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53
5월10일[부할 제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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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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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X4Fq_ARWoM
[인천교구 이규원 마르코(부평1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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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저도 참 소심했습니다. 쓸데없는 근심•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우울•울적했고, 긴장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 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는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죽기 살기로 대대적인 ‘마음 비우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심호흡에 심호흡을 거듭했습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날숨을 내쉴 때 마다, 의식적으로 제 안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들숨을 들이쉴 때마다 대기 중에 있는 충만한 성령의 기운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죽기 살기로 비움 작업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놀라운 기적이 제 내면 안에서 시작되더군요. 끔찍했던 상처들, 미처 치유되지 못했던 아픈 기억들, 수시로 떠올라 삶을 옥죄이던 트라우마들로부터 아주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적과도 같이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는데, 정말이지 쓸데없는 데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괜히 오지도 않을 쓸데없는 일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종이배 하나 띄워보내 듯, 흘려보내도 될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꼭 붙들고, 끌어안고, 괴로워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 동반자이신 성령께 모든 것 내어맡긴 사람들, 보호자이신 성령께 두손 두발 다 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큰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가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내면의 평화요 은은한 기쁨이요 자유로움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근심 걱정,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과 십자가 근본적으로 결핍된 인간 존재로서 당연이 겪어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고맙게도 근심 걱정과 관련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 자비와 은총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매일 선포되는 말씀과 더불어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과분한 성령의 은사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근심은 근심도 아닙니다. 기도 안에 소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 근심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은 머지않아 넘치는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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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SNt1K8oJ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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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저는 어렸을 때 잠을 참 두려워하였습니다. 자고 못 일어나고 나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내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존재이니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과 나는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없는 존재이니 ‘준비’하고 사는 삶입니다.
저는 준비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온종일 행복하게 지내다 보니 잠이 두렵지 않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까를 궁리했습니다. 이것이 잠을 이길 수 없는 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온종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적어도 많이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 커피를 마시지 말고 잠자리까지 끌고 들어올 사건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삶이 현명한 삶인지 밝히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은 아기를 낳은 기쁨으로 잊어버립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가치로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죽음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요?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의 ‘하늘 나라 첫 동네’에서 ‘전과 20범’ 환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세 명을 죽인 죄로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였는데 위암 말기로 가망이 없어서 성모 꽃마을에 맡긴 것입니다. 처음 들어올 때는 마귀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몸집도 큰 데다가 합기도와 같은 무술도 도합 5단이나 되는 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암 말기라고는 하나 그 살기가 대단하였습니다. 도박에 빠져 가정을 망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어렸을 때부터 어긋나서 술만 마시면 싸움질이었습니다. 워낙 싸움을 잘했습니다. 몇 년씩 여섯 여자와 살았는데, 그중 한 여자가 이제 다른 남자와 살겠다고 그 남자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화가 난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한 대씩 때렸는데 둘 다 사망하였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또 싸움하다가 한 명을 죽였습니다.
가밀로 신부님은 그 사람이 불쌍하여 수소문한 끝에 그의 동생의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형이 뒈지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쓴다고 하고 형도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가밀로 신부님의 부탁으로 서로 좋은 말만 하기로 하여 만났습니다. 처음엔 형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는 바람에 거기서 끝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해서 조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못난 형을 둬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 출혈로 각혈을 하게 되자 조금씩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입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죽음이 두렵기 시작한 것입니다. 형제들도 형과 조금 더 있다가 새벽에 출근하기도 하며 조금씩 화해하였습니다. 형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마음이 안정되었고 천사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잠도 이기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 뒤에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니!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은 공짜로 주어진 것처럼 여깁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은 무언가 준비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끝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도 기쁠 수 있는 무언가를 낳아야 합니다. 위 사람은 가밀로 신부님 말대로 용서라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준비한 것입니다.
