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商山) 선비들의 누정(樓亭)에 담긴 꿈과 삶
권세환 전 경상북도상주교육지원청 교육장
Ⅰ. 누정(樓亭)에는 선비들의 삶이 살아있다.
우리 조상들은 길이 끝나는 곳에 누정(樓亭)을 짓곤 했다. 깎아지른 해안가 절벽이기도 하고, 유유히 흐르는 강변이기도 한 누정(樓亭) 공간은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탁 트여 있지만, 그곳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가려져 있는 은폐된 성격이 짙다. 주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이들이 이런 곳을 찾아 정자를 지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못 공감이 가는 구도다. 말로 못할 사연과 때론 억울한 울분의 심정을 그들은 세상에 등을 돌리고 탁 트인 자연을 바라보며 삭이곤 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그저 텅 빈 건물이자 탁월한 자연 경관 속에 말없이 엎드려 있는 옛사람의 흔적일 뿐인 이곳에는 인간의 역사가 있다.
가. 누정(樓亭)은 홀로인 자들의 역사가 있는 집
누정(樓亭)은 홀로인 자가 홀로 머물며 사회와 역사와 철학과 인간을 사색하는 집에 간간이 홀로 길을 떠난 이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객으로 찾아들곤 했다. 홀로와 홀로가 만나 교감했던 그 시간이 세월을 이겨내고 홀로 남아 서 있는 것이 바로 누정(樓亭)이다. 누정(樓亭)은 구심력과 원심력을 갖춘 인문(人文)의 정수(精髓)이다.
누정(樓亭)은 산수(山水)에서 만나는 책 밖으로 튀어나온 역사서이며 철학, 예술, 풍수, 건축, 지리를 담은 뜻밖의 인문학 사전이다.
정도전(鄭道傳)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은 하늘에 보이는 이른바 천문(天文) 현상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에 보이는 이른바 지문(地文) 현상이요,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인간 세상에 보이는 이른바 인문(人文) 현상이다. 천문 현상은 기(氣)에 의한 것이요, 지문 현상은 형(形)에 의한 것인 반면에, 인문 현상은 도(道)에 의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누정(樓亭)은 구심력과 원심력을 갖춘 인문 현상의 정수다. 일월성신과 산천초목을 누정(樓亭) 속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내보내 재배치했다. 이는 시문(詩文)이 있어 가능했다.
면앙정(俛仰亭))의 주인 송순(宋純)은 담양의 제월봉(霽月峯)에 정자를 짓고
풍월(風月)은 불러들이고 아름다운 산천은 끌어당겨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가며 한평생을 보내리라.
라고 하며 풍월산천의 주인이 됐고 천문·지문·인문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됐다. 선비들은 누정(樓亭)은 물론 주변의 이름 없는 산과 물, 바위에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편액과 산, 물, 바위에 붙여진 이름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다름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누정(樓亭)이 어떤 의미일까라는 의문이 있다.
소세양(蘇世讓)은 송순(宋純)의 면앙정(俛仰亭) 현판에 남긴 글에서
산과 물은 천지간의 무정한 물건이므로 반드시 사람을 만나 드러나게 된다.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이나 황주(黃州)의 적벽(赤壁)도 왕희지(王羲之)나 소동파(蘇東坡)의 붓이 없었다면 한산하고 적막한 물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드리울 수 있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2. 누정(樓亭)은 나갔다가 돌아온 이들의 거처하는 집
도연명(陶淵明)은 조선 선비의 롤 모델이었다. 그는
월급 쌀 다섯 말을 위해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며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선비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때 쓴 글이 「귀거래사(歸去來辭)」다.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조선 선비들의 필독시가 됐다. 조선의 관리들은 도연명(陶淵明)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계산풍월의 전원생활을 갈망했다. 그들은 천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도연명(陶淵明)을 상우천고(尙友千古)로 삼았고 그의 유유자적한 삶을 본받으려고 했다.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조선의 관리들에게 비상구 역할도 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임금에게 사직 상소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파싸움에 밀려 파직당하거나 시절이 심상치 않으면 낙향해 정자를 지었다. 귀래정(歸來亭)은 정치에 실망하거나 정권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하며 낙향한 선비들이 지은 정자로서 경주를 비롯하여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유연정(悠然亭)과 애오재(愛吾齋)도 도연명(陶淵明)의 시가 전고(典故)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인로(李仁老)는 자신의 집 이름을 와도헌(臥陶軒)이라고 지었다. 이 땅의 누정(樓亭)에서 도연명(陶淵明)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세운 무우정(舞雩亭)은 전형적인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전고(典故)이자 문학창작의 공간이었다.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는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불모로 간 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잘 모시고 심양에 다녀왔다. 이 때 세자 왕호(往護)에 오르는 감격의 정회를 읊은 가사 「봉산곡(鳳山曲)」을 창작하였다. 「봉산곡(鳳山曲)」은 101구의 한글가사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였다. 그는 환국(還國)시 임금의 소명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자천대(自天臺)에 복거(卜居)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3. 누정(樓亭)은 머무름의 철학과 미학이 있는 집
출처지의(出處之義)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그 몸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는 선비의 처세관이다. 시절이 하수상해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한 선비들은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탁영탁족(濯纓濯足)의 출처관(出處觀)을 지켰다. 그들은 정치에 나서는 대신 은일(隱逸)의 삶을 살며 안빈낙도의 지극한 즐거움을 추구했다. 푸른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 삼아 시와 술, 거문고를 즐기며 풍월주인(風月主人)이 됐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처사의 모델이 공자(孔子)의 제자 증석(曾晳)이다.
공자(孔子)가
내가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하자, 증석(曾晳)은
기수에서 목욕한 뒤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라고 답해 공자(孔子)를 감동시켰다. 조선 선비들은 증석(曾晳)의 풍류, 유유자적(悠悠自適)을 닮고 싶었다. 그런 이들이 정자(亭子)나 누각(樓閣)을 짓고 영귀(詠歸), 무우(舞雩), 풍영(諷詠)같은 이름을 붙였다. 상주의, 풍영루(風詠樓), 무우정(舞雩亭)이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4. 누정(樓亭)은 헐어도 헐리지 않는 그리움으로 지은 집
주(周)나라 소공(召公)은 남쪽 지방을 순방할 때 민폐를 염려해 팥배나무 아래 머물며 백성의 민원을 들어주고 아픔을 해결해줬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정사를 돌보던 팥배나무를 보존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선정(善政)을 찬미하여
팥배나무를 그대로 두고 떠나갔어도 더욱 기려 읊었다. [存以甘棠去而益詠]
는 시를 읊었다.
