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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붉은 강 Red River(1948) : 소떼를 몰아준 진짜 카우보이들에게 경의를 !
하워드 혹스가 드디어 혹은 기어이 웨스턴을 (혼자서 끝까지) 찍었다.
당대 그의 경쟁자였을 '전 장면의 미장센'을 가능하게하는 작가 존 포드에게서
웨스턴의 모든 규칙과 실리를 확연히 꿰뚫어 동시대 이 장르가 지향하는 정점을 사전처럼 스크린에 올렸다.
누구나 지적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나 "바운티호의 반란(1935)"의 웨스턴판이라는 평가 따위는
본편 "붉은 강"이 멀리 깊게 흐르고 난 뒤에 그 흔적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만다.
단적으로 말해, 아버지는 죽지 않고 살아 아들과 화해하고 어머니는 보이지 않으며
"바운티호의 반란"에서의 낙원은 기차가 있는 자본가의 도시로 전환되고, 선장은 결국 부선장을 승인한다.
본편은 기본 얼개라는 측면에서 익히 알려진 그리스 신화나 해양 반란극과는 그 결을 달리한다고 해야겠다.
웨스턴이 지향하는 미건국신화에서 카우보이가 가지는 실제 노동에 충실한 몇 안되는 영화로서
무법자는 등장하지 않으며, 존 포드에게서 중요한 가족이나 마을(타운)역시 결핍되어 있다.
그 자리는 오직 카우보이들의 희망찬 함성으로 시작해 극악한 노동조건과의 사투로 채워진다.
하워드 혹스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전문가 남성 집단은 이번에는 카우보이로 명명된다.
더불어, 혹스적 세계 속에서 윙윙거리던 죽음에 대한 기이한 몰두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제어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혹스의 세계는 길의 시간이고, 그 속의 시간들은 쉬지 않고 울부짖는다.
만약 이 작품을 웨스턴의 대서사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결단코
한 명의 총잡이가 들어오고 석양 속으로 사라지던 이전 시대의 진짜배기 노동이 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존 포드적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야만-문명 등의 이항대립은 사라지고
혹스적 세계만이 꿈틀거리며 결말부에 이르면 과도한 낙관주의만이 전후 대중의 지친 심리를 달래기에 바쁘다.
기억할 것은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남북전쟁 이후의 공황기라는 점이다.
미국은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고 냉전 이전에 실질적인 세계의 지휘자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지만,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일터에서 밀려난 여성들에 대한 만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만약 영화가 여전히 시대를 달랠 수 있다면 본편의 엔딩이 더 이상 언해피않음에는 이같은 위무가 숨겨져있을 것이다.
아직 50년대를 강타한 매카시즘이 할리우드로 밀려들기 직전에'
혹스는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고
그들이 어떻게 고용주들에게서 강제 계약당하고 해고로 죽어갔는지를 일차원적인 은유로 쏘아붙였다.
본편을 거론할 때 빠뜨리지 않아야할 부분은 카우보이들의 얼굴과 목소리의 존재감일 것이다.
웨스턴에서 흔히 비윤리적이라 지적되는 두 지점, 즉 여성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를 보자면
여전히 혹스적 세계 안에 있는 여성은 동시대 다른 장르 안에서의 그녀들보다 당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여성은 남성 동성 사회의 지탱력 중의 하나로 소비되는 측면에 가깝다.
더불어, 아메리카 원주민은 초창기 서부극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목소리를 부여받지 못하고 버려진다.
그들은 단지 위협하는 존재로서 폐기되어야할 신호음만으로 숲 이곳저곳에서 출몰할 뿐이다.
소수자와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본편은 철저히 비판받아야하는 동시대 웨스턴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에
웨스턴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희망찬 찬가로서(드리트리 디옴킨의 음악 속성인 남성 저음 합창)
백인 남성 집단 SWAP에 대한 과장된 우월함으로 포장된 균질한 텍스트로서 동 장르 안에서 긴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과묵하고 독선적인 30년대 이후 웨스턴의 인격화된 얼굴인 존 웨인(애칭 듀크)과
언제든지 정신병원으로 옮겨갈 수 있는 준비가 되있는 50년대의 신경증 꽃미남인 몽고메리 클리프트(애칭 몬티)가
유사 부자관계로서 백인 남성들이 어떻게 미국을 일으켰는가를 노래하는 데 어떻게 쉽사리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신화는 숨겨진 이면과 불가능한 상승이라는 양면을 지니기 마련이니 본편 역시 제외될 수 없다.
저 멀리 바위산이 보이고 포장마차의 행렬은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길을 재촉한다.