교만으로 자신이 죽음 뒤에까지 다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맙시다. 그러면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준비는 피를 흘리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대신 그 순간이 오면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를 만나러 갑니다. 주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열매, 용서의 열매, 선교의 열매를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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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산보 길에 새소리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새들은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침에 분주한 것은 새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길가에 애벌레들이 느리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벌레들에게는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산보를 가는 사람이 무심코 밟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새들에게 아침 식사가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When faced with difficult situations, don't just hope for easy resolutions; instead, strive to make yourself stronger." 어떤 나비도 애벌레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거친 애벌레들은 마침내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것입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시 애벌레의 생활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하늘을 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침 산보 길에 보는 애벌레들이 무사히 나비가 될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님은 위암이 생겼고, 암은 여섯 군데의 장기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의사들도 3개월 시간이 남았다고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암을 극복해서 살고 싶은 의지가 강했습니다. 몸에 많은 의료장비를 달고 있으면서도 산보를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형님은 직업을 포기하고 동생을 위해서 이사 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신부님은 형제님을 찾아가서 고백성사를 드렸고,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건강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드렸습니다. 무덤에 묻혔던 나자로가 무덤을 덮었던 돌을 치우자 무덤에서 나왔던 것처럼 형제님의 갈망, 형님의 돌봄, 신부님의 기도가 함께하니 형제님을 덮었던 암이 치워졌고,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형제님도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었습니다. 3년 동안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형님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3년 동안 힘든 일을 참아 주었던 아내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환시를 보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가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그 극심한 수난의 순간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거기에 무엇을 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희생을 통해서 단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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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전통적으로 서품성구를 정하고 있습니다. 서품상본 앞면에는 서품성구에 맞는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서품성구, 서품일자, 첫 미사, 서품자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저는 31년 전에 서품을 준비하면서 서품성구를 정하였습니다.
저의 서품성구는 시편126장 5절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였습니다. 다른 많은 성경말씀이 있지만 왜 제게 그 시편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운명처럼 그 말씀은 저를 사로잡았고, 저의 사제생활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말을 군대에서 자주 들었습니다. ‘훈련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은 실제 전투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피와 같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하면 전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애벌레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고치에 있는 애벌레가 불쌍하다고 고치를 밖에서 열어주면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야만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사도들과 초대 교회 공동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쁨과 희망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도 때로는 의견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떻게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 기적, 삶을 보았던 제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성서는 아름다운 이야기, 희망찬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던 아담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부하를 시기했던 왕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성서는 어째서 인간의 나약함을, 인간의 잘못을, 인간의 교만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쁜 이야기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행복만을 이야기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다가올 위험과 고통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인은 근심에 쌓입니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겠지만, 박해와 순교가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함께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은 ‘불통’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말씀과 함께 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소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포도나무와 가지에서도 이야기 하셨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싱싱하게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말라 버릴 것이고,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기준은 바로 ‘소통’입니다.
