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지옥찬가(地獄讚歌)
(1)
동굴을 빠져나온 그들은 기다란 통로를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이 현현교에 건물들이 많고 터가 넓은 것에 새삼 감탄했다. 길이 복잡하여 어떻게 어디를 들고 나온 것인지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높이 오장에 이르는 청석 담벼락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으며 중간에 검을 칠을 한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석비룡은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태성전(太聖殿)인 게로군."
"태성전?"
"현현교의 심장부라고 보면 틀림없어."
끼이익!
석비룡은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면 중앙에 화려한 태사의가 놓여져 있고 좌우에는 한 아름도 넘는 굵은 기둥들이 늘어서 있다.
석비룡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종의 의사청이지. 교주 좌엽선이 핵심 간부들을 불러 모아서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던……."
뇌파극은 손을 들어 태사의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저게 바로 좌엽선의 자리였겠군?"
석비룡은 담담히 말했다.
"일명 태성신좌(太聖神座)라고 하지. 문자 그대로 절대위엄과 무쌍무적(無雙無敵)의 상징이었다고나 할까?"
뇌파극은 장난기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렇담 내가 앉아도 되겠군."
"아서!"
석비룡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알고 보면 정상의 자리처럼 고독하고 허무한 자리도 없는 거야. 안 그래?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올라가본들 내려올 일만 남은 그런 재수없는 자리는 앉아서 뭘 해? 아무리 큰 영화도 흐르는 세월 앞에는 한없이 무기력한 법! 따지고 보면 적게 먹고 가는 똥 싸는 인생도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뇌파극은 그의 말이 이치에 합당한 터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혼자말로 구시렁거렸다.
"쳇, 그냥 한 번 해 본 말 갖고 그렇게 트집을 잡을 게 뭐람."
태성전의 뒷뜰로 나오니 그곳에는 시신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무심한 백 년의 세월은 그들의 육신을 태웠고 빛 바랜 옷 속에는 앙상한 뼈와 해골들만 남아있었다.
갈비뼈 사이에 박혀있는 창과 두 쪽으로 쪼개진 해골, 갈비뼈가 남지 않은 시신 등이 처참했던 격전의 현장을 연상시켰다.
뇌파극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끔찍해. 백 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백 년 전의 현현교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절대무적의 존재였다.
당시 현현교 교주 좌엽선(左曄仙)이 무림맹주 신도수사(神刀修士)를 단 삼초 만에 굴복시키고, 백도무림맹의 일천 의사(義士)를 무참히 무릎을 꿇린 뒤론 기세가 더욱 욱일승천(旭日昇天)하여 가히 하늘이라도 무너뜨릴 정도였다.
그런 현현교가 무너진 것은 외부의 공격 보다는 내부의 문제 때문이었다.
강호에는 현현교의 와해에 대해는 여러가지 설(說)이 분분했는데, 그 소문들 중 한 가지 공통된 점은 당시 현현교의 내부는 분열돼 있었고, 그 분열의 시초는 삼좌존이 제공했다는 것이다.
교주 좌엽선의 동생인 좌숙야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전횡을 휘두르자 삼좌존의 다른 두 명인 단리확과 순우창이 좌숙야에게 가세하면서 본격적으로 분열은 시작되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장로원에서 제동을 걸게 되었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장로 가운데 한 명이 좌숙야에게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태상장로 종천로가 좌숙야의 탄핵을 교주 좌엽선에게 간청했지만 교주는 일언지하에 묵살해버렸다.
그 사건을 계기로 양측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뇌파극은 혀를 찼다.
"예로부터 수신제가(修身齊家) 후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지. 결국 그 막강하던 현현교도 그렇게 끝나버렸으니……."
그러나 석비룡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아."
강호의 소문을 그대로 믿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제 밥그릇은 챙기는 법인데 아무리 콩가루 집안이 됐어도 어떻게 대부분이 몰살하는 사태까지 발전할 수 있냔 말이야."
뇌파극은 단순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성질대로 안되니까 이판사판 확 엎어버린 게 아닐까?"
