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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쇠 구장 정문 데침장발 「한영원, 영건, 건강식당 화상기」.
출처:서령경매 소스: EK 이페어케이 플러스
도록번호: 354
견적 RMB: 180,000-280,000
거래가격RMB: 402,500(수수료포함)
354
장사쇠 구장 정문 데침장발 「한영원, 영건, 건강식당 화상기」.
청탁본
종이책 두 폭.
감장인: 성항(주백) 정기(백) 숙문석벽(백) 미수당(주) 숙문 검정(백) 학기(주) 숙문안학(백) 노지경안(백) 여위고 벽암득금석문자인(주)석지서칸제기(석지서칸제기)백) 석지서칸고장묵본(백) 석지서칸독비제기(주) 살비(주)
제목 : 한영원/영건/건강식당 화상기.옛 것을 탈본하고, 석지가 서쪽에 감춰져 있다.。
제발:1. 왕부 《잠부론》 운: 여사사당무숭화치(一舍堂務崇華……)…각일(刻一)이다.식당비는 역시 직불금이다.만, 사치를 참람하기 그지없다.
2.이 탈은 옷깃을 여미고 행장을 잘랐으며, 구탈은 심균초장본에 의하면교정기.
3.한영원7년9월21일삭일갑술식당석각약자오행대략 분별할 수 있는 자는 30여 자이다....또 사건 제1행 내주 하의는 '윤씨'라는 두 글자로, 형의와 의가 병치되어 있다.。
4.수귀리 문숙양식당 초상.
5.건강 원년 8월 을축삭19일 정미, 수귀리 문숙양식당.숙양고조사행정시속속(俗……)…사고조리시 속속.(요체채사하는 소자이고, 성공하는 자는 공자이다.두드러지다)
취저우 장씨 《금석집》의 석문은 오른쪽과 같다.우안고지식당류묘침그 제도는 망자가 적지 않고 오래도록 무너진다.열, 오늘날 사당의 의례이기도 하다.문숙양식당에는 아들 셋이 있다.양의 아들도. 여자 이름은 녕남, 숙양의 딸도; 동생과 숙명, 여자 동생도사자는 숙명을 숙양의 아우라 하고, 제사를 숙명의 딸이라 한다.제사는 숙명의 딸로, 유육조조상이다.기명 "영제", "초"'제'의 뜻은 '여소사제(女思思,)', 즉 '녕남(寧男)'의 뜻이 있다.오늘날 세속적인 선녀들은 아직도 이런 이름을 많이 지녔다.하문운: 숙명벼룩이 춘추언을 잃고 불행하게 일찍 죽자, 장남 도사가 세운 말, 숙명의 장남이 도사라는 자가 이 식당을 세워서 직전만(直万萬)을 성공시킨 것은 기식당 인건비로 영건, 영원식당 기직(記、)과 같은 예다.사고조리시 속속을 도사라 하며, 옛날에는 시가 되었다.속속을 고인이 죽었다고 한다.고한 건무 18년 각 군마다 모두 조속관(,胥官)에 두었는데, 의문스러운 것은 지금의 서(考)이다.이세상 계승자로, 고숙양 부자는 부문학의 속관이고, 도사도 시의 속관으로서 그 예를 유추할 수 있다.숙양의 아들 셋이 어찌 불서명개하랴생존에는 유별이 있다. 그 이름을 가진 자는 함께 식당에 들어가 영원각석말에 형제가 병립하고, 영건각역은하였다.은공립자가 있는데, 지금 사당에 비적 본지를 둔 것이 합족공지이다.고금을 통하여 거의 제정된 것이 없는가, 학이 기록하였다.
6.제사즉사제(思思思)의 뜻으로, 옛사람들은 이를 사랑하였는데, 마치 개백숙(伯叔中) 중계(中季)와 같다.이런 글자는 서로 오르내린다의례가 이러하다.
7.영건 5년 연세가 경오 2월 23일에/중/이 식당을 세웠다.스테로이드/읽기/의미/학례/천재를 당하랴, 벼룩이 부모를 떠나랴/(의혹) 세상을 버리다/묘를 당하다/입직하다오천 (읽는 자는 또 유제(類祭)인데, 세우는 자는 숫자와 같다.)
