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날 받아놨지 뭐!" | ||||||||||||||||||||||||||||||||||||||||||||||||
/예천향토문화연구회 김명회 고문을 보내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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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풍양 공처농요를 전승·발전시키는 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농요는 공처마을 고유의 노동요인데, 1980년대에 이르러 뜻있는 분들에 의해 복원·계승되었으며 1992년에는 전국민속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 농요는 모심기 소리부터 칭칭이까지 폭 넓게 펼쳐지고, 다른 농요와 혼합되지 않은 채 이 마을에서만 불러온 순수성과 소박성이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이런 선생의 선성(先聲)은 들은 지 오래이나 제가 고장을 떠난 지 몇 십 년이 되어 존안을 뵙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선생은 제 은사이신 고 수윤당 정양수 대창교장선생과 각별한 인연으로 같은 길을 걸은 지 반세기도 넘었다. 두 분은 예천향토문화연구회에서 한적(漢籍)을 국역하고 고장의 역사를 밝히고 가꾸는 일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특히 선생이 직접 운전하여 경향각지의 각종 지방사 관련 회의에도 함께 다니시고, 선인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문화유적도 찾아서 전국을 누비며, 서로 배우고 깨우치며 교학상장(敎學相長)을 몸소 실천하셨다. 그리고 예천문화원(원장 김종배)에 임원으로 오래 몸담으면서 예천군에서 발행하는 각종 지리지의 편찬이나 고전(古典)을 국역할 때 간행위원, 편찬위원으로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이 위원들은 대개 국역사업이 주된 일로서 한적속의 행·초서를 한자 한자 정본(整本)하여 이를 컴퓨터에 저장하였다가, 나중에 출력하여 한구(句) 한장(章)을 국역하여 윤문까지 마치게 된다. 이 모두가 눈이 빠지는 듯하고 뼈를 깎는 고통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들이었다. 동양고전에서 비롯된 선생의 타고난 박학(博學)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나 컴퓨터 실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워드는 물론 메일을 주고받는 등 수준급이었으며 팔십을 바라보는 고령임을 감안하면 전문가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윤당 선생 1주기가 되던 지난 1996년 6월 차기 연구회장(이석종)을 선임할 때 뵈오니 얼굴은 수척하나 안광이 형형하시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구회 발전을 위하여 좋은 말씀 내려주셨다. 저희들이 고문으로 추대하니 기꺼이 수락하시며 앞으로의 과제도 제시하였다. 해방정국 시 예천 지식인의 동향, 6·25사변 중 인민군 강점기의 예천 사회, 예천의 금석문집에 누락된 다른 금석문의 발굴 정리, 간행된 예천군지의 보완 등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과 저와의 작은 인연은 학암 장화식(張華植·1853∼1938) 대감의 행장 속에 나오는 온천한화지리(溫泉寒火之理)가 서화담(徐花潭·1489∼1546)의 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누정록 국역시 거론하던 장가영벽(張家靈壁)은 한·당 이래 중국고사인데, 우리나라에는 근년에 인동인 장석영(張錫英·1851∼1929) 선생의 문집에 잘 설명되어 있다는 등 고비 고비마다 교학을 장락(長樂)하시고 하문(下問)을 불치(不恥)하시니 가히 선비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저희 연구회에는 깊은 애착을 지니시고 매년 개최되는 연구발표회에 꼭 참석하여 발표도 하시면서 금년 모임에는 점심을 사겠다며 더욱 정진하라고 격려하셨다.
아, 선생님! 혹여 명부(冥府)의 시왕 중 제오대왕(第五大王) 앞에 가시더라도 평생의 선업(善業)이 쌓이고 쌓여서, 일별(一瞥) 만으로도 극락왕생하실 것이오니 아무 염려마세요. 그리고 선생의 영면으로 가장 애통해 하시는 유족께 삼가 조의를 표하며, 풍양 한동네에서 함께 생활하며 측근에서 우정을 나누시던 김병구 회장께도 망우(亡友)의 슬픔에 대하여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 두 분은 서로 도우며 자주 래왕하셨 는데 선생께서 약국일로 참석치 못하는 모임에는 회의자료를 한부씩 더 구해 오는 등 남다른 정의를 쌓으셨다. 선생의 일생은 필설로 다 밝힐 수 없으나 적어도 한 손에는 약전(藥典)을, 다른 한 손에는 고전을 들고 일생을 정진하신, 신·구학을 겸전하신 선비 중의 선비이시다. 김명회 고문 님! 이제 이승의 고통과 번뇌랑 모두 잊으시고, 안락하고 걱정 없는 행복의 세상, 저 서방정토에서 부디 강건하신 모습으로 환생하시기를 빌고 또 비옵니다. /선생 양례 후 3일 후학 김봉균 통곡 재배
■ 고 김명회 선생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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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천 풍양의 별 고이 잠드소서~
친구의 아버님이자 나의 아버님와 너무 절친하신 그분 너무 애통하네, 다시한번 명복을 바라며,,,,,,
항상 바쁘게 사셨지. 혜숙이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