석비룡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지 않아. 여기엔 틀림없이 뭔가 알려지지 않은 내막이 있어.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바로 그 점을 알기 위해서고……."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것만 알면 지금 움직이고 있는 현현교의 실체에 대해서도 대충 감을 잡을 것 같은데 말이야."
뇌파극은 석비룡의 등을 툭 쳤다.
"짜식! 허구한 날 계집 치맛자락만 들쑤시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언제 그런 연구를 했냐?"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등룡왕부를 멸망시킨 흉수에 관해선 아직도 깜깜 무소식이냐?"
석비룡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약간의 소득은 있었지. 어느 정도 흉수의 윤곽도 알아냈고……."
"그게 정말이야?"
뇌파극은 뜻밖의 말이라는 듯 놀난 소리로 물었다.
"놈은 비단 혈음신장을 익혔을 뿐 아니라 현현교와도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건 전에도 했던 얘기잖아?"
석비룡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전혀 새로운 건 없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뇌파극은 그의 얼굴에서 무엇을 찾아내기라도 할 듯 응시했다.
"설혜는 몸이 약해서 왕부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설혜가 좋아할 수 있는 남자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따라서 우리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외부인은 아니야."
"그럼 흉수는 평소에 등룡왕부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얘긴가?"
석비룡은 눈을 내리깔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다 젊고 잘 생기고 신분과 무공이 매우 뛰어난 사내라고 봐야지. 그래야 설혜의 마음에 들 수 있었을 테니까."
뇌파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석비룡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압축시켰으면 대충 잡히는 사람이라도 있을 테지?"
"물론 있고말고."
"대체 어떤 놈이지?"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석비룡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무서운 얼굴로 뇌파극을 쏘아봤다.
뇌파극은 위압적인 기세에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 갑자기 왜 그런 얼굴을……?"
석비룡의 손가락이 뇌파극의 얼굴을 가리켰다.
"흉수는 너!"
"뭐, 나?"
뇌파극은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지만 석비룡은 거침없었다.
"그래 바로 너!"
"……."
"나이 젊겠다. 그만하면 생긴 것도 반반한 데다 무공도 쓸 만하고……! 게다가 천하제일의 거부인 개봉부(開封府)의 뇌대인을 아버지로 둔 까닭에 웃분들의 친분을 빌미삼아 등룡왕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설혜와 친분을 맺기도 쉬웠을 테지."
뇌파극은 망연자실했다.
"그래서……나를 흉수로 찍었다는 거냐?"
석비룡은 괴이하게 웃었다.
"어느 모로 보나 조건이 완벽하니까!"
뇌파극은 자다가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것과 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껄껄,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석비룡은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물쩡 넘어가지 말고 순순히 시인하지 그래?"
뇌파극은 웃음을 뚝 그치고 석비룡을 흘겨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내 되도록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네놈이 그렇게 나오니 나 또한 예전부터 의심했던 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군."
석비룡은 대수롭지 않은 척하면서 은근히 기대에 찬 시선으로 뇌파극을 쳐다봤다.
"어디 그 우둔한 머리로 누구를 생각했다는 건지 들어나 볼까?"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네놈이지!"
"내, 내가 어떻게 됐다고?"
석비룡은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뇌파극은 웃음도 보이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네놈처럼 모든 정황에 딱 맞는 놈이 어디 있냐?"
석비룡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고, 뇌파극은 점점 신이 나는 듯 사납게 다그쳤다.
"더구나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현현교의 입구를 정확히 발견해 냈으니 결코 현현교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으며, 등룡왕부가 멸망하던 날 네놈은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없었어. 그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거기다 틈만 나면 설혜랑 줄창 붙어 지낸 놈이 누구야? 바로 네놈 아냐? 남자랑 여자가 허구헌날 붙어 지내면 어떤 감정이 발생하는지도 자세히 설명해줄까?"
그 말에는 석비룡도 가슴이 뜨끔했다.
진실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의 생명과 바꿔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를 추호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석비룡은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아, 아무리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등룡왕부를…… 이놈아! 등룡왕은 내 외삼촌이고 설혜는 외사촌이야!"
뇌파극은 완전히 꼬리를 잡았다 생각하고 더욱 물고 늘어졌다.