8.《태평어람》은 양천 청사왈(杨请辞辭:)을 인용하며, 주봉례는 폐침입침, 어묘(,于)라고 하였다.절은 한나라의 인연으로 고치지 않는다.이에 따르면 식당이란 즉 묘침왕제(寝王王制)이며, 서인은 어침제(是于祭)가 없다.숙문 병석.
9.석궐은 "고(故) 남무양공조향식부(南武陽功乡夫夫) 문학관속평읍(平()이라 하였다.둘째) 낭지궐(郞之",)이다.조사의 행정시 속관 속관 속관의 숫자.(조록은 평읍군랑(平君君郞)으로 석명되었다)
10.조명성《금석록》에 의하면,남무양공조궐(南武陽功阙,),지금고남(高南)궐한장과 원년에 세워, 함께 그렸다.네 돌이 산동 기주부에 있는 것과 같이, 석궐은 아홉 줄의 글자를 새겼는데, 분별할 수 있는 자가 매우 많다.유장과 원년 2월 16일날 (그림은 생략) 문숙양립이 있는데, 즉시이 수귀리의 문숙양(文阳陽)은 숙양식당의 각석(石陽食堂 此石)이다.저편 숙양이 그 아버지를 위해 세운 석궐이다.고장제장과 원년하거순제건강 원년 몇60년, 이 개숙양의 무덤은 침제(字題)에 글을 썼다.증이석궐에기된숙양부관질(阳陽父官与此)은이와정합(正合)하여전인어두비(前人两二碑)의고정(考定)이없으므로공조묘궐문(功墓阙文)에서그증(证證)이충분히많이있으니숙문기(记問記)
11.한건강(漢建康) 원년 문숙양식당 화상기(文阳陽食堂像記)는 그 규제와 영건(永建)이다.영원 제각략동, 서숙양조리(,诸) 제속(諸掾)을 위하여 《후한서(後漢書)》 개연전(历延傳) 역군(掾郡) 열속(注为) 주운삼공하에 군현에 이르니, 모두 속속이 있어, 건무 18년 만에, 각 군마다 설치되었다.모든 조속속(趙有市)은 지금 정시(亭市)의 속관(俗官)과 시(市)의 속관(俗官)을 가지고 있는데, 대개 일에 따라 이름을 세운석구출산좌어대, 지금만주 단오교소.문자는 영건식당보다 석각이 많고 정교하여 하나도 훼손되지 않아 귀중하다. 조씨보방비록이 시저되었는데, "을축" "을"자를 그림글씨로 여겼는데, 금심에서는 원석 "을"자를 글씨로 여겼는데, 극현하여 백곡원문은 순제기(順帝紀)로 여겼는데, 정정은 계미지오(讹未之,)가 되지 않았고, 옛 기일초치(紀日草误)는 오자(者者)가 많았다.숙이 묻다.
12.한영건 식당 초상.
13.문숙양식당화상석각,오하옥《균청관금석록》이미 기록되어 있으나, 비석의 출지를 기록하다.방씨 《침경당제발(多經堂題》)》은 다론 변서체(书書體)이며, 또한 호(无)가 그 석문을 고증하지 않았다."학속" 아래는 "有"자이고, "直万萬" 아래는 "工"이다.글자가 요체요에 어긋나고 글의미도 통하지 않으니 어찌 그 묵본이 얼마나 희미하랴!이 탈은 아직 단오교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부시에 얻었으니 글씨가 분명하고 알 만하다. 석구가 산좌어대의 부양산 뒤로 나왔다.도광 13년, 마철교가 가숙 벽간에 박힌 것을 얻자, 스스로 저술가 有에 증거정핵자가 있어, 기득남무功공조석궐문중에 문숙양기인이 있다는 것을 복작하여 해석하였는데, 그 문발은 전인미답이며, 족히 다했다.노지가 또 발하다.