원호(元昊)는 단종(端宗)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단종(端宗)이 영월로 유배를 당하자 멀리서 유배지가 보이는 제천 평창강 절벽에 초막(草幕)을 짓고 날마다 통곡하며 절을 했다. 원호(元昊)가 죽자 후학들이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웠으니 관란정(觀瀾亭)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스승이나 조상이 남긴 시문이나 문장, 학문의 세계, 삶의 방식을 남기기 위해 문집을 만들거나 시를 지어 헌정하는 한편 누정(樓亭)을 지어 거이익영(去而益詠)했다.
5. 조선시대 시문학의 정수(精髓)가 있는 집
누(樓)는 본래 적의 공격과 침입을 관측하기 위해 성문 위, 또는 성곽의 높은 곳에 지어진 군사용 시설이다. 궁궐(宮闕)의 누각(樓閣)도 같은 목적으로 건축됐다. 기가 막힌 절경지에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황지우는 그의 시 「길」에서
돌아다녀보면 조선 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
라고 했다.
시야가 잘 확보되고 주변 풍경을 압도하는 절경지에 세웠으니 당연히 명당이다. 관측(觀測)은 승람(勝覽)의 다른 한쪽이다. 누(樓)에서 창과 칼을 거둬들이고 붓을 들면 시와 술, 음악이 넘쳐나는 문화적 공간이 된다.. 고을을 찾는 관리들의 연회 장소였고 객이 묵어가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때문에 승경(勝景)에 지은 누각(樓閣)에는 이름난 시인묵객이 줄을 지어 찾아왔다.
조선 누정예술사에 길이 빛나는 시문과 문장, 그림이 누(樓)에 남아 있다. 상주의 풍영루(風詠樓)와 관수루(觀水樓)가 그와 같은 곳이다. 누각(樓閣)은 공공재였고 연회가 열렸던 곳이었으며, 공사(公私)를 따지지 않고 길손이 머물러 가던 곳이었다.
Ⅱ. 누정(樓亭)의 범위와 건물로서의 기능과 역할
1. 우리나라 건물의 명칭
우리 선조(先祖)들은 거처하는 사람의 신분과 집의 규모에 따라 궁궐(宮闕)부터 시작해서 작은 정자까지 건물 크기별로 8등급으로 나누어 전당합각제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로 구분했다.
전당합각제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은 품격이 높은 것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순서이며 건물들의 신분과 위계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질서는 비단 궁궐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찰이나 성균관 및 향교, 또는 일반 민가에서도 관철된다. 이를테면 사찰에서 부처님을 모신 건물들은 전(殿)자가 붙는 데 비해 조사당(祖師堂)처럼 사람을 모신 건물에는 대체로 당(堂)자가 붙는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도 공자의 위패를 모신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이고, 유생들이 모여서 강학하는 건물은 명륜당(明倫堂)이다. 사가(私家)에서는 절대로 건물 이름에 전(殿)자를 붙일 수 없다. 아무리 높아도 당(堂)이다. 이런 질서를 알면 건물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樓亭條)에는 누(樓)·정(亭)·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각(樓閣)은 누관(樓觀)이라고도 하며,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혹은 흙으로 쌓아올린 대 위에 세우기 때문에 대각(臺閣) 또는 누대(樓臺)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강릉의 경포대(鏡浦臺)와 평창의 청심대(淸心臺)는 그곳의 대(臺) 자체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건립된 누정(樓亭)이 있으면 누정(樓亭)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누각(樓閣)에 비하여 정자는 작은 건물로서, 역시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놀거나 휴식할 장소로서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세우는데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도 한다. 사(榭) 또한 높은 언덕, 혹은 대 위에 건립한 집으로 정자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누정(樓亭)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속의 살림집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위주의 유람이나 휴식공간으로 가옥 외에 특별히 지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우리나라의 누정(樓亭)은 신라의 비처왕(毗處王, 소지왕 2년이라고도 한다.)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서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서출지(書出池)의 지명설화로 미루어 천천정(天泉亭)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옛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우리나라 누정(樓亭)이 언제부터 건립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2. 건물의 규모에 따른 구분
우리나라는 거처하는 사람의 신분과 집의 규모에 따라 건물을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등 8등급으로 구분하였다.
가. 전(殿)
전(殿)은 가장 격식이 높고 규모도 커서 여러 건물들 중 으뜸인 건물이다. 경북궁의 근정전, 명전전, 인정전, 자경전, 대조전 등과 같은 중심건물과 내전 및 침전의 대표건물을 부를 때 사용하며, 왕과 왕비, 혹은 대비, 대왕대비 등이 쓰는 건물이다. 세자나 영의정은 전(殿)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또한 절에서는 불보살을 모심 법당(法堂)으로 대웅전이나 극락전, 약사전 등을 말한다.
나. 당(堂)
당(堂)은 전(殿)보다 규모는 떨어지지 않지만 격이 한 단계 낮은 건물이다. 전(殿)에 딸린 부속건물이거나 공간의 중심건물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사찰, 공공건물, 살림집 등 전체 건물에서 당(堂)이 보이는데, 각 영역의 중심건물을 일컫는다. 경복궁 자선당, 창덕궁 희정당, 창경궁 양화당 등이며, 서원 또는 향교에서는 사당, 강당 등 주전을 당(堂)이라고 하였고, 살림집에서도 양진당, 충효당, 서당, 사당 등 주전을 당(堂)으로 불렀다. 따라서 당(堂)은 공적인 활동보다는 사적인 활동공간이다.
다. 합(閤)
합(閤)은 서궐의 사현합(思賢閤), 동궐의 체원합(體元閤) 등과 같이 전(殿)이나 당(堂)에 부속되어 공공 용도보다는 사적 용도의 기능을 하는 부속건물로서 당(堂) 부근에서 그 것을 보위하는 기능을 한다.
라. 각(閣)
각(閣)은 누(樓)와 비슷한 중층건물이 다수로 합쳐서 누각(樓閣)이라고 부른다. 궁궐이나 절 등의 정당 앞이나 좌우이 지은 줄행랑으로 이를 행각(行閣)이라고 한다. 사찰에서는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외호하는 선신으로 산신각 등 토착신을 모시는 법당을 말한다.