"흐흐! 네놈이 색광서생이라는 것은 천하가 알고 있어. 설혜를 사랑했는데, 그것이 인정을 받지 못하자 화가 치밀어 이판사판으로 등룡왕부를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렸던 거야. 어때, 내 추리가 너무 정확하지 않나?"
석비룡은 더 참지 못하고 뇌파극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아예 얘기를 만들어 내? 이 때려죽일 놈 같으니!"
뇌파극도 지지 않고 석비룡의 멱살을 잡았다.
"얘기를 먼저 지어낸 건 누군데?"
그들은 서로 멱살을 잡고 바락바락 악을 써 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아!"
"그러니까 왜 겁대가리 없이 잠자는 사자를 간드리냔 말야, 새꺄!"
(2)
석비룡과 뇌파극은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렸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교주 좌엽선의 거처인 존각(尊閣) 앞으로 다가갔다.
존각 안으로 들어서기 전, 뇌파극은 갑자기 진지해지며 물어왔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설혜는 아직도 그 상태냐?"
두 사람은 아옹다옹 싸우면서도 만남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푸는 것도 잠깐이다.
석비룡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분고분 대답을 해주었다.
"상태는 여전하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
"희망이……?"
의아해 하는 뇌파극의 얼굴을 쳐다보며 석비룡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부님께서 설혜를 부활시키기 위해 피땀을 쏟고 계신다면 이해할는지 모르겠다만……."
"부활?"
뇌파극은 깜짝 놀랐다.
"그, 그게 가능한 얘기냐?"
"내 예상이 맞는다면 늦어도 한 달 안에 설혜는 살아난다. 이건 내기를 해도 좋아!"
뇌파극은 하하하! 웃었다.
"살다보니 이렇게 놀랍고 기쁜 일도 있군."
"설혜만 부활하면 흉수의 정체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란 얘기지."
석비룡은 의기양양해서 말하다가 수정관 속에 갇힌 설혜의 모습을 떠올리곤 자기도 모르게 풀이 죽었다.
"거기까진 좋은데 문제는 뱃속에 들어있는 씨앗이란 말이야."
뇌파극은 펄쩍 뛰었다.
"씨앗이라니?"
석비룡은 쯧쯧 혀를 찼다.
"뱃속에 애를 배었단 말이다."
"뭐, 뭐야? 그럼 설혜가 임신을……?"
* * *
끼이익!
오랫동안 사람이 돌보지 않아 녹슨 문이 거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석비룡과 뇌파극을 맞이한 것은 오래 묵어 곰팡내 나는 퀴퀴한 냄새와 거미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사방에 쳐놓은 거미줄, 그리고 바닥에 쌓인 먼지뿐이었다.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자 바닥은 꺼져 내릴 듯 쿵쿵! 울렸다.
안쪽의 원형 탁자 주위에는 꼭 스물 네 구의 해골이 등을 꼿꼿이 편 채 앉아 있었다.
뇌파극은 찜찜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젠장할! 어디를 가나 온통 해골 천지로군."
석비룡은 해골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말했다.
"은천이십사룡(隱天二十四龍)이야."
"은천이십사룡?"
"좌엽선의 주위를 그림자처럼 지키는 호위무사들인데 각자의 무공이 어지간한 문파의 장문인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하더군."
뇌파극은 믿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앉은 채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죽은 것 같은데…… 그렇게 뛰어난 고수들이 이런 식으로 고스란히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 건가?"
딴은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당시 은천이십사룡 가운데 하나라도 죽일 수 있는 자는 강호에 많지 않았다. 더구나 스물네 명을 한꺼번에……
단언컨대 신이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석비룡은 은천이십사룡 중 하나를 가볍게 발로 툭 찼다.
와르르르……!
수수깡을 잇대어 놓은 것처럼 뼈다귀들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석비룡은 뼈 하나를 주워들고 큼큼,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었군."
뇌파극이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됐는데?"
"독(毒)이야. 그것도 아주 지독한……! 전혀 무방비 상태에서 모두 독살됐어. 그만큼 믿었던 상대에게 당했다는 얘기지."
