 순간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목숨을 앗아 가는 탓에 악마의 혓바닥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무시무시한 암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귀왕자는 제아무리 대단한 호신강기(護身氣)라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가 상대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목숨을 빼앗는다고 한다.
철군악은 이미 당문 오독(五毒)과 싸울 때 귀왕자를 한 번 보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실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위력뿐만이 아니었다.
오독의 귀왕자에는 극독(極毒)이 묻어 있어 보기에도 끔찍한 남빛 광망(光芒)이 번들거렸었지만, 상관초경이 조금 전 던진 귀왕자는 단지 붉은빛뿐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상관초경이 어떤 사람인지 철군악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그가 아무리 광명정대하고 정정당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싸울 때마저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관초경은 철군악이 힘들여 귀왕자를 막자 두 눈을 빛내며 다시 손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슈우욱……
거무스름한 권풍이 허공 가득 일어나더니 철군악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왔다.
소리는 미약했지만, 위력은 강대(强大)하기 그지없었다.
철군악은 이미 조금 전 혼쭐이 났었기에 상대의 권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권풍이 다가오는 것을 신중한 표정으로 보고 있더니 어느 순간 발을 이리저리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읏!
그의 몸이 마치 허깨비처럼 옆으로 쭈욱 미끄러지며 무시무시한 권풍을 슬쩍 비켜나는 것이 아닌가?
상관초경의 얼굴 가득 놀란 빛이 떠올랐다.
“심이전체(心移轉體)로구나!”
심이전체(心移轉體)!
이는 이미 도가(道家)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失傳)된 것으로 신법(身法)이되 신법이 아닌, 아주 특이하고도 기괴한 무공이었다.
말 그대로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몸뚱어리를 옮길 수 있다는 극히 이론적인 신법으로, 무림 역사상 오직 한 사람, 무당(武當)의 개파조사(開派祖師)인 장삼봉진인(張三峯眞人)만이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도(道)를 이루지 않는 한 절대 이룰 수 없다던 절대불가(絶代不可)의 무공을 철군악이 익히고 있으니 상관초경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관초경은 상대가 너무도 간단히 권경(拳勁)을 피하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구부정하게 뻗어 있던 팔을 안으로 슬쩍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스윽!
그러자 실로 보고도 믿지 못할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쉬이익……
철군악을 스쳐 지나갔던 권풍(拳風)이 돌연 원을 그리며 허공에서 반 바퀴 돌더니 그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어기회선(御氣回旋).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왔지 누구도 익힌 적이 없다던 어기회선이 상관초경의 손에서 실로 수백 년 만에 재현된 것이다.
막 상관초경에게 다가가다 말고 기괴한 느낌이 들어 힐끔 뒤를 돌아보던 철군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쾌애애액……
피한 줄로만 알았던 거무스름한 권풍이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그의 뒤통수를 노리며 쏘아져 왔기 때문이다.
순간, 철군악은 비호처럼 앞을 향해 몸을 날리며 검을 기괴하게 그어댔다.
쾌애액!
살인적인 권풍이 실로 간발의 차이로 그의 등을 스쳐 지나간 순간,
피윳!
철군악의 검에서 뭔가 희끗한 것이 튀어나와 상관초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무극칠절(無極七絶)의 제일절(第一絶), 초동생멸(初動生滅)이 펼쳐진 것이다.
상관초경은 난생처음 본 검법에 일순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난감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두 눈을 횃불처럼 빛내며 마치 이불을 잡고 털듯 양손을 기이하게 흔들어댔다.
“암천비조(暗天飛鳥)!”
휘리리리릭……
거무스름한 권풍이 마치 춤을 추듯 그의 양손에서 튀어나와 종잡을 수 없는 속도와 기세를 동반한 채 철군악이 펼친 검기에 부딪친 순간,
푸스스스스……
문인령조차 변변히 대항 한번 못 해보고 목숨을 잃어야 했던 초동생멸의 검기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그 힘을 잃는 것이 아닌가?
파아아아……
상관초경이 내뿜은 권력(拳力)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철군악을 향해 다시 질풍처럼 쏘아져 왔다. 찰나,
스윽!
돌연 철군악의 몸이 뭔가에 잡아 끌리듯 뒤로 쭈욱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상관초경의 입에서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건곤대나이신법(乾坤大那移身法)이로구나!”
상관초경은 매우 놀랐지만,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승기를 멍청하게 놓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뒤로 물러나는 철군악을 재빨리 따라붙으며 손을 기이하게 떨쳐 냈다.
“반권수암(半拳收暗)!”
그의 손이 권(拳)도 아니고 장(掌)도 아닌, 벼락같은 기세를 동반한 채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쾌애애액……
그 기세가 어찌나 장중하고 강렬하던지 철군악은 주먹이 다가오기도 전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떨어져 내리는 주먹을 바라보고 있더니 마치 밥상에 앉은 파리를 쫓듯 슬쩍 검을 떨쳐 냈다. 순간,
쉭!
희끄무레한 안개 같은 것이 그의 검에서 튀어나오더니 번개가 무색할 정도의 빠르기로 상관초경을 향해 쏘아져 갔다.
이것이 바로 무극칠절의 제이절(第二絶)인 수유단혼(須臾斷魂)이었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상관초경은 미처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일검(一劒)을 얻어맞고 말았다.
파앗!
뭔가가 허리를 베고 지나가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초경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계속 휘두른 덕에 철군악의 어깨를 강타할 수 있었다.
쾅!
“윽……!”