마. 재(齋)
재(齋)는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 활동 공간으로 조선 시대 때 성균관ㆍ사학(四學)ㆍ향교ㆍ서원 등에 딸린 기숙사로서 기서(寄居)하는 활동공간이다. 명륜당(明倫堂 : 강당) 앞에 좌우 2채를 짓고 왼편 동쪽에 있는 것을 동재(東齋), 오른편 서쪽에 있는 것을 서재(西齋)라 하였다. 또한 재(齋)는 제사를 지내거나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소박하게 학문을 수행하며 독서하거나 사색하는 공간이다. 은밀하며 검소하지만 풍광 좋은 곳에 건물을 지어 사용하는 살림집에 딸려 만들어진 암자와 유사한 건물이다.
바. 헌(軒)
헌(軒)은 처음에는 비바람막이가 붙은 수레를 뜻하지만, 대청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말한다. 강릉의 오죽헌(烏竹軒) 등과 같이 살림집 형태의 당(堂)의 형식을 가진 것이나 화성의 낙남헌(洛南軒) 등과 같이 정(亭)의 의미를 갖는 특별한 목적의 건물들을 헌(軒)이라 한다. 지방 관리가 업무를 보는 건물은 동헌(東軒)이다.
사. 누(樓)
누(樓)는 바닥이 지면보단 상대적으로 높은 마루로 지어진 집을 말하며, 원두막과 같이 마루를 땅으로부터 높이 띄워 습한 기운을 피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든 여름용 건물과 같이 중첩시켜 올린 집을 뜻한다. 이층건물일 때 일층은 각(閣), 이층은 누(樓)라고 불렀다.
아. 정(亭)
정(亭)은 흔히 정자(亭子)라고 하는데, 연못, 개울, 산 속의 경관이 좋은 곳에 휴식이나 유희 공간으로 사용되는 작은 집으로 경치가 좋은 곳의 놀거나 쉬는 정자(亭子)는 가장 작은 크기의 건물이며, 건축물위 8품계의 맨 아래 단계이다. 또한 정자(亭子)는 원림에 세워서 유희와 휴식공간으로도 사용하는 정자(亭子)도 있으며, 누각형태의 모양과 온돌을 넣은 살림집형식도 있다. 유희를 위한 건물은 누(樓)와 동일한 기능을 하지만 보통 정(亭)은 크기가 작고 개인적인데 반해 누(樓)는 규모가 크고 공공성이 크며 공적 행사를 더 많이 한다.
3. 누정(樓亭)의 기능과 용도
누정(樓亭)의 기능과 용도는 크게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로 구분된다.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사방의 자연 경관을 감상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용도와 성격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누각(樓閣)은 규모도 크고 공적인 성격이 큰 반면, 정자(亭子)는 왕실이든 양반 사대부든 사적인 용도로 이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누정(樓亭)의 기능과 역할은 크게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누각(樓閣)은 대개 궁궐이나 관아, 서원, 사찰 등에 부속 건물로 세워졌다. 궁궐의 누각(樓閣)은 경복궁의 경회루 등이 있고, 관아의 누각(樓閣)은 상주의 태평루와 삼척의 죽서루 등이 있다, 또한 서원의 누각(樓閣)은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대루(晩對樓)와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의 청월루(淸越樓) 등이 있고, 사찰의 누각(樓閣)은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쌍계루(雙溪樓)가 대표적이다.
누각(樓閣)의 기능과 용도는
첫째,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다. 경회루(慶會樓)는 외국 사신이나 왕과 대소 신료들이 모여 연회를 베푸는 장소였고, 죽서루(竹西樓)도 감사·수령의 교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공식적으로 접대하는 곳이었다.
둘째,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루(門樓)의 공간이다. 관아·서원·사찰의 누각(樓閣)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입구에 세워진 예가 많다.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정허루(靜虛樓), 선암사(仙巖寺)의 강선루(降仙樓) 등이 같은 경우이다.
셋째 경치를 즐기고 감상하는 공간이다. 이름이 알려진 누각(樓閣)은 규모도 크고 빼어난 절경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강물이 흐르는 깎아지는 절벽 위에 세워진 상주의 관수루(觀水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가 대표적이다. 이들 누각(樓閣)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과 화가들이 남긴 발자취가 즐비하다.
정자(亭子)의 기능과 용도는
첫째, 주위 자연 경관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이는 왕실의 궁궐이든 양반 사대부의 원림·명승, 계곡·계류, 강호·해안, 마을·가옥에 딸린 정자든 모두 마찬가지다. 이들 정자(亭子)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자리에 위치하여 세속의 때를 벗고 마음을 순화하는 공간이었다.
둘째, 선비들의 풍류와 친교의 공간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합창하는 곳에서 의기투합한 선비들이 막걸리 한잔하며 시도 짓고, 창(唱)도 하고, 세상사 비판도 하는 그런 장소가 정자(亭子)였다. 상주의 호연정(浩然亭)은 선비의 문회 및 시회의 공간으로 이용되었으며, 권섭(權燮)은 「호연정팔경시(浩然亭八景詩)」를 남기기도 하였다.
셋째, 정자(亭子)는 학문과 교육의 공간이다. 영조는 창경궁 함인정(涵仁亭)에서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였고, 선조 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상주 계정(溪亭)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난재(懶齋) 채수(蔡壽)는 쾌재정(快哉亭)에서 한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넷째, 정자(亭子)는 종중이나 마을 사람들의 모임이 열리는 장소였다. 상주의 익암정(益巖亭)은 풍양조씨 검간공파 후손이 건립한 것이며, 나주의 쌍계정(雙溪亭)은 나주정씨·하동정씨·서흥김씨·풍산홍씨 네 문중에서 대동계를 하던 곳이다. 마치 지금의 사랑방 같은 공동체 모임이 열리던 장소였던 셈이다.
정자(亭子)는 누각(樓閣)보다 규모는 작지만 위치도, 주인도, 모양도 다른 만큼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4. 누정(樓亭)의 이름
누정(樓亭)이든 사람이든 자기만의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다. 누정(樓亭)의 이름을 보면 그 누정(樓亭)의 특징이나, 그 주인이 살아왔던 삶의 과정과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누정(樓亭)을 마주할 때는 맨 먼저 누정(樓亭) 이름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누정(樓亭) 이름을 살펴보면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누정(樓亭)이 있는 주위 자연환경과 연계된 이름이다. 주변의 산·강·하천·호수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백옥정(白玉亭)은 옥동마을의 이름에서 나왔고, 백화재(白華齋)는 백화산((白華山)에서 이름을 빌려 왔다. 또한 무우정(舞雩亭)도 우담(雩潭)이라는 지명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다. 강릉 경포대(鏡浦臺)와 춘천 소양정(昭陽亭)은 경포호와 소양강에서, 나주 쌍계정(雙溪亭)은 양쪽 계곡 사이라는 데서 따온 이름이다.