우리 몸의 건강도 소통이 중요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면 우리의 몸은 건강을 유지하게 됩니다. 신선한 공기와 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노폐물이 걸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도, 소화가 잘 되어야만 합니다. 소화가 안 되고, 배변이 안 되면 음식을 잘 먹을 수도 없고, 우리의 건강은 점차 나빠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 우산을 펴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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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0-23: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 진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것이 부활 의미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태 안에 있다가 밝은 대낮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고통을 바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주님에게서 오는 이 기쁨은 그렇기에 자기가 바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바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 이것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고통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과 싸움이다. 나 자신과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다. 이 고통을 바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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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를 계속해서 전하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 곧 수난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잠시는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해산을 앞둔 여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지금 제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묘사하시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의 의미까지 알려 주십니다. 사랑하는 존재나 마음을 다하여 애착하던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혹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여정일 때, 반드시 ‘부활’과 새로운 ‘생명’이 주는 ‘기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술적 영감과 철학적 사고는 슬픔이나 비극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여야 행복을 그리워하고 슬퍼하여야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을 만큼의 고통에서 태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쁨은 가식적 행복일 수 있고, 언제 슬픔으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을 품고 있습니다. 영적 기쁨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 내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믿을 때 생기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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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1-23ㄱ)
1) 여기서 ‘진통’과 ‘해산’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인 ‘예’입니다. <“예수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이 겪게 될 고통과 슬픔은 산모가 겪는 진통과 같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은 출산과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잊어버린다.’라는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산모가 진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에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잊어버린다.’라는 말은, ‘망각’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해방’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겪었던 고통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즉 고통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그만큼 부활의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2)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부활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시점에서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는, 또는 신앙인들은 이미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만 했는지를 잊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부활의 기쁨도 희미해질 것이고, 결국에는 부활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믿고 있으니까 더 이상 사순절은 필요 없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이긴 한데, 부활 전의 과정도 중요하고, 부활의 이유와 목적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먼저 믿어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우리의 부활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셔서 부활하셨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부활의 기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각자 자신의 부활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지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하는 길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기 위해서이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4)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는 말씀은, “내가 부활해서 너희에게 나타나면”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라는 말씀은, “너희 마음이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될 것이고,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영원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도’는 박해자들, 사탄, 시간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박해자들’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세상이 너희를 박해해도, 너희의 기쁨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는 “부활의 기쁨은 세상의 박해를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사탄’으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사탄의 유혹과 방해를 물리치는 힘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 쪽에서도 유혹을 물리치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으로 해석하면, 부활의 기쁨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5)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그날’은 부활과 성령강림을 함께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또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온전히 깨달았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확신하고 있는 신앙을 증언하고 선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성령을 받았는데도, 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많은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한 번에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평생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련과 정화 과정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1베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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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0절)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과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할 이가 누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제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시편> 작가도 말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 126,5)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 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 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 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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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주님!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자랑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다하지 못할 자랑입니다.
