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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독교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반야심경"
문화도시재생대표
2020. 4. 27. 14:28
서구적인 시각은 기독교적 사상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몇천 년의 시간 속 DNA에 녹아들어 있는 사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즘 보면 서양인 승려가 있고, 동양인으로서 기독교 성직자가 있습니다. 승려로서의 정체성이라고 할 때 문득 드는 것은 어디서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려로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 지구인으로 오십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선이 근대와 되면서 상투를 자르고 한복은 벗고 양복을 입었습니다. 저의 눈에는 여전히 조선인이라는 것이지요. 절대로 그대로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입니다.
무속에서 불교가 되었죠. (원형으로서 무교를 인정할 때) 사찰에 가보면 신당이 있습니다. 신당으로서 민속종교가 연명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은 항상 우리 식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원형에서 선진화된 불교를 만들어 냈죠. 조선은 국가 이념을 유교로 전환했습니다. 스스로 유교의 고향이라고 한 중국에서까지 퇴계 이황 선생을 추앙합니다. 근대 이후에 유교는 퇴계 이황으로부터 탄생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형통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형통 주의 지연, 학연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끼시겠지만 심성의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야마나 테츠시의 "반야심경"을 읽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재야의 철학자이지만 그는 프랑스 철학을 수혈받은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저의 정신적인 스승이신 유영모 선생님의 사상과 가장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기독교 사상을 자신의 이해로 해석했던 것은 이 땅에서 보기 드문 일입니다. '야마시 태츠시'는 일본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영모 선생은 지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재야의 인물일 뿐입니다.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전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재야의 사람들입니다. 비판하는 학자들은 서양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들은 동양인입니다. 문화적인 융합이 있어야 하는데 학자들의 생각 속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서양에서 배운 것에 반하는가 그렇지 않은 가로 판단한다.
정념&정정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公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碍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無?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 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多羅 三?三菩提 故知般若波羅密多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고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際一切苦 眞實不虛故
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3번)
— 반야심경 中
'반야심경'은 교양적인 차원에서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책과 무게와 깊이를 비교할 수 없지만
저는 유영모 선생의 "노자"를 기억합니다.
많은 재자들이 해석을 부처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분에게서 직접 듣고 배우지 않으면, 순 한글로 쓰었지만 읽기 쉽지가 않습니다.
<반야 심경>이 262자로 되어 있습니다.
경전 중에서 가장 짭다고 하지요.
<노자>는 5,000자로 상, 하로 되어 있습니다.
몇 자라고 할 때 한자로 되어있다는 것이지요.
한글로 번역할 때는 설명까지 붙어야 하므로 20,000자가 넘어집니다.
유영모의 노자는 자수를 맞춰 쓰고 있습니다.
'야마나 테츠시의 반야심경'과 성격이 다릅니다.
유영모 선생의 노자는 정념을 통해서 살핀 작품입니다.
두 분의 성격이 다르지만 정념에 기반을 두고 풀이했다는 것입니다.
야먀나 테츠시는 상담학적인 차원에서
반야심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대를 불문하고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행복에 대한 성찰이 중요합니다.
형식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세월을 두고 명상했다는 것이지요.
'생로병사'의 애고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에서 해방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입니다.
출발이 그렇습니다.
'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펴보고, 명상을 해야 합니다.
과학적인 사고와 사회과학적인 사고 인문학적인 사고를 한때 이것이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색'의 세상은 명상을 통해서 깨달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나에게 깨달음이지
보편적인 깨달음은 아닙니다.
어느 유명인이 한 말이 기억납니다.
세상에는 멘토는 없고
도반이 존재할 뿐이다는 것입니다.
너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은 다르고
그 경중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반으로서 같이 할 뿐입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가르침은 받는다는 것은
공할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정보만이 존재한다."
얼마나 위대한 명언인지 감동이 됩니다.
바깥(색)과 안(자아)은 둘 다 공하다.
반야경(般若經)에 있는 말.
색(色)에의(依) 하여 표현(表現) 된 현상(現象)은
평등(平等) 무차별(無差別) 한 공(空),
곧 실상(實相)과 상즉(相卽) 하여 둘이 없다는 뜻.
진공(眞空), 묘(妙), 유(有)의 뜻을 말함
— 색즉시공 중
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5번 정도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앎(정보)이라는 것을 통해서
지식의 넓이가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앎은 그렇게 우리의 행복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요즘 학자들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승불교를 얕잡아보고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동방정교회와 서방 로마교회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지요.
서방 로마교회가 동방 정교회를 무시하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대승불교의 깨달음은 소승불교의 학식에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문제는 학식의 형태를 통해서
현실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색'(정보)는 우리의 반응을 야기합니다.
공이 공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색이 없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현실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어야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것이지요.
안과 바깥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안이 먼절까요.
바깥이 먼절까요?
저는 밖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야는 우리의 생각을 좌우합니다.
눈, 귀, 촉각, 등이 밖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괴로움이 어디서 올까!
고만해보면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대부분 보인 것을 통해서
사고를 합니다.
상대와 나를 비교하게 되지요.
나에게 있어서 충족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상태의 만족이겠죠.
자아를 채우지 않으면 항상 나는 불행합니다. 절대치로 계산하면 색과 자아는 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행복은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상대를 통해서 나를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웃사랑'이 그렇습니다.
이웃에게 베푼 선이 예수님께 드리는 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대 이야기도 하시지요.
자아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죠.
이번 '코로나19'의 깨달음은
바깥과 안이 다 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너만 존재하고 나만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현실을 만든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은 곧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니라.
— 반야심경 中
'코로나19'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대처를 잘하는가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세계적으로 한국보다 '싱가포르'를 이야기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 국가로서
한국이 떠오른 적이 있습니다.
요즘 싱가포르가 위험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저는 마스크를 하지 않은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 가장 비판받던 것이
마스크에 관한 것입니다.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WHO에서 마스크 무용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마스크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마스크가 사실상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왜? 마스크를 하지 않은 나라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고
마스크를 한 나라는 줄어들었을까요.
이미 나에게 바이러스가 침투하려고 하면
의료용이 아닌 이상 막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보호라기보다는
보이는(색)에 대한 배려라고 봅니다.
나에게서 세상으로 가는 길목을 끊는 것이지요. 이웃사랑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국가의 행정과 의료진의 헌신이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을 만든다."
현실을 만드는 것은 우리입니다.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재기가 아닌가요.
물품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지요.
두려움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코로나19'가 도리킬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세상이 무얼까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을 박살 내고
공유와 융합의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은 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현대사회를 만드는 새마을 운동의 표어입니다.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그 당시에는 그렇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거지꼴을 못 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려와 공유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너의 안전이 나의 안전이 되었습니다. '
야마나 테츠시의 반야심경'을 읽으면서 느낀
나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