조선 초기의 이름난 신숙주(申叔舟)는 누정(樓亭) 이름을 설명하면서
거의 다 보이는 그대로의 의미를 취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이런 경우가 제일 많았다.
둘째, 달·구름·바다·바위 같은 자연 현상이나 동식물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관수루(觀水樓)는 낙동강을 조망하며 흐르는 물에서 심오한 진리를 찾고자 하였으며, 계정(溪亭)은 계곡의 물소리를 듣기 위해 그 이름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함양 농월정(弄月亭)은 달, 함양 거연정(居然亭)은 수려한 자연, 강릉 해운정(海雲亭)은 바다와 구름, 삼척 해암정(海巖亭)은 바다와 바위, 창덕궁 부용정(芙蓉亭)은 연꽃,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은 꽃향기에서 각각 유래된 이름들이다.
셋째, 사람의 이름이나 호(號)에서 따온 명칭이다. 호연정(浩然亭)은 신유(申裕)의 호(號)이며, 사가정(四可亭)은 김석엽(金錫燁)의 호(號)이며, 동원정(同源亭)은 유광원(柳光源)의 호(號)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다. 이들 정자의 이름은 호(號)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양 의상대(義湘臺)는 의상대사, 양양 하조대(河曺臺)는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의 성씨, 담양 송강정(松江亭)과 면앙정(俛仰亭)은 정철과 송순(宋純)의 호에서 유래된 이름들이다.
넷째, 한문 구절이나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금란정(金蘭亭)은 『주역(周易)』에서 가져왔으며, 정허루(靜虛樓)는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서 가져왔으며, 천운정사(天雲精舍)는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시(詩)에서 가져왔다. 또한 담양 식영정(息影亭)은 『장자(莊子)』에서, 안동 체화정(棣華亭)은 『시경(詩經)』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세검정(洗劍亭)은 인조반정에서 유래되었다.
다섯째, 현재 자신의 상황이 반영된 명칭이다. 임호정(臨湖亭)은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연호수를 곁에 두고 벗한 정자’이며, 쾌재정(快哉亭)은 난재(懶齋) 채수(蔡壽)가 낙향하여 주변의 ‘멋진 경관을 감상’하는 기쁨을 나타낸 정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안동의 만휴정(晩休亭)은 ‘인생 늘그막에 쉬어가는 정자’이며 옥천 독락정(獨樂亭)은 ‘홀로 즐거움을 누리는 정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누정(樓亭)의 이름은 그 누정(樓亭)만의 특징과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누정(樓亭)의 이름을 쓴 편액(扁額)이 중요하다. 누정(樓亭) 명칭을 한자로 쓴 편액은 그 건물의 얼굴과 같다. 마치 단독 주택의 대문에 걸려있는 집주인의 문패와 같은 셈이다. 누정(樓亭) 이름을 쓴 편액(扁額)은 건물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장소에 걸려있다.
이 편액(扁額)은 다른 현판과 달리 글씨도 크고, 당대의 저명한 학자나 명필이 쓴 경우가 많았다. 호연정(浩然亭)은 정자 이름을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지었고 현판은 조선후기(숙종)의 유명한 서예가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썼다.
Ⅲ. 상주지역의 누정(樓亭)
자연과 사람과의 만남에서 태어난 것이 누정(樓亭)이다. 누정(樓亭)은, 고려, 조선 시대를 통해 사대부들의 심신수련과 휴양, 유학의 계승과 선현들을 닮기 위하여 시공간을 초월한 장소인 것이다.
상주는 고도이자 웅주(雄州)로서 빼어난 산수와 넓은 곡창지대를 품은 고장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누정(樓亭)을 통한 시문학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상주 지역의 누정(樓亭)을 알아보면 『상산지병오초책(商山誌丙午草冊)』 구당지(舊堂誌)에 기록된 누정(樓亭)은 풍영루(風詠樓), 응신루(凝神樓), 청량각(淸涼閣), 추월당(秋月堂), 이향정(二香亭, 침천정이라고도 함), 자천대(自天臺), 관수루(觀水樓), 한연당(閒燕堂), 합강정(合江亭) 등 9곳이 있다.
또한 『교남지(嶠南誌)』에는 상주지역에 풍영루(風詠樓), 관수루(觀水樓), 응신루(凝神樓), 청량각(淸涼閣), 추월당(秋月堂), 한연당(閒燕堂), 이향정(二香亭), 태평루(太平樓), 범향정(泛香亭), 육익정(六益亭), 지락정(至樂亭), 매호정(梅湖亭), 창석정(蒼石亭), 대산루(對山樓), 계정(溪亭), 정우정(淨友亭), 수석정(水石亭), 합강정(合江亭), 고목정(孤鶩亭), 불환정(不換亭), 소리정(素履亭), 옥류정사(玉流精舍), 청간정(聽澗亭), 퇴치정(退致亭), 병천정(甁泉亭), 구만정(九灣亭) 쇄연정(灑然亭), 용산정(龍山亭), 백석정(白石亭), 감모정(感慕亭) 등 30곳이 있다.
또한 함창지역에는 함녕루(咸寧樓), 명은루(明隱樓), 쾌재정(快哉亭), 육영정(育英亭), 기정(岐亭), 육의정(六宜亭), 애경당(愛敬堂), 호연정(浩然亭), 정우정(淨友亭), 취수대(醉睡臺), 산택재(山澤齋), 만귀정(晩歸亭), 수묵당(守黙堂), 광원대(曠遠臺), 수월정(水月亭) 등 14곳이 있다.
누정(樓亭)은 『상산지(商山誌)』 청대본(淸臺本)과 창석본(蒼石本)에도 누정조(樓亭條)를 정관(亭觀)이라 표제를 아래 누정(樓亭)은 물론 승경지(勝景地)도 포함시켰다. 상산지(商山誌) 정관조(亭觀條)에는 정(亭)·당(堂)·헌(軒)·정사(精舍)·재(齋)·루(樓)·단(壇)·호(湖)·암(巖)·동(洞)·촌(村)·담(潭)·산(山)·진(津)·방(坊)·폭포(瀑布) 등을 포괄하였는데, 단(壇) 이상은 인공 건조물이고 나머지는 자연물이다. 대개 전자는 상주처(常住處)인데 비해 후자는 가끔씩 들리는 유상처(遊賞處)이다. 그러나 자연물이라도 순수 그대로 누정(樓亭)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고 극히 인공의 가미가 가벼운 정도가 대부분이다.