"서부 개척사(1962)"는 아직 15년이 흐른 뒤에야 도착하겠지만, 혹스는 먼저 자신의 웨스턴을 찾아나선다.
그 길의 서두에 올려진 첫 막은 사랑하는 여성과의 이별이다.
존 웨인(듀크)에게는 어느 영화에서나 도대체가 여성과의 로맨스가 허락되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아보인다.
왜냐면 그는 자신보다 17살이나 어린 "벤허"의 찰톤 헤스톤과 더불어 남성 백인 가부장제를 표상하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로맨스가 가능하다 하여도 그는 결코 여성과의 이성애(동성애는 결단코 불허된)에 매달릴 존재가 아니다.
하워드 혹스는 존 포드의 웨스턴 안에서 이같은 존 웨인의 '미국이 허락한 남성영웅 개인주의'를 잘 알고있었다.
본편의 오프닝에서 존 웨인이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동료 월터 브레넌과 단 둘이 떠나는 것이
물론 전술한 존 웨인의 기존의 캐릭터의 재활용과 배치라는 측면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혹스적 세계 안에서 대들보가 되는 전형적인 남성 전문가 집단의 우두머리로서의 존 웨인 캐릭터는 말할 나위 없고
본편 자체가 거의 여성이 배제된 남성들만의 세계로 무장되어야함이 그녀를 보내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한 나의 해석은 왜곡이다.
근원적으로 존 웨인이 사랑하는 백인 여성에게 준 팔찌가 인디언의 팔목에서 발견되는 이후의
팔찌가 가지는 고리로서의 순환 징표에 주목하기보다는
영화 제목인 "붉은 강"에서 처음으로 벌어지는 살륙이 백인 우두머리 남성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지므로서 원주민의 피로 강이 붉어졌다는 뜻밖의 당대 이후의 동떨어진 끼워맞추기식 암시에 먹먹해진다.
아마도 혹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팔찌의 행방이었을 것이고,
원주민은 그저 방어와 공격의 대상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혹하게 등식화 한다면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로의 팔찌 주인의 전환 사이에
남성 아메리카 원주민이 끼워져있을 때 그것은 뜬금없이 여성 배제 이후의 남성 동성애의 잔존으로 다가선다.
하지만, 이후 "붉은 강"에서 어느 누구나 죽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단지 유래만을 따지고 볼 때 콜로라도의 붉은 진흙으로 인해 칭해진 '붉다'라는 지명이
영화 내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이자 정당한 살해라는 명분으로 다소 어이없게 돌아온다.
영화 내에서 주목할 이데올로기적 근심은 십자가로 표상되는 보수 기독교의 내세관이다.
누구든 방해되는 자는 죽이고 장례의식을 밟음으로서 웨스턴은 그 자체의 정당성을 인지화하려고 든다.
영화 내의 두번째 살인 역시 백인이 아닌 멕시코 계열의 남성을 표적으로 한다.
즉, 이는 미국이라는 땅이 어떻게 살인을 근원으로 건설되었는가에 대한 따뜻한 왜곡의 해설 의식이다.
하지만, 첫번째 살인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이마저도 배당되지 않을 때
혹스적 웨스턴 안에서도 문명-야만의 이분법은 낮게 깔려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아역 연기를 맡은 연기자가 처음 존 웨인과 등장할 때
약간 얼이 빠진 채로 중얼거리는 "총소리, 비명, 죽음" 등의 수사는
편의상 그 부분만을 잘라서 따온다면 웨스턴의 은밀한 쾌락 공식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즉, 웨스턴에서 대화라는 소통은 단지 대결이라는 곧 도달할 방식의 표지로서 호흡될 뿐이라는 뜻이다.
서부극에서 말은 언제나 총에게 등지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순식간에 십수년을 날려버리는 편집술은 그다지 새롭지도 놀라울 것도 아니고,
동일한 컷에서 존 웨인의 몇 마디 말로 남북 전쟁이 흘러가고 경제 공황이 밀려들었음을 확인하는 지점에서
이 대서사극이 결국 경제라는 압박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공간 안에서
존 웨인이 성장한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 한 팔을 기대어 일어서는 모습은
영화의 기본 얼개를 바로 상징하는 핵심이라 할 것이다.
이들의 뒤로 보이는 무수한 십자가 무덤 표시와 한 다리를 바위 위에 올린 젊은 몬티의 자세는
이후 극 속에서 진실로 준비해야할 자가 누구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중반부를 지나쳐 무리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이전에 존 웨인이 다리에 부상을 입는 맥락 역시 동일하다.
