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주유가 껄껄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그도 속일 수 있었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노숙이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주유가 비로소
은근히 뽐내는 듯한 말투로 털어놓았다.
"오늘 황개를 아프게 때린 것은 실은 모두가 계책이외다.
나는 그를 조조에게 거짓 항복을 시키기 위해 먼저 고육계를 베푼 것이오.
그렇게 하여 조조를 속이기만 하면
불(火)로 공격하여 이길 길이 날 것이기 때문이오."
바로 공명이 말한 그대로였다.
노숙은 속으로 다시 한 번
공명의 귀신같은 헤아림에 감탄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주유가 또 공명을 죽이려 들까봐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
한편 황개는
자기 진중으로 돌아가자마자 앓아 누웠다.
목숨을 건진 게 다행이라 싶을 만큼 심한 상처였으나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인 듯싶었다.
여러 장수가 번갈아 찾아보고 좋은 말로 위로했지만
황개는 길게 탄식할 뿐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택이 찾아보러 왔을 때였다.
황개는 문득 좌우를 꾸짖어 물리치고
감택만 병상 곁으로 불러들였다.
비록 벼슬자리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감택은 황개와는 특히 가까운 사이였다.
단둘이 남게 되자 감택이 먼저 물었다.
"장군께서는 전에 도독과 원수진 일이 있습니까?"
무언가 살피는 듯한 눈길이었다.
황개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없소."
그러자 감택이 문득 모든 걸 알았다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공께서 받은 고초는 바로 고육계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황개가 놀라 물었다.
☆☆☆
감택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늘 도독께서 하는 양을 보니 열에 여덟 아홉은 짐작이 갔습니다.
그래도 혹시 해서 특별히 찾아와 물어본 것이지요."
그러자 비로소 마음을 놓고 황개는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3대에 걸쳐 오후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제대로 거기에 보답하지 못했기에
이제 그 계책을 올려 조조를 깨뜨리고자 하는 것일세.
따라서 비록 내 몸은 고초를 겪었으나 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마음으로 깊이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공을 만나니 만 가지 걱정이 다 스러지는 듯하네.
공이 평소부터 가슴 가득 충의를 품고 있음은 내가 잘 아는 바라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 보고 싶으이."
"장군께서 제게 하시려는 말씀은
혹시 저를 시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는 글을 보내려 하심이 아닙니까?"
감택이 얼른 황개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을 받았다.
감택의 자는 덕윤으로 회계 산음 땅 사람이었다.
집이 가난한 중에도 배우기를 즐겨하여
매양 남의 책을 빌려다 읽었는데 한 번만 읽으면 잊는 법이 없었다.
거기다가 말솜씨가 좋고
담력이 있어 일찍부터 널리 이름을 얻었다.
손권은 그를 불러 모사로 썼는데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황개와 가장 친했다.
"실로 내 뜻이 그러하네. 공이 한 번 그 일을 해주겠는가?"
감택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황개는
그의 물음에 더 말을 둘러대지 않고 바로 물었다.
감택이 흔연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한번 해보지요."
황개는 감택의 재주와 말솜씨라면
틀림없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에 기쁨을 이기지 못해 몸의 아픔도 있고
병상에서 내려와 감택에게 절하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나무나 풀처럼 헛되이 죽어 썩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장군 같은 분께서도 이렇듯 몸을 내던져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시는데 이 감택이 어찌 목숨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감택은 그렇게 겸양의 말을 한 뒤 제 편에서 오히려 서둘렀다.
"일을 늦추었다가는 어떤 변이 날지 모릅니다. 얼른 떠나게 해주십시오."
"글이 이미 닦아 두었네 그려."
황개가 더욱 감격한 얼굴로 감춰두었던 글 한 통을 찾아 내밀었다.
일이 되려고 그러는지
절로 손발이 척척 맞는 판국이었다.
☆☆☆
황개의 편지를 받아 갈무리한 감택은
그날 밤 고기잡이 늙은이로 꾸민 뒤 작은 배를 훔쳐내어 강을 건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북쪽에 있는 조조의 진채를 행해서였다.
차가운 밤하늘엔 별만 가득한데 강을 가로지르는 감택의 배는
3경 무렵하여 조조의 진채에 이르렀다.
강을 지키고 있던 조조의 군사들이 감택을 붙들고
한밤인데도 조조에게 그 일을 알렸다.
"간세(첩자)가 아니던가?"
조조가 그렇게 묻자 알리러 온 군사가 대답했다.
"다만 한 사람 고기잡이 늙은이 같은 꼴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스스로는 말하기를 동오의 모사 감택이라고 했습니다.