『상산지 중보판』에 수록된 정관조(亭觀條)에는 육익정(六益亭)을 비롯하여 93개소와 속수정(涑水亭)을 비롯하여 52개소와 공서조(公署條)에 풍영루(風詠樓) 등 16개소 등 모두 161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누정(樓亭)은 그 당시 현존(現存)하지 않은 누정(樓亭)도 있어 그 수가 명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상주지역의 누정(樓亭)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상주지역(옛 상주지역 : 문경, 의성일부 포함)의 누정(樓亭) 수(數)는 301개소이며, 권역별로 보면 중앙권(4대문 외) 16개소, 동부권(사벌, 중동, 낙동, 단밀) 70개소, 서부권(화북, 화남, 화동, 외서, 내서, 은척, 모동, 모서) 55개소, 남부권(외남, 청리, 공성) 40개소, 북부권(공검, 이안, 함창, 영순, 산양) 120개소이다. 이 중에서 관루 24개소, 현존, 80개소, 자리보존 56개소 등이며, 현존하지 않는 것이 141개소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상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상주(尙州)의 누정대(樓亭臺)』는 상주지방의 누정(樓亭)을 현존하는 누(樓)·정(亭)은 봉황정(鳳凰亭) 등 32개소, 자연경관을 그대로 이용한 정(亭)·대(臺)는 봉황대(鳳凰臺) 등 21개소, 현존하지 않는 누(樓)·정(亭)은 풍영루(風詠樓) 등 76개소, 위치를 알지 못하는 정(亭)·대(臺)·암(巖)은 고목정(孤鶩亭) 등 61개소, 특기할 옛 상주지역 누(樓)·정(亭)·대(臺)는 관수루(觀水樓) 등 41개소로 구분하였으며, 모두 231개소이다. 이는 상주지역의 누정(樓亭)을 조사한 자료보다 70개소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사자와 현존하는 기록의 차이와 상주지역의 행정구역이 변천됨으로서 생긴 것으로 본다.
『상주(尙州)의 누정대(樓亭臺)』에 나타난 상주지역의 현존하는 누정(樓亭)은 봉황정(鳳凰亭), 호연정(浩然亭:함창읍 윤직리), 관수정(觀水亭), 소리정(素履亭), 옥류정(玉流亭:낙동면 승곡리), 용산정사(龍山精舍), 익암정(益巖亭), 청간정(聽澗亭), 백옥정(白玉亭), 백화재(白華齋), 청월루(淸越樓), 무우정(舞雩亭), 임호정(臨湖亭), 계정(溪亭), 대산루(對山樓), 동원정(同源亭), 사가정(四可亭), 모정(茅亭), 방호정(傍湖亭), 쾌재정(快哉亭), 호연정(浩然亭:이안면 가장리), 금란정(金蘭亭), 송석정(松石亭), 옥류정(玉流亭:화북면 입석리), 용화정(龍華亭), 청화정(靑華亭), 백우정(百友亭), 정허루(靜虛樓), 천운정사(天雲精舍), 봉양정(鳳陽亭), 침천정(枕泉亭:二香亭), 태평루(太平樓) 등 32개소이다.
Ⅳ. 상산의 누정(樓亭)은 무엇을 담았을까?
누정(樓亭)은 사색과 여유, 쉼을 통한 치유(治癒)와 해소의 공간을 상징한다. 하지만 선비들은 그 안에 좀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했다. 자연과 마주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독서와 수양을 통해 선현(先賢)의 훌륭한 정신을 계승하였다. 부모 형제와 정을 나누고 지역 유림(儒林)들과 공론을 모으며 풍류의 장을 마련하는 등 오늘날의 멀티플렉스를 누정(樓亭) 안에 실현하였다. 바쁜 일상 속에서 혼자 또는 여럿이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사적 공간을 찾는 현대인들의 소망을 이미 선비들은 누정(樓亭)을 통해 즐기고 있었다.
이제 선비들의 다양한 고민과 휴식, 풍류가 깃든 상산의 누정(樓亭)을 찾아 떠나보고자 한다. 수려한 산수 속에 자리한 작은 공간 속에서 자연이 주는 육체적 치유(治癒)와 수백 년 전 그들이 남긴 편액(扁額)의 글귀와 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음미하며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는 것으로 다시 일상의 활력을 붙여 줄 것이다.
1. 누정(樓亭)은 자연과 마주하며 학문을 연마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친 곳이다.
상산(商山)의 선비들에게 있어 산수(山水)는 우주의 원리가 실현되는 곳이자 높은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일찍이 세상의 일에는 뜻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여 도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거나,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펼치다가도 말년에는 산수 속에 자그마한 거처를 마련하여 덕을 기르고 인격을 수양하며 학문의 완성을 이루기를 갈망했다.
간혹 누정(樓亭)으로서 산수(山水)와 어우러진 이상적 경관(景觀)을 갖추지 못했다면 손수 연못을 파서 물줄기를 흘러 보내고, 그 안에 인공 섬을 조성하여 꽃과 나무를 심는 등 유학(儒學)을 탐구하기 위한 이상적인 공간을 직접 설계하여 누마루 앞에 만들어 펼쳐 버린다. 여기에 유학(儒學)의 학문적 경지를 추구하는 고사를 인용하거나, 스스로 삼은 학문과 수양의 공간으로 완성했다.
아울러 자신이 연마한 학문의 경지와 관직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나라에 기여하는 인재를 길러 내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갈무리하여 자신만의 철학을 저술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무리 짓는다. 이처럼 선비들의 누정(樓亭)은 작지만 큰 뜻을 품은, 학자로서의 유학(儒學)을 실천하는 공간이었다.
가. 쾌재정(快哉亭)
쾌재정(快哉亭)은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230-1에 있는 정자이다. 이조 연산조의 대문장이고 인천군(仁川君)에 책봉된 난재(懶齋) 채수(蔡壽. 1449〜1515)가 중종반정(中宗反正)후 이조참판직에서 물러나 59세 때 낙향하여 지은 산정형(山頂形) 정자이다. 지은 연대는 1509년경으로 본다. 쾌재정(快哉亭)이란 이름은 주변의 멋진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느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상산지(商山誌)』에
이안면 이안촌 뒤에 난재(懶齋) 채수(蔡壽)가 지었다.
고 하였다.
『함창현지(咸昌縣誌)』에는
쾌재정은 이안부곡 서쪽에 있다. 난재 채수의 별당이며, 그가 쓴 기(記)가 있다.
라고 하였다.