왼쪽 어깨가 엉망진창이 된 채 뒤로 물러나는 철군악의 얼굴은 놀람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여태껏 수많은 고수들과 싸움을 해왔지만, 상관초경처럼 무공이 고강하고 기세 있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상처를 입게 되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찾아드는 고통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뺄 궁리를 하기에 바빴는데, 상관초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기세로만 따진다면 오히려 철군악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 보였다.
철군악은 설마 상관초경의 투지가 이처럼 대단한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가 졸지에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상관초경이 뒤로 물러나는 철군악을 따라붙으며 기괴하게 삼(三) 권(拳)을 쳐온 것이다.
“삼정암겁(三精暗劫)!”
순간, 거무튀튀하게 변한 상관초경의 주먹이 갑자기 세 개로 불어나더니 마치 유성이 떨어져 내리듯 맹
렬한 기세로 철군악의 상하(上下)를 노리고 쏘아져 왔다.
콰아아아악……
천수암권(千手暗拳) 중에서도 위력이 막강한 삼정암겁의 권세(拳勢)였다.
철군악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을 눈앞에 수직으로 세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상관초경의 주먹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왔다.
바로 그때,
쓰스스스……
철군악이 들고 있던 검끝에서 돌연 실처럼 가늘고 희끄무레한 검기가 번져 나오더니 커다란 반월(半月) 모양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그 위세가 어찌나 장중하고 강렬하던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오직 밝은 달만이 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무극칠절 중 제삼절(第三絶)인 반월신사(半月神絲)였다.
상관초경의 얼굴에 일순 다급한 기색이 어렸다.
자신이 펼친 삼정암겁의 막강한 권세(拳勢)가 그 반달 모양의 검기(劒氣)에 닿는 순간,
파스스스……
마치 백사장의 모래가 파도에 휩쓸리듯 아주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반달 모양의 검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상관초경의 몸뚱어리를 집어삼킬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져 왔다.
쓰스스스……
마치 하늘에 떠 있던 달이 땅위로 떨어져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상관초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야압!”
그는 번개같은 동작으로 옆으로 이 보 움직인 후 주먹을 얼른 끌어당기더니 다시 힘차게 앞을 향해 뻗어 냈다. 순간,
콰콰콰콰콰……
거무튀튀한 그의 주먹이 무려 수백 개로 불어나더니 마치 우박이 쏟아지듯 철군악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시무시하던지 일순 하늘이 컴컴해지며 온 세상의 종말(終末)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천수암권의 최절초(最絶招)인 천수겁(千手劫)이다. 정확히 천 개의 손그림자[手影]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면 태산마저도 소멸돼 버린다고 알려진 절세의 무공.
하나, 그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천수겁으로도 악마의 손길처럼 덮쳐 오는 반달 모양의 검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쓰스스스스……
그 검기는‘천재’의 몸과 자존심을 산산이 가르고 지나간 연후에서야 허공에 그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파앗!
“크윽……”
붉은 피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상관초경은 멍하니 눈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깨질 듯 청명(淸明)한 햇살이 하늘 끝으로부터 내려와 이마며 코끝이며, 온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몸뚱어리가 피바다로 변한 땅바닥에 제멋대로 눕혀져 있었고,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 나갔는지 눈이 자꾸 감기려 했지만, 그는 결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결코 자네를 이길 수 없…… 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자네에게 저, 정보를 주고 한 가지 부…… 탁을 하려고 한 거네…… 이제 내가 원…… 하는 것을 말하겠네.”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딸이 하…… 나 있네. 수아(琇兒)라고, 아주 귀여운 아이지. 팔 년 전에 태…… 어나자마자 제 어미를 잃은 아…… 주 불쌍한 아이네.”
상관초경은 힘이 드는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숨을 골랐다.
비록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채 비참한 모습으로 피바다 위에 누워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기개(氣槪)가 있었다. 과연 천하의 그 누가 이처럼 죽음 앞에서 초연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칭송 속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수라 할지라도 과연 이처럼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상관초경은 비록 무공은 천하제일이 아닐지 몰라도 기개만큼은 천하제일이었다.
“내 부탁은…… 하나뿐인 딸, 수아(琇兒)를 보살펴 다, 달라는 것일세. 처음 보는 자…… 네에게 할 말이 아니지만, 내 딸…… 이 자라기에 당문(唐門)은 너무 삭막해……”
그는 말을 마치고 흐릿한 눈을 들어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마치 들어줄 테면 들어주고 말 테면 말라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철군악은 도저히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소.”
철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상관초경은 꺼져 가는 눈으로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감사의 표정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철군악은 그의 당당하면서도 쓸쓸한 눈빛 한구석에 떠올라 있는 고마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애써 철군악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 급격히 생기(生氣)가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만약 의부(義父)를 만…… 나게 되면 한 번쯤은 그를 용서…… 알고 보면 부, 불쌍한 사람, 그의 유, 융천지옥마공(融天地獄魔功)을 조심…… 악마의 독공(毒功)……”
상관초경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죽는 그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무인(武人)도 결국은 닥쳐 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철군악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는 침침한 눈으로 상관초경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거의 갈라질 듯 무참히 찢겨져 있는 허리에서는 내장과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고, 온통 검기(劒氣)로 난자된 몸뚱어리에선 성한 곳이라곤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고 결국은 당당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인간적으로 풍기는 체취와 무인으로서의 당당함이 죽은 사형과 너무도 흡사했다.
철군악이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생기를 잃은 상관초경의 얼굴에 죽어 가는 사형의 모습이 겹치며 떠올라 도저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잘 가시오……”
철군악은 잠시 상관초경의 시체를 보며 나직이 읊조리다 이내 자리를 떠났다.
휘이이잉……
그의 모습은 금세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갑자기 적막해진 계곡에는 을씨년스런 바람만 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