"은천이십사룡이 믿는 상대라면 좌엽선과도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얘긴데……."
뇌파극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석비룡은 벌써 문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어? 안으로 더 안 들어가 보고?"
석비룡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보나마나 저 안에도 구역질나는 해골들만 즐비할 테니까."
존각에서 나온 두 사람은 오른쪽의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백 년 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와 풀들은 제멋대로 키재기를 하며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석비룡과 뇌파극은 머리 위에까지 이르는 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양쪽이 낭떠러지인 좁은 오솔길 위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를 돌아보니 오던 길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뿐더러 주위의 풍경이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뇌파극은 기겁을 했다.
"이, 이게 뭐야?"
석비룡을 쳐다봤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왜 갑자기 이런 곳에 서 있는 거지?"
"함부로 움직이지 마!"
석비룡은 소리를 질러, 발을 떼려는 뇌파극을 제지했다.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살폈다.
"보고만 있어. 쓸데없이 길 밖으로 몸이 벗어나면 그대로 끝장이야!"
뇌파극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호, 혹시 우리가 진법에……?"
석비룡은 싸늘하게 말했다.
"보통 진법이라면 걱정도 안 해. 이건 특별해. 차원의 한계를 뛰어넘어 걷잡을 수 없는 환각 속으로 인간을 빨아들이는…… 보이는 게 실상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 죽음의 마수가 펼쳐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이 진법의 무서운 점이지."
눈을 까뒤집고 살펴봤지만 이 진법의 어디에도 허점은 보이지 않았다.
석비룡의 얼굴은 소태라도 씹은 표정이 되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떤 자식이 이따위 돼먹지 않은 장난질을 쳐놓은 거야?"
허나 욕을 해서 풀릴 문제는 아니다.
자신들은 이미 진 속에 깊이 들어와 있고, 진을 풀기 전에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석비룡은 생각했다.
'이건 분명히 노야가 나에게 가르쳐 준 아홉 가지 환상진법 중 하나다! 헌데 어떻게 이것이 여기에 펼쳐져 있단 말인가?'
뇌파극은 울상을 짓고 거의 애원을 하다시피 했다.
"어떻게 좀 해봐, 임마! 마냥 이러고 있을 거냐?"
길 양쪽의 흙이 부스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며 길폭이 눈에 띄게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방정 떨지 말고 조용히 해!"
석비룡은 버럭 소리를 질러 뇌파극의 입을 막아놓았다.
'팔방(八方)이 모두 사로(死路)로 봉쇄되어 있고 단 한 군데의 생로(生路)도 열려 있지 않다! 시간이 없다! 일각이 지나면 열리지 않은 생로조차 모두 사로로 변해 버린다. 그 때가 되면 대라신선이라도 이곳을 탈출하지 못해!"
울컥 치솟는 울화를 참고 아무리 이리저리 살펴도 방법이 없다.
마침내 석비룡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해제가 안 된다면 모두 부셔 버릴 수밖에!'
그의 양손에서 예리한 바람소리가 일며 무시무시한 기운이 정면을 향해 해일처럼 덮쳐갔다.
'이 진법이 설치된 지 백 년이 넘었다면 자연지물의 성쇠에 따라 진법 자체에 변화가 있을 터!'
콰콰콰쾅!
강렬한 폭발음과 검은 연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그들이 밟고 있던 좁은 소롯길과 낭떠러지는 다시 울창한 수림으로 변했다.
점차 연기가 가셔졌고……
"진은 완전히 해제된 거야?"
뇌파극이 다가왔다.
"해제는 됐는데……."
석비룡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뇌파극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다가 윽! 하고 숨을 삼켰다.
맞은 편 석실 중앙에는 한 개의 태사의가 놓여져 있고, 태사의 위에는 고슴도치 같은 노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바라보니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양 볼은 옴폭 패였으며 깡마르고 노란 얼굴은 주름 투성이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목과 손의 피부는 늙은 나무의 말라비틀어진 무늬처럼 쭈글쭈글했다.
이미 죽은 시체였지만 노인에게서는 숨막히는 기도가 풍겨 나왔다. 퀭한 두 눈은 석비룡과 뇌파극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것 같았다.