쾌재정(快哉亭)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면서, 이행(李荇), 황여헌(黃汝獻), 정시한(丁時翰) 등 당대 문장가들이 이곳에서 제영(題詠)을 남김으로써 문학의 공간이자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채수(蔡壽)가 1514년에 지은 「쾌재정기(快哉亭記)」는 다음과 같다.
내(川)가 동쪽으로 달려가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은데, 산은 물에 임하여 마치 누에머리 같다. 날아갈듯 한 정자가 있으니 쾌재정(快哉亭)이다. 동으로 학가산(鶴駕山)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속리산(俗離山)이며, 남으로는 갑장산(甲長山)우러르고, 북으로는 대승산(大乘山)이다. 강산이 구불구불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데 주인은 누구인가, 채기지(蔡耆之)라네. 소년에 등과하여 외람되게도 장원을 차지하였고, 지위는 군(君)에 봉하여져 영광이 과분하다. 노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와 의식이 족하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거문고를 울리고, 바둑을 두고, 시 읊으며 술 마시는 한인(閒人)이요, 시비나 헐뜯음은 알지도 못 한다. 유유자적하며 애오라지 한해를 보낸다.
또한 「쾌재정(快哉亭)」 시에서
늙은 나이 이제 예순 여섯
지난일 돌이켜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구나
젊었을 때는 재주가 겨룰 이 없기를 기약했고
중년의 공명(功名) 또한 홀로 잘난 체하였네
세월은 흘러 노끈으로 잡아매기 어렵고
산길은 멀고멀어 나가지 못하는 구나
어떤 것인들 티끌세상 일 다 버리고
봉래산 꼭대기에서 신선을 짝하느니만 하랴
라고 읊었다.
채수(蔡壽)는 쾌재정(快哉亭)에서 『설공찬전(薛公瓚傳)』을 한문으로 창작하였으며, 이 소설이 한글로도 번역되어 많이 읽혀졌으나 금서가 되었다. 이후 실전된 『설공찬전(薛公瓚傳)』의 한글소설이 『묵제일기(黙齋日記)』의 이면(裏面)에 필사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이는 한글소설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쾌재정(快哉亭)은 교류의 장이면서 문학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나. 계정(溪亭)과 대산루(對山樓)
계정(溪亭)과 대산루(對山樓)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1에 있다.
『상주지(商州誌)』에 우산칠리강산(愚山七里江山)이라고 하면서 칠리강산(七里江山)의 산과 물은 모두 속리에서 왔으며, 산중 깊은 곳이었으나, 정경세(鄭經世)가 이 임숙(林塾)과 천석(泉石)의 기승장관(奇勝壯觀)을 사랑하여 1600년(선조 33)에 비로소 복거(卜居)하면서 20개소의 경관을 이름 짓고 시로써 찬상(讚賞)하였다.
『상산지(商山誌)』에는
상주 밖 외서면 우산 문장공 정경세가 도를 강(講)했던 곳이다. 곳이다. 광해정란을 당해서 상소를 올리고 산으로 돌아와 일찍이 시에 말하기를 ‘한수(漢水)는 맑기가 거울 같고, 모당(茅堂 : 거처하는 곳)은 좁기가 배와 같다. 처음에는 큰 꿈을 펴려했더니, 마침내 할 일 없는 중과 같이 되었네. 밥을 던져 고기를 기르고, 노래를 그치고 해오라기와 함께 잠잔다. 가시삽짝을 종일토록 닫아두고, 한가롭게 앉아 있으니 마음이 유연(悠然)하다.’
라고 하면서, 정경세(鄭經世)가 우산(愚山)에 복거(卜居)한 심경을 기술하였다.
이처럼 계정(溪亭)은 영남학파를 중흥시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독서하기 위해서 1603년에 지은 정자이다.
계정(溪亭)은 상(上)우산마을 서쪽의 주산을 등지고 건물 동편 아래로 이안천(利安川)이 흐르고, 동쪽 멀리 높은 연봉들은 안산으로 삼아 동향 배치하였다. 대산루(對山樓)는 정자의 북쪽 바로 앞에 있는 안산(案山)을 마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경세(鄭經世)는 우산에서 「우곡잡영20십절(愚谷雜詠二十絶)」을 지었다. 이 우곡이십경(愚谷二十景)은 경관을 감상하는 주체의 위치에 따라 10경씩 구분되어 있는데, 앞의 10경은 서실에서 앉거나 누워서 즐기는 경관이며, 뒤의 10경은 직접 소요하면서 감상하는 경관이다.
전10경(前十景)은 서실(書室), 회원대(懷遠臺), 오봉당(五峯塘), 오로대(五老臺), 상봉대(翔鳳臺), 오주석(鰲柱石), 우화암(羽化巖), 어풍대(御風臺), 만송주(萬松洲), 산영담(山影潭)이며
후10경(後十景)은 계정(溪亭), 수륜석(垂綸石),선암(船巖), 화서(花漵), 운금석(雲錦石), 쌍벽단(雙璧壇), 청산촌(靑山村), 화도암(畵圖巖), 공선봉(拱仙峯), 소회동(水回洞)이다.
전10경(前十景)의 제1경은 「서실(書室)」이다.
성현께선 가셨으나 책은 남아 있으니
마음 쏟아 이해하면 성공 보리니
이 서당에서 부지런히 힘 쏟으며
옛적 윤편(輪扁)이 환공을 비웃은 고사를 혐(嫌)의하지 말자.
제1경이다. 2층 누각의 T자형 건축물로 정경세(鄭經世)가 독서, 강학, 서고 등으로 활용한 공간이다.
이 시에서는 성현(聖賢)은 이미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들이 남긴 책이 있기 때문에 이를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면 성현(聖賢)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노래하였다. 시의 내용만으로 볼 때 제1경은 경관과 상관없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서실(書室)은 현재의 대산루(對山樓)이며 대산루(對山樓)라는 이름은 산을 마주하고 있는 누각(樓閣)을 뜻한다.
후십경(後十景)의 제1경은 「계정(溪亭)」이다.
만 골짜기 바람과 물속에 홀로 살아가네
긴긴 해에 계정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다.
느즈막이 뜻 내어 책을 놓고 나가보니
싱그러운 녹음이 눈이 부시도록 뜰 안에 가득하구나.