중한 기밀이 있어 승상을 뵈러 왔다고 합니다."
그 말에 긴장한 조조는 곧 감택을 불러들이도록 했다.
감택이 군사의 인도로 조조의 장막에 이르러 보니
촛불이 휘황하게 밝혀진 가운데 조조가 궤에 기대어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었다.
조조가 감택을 보고 대뜸 물었다.
"그대는 동오의 참모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 여기로 왔는가?"
"내가 듣기로 조승상은 어진 이 구하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한다더니 터무니없는 말이었구나.
황공복, 실로 당신은 크게 잘못 생각했구려!"
감택은 대답 대신 그런 한탄부터 앞세웠다.
조조의 사람 맞는 태도가 겸손하지 못함을 걸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크게 동요되는 기색 없이
실눈을 지어 감택을 살피며 대답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나와 동오는 아침저녁으로 군사를 맞대 싸우고 있다.
그런데 그대가 이렇게 홀로 왔으니 어찌 그 까닭을 묻지 않겠는가?"
자신을 격하게 만들려는 감택의 수작쯤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조조의 말투였다.
감택은 그토록 매서운 조조의 헤아림에 은근히 놀랐다.
쓸데없이 격동시키느니보다는 먼저 솔깃한 말부터 들려주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이 온 까닭부터 밝혔다.
"황개는 동오를 3대째나 섬기고 있는 오래된 신하였습니다.
이번에 주유로 부터 여러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큰 잘못도 없이 모진 매를 맞았습니다.
이에 그 분함과 한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승상께 투항하여 원수 갚을 계책을 꾸미고 있는바,
특히 저를 보고 함께 일을 꾀해 보자고 했습니다.
저와 황개는 비록 성이 다르나 정은 골육에 못지 않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밀서를 바치러 왔는데 승상께서는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역시 조조는 달랐다.
적의 이름난 장수가 항복을 하러 사람을 보냈다면
마땅히 기뻐하고 볼일이었으나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편지가 어디 있는가?"
그렇게 목소리도 차갑게 들릴 만큼 차분했다.
감택이 품안에서 황개의 밀서를 꺼내 말없이 조조에게 바쳤다.
봉함을 찢은 조조는 등불을 당겨 놓고 안에 든 글을 읽어 나갔다.
거기엔 대략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이 황개는 손씨네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온 터라
본시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세를 논하자면,
지금 강동은 겨우 여섯 군의 얼마 안 되는 군세로 중원의 백만 대군을 맞서려 하고 있으니,
적은 군사가 많은 군사를 당할 수 없음은
천하가 다 알리지 않고 한결같이 그 같은 일의 불가함을 알고 있는데
오직 주유 어린것만이 얕고 어리석은 고집에 빠져
스스로의 재주만 믿고 계란을 들어 바위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유는 임금이라도 된 양 함부로 아랫사람에게
벌과 복을 내리어 죄 없는 사람이 형을 받고 공 있는 사람이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황개 또한 동오의 여러 대를 섬긴 오랜 신하임에도
까닭 없이 욕을 보았으니 마음으로 한스럽기 실로 그지없습니다.
엎드려 듣건대 승상께서는
정성을 다해 사람을 맞고 옛 일을 마음에 끼는 법 없이
선비들을 받아들이신다 했습니다.
이 황개 비록 동오의 녹을 먹으며 여러 번 승상께 대적한 일이 있으나
이제 무리를 이끌고 승상께 항복하여 공을 세움과 아울러
주유 그 어린것에게 당한 욕을 씻고 싶습니다.
군량과 말먹이 풀이며 수레 병장기까지 배가 나는 대로 바치고자 하는 바
피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아뢰오니 부디 저를 의심(疑心)하지 말아 주십시오>
조조는 앞에 놓인 탁자 위에
황개의 편지를 얹어놓고 여 남은 번이나 뒤적이며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탁자를 치며
눈을 훑어 감택을 노려보고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황개는 고육계를 써서 너로 하여금 거짓으로 항복하는 글을 전하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걸려들면 다시 딴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겠지.
이놈,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렇게 와 놀리고 욕 뵈려 드느냐?"
그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끌어내 목베지 못할까!"
감택은 속으로 뜨끔했으나 전혀 뜻밖은 아니었다.
어떤 조조라고 몇 마디 달콤한 말과 글 한 통에 넘어가겠는가.
오히려 감택의 대비는 조조가 그렇게 나올 때를 위해서 더 잘 마련되어 있었다.
무사들에게 끌려나가면서도
낯빛 하나 변함없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껄껄거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미 네놈의 간사한 계책을 알아보았는데 넌 무엇이 좋아 그렇게 웃느냐?"
