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시(34세, 1795년작)
인생이 초목과 다름 없어서
물과 흙으로 목숨을 잇는다
입으로 땅의 털을 먹으니
곡물이 그 마땅한 것이로다
그러나 곡물이 주옥처럼 귀하니
가난한 자 어찌 영양을 취할소냐
골마른 목 고개는 구부린 따오기며
주름 잡힌 살매는 닭의 가죽인양
우물이 있어도 새벽에 길으지 않고
섶이 있어도 밤에 불때지 않는다
사지가 비록 움직이기는 하다
행보는 맘대로 할 수 없어라
빈 들판에 쓸쓸한 바람 부는데 (48)
슬피 우는 기러기 어디로 가는고?
고을 삿도가 어진 정사를 한다고
제 주머니 털어 구제를 한다지요
걸음걸음 고을 문 앞에 이르러
입을 쳐들고 죽가마로 모여든다
이건 개 돼지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을
사람들은 도리어 엿처럼 달게 먹누나
삿도는 본래 어진 정사를 하려 않고
또한 제 주머니를 털려고도 않았다
관가 창고를 악한 놈이 엿보나니
어찌 우리들이 파리하지 않으랴?
관가 마구에는 말들이 살쪘나니
실상은 우리들의 살로써 되었구나
슬피 울부짖고 고을 문을 나서니
현기는 나서 앞길이 희미하도다
갈곳이 어디냐 잠간 누른 잔디 밭으로
무릎을 펴고서 우는 아이를 달래누나
고개를 수그리고 서캐이를 잡느라니
두 줄기 눈물이 비오듯 하누나
음미하기)
정약용이 34세인 1795년에 지은 시이다. 병조참의를 하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어쩌면 전해 암행어사를 다녀왔던 기억이 떠올라서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5언 96줄, 곧 480자에 이르는 장편시여서 3부로 나누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본래 정약용은 번호를 매기지는 않았지만 3분된 부분마다 소릉 이가환의 평을 간단하게 붙였다. 최익한은 여기에 맞춰 1-3의 번호를 매겼다. 곧 각 번호마다 5언 32줄, 곧 160자 분량이다. 또 글의 내용에서도 어느 정도 구분이 된다.
1의 마지막 소릉 이가환의 평은 “찬란할사 당 나라 원 도주의 문장 기운 드넓어 거침이 없네[粲粲元道州 詞氣浩縱橫]”하였다. 여기서 원도주는 도주자사 원결(元結: 723-772)을 가리킨다.
본래 제목은 ‘飢民詩’이다. ‘기민’이라고 하면 될 것같은데, ‘시’를 붙인 것도 좀 이상한데 최익한이 그냥 본래 제목을 그대로 쓴 점도 이상하다. '굶주리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최익한의 번역으로서는 매우 무난한 방식으로 흘러갔다. 의역은 거의 없다. 다만 병육(病肉)을 병든 살갗이 아니라 주름잡힌 살매(살갗)으로 번역한 것은 굶주렸기에 병든 것처럼 목가죽이 주름잡힌 것으로 본 듯하다.
중간쯤 "고을 삿도가 어진 정사를 한다고/ 제 주머니 털어 구제를 한다지요"라고 감격스럽듯이 사또를 칭찬하다가 두세줄 밑에 "삿도는 본래 어진 정사를 하려 않고/ 또한 제 주머니를 털려고도 않았다"는 반어적인 구절이 매우 재미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 내용을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문대로라면 아래 구절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진 정사 베푸는 것 원하지 않고/ 제주머니 털어 구휼함도 달갑지 않네"가 정확할 듯한데 최익한은 여기서 한번 돌려치기를 한 듯하다.
최익한이 아는 방언들이 많이 나타난다. 골마른 목고개는 마른 목, 곧 야윈 목덜미를 가리킨다. 살매는 살갗의 방언으로 보인다. ‘길으지’는 긷지이다.
아무튼 고을에서 이루어지는 재난의 참상, 이때 조선왕조에서 매우 자랑하는 구휼 정책도 실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거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지은 듯하다.
<飢民詩>
人生若草木
水土延其支
俛焉食地毛
菽粟乃其宜
菽粟如珠玉
榮衛何由滋
槁項頫鵠形
病肉縐鷄皮
有井不晨汲
有薪不夜炊
四肢雖得運
行步不自持
曠野多悲風
哀鴻暮何之
縣官行仁政
賑恤云捐私
行行至縣門
喁喁就湯糜
狗彘棄不顧
乃人甘如飴
亦不願行仁
亦不願捐貲
官篋惡人窺
豈非我所羸
官廏愛馬肥
實爲我膚肌
哀號出縣門
眩旋迷路岐
暫就黃莎岸
舒膝挽啼兒
低頭捕蟣蝨
汪然雙淚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