웨스턴의 역사 안에서 누구나 기억할 이 장면에서
존 웨인은 자신의 코를 문지름으로서 출발의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몬티를 비롯한 카우보이들의 얼굴 편집술은
웨스턴 안에서 카우보이 집단의 남성 동질감으로서 감격스러운 하나의 희망을 노래한다.
동시에 그것은 불가능한 임무, 즉 죽음을 각오한 일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본능의 배제라는
혹스적 세계가 다시 주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왜 만들어져야하는가에 대한 감독의 진단과도 같은 뜨거운 숏으로
이후 몬티는 존 웨인의 코를 문지르는 버릇조차 어느 순간 그대로 답습함으로서 후계자의 위치를 정리한다.
월터 브레넌은 극 내외에서 누구보다도 연배가 높은 이미 전성기가 지나간 할리우드의 명 조연이다.
그는 당대의 굵은 남성 배우들 사이를 오가며 아카데미 조연상을 3회 수상한 거의 유일한 연기자로 기억된다.
악랄한 악당 두목과 푸근한 남성 파트너 사이를 오가는 그는 30년대의 전성기 이후로도
꾸준히 많은 장르에서 대중들이 그에게 원하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선사한다.
재밌는 것은 이 영화에서 그는 요리사 파트너인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카드 게임에서 자신의 틀니를 잃어버리는데
실제로도 그는 자동차 사고로 치아를 모두 잃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혹스가 월터 브레넌이라는 명배우에게 바치는 일종의 경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극 내부에서 월터 브레넌의 위치는 요리사라는 직책과 중요한 지점에서의 정리된 조언 등으로 인해
다분히 모성의 자리를 차지하는 남성 캐릭터로 남성 동성 집단을 지탱하는 다른 지점으로 설정됩니다.
조안느 드루가 연기하는 강인한 서부 여성의 첫 등장은 이토록 매혹적이다라고 말하기에는
이후 그녀가 자리하는 위치와 공간들이 다소 애매한 이중성을 지니는 것에 주목해야겠다.
몬티와의 첫 조우에서 그녀는 둥근 원형 형태로 포위된 포장 마차 행렬 안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 원형이라는 도상은 중요한 여성 등장을 그 자체로 암시한다.
첫 등장에서 몇 마디의 말이 오고간 이후 그녀는 화살에 어깨를 관통당하고도 전혀 아픔을 말하지 않는다.
몬티가 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제거한 이후에야 그녀는 기절할 여유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그녀를 전술한 바와 같은 강인한 여성 캐릭터로 손쉽게 정리하기보다는
남성화된 여성 캐릭터의 강요된 실상으로 점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녀가 이후 몬티와의 로맨스 숏을 배제한 장면에서 화살-담배-권총을 들고 나올 때
전체 카우보이 집단과 대비되는 유일한 여성이 아닌 남성의 권력을 지닌 여성으로 제시됨은 의미심장하다.
즉 그녀의 사회적인 젠더는 영화 내에서 그녀가 소속된 남성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위해 전환된 것이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알다시피 평생토록 게이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갔던 명배우였고
스스로를 타락과 자살의 시간으로 이끌면서 그 과정을 필름 위로 새겨간 당대의 신경증 환자였으며
어린 시절 이후 성인이 되고나서까지 어머니의 조종 아래서 정신적 상흔을 간직한 아이였다.
그의 필모에서 "프로이트", "지상에서 영원으로","젊은이의 양지" 등의 작품명을 발견함은 우연의 과장된 슬픔이다.
혹스가 의도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본편에서 몬티와 조안느 드루의 첫번째 로맨스 시퀀스가
영화 속에서 이전과 이후 단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안개 속 무인지경이라는 점은 기이하다.
몬티의 게이 정체성과 연관시키든 혹은 극 내부에서 여성과의 로맨스 자체를 불허하는 장치든 간에
두 사람 사이의 감미로운 대사에도 불구하고 안개 속에서의 키스 장면은 무언가를 은폐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이 장면에서 몬티는 이후 자신이 영화 속에서 여성들과의 로맨스가 실현될 때마다 보였던
줄곧 지속되는 무언가 포기한 몽환적인 표정의 자세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첫 키스하는 것은 그가 아닌 그녀라는 점 역시 몬티를 표상하게 하는 지점이다.
아마도 본편이 오이디푸스 신화로 읽히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지점은 위 장면에서 증명될 것이다.
몬티를 처단하기 위해 쫓아온 존 웨인과 그를 맞이하여 영화 내에서 가장 긴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에서
존 웨인은 국내 공중파 TV 방영시에는 어떻게 더빙했을지 궁금한 말을 툭 던진다.