「계정(溪亭)」은 20경 중 제11경이다. 「계정(溪亭)」은 서실(書室) 앞에 있는 초가집으로 만든 정자(亭子)이다. 이 시에서 보면 후십경(後十景)의 시작은 건물 밖으로 나와 뜰을 소요(逍遙)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앉거나 누워서 경관을 상대하던 전십경(前十景)과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우곡잡영20십절(愚谷雜詠二十絶)」의 후기에는, 이 20경은 근력이 떨이지고 병이 들어 다니기 어려워졌을 때, 지난날에 노닐던 곳을 생각해서 절구 20수를 지어 벽에 붙여두고, 누워서 유람하는 흥을 부쳤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곡잡영20십절(愚谷雜詠二十絶)」은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수양과 강학을 수행하던 당대 사림(士林)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수토(搜討)와 와유라는 당대 사림의 산수 향유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 누정(樓亭)은 찾아가고 맞이하는 정겨움이 있는 곳이다.
옛 고을에는 그 지역 일대가 한눈에 보이면서 경치가 빼어난 곳에 단청이 화려하고 처마가 웅장한 누각(樓閣)이 자리하고 있어 접빈과 화합의 기능을 담당했다. 주로 당대 고관대작이나 저명한 묵객(墨客)들이 이곳에 출입하여 연회의 장소로 활용하면서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누각(樓閣)이 위치한 일대 경관의 수려함을 묘사하거나 수령의 선정을 칭송하는 글을 시로 지어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관루(官樓)의 경우는 관아에서 운영하는 공간이기에 누구나 자유롭게 향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역의 선비들은 격의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길 공간이 필요했고, 문중 또는 개인이 소유한 정자(亭子)를 이용하였다. 만남과 사귐의 공간으로서 누정(樓亭)을 방문하는 선비들은 시단을 형성하며 교유하고, 향촌 내 여론을 형성하는 등 선비들의 누정(樓亭)은 그들만의 문화 살롱이었다.
산수화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된 선비들은 누정(樓亭)에서 벌어지는 흥취 넘치는 시회와 음악, 향기로운 술과 음식, 밤새도록 이어지는 이야기 등 유선(儒仙)들의 풍류를 사랑했다. 이 소중한 공간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가꾸기 위한 노력으로 계(契)를 결성하기도 했는데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대를 이어 모임을 유지하며 누정(樓亭)을 지키고 있다.
가. 침천정(枕泉亭)
침천정(枕泉亭)은 상주시 북문동 703번지에 있다. 침천정(枕泉亭)은 1577년(선조 10년)에 목사 정곤수(鄭崑壽)가 읍성 남문 밖에 건립한 관정(官亭)으로 연당(蓮堂)이라 칭했다. 임란 때 소실되어 1612년(광해군 4)에 목사 한술(韓述)이 중건하고, 1614년 목사 강복성(康復誠)이 천향정(天香亭)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1693년 목사 이항(李恒)이 이향정(二香亭)으로 고쳤다. 1914년 상주읍성이 헐릴 때 지역민 10여명이 매입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군수 심환진(沈晥鎭)이 침천정(枕泉亭)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상산지(商山誌)』에
침천정은 주5리 자양산 아래 약천(藥泉) 위에 있다. 이향정(二香亭)이 헐릴 때 지역민 10여인이 힘을 합해 매수하여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
고 하였다.
침천정(枕泉亭)은 주로 관료들의 휴식처(休息處)와 유상처(遊賞處)로 이용되었으며, 내부에는 많은 기문(記文)과 원운(原韻)이 걸려있다.
김악주(金岳柱)가 「이향정기(二香亭記)」를 썼는데 서리(胥吏)로서 관정(官亭)에 기문을 남긴 경우는 이것이 상주에서 최초다.
내가 정사년에 여름에 목사의 허락을 얻어 이 곳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무릇 이 정자의 기이한 생김이나 모습은 내가 아는 바다. 정자 아래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연꽃인데, 연꽃은 품종이 두 가지로 붉은 색과 흰색이 각기 남과 북으로 나뉘었기에 이향정(二香亭)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또 김악주(金岳柱)는 「유이향정서(遊二香亭序)」에서
사시로 학문을 연구하니 모두가 상(商)나라 학교(序)의 글을 숭상하던 기풍을 보고, 삼경에 거문고 타며 글을 읽으니, 성대한 주나라 학교(庠)의 선비 기상을 보도다. 공자 맹자의 인덕(仁德)의 교화는 옛날과 같은데, 송대(宋代) 성리학자의 예의와 사양(辭讓)함은 새롭도다.
이 이향(二香)의 이름난 정자는 실로 일로(一路)의 명승지로 우뚝한 상산(商山)을 마주하여 우뚝 솟았고, 꽃과 대숲의 많은 집들은 아득히 북천의 어연(禦淵) 긴 숲을 끌어당기도다. 구름 걸린 숲 한 곳에 온갖 모습의 초목이 색색으로 앞개울, 뒷 개울을 덮었고, 많은 촌락 골목은 정연하게 동쪽 마을 북쪽마을을 나누었다.
- 중 략 -
오호라. 등왕각(滕王閣)의 놀이 이미 지난일이요 난정(蘭亭)의 놀이도 아득하고 멀도다. 백대의 광음은 덧없고 한 때에 단란한 모임도 두 번 얻기 어렵도다.
산을 이루는 공력에 한 삼태기 흙 모자람을 두려워하고 학문은 삼여(三餘)로서 충족시켰으며, 다행히 태평성세를 만나 함께 즐거운 자리 하였도다. 각기 단인(短引)을 읊어 길이 가을바람에 하소연 하노라.
이경유(李敬儒)도 「이향정(二香亭)」의 시(詩)에서
남쪽의 연꽃과 북쪽의 연꽃이
붉고 흰 색깔로 나뉘어 있다.
정자가 두 못 사이에
완연히 새가 날개를 편 듯하다.
고 읊었다.
이처럼 침천정(枕泉亭)은 지역의 관리나 선비들의 휴식처(休息處)와 유상처(遊賞處)로 활용되었다.
침천정(枕泉亭)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한시문의 창작 공간이기도 하였다. 특히 상주 출신의 대 문장가인 이준(李竣), 조우인(曺友仁), 이경유(李敬儒), 강세륜(姜世綸) 등의 명시와 기문도 이 정자(亭子)에서 창작된 것이 많았다. 현재에도 상주유림에서 한시백일장을 이곳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나. 청간정(聽澗亭)
청간정(聽澗亭)은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154번지에 있다.
『상산지(商山誌)』 정관조(亭觀條)에
청간정 주남 운곡에 사용 조예가 세웠으니, 단상에 은행이 쌍취(雙翠)하고, 정전에 석천이 장명하며, 사예 조정융이 시를 쓰고 현판을 걸었다.
고 하였다.