"호, 혹시…… 저 노인이 현현교의 교주 좌엽선……?"
뇌파극이 더듬더듬 물었고 석비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뇌파극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혀를 내둘렸다.
"과연 일세를 주름잡던 희대의 효웅답군. 죽은 지 이미 백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저 숨 막히는 기도라니……!"
"시체가 썩지 않아서 더욱 그렇게 느껴질 거야."
석비룡은 좌엽선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혈음신장 덕분이지. 어쨌거나 혈음신장의 속성법을 창안한 장본인이 바로 이 양반이거든."
태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어 좌엽선의 가슴과 손목을 짚었다.
"체내의 모든 경맥이 혈음의 한기로 덮여있고 죽은 뒤에도 그 한기가 사라지지 않아 시체가 이렇게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는 것이고……"
뇌파극은 뒷짐을 지고 좌엽선의 주위를 둘러보며 쯧쯧 혀를 찼다.
"한창 잘나갔던 양반이 어쩌다 이렇게 불쌍한 동태 신세가 되셨소. 그래."
석비룡은 좌백선의 맥을 짚었던 손목을 내려놓다가 문득 시선이 태사의 아래쪽을 향하면서 반짝, 빛을 발했다.
"가만!"
그는 즉시 옆으로 돌아가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손가락으로 긁어 쓴 듯 작게 휘갈겨진 글씨가 있었다.
"여기 뭔가 적혀 있어!"
석비룡이 소리쳤고, 뇌파극도 황급히 다가와 몸을 숙였다.
"빨리 읽어봐."
뇌파극이 재촉을 했다.
석비룡이 첫 구절을 읽었다.
"처음부터 모든 건 삼좌존의 음모였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껴서인지 석비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3)
처음부터 모든 건 삼좌존의 음모였다.
이제 이곳에 생존자는 아무도 없다.
남은 건 삼좌존과 그의 추종자들뿐……
현영!
이곳을 나가는 즉시 모든 출구를 봉쇄하라.
그리고 삼좌존을 제거하여 나의 한을 풀어다오.
네가 혈음신장을 익혔으나 삼좌존 역시 혈음신장의 구결이 적힌 비급을 가지고 있으니 승산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천령음맥을 가진 여인을 찾거라.
찾아서 그녀의 음기를 흡수한 뒤 수태를 시키고 그 몸에서 아이가 나거든 혈음신장을 수련시키도록 하라.
명심하라, 현영!
혈음신장을 극성까지 완성하는 길은 오직 그 한 가지 방법뿐임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석비룡은 가슴이 꽉 막히는 갑갑함을 느꼈다.
'노야의 말대로 현영이 내 아버지라면 그는 비단 현현교와 깊은 연관이 있을 뿐 아니라 나이도 이미 백 살이 넘었다는 결론이 아닌가!'
의문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영과 좌엽선은 또 어떤 관계라는 말인가?'
뇌파극은 그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석비룡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뇌파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여기 적힌 대로라면 현현교를 무너뜨린 건 장로원이 아니라 삼좌존이란 얘기 아냐?"
그 말에 석비룡은 얼른 정색을 하고 고개를 돌려 뇌파극을 쳐다봤다.
"여기 적힌 글이 사실이라면 은천이십사룡을 독살시킨 건 삼좌존의 한 명인 독마(毒魔) 순우창이 틀림없어. 좌엽선을 앉혀둔 채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자는 역시 삼좌존의 한 명이자 좌엽선의 동생인 좌숙야 밖에 없을 테고……."
그때였다.
고오오오!
수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뇌파극은 즉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설마 그 환상진인지 뭔지 하는 게 다시 펼쳐지는 건 아니겠지?"
석비룡은 무릎을 으드득 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는 게 급선무야!"
고오오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수림 밖으로 나온 석비룡과 뇌파극은 멀리서 땅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저건 뭐야! 따, 땅이 움직이고 있잖아?"
두두두두……!
급기야 그들이 서 있는 땅도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한 순간 석비룡의 몸이 경직되었다.
"비……비천칩의(飛天蟄蟻)야!"