《송위도 영원식당 석각고.가경 21년, 물고기태마기원 효렴(방옥)부산 우물 맹장 쪽에서 시득이는 석각자 팔행인데, 그 가식자는 영원칠이다.년 9월 신묘삭창덕□어□이군□으로 서니, 당8년 2월이다.10월 10일 무술공성(無十九工成)□십구장(下君)직전십만군본치(直十万十萬君本治)금건초9년(金建初九年)하결). 모두 40여 자를 얻다.정축희렴의 동생인 방거(,字)는 자는 와려(,复)이며, 복어정북(井北) 견인(見人)의 집 사돈석(豚石石)쪽에 새긴 글자는 전석(前石)과 합(合)하여 완연전벽(璧,全即), 즉 그 후 사행(四行)은 234자로, 그 사이에 판별할 수 있는 자: "중경군위(景景君"。)"이다.숫자가 흐릿한 것은 문리가 되지 아니하나, 그 끝에 형제 병립은 글자를 새기고, 그 경계 안은 길이가 이척 일촌 오분이고, 너비는 일척 일촌이며, 문석은 한나라와 황제를 새기고,지금까지 천칠백 년 동안, 집고금석 제록은 한 사람도 기록하지 않고, 글씨는 석측을 새기고, 감중과 오봉이다.2년, 천봉 3년에 서로 유사하며, 그 글자의 크기가 서로 같고, 그 행적이 다소 고르지 못하여, 제성 연광 4년비와 유사하며, 수리 연월, 인명, 수리 연월, 인명을 기록하였다.공비는 포중(六年中) 영평(永平) 6년각(相刻)과 유사하며, 그 기년월일유족(紀年月日有足)은 한서(漢書) 편년기사(记年記事)에 명한 잔비의 글에는 역사 속에 길이 있는 자가 있는데, 이를테면 송나라 군주가 구색한 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송나라의 이름은 조준이고, 장주 출신이다.
여심 송씨의 석문이 당초에 나올 때 타본하였거나, 그보다 나은 것은, 연조준이었다.고운: 마씨타쿠의 펠트묵기열등한 탁수도 솜씨가 없고 글씨도 분간할 수 없다.금번 시험에서 제1행 "창덕"을 하직하였다."州州"라는 글자는, 마지막 행에 "昌德"이라는 글자가 있으면, 송나라를 알 수 있다.석소운 "중경군위"라는 글자는, 많이 희미하고, 마지막 행은 은근히 "군위"라는 글자를 보는 것 같아, 미진하였다.그래, 나날이 정갈해지고 다시 알맞아진다.고정건. 학기시갑진(鶴記時甲(, 1904) 이월 이일 삼경서(三书書).
개요: 박품 안에 정문 데친 것을 받아 산동 제녕을 발하고 한나라를 낸 《영원 8년 식당 문제기》《영건 5년 식당 그림》《제기(題記)》《건강 원년 문숙양식당 화상제기》 탁본 3종이 세 종류의 한대 식당 초상화는 모두 산동 어대마성이다항수장(郑引藏), 정씨(鄭氏)가 경전을 인용하고, 작은 글자가 천여 자나 된다.
식당에 글씨를 써서, 즉 향당야(堂堂,)라 하였는데, 옛날 사묘(,建)에 묘(堂)를 지어 신을 섬기려고 하였다.가일전에, 금석댁은 기록이 없었다.가도 이후 세상에 나왔다.이 폭 중에서 정씨는 심균으로 초장본을 썼다.학교의 《영원8년식당제기》를 심사하여 구척으로 하고, 《태평》을 인용하였다.어람(御》、), 조명성(趙明《) 《금석록(金石錄)》, 오영광(吳榮光) 《균청관(清淸館) 금석록(金石錄)》 등 고금의 여러 견해를 석독《문숙양식당 화상제기》.문자는 향식부(掾、夫)·정속속(等职)·공조(功、)·부문학속(府文學掾) 등의 관직명을 고증하고, 단방득석(方方石石) 이전 탁본(本本)으로 증명하였다.
그중 문숙양식당기다.이 석경청 장덕용《이명초당금석집》단방 《端齋藏石記》, 단방 《》、齋藏石記"저록, 방약 《교비수필》 운 "옛날 산동 어대에서 탁공하였다.중간화상 및 좌측제자만 탁본하여 활낙씨(단방)에 귀탁한 후전석 탁본(全石本本)을 본다."이 탁본에는 마성항장인(馬星藏藏印)이 있는데, 이 상은 마씨(馬氏) 때 처음 탁본, 즉단(此,)임을 알 수 있다.방시 탁본도 흔치 않은데, 여기석민국은 초기에 해외로 유실되었기 때문에 탁본은 날로 희박하여 장가(藏家)에게 중시되었다.