" 내 아를 낳아도"
이미 자신의 후계자 격이라 스스로 인정하는 몬티와의 로맨스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 웨인이 조안느 드루에게 던지는 저 한마디는 극 내부의 표적을 곧바로 응시한다.
그녀 역시 서부극의 전통적인 여성 위치 - 요조숙녀와 술집 작부 - 이분법을 붕괴시키는 동작을 보이는데,
커다란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불을 붙이는 그녀는 어느새 몬티와의 로맨스 숏의 그녀가 동일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금 화살이 어깨에 관통되었을 때의 첫 등장 장면으로 돌아간 듯 하다.
존 웨인에게서, 즉 서부극의 남성들에게서 그녀는 그저 아기를 낳는 대상으로 호명되고
그마저도 허락받으려면 남성화된 여성이라는 전환을 거친 이후에 가능함을 드러낸다.
서부극의 여성들이 다소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다면 그것은 여성-모성의 위치가 아니라
남성 집단에의 동화될 자격증 발급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로지 서부는 남성들의 전유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초기 서부극, 20년 후의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에서조차
무법자들의 타운은 기차라는 자본주의 문명 앞에서 힘없이 석양 너머로 사라져야하는 존재였다.
능히 소떼 오페라라고 부르기에 걸맞은 본편에서 카우보이들은 기꺼이 기차를 찾아 헤매는데,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는 아직 "수색자(1956)"로 변신하기 이전의 존 웨인 뿐이다.
새로운 무리의 지도자이자 존 웨인의 후계자에서 반란하는 아들로서 변신한 몬티 역시도
소떼가 도착해야할 지점으로 선한 자본가가 환상적으로 맞이하는 마을을 상상하고 결국 도달한다.
이 지점을 서부극에서 볼 수 없는 환타지로 받아들인 것인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위 숏에서 기차를 전면에 놓고 소떼가 천천히 들어오는 롱 숏 기법은
중반부 붉은 강을 건너는 소떼의 모습과 더불어 건국 신화 그 자체로 은유된다.
개인적으로 "붉은 강"을 이끌었다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인물은
감독이나 배우, 제작자가 아닌 실제로 이 소떼들을 이끌고 몇 개의 거대한 숏들을 이끌어낸
이미 전성기가 지나버렸을 서부의 카우보이들이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었기에 영화 자체가 가능했을 것이다.
본편 제작 당시 존 웨인은 40대였지만, 실제 영화 속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보인다.
그가 반항한 아들 몬티를 처단하러 마을로 들어서는 장면에서 그는 몹시도 마초적인데,
혹스는 여기서 그를 말에서 내리게 한 이후 소떼 사이를 헤쳐나오는 당당함으로 탁월하게 묘사한다.
서부극의 진짜배기 남성-아버지라 할 존 웨인은 여기서 아들의 상징적 경쟁자인
다른 한 명의 빠른 총잡이 카우보이와 뒤돌아서서 승부함으로서 실질적으로 그가 온 목적을 이룬다.
서두에 전술한 바와 같이 본편은 중반부까지 철저히 오이디푸스와 바운티호의 반란의 자장 아래 머물지만,
종결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갑작스러운 그러나 준비된 화해를 이끌어냄으로서 혹스적 세계를 과시한다.
여기서 조안느 드루의 권총이 분명히 어떤 역할을 이끌어냄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이전에 이미 그들은 하나의 결과-소떼의 마을 도착이라는 건국 환타지-에 동의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주먹다짐은 일종의 승계의식에 다름 아닐 것이고
그 과정에서 또다른 후계자를 낳아야할 여성의 존재가 부각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여정에서 존 웨인의 독재와 몬티의 친노동자적 정서가 교체됨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마지막 장면의 소에게 찍는 낙인 표지를 어떻게 읽어야할까?
아마도 극 내부의 자연스러운 내러티브라면 이는 DADDY//MAN으로 독해되어야할 것이다.
아버지가 결국 아들을 소년에서 남자로 인정하는 과정으로서의 길,
하지만 혹스적 세계라면 이는 DEAD//MANIAC 으로 보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수천 마일의 소떼 이동이라는 여정은 죽음과 광기라는 요소를 끌어안은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전의 혹스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강박이 여전히 보상이라는 체계 안으로 편입됨을 발견할 수 있다.
"붉은 강"은 장쾌한 건국신화로의 긴 여정이라는 측면에서 황홀한 남성 집단의 합창이며
아버지-아들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 다시금 웨스턴의 젠더적 본질을 확인하는 환대 환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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