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을 잡으려고 세계 주요국들이 '쩐의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한국 정부도 10조원(약 1조 1400억엔) 규모의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내놨다. 업계는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금성 보조금 지급이 빠지면서 세제·금융 지원을 강화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팹리스, 제조시설 등의 설비투자 및 연구개발(R&D)을 위해 10조원 이상을 지원할 계획이다. 보조금 지급이 아닌 세제·금융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KDB산업은행 등을 통해 저리 대출·보증을 확대하는 것 외에 민관공동출자펀드를 설립해 설비투자와 R&D를 지원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미국·중국·일본 등과 달리 현금성 보조금 지급이 없어 "실탄이 빠졌다"고 비판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리대출 금융정책은 이미 기반이 있는 기업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초기 투자가 필요한 기업에는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정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국내 소재·부품·장비,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들은 현금이 많이 부족해 보조금 형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 주요국들은 앞다퉈 보조금 지급책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CHIPS법)에 따라 올해 인텔(85억달러), 대만 TSMC(66억달러), 삼성전자(64억달러) 등에 총 390억달러(약 6조1000억엔)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유럽연합(EU)은 현재 독일(183억달러) 프랑스(31억달러) 네덜란드(27억달러) 등이 총 241억달러가량의 보조금을 낸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에 있는 TSMC 1·2공장에 최대 1조2000억엔가량의 보조금을, 도요타·NTT 등 자국 대기업이 출자한 라피다스에는 9200억엔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민희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 정부의 10조원 지원은 규모든 지원 방법이든 주요국을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지원을 통해 소재·부품·장비, 팹리스, 제조시설 등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반도체 기초체력을 강화하고 시스템반도체, 반도체 제조 후 공정 등 상대적 취약 분야도 육성할 계획이다. 이런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이미 한국에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제조기반시설이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처럼 보조금을 주면서도 기업을 유치할 필요성은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재정도 어려운 상황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R&D 지원과 함께 기업이 잘하는 분야에서 세제 지원을 하고 취약한 부분을 중심으로 재정을 쓰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며 반도체 제조 후공정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보조금 지급 대신 세액공제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올해 종료 예정인 국가전략기술투자세액공제 연장, 국가전략기술 R&D·통합투자세액공제 범위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보조금 지원 대신 세액공제를 늘리면 비슷한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