청나라 말기에 정문은 강남에 우거하면서, 주효장·황주이·왕붕운과 합류하였다.청나라 말기에 대가라 일컬다.우시와 사, 서화에도 능하여 교분이 매우 넓다.그러므로 촬영장에서 그 시고 및 글씨를 산견하였다그림을 여러 제목으로 증정하는 자는 탁본으로, 예를 들면 '호태왕벽돌' 같은 것을 소장하고 있다.이 『한영원/영건/건강식당 화상기』 권단에는 "구탈본, 석지서감장(石西西藏藏)"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정씨 교정을 위해 비자를 읽어야 한다.소장본은 그 금석 이론의 구조, 감장 관점 등을 연구하는데 실물을 참고한다.장사쇠의 옛 소장품에는 많은 출판물이 있다.
출판: 1. '중국 근현대 문화명인 유묵' P112, 중국 방정출판사, 2013.
2. 《장사쇠 사우 한묵》P74, 만권출판사, 2005。
3. 《청나라 근현대 명인 서예와 위변조》 P19, 만권 출간회사, 2004.
[ZHANG ZHIZHAO AND ZHENG WENZHUO] HAN YONG YUAN, YONG JIAN, JIAN KANG SHI TANG HUA XIANG JI
Ink-rubbing in Qing Dynasty
2 pieces
Illustrated: 1.Calligraphy Collection of Chinese Modern Celebrities, p. 112, China Fangzheng Publishing House, 2013
2.Calligraphy by Zhang Shizhao's Teachers and Friends, p. . 74, Volumes Publishing Company, 2005
3.Calligraphy by the Qing and Modern Masters and Authentication, p. 19, Volumes Publishing House, 2004
사이즈가 같지 않다
RMB: 180,000-280,000
발자소개: 정문데(鄭文(, 1856~1918), 자는 준신(俊臣), 호는 소파(小坡)또 숙부께서 기다리시며, 스스로 강이라고 부르다.남퇴사, 별호는 여위고 벽(碧客), 냉홍사객(红紅辭、), 대학산인(大鶴山人) 등이며, 산동은 고밀하다.사람. 내각 중서를 지낸 후 쑤저우에서 존고학당에서 수학하였다.만년에는 직업의사가 그림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생. 음률에 능통하여 만청(晩淸)의 유명한 사인이며 서화(書畵)·················.
장가소개: 장사쇠(章士(, 1881~1973) 자행엄(字行,), 일작행(一作行)바위, 별호는 고동, 별서장은 따로 쓴다.구생, 황중황 등 호남 선화(善化, 지금의 장사) 출신이다.공업 서예. 신중국이 성립된 후, 정무원 법제 위원회 위원, 전인대.상임위원, 정협전국상임위원, 중앙문사연구관장 등의 직위.
章士钊旧藏郑文焯长跋《汉永元、永建、建康食堂画像记》
图录号: 354
估价RMB: 180,000-280,000
成交价RMB: 402,500(含佣金)
354
章士钊旧藏郑文焯长跋《汉永元、永建、建康食堂画像记》
清拓本
2幅 纸本
鉴藏印:星恒(朱白) 郑记(白) 叔问石癖(白) 眉寿堂(朱) 叔问审定(白) 鹤记(朱) 叔问眼学(白) 老芝经眼(白) 瘦碧闇所得金石文字印(朱) 石芝西堪题记(白) 石芝西堪考藏墨本(白) 石芝西堪读碑题记(朱) 瘦碧(朱)
题签:汉永元/永建/建康食堂画像记。旧脱本,石芝西堪藏。
题跋:1.王符《潜夫论》云:庐舍祠堂务崇华侈……是刻一食堂之费,亦云直钱十万,奢僭甚已。