방에 들라치면 먼저 들어와 있고 일어날라치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기도할라치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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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해산의 고통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간을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의 시간이라고 고백하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완전한 시간이고 종말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이들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기쁨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와 나누는 ‘화해’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저마다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각자가 계획하고 결심하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은 어리석게도 자꾸만 내 자신이 ‘나’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지금보다 나은 나’, ‘지금보다 멋진 삶’, ‘지금보다 성공한 내일’을 꿈꾸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세상은 좋아합니다. 서점가에 쌓여 있는 자기 계발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부추기고 사람들이 그런 책을 읽을수록 ‘지금의 나’는 부정되고 제거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부족하면 서로 돕고, 어설프면 서로 챙겨 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갈수록 종교가 힐링 센터로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가 경쟁에 지친 개인을 위로하는 공간으로만 머물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결심과 격려의 자리로만 굳어진다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을 누릴까요?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의 시간’,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후회할 어제도, 살아갈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과 존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보듬는 일,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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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 22)
사순시기에서 부활 시기로 영적 움직임은 불안에서 평화로 그리고 근심에서 기쁨으로 회심입니다. 사순기기는 해산할 여자처럼 걱정과 근심에 싸이지만, 부활 시기는 해산한 여자처럼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평화처럼 부활의 선물이고, 부활의 기쁨은 사랑하는 이와 재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하나의 선물, 곧 무상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기쁨은 우리 안에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기쁨이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 안에 있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어떤 누구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6,23)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기쁨 중에 살아가는 삶이 바로 크리스챤 생활입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사랑이신 주님 안에 머문 삶의 결과가 기쁨이며 이는 바로 내적 기쁨이자 존재적 기쁨입니다. 이를 체험하고 지속할 수 있는 삶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충실한 기도 생활은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기쁨이 충만한 삶은 기도 생활에 더욱 충실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예전 보다 세상의 이치는 물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 살 때,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살았던 젊은 필리핀 신부에 대한 저의 느낌은 긍정적이기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그 까닭이란 제 눈에는 보이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도대체 아무것도 행하려 하지 않았지요. 결국 제대로 본다는 것도 단지 보이기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살 때 보는 것은, 육으로 보는 것이었고 거짓되고 피상적인 봄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그에 따른 제자들의 슬픔을 처절하게 겪고 난 뒤 다시 보게 된 부활을 체험한 이후의 보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즉 후자의 보는 것은 곧 마음이나 심령으로 보는 것으로써 이 보는 것은 참되고 깨달음을 수반한 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소경이 눈을 뜨듯 참된 심령의 눈을 뜨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보면서 이해하고 꿰뚫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영적인 눈을 뜨고서는 제자들은 몰이해의 안개가 걷히듯 모든 것을 제대로 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의심이나 의문이 사라졌기에 주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성령을 체험한 후의 우리 역시 동일하게 믿음의 눈이 열리고 부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참된 내적 전환 곧 근심,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외적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흐르는 시간의 강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는 근심의 무게를 깊은 내성과 숙고를 통해 거슬러 올라와야 만이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의 과정을 해산의 진통에 비유하십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여인에게 산고가 예고되어 있듯이, 우리도 인생을 ‘苦海’라고 표현했듯이 인생 항로에서 갖가지 근심과 시련의 시간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겪을 어려움과 고통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거나 남을 탓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며 힘겹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후에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이 계시기에 고통과 질곡의 시간을 인내하고 희망하면서 닥칠 그 날을 고대하면서 고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부활 이후 제자들의 슬픔, 근심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으며, 이 기쁨은 실제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많은 순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은 이산가족 상봉 중계방송을 시청할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과 재회의 기쁨, 다시 만남의 기쁨!!! 생사를 모르는 채 살아왔던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을 연상한다면 아마도 부활 후 스승을 다시 만났을 때 제자들의 기쁨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그 재회의 기쁨의 크기가 큰 쪽이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자신들의 눈앞에서 죽으셨던 주님을 생생하게 다시 만나 제자들의 기쁨이 훨씬 더 컸으리라 봅니다. 자신들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다시 찾아오셨기에 받은 기쁨이었기에.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일시적이고 지나가며 외적인 기쁨이라면, 주님께서 부활 후 주시는 기쁨은 지속적이고 항구하며 내적인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근원적 기쁨이며 존재적 기쁨이고 은사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가져다준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내 영혼 안에 함께 계시는 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한 마디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잦은 자연 재화와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향일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외적인 기쁨,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기에 참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젊은 세대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끈기도 인내심도 없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인 하면 으레 은근과 근기를 말했었는데,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기에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기보다는 너무 화려하고 큰 것만을 추구하기에 그러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외적 사회 구조 자체가 그들의 희망을 꺾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익숙하다 보니 삶의 잔잔하고 소소한 작은 기쁨이나 참된 존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 곧 참된 기쁨이 지금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 참된 눈이 열리게 되길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기억합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내가 너와 함께 있다.”