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불행을 좇아내는 믿음
07/18화(火)마 15:21-28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마 15:25)
신앙은 누구에게 주재권이 있는가? 주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가 중요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면 죄를 짓는 것이고, 삶의 주체가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중요한 것은 부모의 신앙이 바를 때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귀신 들린 것은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고 오직 예수로만 해결됩니다.
불행을 좇는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절대 간구하는 신앙입니다.
딸을 고쳐달라는 여인의 말에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 이방 여인은 소리를 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절대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오직 주님만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단지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을 다해 주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넘는 방법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구하는 신앙입니다. 평안이 올 때까지 간구합니다.
▣겸손한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여인을 개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자신은 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며 부스러기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구하는 자의 태도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참 진리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겸손할 때 성령의 역사로 귀신의 역사가 끊어집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주인 된 태도입니다. 교만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여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자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예수님께 믿음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딸의 병이 낫게 됩니다. 이방인들도 실상은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지만, 그들이 모든 것이 은혜로 된 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And...
우리가 영적 열매를 맺는 것은 ‘일하는 것’에 있지 않고 ‘죽는 것’에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시적인 기쁨을 택하느냐 혹은 십자가의 길을 택하느냐? 선택권이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든 잠시 고난을 겪지만, 영원의 삶을 선택하든 지금 결정해야 합니다. 선택의 결정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큰 차이로 변화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선택할 때 육안으로 보면 그 길은 고난의 길인 것 같으나 주님과 함께 하는 그 길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도구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릇입니다. 나의 선택에 따라 성령을 담는 그릇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사단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때로는 하나님의 침묵에 힘들 때도 있지만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테스트하십니다. 신앙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기간에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내가 느끼지 못할지라도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첫 등교 할 때 잘 가고 있는지 몰래 뒤에서 따라가 보는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자아(自我)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주님과 연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일로 걱정 근심 염려할 때 하나님에게서 분리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갈등을 많이 합니다. 갈등을 없애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아를 죽음에 넘기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면 갈등이 사라집니다. 진정 죽은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고, 감정도 없고, 자신의 생각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가장 행복합니다. 내게 주님의 성품만 남기 때문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더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쁩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만큼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많이 소유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존재가 내 안에 가득할 때 행복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터널을 지나며 힘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터널을 왜 뚫어 놓았을까요? 돌아가는 길을 단축하기 위해 터널을 만든 것입니다. 비록 캄캄하고 숨 막히는 고통이 있지만, 지름길로 가기 위해 만든 것이 터널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고통이라는 터널이 없다면 많은 실수를 되풀이하며 진리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터널로 집어넣으셨다면 가장 빠른 길로 인도하고 싶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재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터널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십자가에 내가 달린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이 달린 십자가에 내가 달릴 수 있도록 나를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자아, 옛사람을 못박아야 합니다. 자아의 죽음 뒤에 주님과 연합의 영광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충만
https://youtu.be/IFX1nyHpKp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