2.此脱为褾手剪断行款,碻为旧脱,据沈均初藏本,校定记之。
3.汉永元七年九月廿一日朔日甲戌食堂石刻约字五行,略可辨者,卅余字耳……又案第一行莱州下疑是“尹氏”二字,形义并近之。
4.寿贵里文叔阳食堂画像。
5.建康元年八月乙丑朔十九日丁未,寿贵里文叔阳食堂。叔阳故曹史行亭市掾……士故曹吏市掾。(谛寀士下是所字,成下是功字甚显)。
衢州张氏《金石聚》释文如右。愚案古之食堂类墓寝之制,亡者无少长皆坿列,亦如今祠堂之义例。文叔阳食堂记有子三人者,叔阳之子也。女名宁男,叔阳之女也;弟叔明,女弟思者,叔明为叔阳之弟,曰弟思为叔明之女也。弟思乃叔明女名,犹六朝造像记女名“迎弟”、“招弟”之义,言有女召思弟,亦即“宁男”命名意也。今世俗先生女,犹多取此类以名之。下文云:叔明蚤失春秋言不幸早死,长子道士所立言,叔明之长子名道士者,立此食堂成功直钱万,是记食堂之工费,与永建、永元食堂记直同例。士故曹吏市掾谓道士,旧为市掾曰故者已死之谓。考汉建武十八年每郡皆置诸曹掾,疑类今之胥吏世相承袭者,故叔阳父子同为府文学掾,道士亦为市掾,其例可类推已。叔阳之子三人曷为不书名盖生存有别也。其名者并坿入食堂,证以永元刻石末有弟兄并立,永建刻亦隐隐有公立字,正如今祠堂之设匪本支即合族共之。古今殆无异制欤,鹤记。
6 .弟思即思弟之意,古人爱而字之,如盖伯叔中季之类字,互有上下此其义例尓。
7.永建五年大岁在庚午二月廿三日,/仲/立此食堂,当甾/念居此/意/学礼/何意被天灾,蚤离父母/(疑)弃世/墓/立直五千。(念字又类祭,立字上似公字。)
8.《太平御览》引杨泉请辞曰:周褏礼废立寝,于墓庙,汉因而不改云云。据此所谓食堂,当即墓寝王制,庶人无庙祭于寝是也。叔问题并释。
9.石阙首称“故南武阳功曹乡啬夫府文学掾平邑(泐二字)郎之阙”,此多曹史行亭市掾廷掾数字。(赵录释为平邑君郎)
10.按赵明诚《金石录》载,南武阳功曹阙,今考南阙汉章和元年立,并画像四石在山东沂州府,石阙刻字九行,可辨者甚多,中有章和元年二月十六日子(缺泐)文叔阳立,当即此寿贵里之文叔阳,此为叔阳食堂刻石。彼则叔阳为其父所立之石阙也。考章帝章和元年下距顺帝建康元年几六十年,此盖叔阳之墓寝题字也。证以石阙所记叔阳父官秩与此正合,前人于两碑并未有考订,兹从功曹墓阙文中得其佳证亦足多焉,叔问记。
11.汉建康元年文叔阳食堂画像记,其规制与永建、永元诸刻略同,叙叔阳为曹吏诸掾,案《后汉书》盖延传历郡列掾注云:古者三公下至郡县,皆有掾属,建武十八年,每郡皆置诸曹掾,此刻有亭市掾,又有市掾,大抵皆随事立名尓。石旧出山左鱼台,今藏满洲端午桥所。文字较永建食堂石刻既多且精,无一损泐,是可贵也,赵氏补访碑录始著之,而以为“乙丑”“乙”字为泐文,今审原石“乙”字,极显,白曲园文以顺帝纪考之,定丁未为癸未之讹,古之纪日草草致误者多已。叔问。
12.汉永建食堂画像。
13.文叔阳食堂画像石刻,吴荷屋《筠清馆金石录》已载之,但记碑之出地。方氏《枕经堂题跋》多论辨书体,亦豪无考证其释文,“学掾”下为“有”字,“直钱万”下为“工”字,并失于谛宷且文义弥不可会通,岂所见之墨本多漫漶耶?!此脱尚是未归端午桥抚部时所得,故字迹明白可识,石旧出山左鱼台之凫阳山后。道光十三年,马铁桥得之即嵌于家塾壁间,自来著录家尠有证据精核者,予既得南武昜功曹石阙文中有文叔阳其人,复为之诠释,其文发前人所未发,亦足多已。老芝又跋。
坿《宋伟度永元食堂石刻考》。嘉庆二十一年,鱼台马寄园孝廉(邦玉)在凫山井阑侧,始得是石刻字八行,其可识者,永元七年九月辛卯朔昌德□于□以君□作立,是堂八年二月十日戊戌工成□一十九丈(下缺)直钱十万君本治(下缺),今建初九年(下缺)。共得四十余字。丁丑希廉之弟邦举,字卧庐,复于井北见人家饲豚石侧有刻字,购归与前石合之,宛然全璧,即其后四行也,行二十三四字,其间可辨者:“仲景君韦”。数字模糊间隔不成文理,惟末“弟兄并立”连属刻字,界内长二尺一寸五分,宽一尺一寸,案石刻汉和帝时,至今千七百年,集古金石诸录无一载者,且字刻石侧,坎中与五凤二年、天凤三年刻相类,其字大小相次,其行多少不均,与诸城延光四年碑相类,记修造年月、人名、工费与褒中永平六年刻相类,其纪年月日有足与汉书编年记事冥若符合者。一残碑之文,其有禆于史者,如是谓非宋君钩索之功哉。宋名祖骏,长洲人。