(사18,10)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 바오로는 항상 늘 기뻐하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의 좋은 성격이나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받는 사랑에서 내어주는 사랑을 자신이 먼저 사신 분이십니다. 이는 사랑받고 싶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쁨에서, 이제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기쁨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존재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울한 성인은 불행한 성인이기에 불행한 성인이 아니 되기 위해서 우리는 늘 환난이나 근심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아갑시다. 기도를 대신해서 김종삼의 「어부」라는 시를 보내니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삶이 힘들더라도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는 날까지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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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일평생 만여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어항 속의 금붕어는 얼마의 알을 낳을까요? 모든 환경이 만족스러운 상태이기에 자연 상태의 금붕어보다 더 많이 알을 낳을 것 같지만, 자그마치 6~70%나 적은 삼사천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합니다. 아무런 위험도 없고, 적당한 온도와 먹이도 풍부한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다. 그런데도 알은 오히려 적게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 자연의 삶인데, 어항 속의 금붕어는 자연의 삶, 즉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점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를 원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금붕어인가 아니면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까? 위협과 불안이라는 고통이 많다 하더라도 자연 상태의 금붕어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에 직면하는 그 순간은 괴롭고 힘들 수 있겠지만, 고통을 통해서 삶이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일등에게 관심을 두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관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고통을 극복하기보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이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고, 때로는 불공평한 하느님의 잘못된 행동이라며 불평불만을 합니다. 결국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 속에 있다면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다고 착각하는 분에게 성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너무나도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제자들은 온갖 근심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갖고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닌,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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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의 원천>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슬픔은 얼마 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맛 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고달픈 생활입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봄에 애써 씨 뿌린 사람만이 가을에 거둘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는 미국에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첫 번째로 듣는 얘기가 “너 제 정신이냐?” 는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정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정신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모르는 기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적 해산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외면하고 현실적 안락함을 추구하면 내적인 기쁨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랑의 향기를 내는 신앙인의 소명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예레15,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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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과 슬픔>
요한 16,20-23ㄱ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기쁨과 슬픔>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기쁨의 믿음 아니라
믿음의 기쁨이요
슬픔의 믿음 아니라
믿음의 슬픔이니
믿음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의 희망 아니라
희망의 기쁨이요
슬픔의 희망 아니라
희망의 슬픔이니
희망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의 사랑 아니라
사랑의 기쁨이요
슬픔의 사랑 아니라
사랑의 슬픔이니
사랑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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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군대를 다녀와 운전면허 실기를 시작한 첫 날을 기억합니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운전대는 참으로 낯설었습니다. 백미러와 룸미러, 좌석 앞 뒤 공간 등등 신경 써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1종 트럭으로 연습을 하니 브레이크와 클러치를 어느 순간에 떼고 밟아야 할지, 기어는 언제 조작해야하는지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속도를 30킬로만 내도 빠르게 느껴져 위협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처음으로 도로 주행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옆에 버스가 지나가면 흠칫흠칫 놀라고 도로 위의 택시들은 어찌나 위험해 보이는지, 그 와중에 차는 차선 한쪽으로 자꾸만 몰리는 것 같고 그 와중에 신호까지 확인해야 하니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주차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요. 후면 주차든 전면 주차든 유격을 맞추지 못해 몇 번을 다시 시도해야 했고 혹시라도 다른 차를 긁을까 두려워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 보니 세상의 모든 운전자들이 존경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운전을 합니다. 운전에 있어서 자만은 금물이지만 여하튼 자연스럽게 속도를 내고 줄이고, 이태리에서는 15인승 승합차를 몰고 신자분들을 모시고 다닐 정도로 수동 운전에도 능숙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차도 몇 번 긁어보며 그 과정에서 식은땀도 제법 흘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운동선수들, 노래를 잘 하는 가수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고 합당한 수업료를 지불했을 것이며 구슬땀 또한 흘렸을 것입니다.
재능이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라도 무엇이든 공짜로 이뤄지는 법은 없고 어찌됐든 모든 일에는 댓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일종의 업적을 이뤄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우리 자신의 삶이 비교적 평탄해 보일지는 몰라도 그 이면에 있는 우리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평탄하다”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간의 관계, 학업, 자녀의 성장 과정, 직장 생활과 결혼생활, 그밖에도 수 없는 인간관계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우리의 삶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적잖은 실수를 저질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역시 우리 모두는 그러한 과정 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이번 주 복음에서 계속되어 온, 승천을 앞두고 근심 중에 있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뒤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예감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고 제자들을 비난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진리를 계속해서 증언할 것이며 이스라엘뿐만이 아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예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선포해 나갈 것입니다.