우우웅! 우우우……웅!
수천 만, 수억의 비천칩의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그 모습이 마치 땅이 파도가 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맙소사! 저 끔찍한 괴물들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두 사람의 얼굴은 핼쑥하니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앞뿐만이 아니다. 뒤쪽에서도, 오른쪽과 왼쪽에도 비천칩의가 군무(群舞)를 추며 나타났다.
잘 훈련된 무희(舞姬)들처럼 비천칩의들이 일제히 하늘로 올랐다 땅으로 내렸다 하면서 춤을 추는 듯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목숨이 위험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콰우우우우우……!
비천칩의들은 수십 갈래로 편대를 이루어 사막에서 부는 회오리 기둥처럼 날아올랐다. 현현교의 지붕과 담을 새까맣게 뒤덮으면서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석비룡과 뇌파극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여긴 폐쇄된 공간이라서 늦으면 피할 곳도 없어!"
"알았으면 빨리 튀어!"
쉐에엑……!
그들은 처음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사람의 신형이 섬전과 같은 속도로 비천칩의 속을 파고들었다.
슈아아아……!
너무나 순식간에 스쳐갔기 때문에 비천칩의들은 두 사람을 발견했지만 떼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아니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입을 벌려 물려는 순간 벌써 지나가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처음 그들이 통과했던 현현교의 본부로 이어지는 지하통로 속에 들어와서야 마음 놓고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헉헉!
석비룡은 히죽 웃었다.
"됐어. 놈들을 빠져나왔어!"
그때였다.
쿠쿠쿠쿠!
엄청난 진동음에 두 사람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 이런! 천정이 무너지고 있어."
쩍! 쩌……억!
천정에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마른 논바닥처럼 금이 갔다.
콰콰콰콰!
돌조각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속에서 비천칩의들도 함께 쏟아져 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집요하게 먹을 것을 추적하는 비천칩의가 통로를 무너뜨린 것이다.
"피햇!"
소리를 지르며 석비룡은 몸을 날렸다.
콰콰콰쾅!
마치 집중포화라도 쏘듯 돌무더기들이 전후좌우에서 퍼부었다.
"으아아아!"
뇌파극의 한 줄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석비룡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우박처럼 떨어지는 돌에 가려 뇌파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뇌파극!"
목을 쥐어짜며 소리를 질렀지만 뇌파극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콰콰콰콰……!
우우우웅……!
들리는 것은 돌 떨어지는 소리와 목표물을 다시 발견하고 달려드는 비천칩의의 날개 소리뿐이었다.
석비룡은 꾹 이를 악물었다.
몸을 홱 돌려 천리표풍의 신법을 전개했다.
쏴아아아……!
석비룡의 신형이 사라졌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천정이 와르르! 무너지며 집채만 한 바위가 콱! 박혔다.
꽈르르르!
한 달 간의 노력 끝에 발견한 현현교로 들어가는 석문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석비룡은 석문 앞에서 안타깝게 그 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꽈꽝!
석문은 완전히 무너졌고, 언제 그 자리에 석문이 존재했냐는 듯 커다란 바윗덩어리만이 굴러다녔다.
"뇌! 파! 극!"
석비룡은 짐승이 포효하듯 몇 번을 거듭 그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헛수고였다.
'뇌파극……!'
석비룡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코 끝이 찡하며 눈시울이 따뜻해졌다.
어릴 적 죽마고우이자 강호를 누비는 동안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던 놈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아옹다옹 싸우고 서로 헐뜯기에 바빴지만 목숨만큼이나 소중했던 친구였다.
투둑!
발 아래에 돌 부스러기가 굴러왔다.
'응?'
석비룡은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돌무더기 속에서 바위 하나가 꿈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뇌파극!"
석비룡이 두 팔을 벌리며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콰쾅!
바위가 박살나면서 수천 마리의 비천칩의가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우우웅!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비천칩의.
"빌어먹을!"
석비룡은 달려드는 비천칩의를 피해 다시 몸을 돌려야 했다.
몸은 빠르게 쭉쭉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다.
'뇌파극…… 미안하다…… 뇌파극…… 나의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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