余审宋氏之释文当初出时打本,或胜于此,然祖骏固云:马氏拓之毡墨既劣拓手亦不工,字亦不可辨。今考第一行“昌德”下为“莱州”二字,末行有“昌德”二字,亦可识至宋释所云“仲景君韦”四字,则多漫漶,末行似隐隐见“君韦”字迹,未足尽信也,或它日得精脱再当考定焉。鹤记时甲辰(1904)二月二日三更书。
提要:拍品内收郑文焯题跋山东济宁出汉《永元八年食堂题记》、《永建五年食堂画像题记》、《建康元年文叔阳食堂画像题记》拓本三种,此三种汉代食堂画像题字刻石均为山东鱼台马星恒收藏,郑氏引经据典,小字漫跋千余字。
食堂题字,即飨堂也,古时祠墓,建堂以飨神之所,乾嘉以前,金石家无著录,嘉道以后,始著于世。此幅之中,郑氏以沈均初藏本校之《永元八年食堂题记》,审为旧拓;引《太平御览》、赵明诚《金石录》、吴荣光《筠清馆金石录》等古今诸家见解,释读《文叔阳食堂画像题记》文字,考证乡啬夫、廷掾、功曹、府文学掾等官职名,并证为端方得石之前拓本。
其中文叔阳食堂记。此石经清张德容《二铭草堂金石聚》、端方《匋斋藏石记》著录,据方若《校碑随笔》云“旧在山东鱼台,拓工仅拓中间画像及左侧题字,归托活洛氏(端方)后,始见全石拓本。”此拓有马星恒藏印,可知此尚是石在马氏时初拓本,即端方时拓本亦不常见,此石民国初即流失海外,故拓本日稀,为藏家所重。
清末,郑文焯寓居江南,与朱孝藏、况周颐、王鹏运合称“晚清四大家”,工于诗词,又擅书画,交谊甚广。故拍场散见其诗稿及字画多为题赠者,拓本诸如其自藏“好太王砖”之类。此《汉永元/永建/建康食堂画像记》卷端题:“旧脱本,石芝西堪藏。”,当为郑氏校勘读碑自藏之本,对研究其金石理论结构、鉴藏观点等提供实物参考。章士钊旧藏,诸多出版。
出版:1.《中国近现代文化名人遗墨》P112,中国方正出版社,2013。
2.《章士钊师友翰墨》P74,万卷出版公司,2005。
3.《清及近现代名人书法与辨伪》P19,万卷出版公司,2004。
[ZHANG ZHIZHAO AND ZHENG WENZHUO] HAN YONG YUAN, YONG JIAN, JIAN KANG SHI TANG HUA XIANG JI
Ink-rubbing in Qing Dynasty
2 pieces
Illustrated: 1.Calligraphy Collection of Chinese Modern Celebrities, p. 112, China Fangzheng Publishing House, 2013
2.Calligraphy by Zhang Shizhao's Teachers and Friends, p. 74, Volumes Publishing Company, 2005
3.Calligraphy by the Qing and Modern Masters and Authentication, p. 19, Volumes Publishing House, 2004
尺寸不一
RMB: 180,000-280,000
跋者简介:郑文焯(1856~1918),字俊臣,号小坡,又号叔问等,自号江南退士,别号瘦碧、冷红词客、大鹤山人等,山东高密人。曾任内阁中书,后在苏州授学于存古学堂。晚岁以业医卖画为生。精通音律,为晚清著名词人,兼擅书画、金石、医学。
藏家简介:章士钊(1881~1973),字行严,一作行岩,别号孤桐,别署章丘生、黄中黄等,湖南善化(今长沙)人。工书法。新中国成立后,任政务院法制委员会委员、全国人大常委、政协全国常委、中央文史研究馆馆长等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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