이 와중에 여러 가지 갈등도 있을 것이고 인간적인 고통이 뒤따를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다양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목숨까지 잃게 될 것 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즉, 제자들의 고통은 분명 기쁨으로 변화되고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로 인해 이전의 고통은 자연스럽게 잊혀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삶 안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선사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무의미 하지 않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통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인간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고통은 선을 행하기 위한 투쟁,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따르기 위한 내적인 고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 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환시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코린토에 도착한 바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현재 그리스의 도시인 코린토는 당시 북쪽과 동쪽에 항구를 끼고 있는 상업도시였습니다. 전형적인 그리스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12개의 신전이 세워져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으며 종교적 매음 행위가 용인되어 향락 도시 혹은 퇴폐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 바오로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으로 그를 독려하십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며, 이처럼 언제나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해야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주어지는 합당한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후에 오는 기쁨의 열매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고통 속에 불만도 가질 수 있고 탄원할 수도 있지만 그 결실을 마주하게 되면 “아무 것도 묻지 않을 만큼”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선을 실천하고 미움을 덜어내야 합니다.나아가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랑할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다 보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 점차 당연한 것이 될 것입니다.
마치 지금은 숨 쉬는 것과 같이 당연한 듯 느껴지는 저의 운전 실력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종국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 모든 것들은 무한한 기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다짐하는 우리들의 마지막 순간을,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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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기뻐하십시오!-
“기쁨은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훈련이다”
가장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입니다. 수도원 곳곳에 무수히 만개한 하얀 이팝나무꽃들이 기쁨의 선물처럼 생각됩니다. '영원한 사랑'이란 이팝나무 꽃말도 멋집니다. 새삼 기쁨의 선물도 발견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심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점심밥을 먹다가 창밖 눈부시게 빛나는 쌀밥같은 이팝나무꽃들을 보는 순간 떠오른 “눈부신 날에는”이란 시입니다. 시역시 저에겐 기쁨의 선물이자 발견입니다.
“5월
'영원한 사랑'이란
꽃말의
새하얀 이팝나무꽃들
눈부신 날에는
눈부신 이와 함께
눈부신 만남
눈부신 위로
눈부신 기쁨을 나누고 싶다
새하얀 이팝나무꽃들 눈부신 날에는”-2024.5.9
유난히 “눈부시다”라는 말마디가 마음에서 맴돌았습니다. 하루하루가 기쁨으로 빛나는 선물같은 눈부신 삶입니다. 눈부심의 중심에 바로 눈부신 분, 파스카의 주님이 계십니다. 언젠가 나눴던 “선물”이란 시를 또 나누고 싶습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 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버리고 살았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 폈다지면 또 오늘의 꽃 폈다지고...
평생을 하루하루 그렇게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2001.4.23.
살아야 할 꽃자리, 기쁨의 선물을 발견하여 행복하게 살아야 할 꽃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기쁨의 선물들 한 중심에 파스카의 주님이 계십니다. 파스카의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입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우리가 만나야할 눈부신 분은 바로 파스카의 주님입니다. 다음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은 이미 실현되어 기쁨의 선물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은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부활한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할 때 눈부신 선물인 기쁨의 빛에 온갖 번민과 의심의 어둠이 말끔히 걷힙니다.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 빼앗아올 수 없는 기쁨,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쁨, 주님의 선물인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영원한 기쁨, 참 기쁨입니다.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 불안과 두려움 중에도 끊임없이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입니다. 세상에 이런 파스카의 기쁨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록의 5월, 파스카의 기쁨을 색깔로 하면 신록의 기쁨입니다.