이상히 여긴 조조가 감택을 다시 끌어오게 해놓고 물었다.
감택이 웃음이 그치고 한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무엇이 좋아 웃는 게 아니외다.
다만 황개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비웃었을 뿐이오."
"어찌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냐?"
조조가 다시 물었다.
너무도 태연스런 감택의 언동에 자신의 짐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것 같았다.
"죽이려면 빨리 죽일 것이지 웬 물음이 그리 많으냐? 어서 나를 죽여라!"
감택은 짐짓 허세를 부려 조조의 궁금증을 돋우었다.
이제는 말까지도 함부로 했다.
조조도 더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매섭게 몰아댔다.
"너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읽어 간사한 속임수를 꾸민 계책은
다른 사람이라면 속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속이지 못한다."
"네가 읽은 그 책에서는 도대체 어떤 게 간계라고 하더냐?"
감택은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조조를 비웃듯 물었다.
그래도 조조는 냉정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너희들의 간계가 어디서 드러나게 되었는지 알아야
네놈이 죽어도 한이 없으리라 여겨 일러준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항복해 올 뜻이 있다면 어찌 이 글에 그 날짜와 시각을 밝히지 않았느냐?
그래 놓고도 네놈이 이렇듯 뻗댈 수 있느냐?"
그 말을 듣자 감택이 문득 크게 웃은 뒤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했다.
"너는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병서 많이 읽은 것을 스스로 높이 치고 있구나.
이 못 배운 것아, 차라리 군사들 거두어 돌아가라!
그렇지 않고 싸우다가는 반드시 주유에게 사로잡히고 말리라.
너 같은 것의 손에 욕되게 죽는 게 참으로 원통하구나!"
"배운 것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조조가 다시 발끈해서 물었다.
☆☆☆
감택은 그런 조조를 더욱 심하게 건드렸다.
"너는 꾀를 쓸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세상일의 이치에조차 밝지 못하다.
어찌 배움이 있는 자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내 말에 어디가 틀렸기에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느냐?"
"너는 어진 이를 예로 대하지 않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대답하겠느냐?
나는 다만 여기서 이대로 죽을 뿐이다."
감택이 끝내 그렇게 뻗대자
조조가 약간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좋다 만약 네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면
나는 어진 이로 대접하고 엎드려 맞아들이겠다. 어서 한 번 말해 보아라."
그러자 감택도 성난 표정을 지우고
앞서와는 달리 예까지 갖추어 대답했다.
"승상께서는
<주인을 저버리고 도둑질을 하는데는 그때를 미리 정할 수 없다>는 말도 듣지 못하셨소?
만약 이제 황개가 그 글에서 날짜를 정해 보냈다가
형세가 급하고 절박하게 틀어져 그대로 손을 쓰지 못하게 됐는데도
이쪽에서 그를 맞으려 나섰다가는 그대로 주유에게 우리 일이 들켜버릴 것이 아니겠소?
다만 때를 보아 재빨리 해치울 뿐
미리 날짜를 정해 둘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일이외다.
그런데 그 같은 이치를 따져 보려고도 않고 죄 없는 사람을 억지로 죽이려고만 드니
배운 것 없는 자란 소리를 듣게 된 것이오."
조조가 들어보니 한마디도 어김이 없는 소리였다.
이에 조조는 얼굴빛을 풀고 감택을 풀어 주게 한 뒤 자리에서 내려와 죄를 빌었다.
"내가 일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높으신 분을 잘못 욕보인 것 같소.
창칼을 맞대고 있는 싸움터라 의심이 지나쳐 그리 된 것이니 부디 괴이쩍게 여기지 마시오."
"저와 황개가 투항하려는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바라고 달려 올 때의 그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속임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라도 믿어 주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감택은 더욱 공손하게 대답했다.
조조는 크게 기뻤다.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밝고 부드러운 얼굴로 감택의 두 손을 잡으며 다짐했다.
"만일 두 분께서 이번에 큰공을 이루시기만 한다면
뒷날 두 분께서 받는 벼슬은 반드시 모든 사람의 윗자리가 될 것이오."
"저희들은 벼슬이나 봉록(俸祿)을 구해 승상께 온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도리에 따르고자 할뿐입니다."
감택이 더욱 능청을 떨었다.
조조는 술을 내러 그런 감택을 두텁게 대접했다.
오래잖아 어떤 사람이 들어와 조조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수군거렸다.
듣고 있던 조조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그 글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곧 그 사람이 밀서 한 통을 올렸다.
그걸 읽는 조조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가득 떠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이 바로 주유와의 사항계 다툼에서
결정적으로 패하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조조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