요즘 저의 기쁨은 집무실옆 신록과 애기똥풀꽃이 어울어진 꽃길, 하늘길에서 고백성사후 사진을 찍어 나눠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쁨과 행복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어제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사진처럼 멋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신부님, 예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내면에 기쁨이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기쁨은 순전히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거행하는 공동전례기도 역시, 기쁨의 선물, 기쁨의 발견, 기쁨의 선택, 기쁨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선물인 기쁨의 원천인 파스카의 주님을 발견하고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입니다. 기쁨 역시 영적훈련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기쁨의 영적훈련의 장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기쁨의 전사’로 사는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 누구보다 기쁨을 강조한 기쁨의 사도, 기쁨의 전사, 바오로입니다. 바로 파스카의 주님이 늘 함께 하심이 바로 기쁨의 비결, 행복의 비결임을 봅니다. 환시중 들려온 주님의 약속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도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바오로 사도의 입을 빌려 우리 모두에게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주는 말씀 처방전에 참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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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바람처럼 성령처럼>
"너희는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제가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요즘 많은 사람이 기쁨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게 많은 분이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기쁨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고,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실텐데 진정 그렇습니다. 기쁨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기쁨을 추구하라고 하면 기쁨을 포기하기에 기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얘기한 것이고, 좋아하더라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쁨을 좋아하면서도 원하지는 않을까요? 그것은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얻으려면 고생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고생스럽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기쁨은 없다는 겁니다.
무릇 모든 기쁨은 고통을 전제하고, 수반합니다. 영어로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통 없이 얻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그런데 문제는 기쁨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만족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란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만족감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고, 설사 어려움이나 고통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얻은 것은 그리 큰 기쁨이 되지 못하지요.
실로 기쁨은 고통과 정비례하는 거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있기를 누구나 원하지만 그 원하는 집을 사달라고 하자마자 부모가 사준 부부와 누구의 도움 없이 부부가 10년을 고생고생하여 산 부부가 있다면 부모가 하루 만에 사준 부부보다 10년을 고생고생하여 산 부부가 더 기쁘고, 그 집을 산 것 때문에 더 행복하겠지요.
집이나 재물뿐 아니라 우리는 힘들게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을 때, 원하던 승진을 힘들게 하거나 천신만고 끝에 박사학위를 땄을 때, 또 어찌 살지 몰라 어둠 속을 헤매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런 때에도 그 어려움과 고통만큼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러나 고통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과를 먹고 싶지만, 나무에 올라가면서까지 따먹기는 싫어서 먹기를 포기하듯 고통스러운 기쁨들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들을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안타까운 것이 바로 사랑의 기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고, 사랑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요즘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은 더 많고 사랑하는 사람 대신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도 많지요.
사람을 사랑하고 반려 동물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생명을 사랑하고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사람 사랑하기를 그만 두고 반려 동물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쉬운 사랑만 하겠다는 거라고 해야겠지요.
또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랑은 않겠다는 거라고 말입니다.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고통이 싫어서 아예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니.
오늘 주님께서는 근심이 동반되는 기쁨을 포기하거나 뺏기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진정 구더기 무서워서 장 담그는 것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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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다."(요한16,22)
<미사(성체성사)!>
오늘 복음(요한16,20-23ㄱ)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으로 표현하시면서, 이를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기쁨에 비유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너희가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너희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면서, 그들의 삶을 이끌어 가시겠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큰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큰 잔치가 바로 '미사(Missa.성체성사)'입니다.
전례(Liturgia)는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입니다. 전례는 '교회 활동의 정점(頂點)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源泉)'입니다. 전례 중에서 가장 으뜸 전례가 바로 '미사(성체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마련해 놓으신 이 큰 잔치인 미사(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시려고,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려고.
날마다 큰 잔치를 손수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보고 싶어하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부활합시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호의와 선의와 성실과 온유와 절제가 충만한 부활의 삶을 살아갑시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어, 말씀하신 성자께서 하신 거룩한 약속이, 복음 전파로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주님의 모든 자녀가 진리를 따라 살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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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6Qg6PiP-D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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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 22)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참된 기쁨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기쁨도
하느님 안에서
익어가는 것이며
익어가는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고통 없는
기쁨이
없습니다.
고통이
우리의
축복이 되며
고통이
기쁨이 됩니다.
고통을 지나야
비로소 기쁨을
만나게 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우리의
길과 길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기쁨이
만들어 놓은
길 위에
십자가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우리를
업고 가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부활의 교훈
부활의 기쁨을
진정 배우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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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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