이처럼 청간정(聽澗亭)은 1585년경에 조예(趙秇)가 지었으며, 정자(亭子) 앞에는 4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고 국사봉, 계곡물이 사철 흘러 시인 묵객(墨客)들의 시회장(詩會場)으로 널리 애용되면서 친목과 접빈과 화합의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정자(亭子)에는 조정융(曺挺融)과 조원윤(趙元胤)의 시가 남아 있으며, 조유경(趙游經)의 「청간정기(聽澗亭記)」가 있다.
송덕부(宋德溥)는 「제청간대(題聽澗臺)」를 지었다.
하늘이 만들어 아끼던 명구(名區)를 내어 놓아
오늘 저녁에 상쾌하게 올라서 마음껏 유람한다.
산 빛은 은은히 뜬구름 밖에 보이고
돌 형세는 석양빛 사이에 가지런하지 않네.
튀어난 바위틈에 시드는 꽃을 함께 아끼고
한적한 물가에 숨은 풀을 유독 가련해 한다.
태연하게 대하여 세상 생각 버리려고
술잔 들어 취하며 또 기뻐하네.
송덕부(宋德溥)는 청간정(聽澗亭)이 하늘이 만들어 아끼던 명구(名區)라며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으며, 이 정자(亭子)에서 세상 생각 버리고 술잔 들어 취하며, 벗들과 더불어 즐거운 전원생활을 향유함을 노래하였다.
조유경(趙游經)은 「청간정기(聽澗亭記)」에서
정자의 명칭을 청간정이라 부른다. 청간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정자를 간수(澗水) 곁에 지으니, 정자의 사람들이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자의 사람이 물소리를 자연히 듣게 되는데, 다만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 못한다면 어찌 청간(聽澗)이란 이음으로 정자를 칭하겠는가?
그렇다면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른 봄날에 얼음이 녹아 찰랑찰랑 흘러가는 물소리가 청아하고 한가하게 들리니 그것이 청한한 감흥을 일으키게 한다.
고 하면서 속세의 모든 티끌을 버리고,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오직 맑고 윤택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니 즐거움이 생기서 스스로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청간정(聽澗亭)은 친목과 화합, 접빈은 물론 선비들의 유상처(遊賞處)이며,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자신을 정진하는 수양처(修養處)로 삼았음을 말하고 있다.
다. 금란정(金蘭亭)
금란정(金蘭亭)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638번지의 장각폭포 옆에 있다. 신라 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일찍이 속리산(俗離山)을 찾아보고
도는 세상은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하려하고,
산을 세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세속은 산을 떠나려 하는구나.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또한 금란정(金蘭亭)의 위치는 천왕봉이 삼파수(三派水)의 꼭지점이라 물이 튀는 방향에 따라 남한강, 금강, 낙동강으로 흘러 세(三) 강의 시원이 되는 곳이다.
이 곳에 위치한 금란정(金蘭亭)은 창건 연대는 깊지 않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다. 금란정(金蘭亭)은 뜻을 같이 한 정운상(鄭雲常)외 11명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고, 유상하기 위해 1900년대에 건립한 정자이며, 현판은 조봉진(趙鳳鎭)이 썼다.
권오하(權五夏)의 「금란정기(金蘭亭記)」에 보면
정자를 금란(金蘭)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대개 취한 바가 있다. 주역에 말하기를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예리함이 금(金)을 끊고, 같이 한 말(言)은 그 냄새가 난초(蘭)와 같다고 하였다. 무릇 금은 물건의 굳은 것이고 난초는 물건의 향기 나는 것이다. 마음의 날카로움이 굳은 금을 끊고 말의 냄새가 난초의 향기 같으니 같은 마음이 지극하지 아니하면 능할 것이랴! 이는 두 사람에 있어서도 오히려 어렵거든 하물며 많은 사람임에랴! 흑호(黑虎: 壬寅)년 모춘(暮春:음력 3월) 아래위 마을에 뜻을 같이 하는 열두 사람이 꾀(謀)를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며 소리를 같이 하고 힘을 내어 새로 정자 두어 칸을 속리산 아래 용추(龍湫)위에 세우기 시작하여 두 서너 달이지나 낙성하였으니 이 어찌 마음이 같아 날카롭고 향기 냄새나는 금란(金蘭)의 소치(所致)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소통하고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려운데도 십여 명이 함께 큰일을 도모한 것은 금란지교(金蘭之交)의 모범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선비들은 서로 교우하면서 정자(亭子)를 연회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하면서, 또한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또한 정자(亭子)에서는 그 정자(亭子)가 위치한 일대 경관의 수려함을 묘사하는 창작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3. 유학정신(儒學精神)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선비들이 향유한 누정(樓亭)은 유교(儒敎)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부자간의 효친(孝親), 군신간의 의리(義理), 부부간의 도리(道理), 어른과 아이 간의 질서(秩序), 친구간의 신의(信義) 등은 물론 민심을 보듬고 나라를 걱정하는 등 유학자로서 지켜야 할 덕행의 실천이 누정(樓亭)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나라와 임금을 생각하며 한 세월을 보내기 위해 누정(樓亭)을 지어 강호를 벗하면서 지내기도 하고, 노년의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자손들의 우애를 다지기 위해 누정(樓亭)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을 위한 구휼정책을 펴기 위해 식량을 보급하거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의원의 역할을 한 누정도 있으며,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의 창의(倡義)를 도모하기 위한 은신처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선비들의 누정(樓亭)은 유학(儒學)의 정신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써 유학자들의 삶이 학문적 이념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
가. 무우정(舞雩亭)
무우정(舞雩亭)은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1-4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무우정(舞雩亭)은 경천대(擎天臺)와 고슬단(鼓瑟壇)의 중간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창연한 고색을 간직한 채 산을 등지고 강을 굽어보며 있다.
『상산지(商山誌)』 정관조(亭觀條)에
낙강 상(上), 자천대 하(下)에 별제(別提) 채득기(蔡得沂)가 세우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기(記)를 썼으며, 중간에 폐하고 유지(遺址)만 있었는데, 1748년에 목사 이협(李埉)이 중창하고 사람을 두어 수호(守護)하게 하며 기(記)와 시(詩)를 썼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무우정(舞雩亭)은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 1604〜1647)가 1628년부터 자천대(自天臺, 擎天臺)에 터를 닦고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이다. 그 뒤 1746년(영조 22) 목사 이협(李埉)이 중창하였다.
무우정(舞雩亭) 이름은 우담(雩潭)이 공부뿐만 아니라 가뭄이 심할 때 이곳에서 악공과 무희를 동원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내 해갈되었다는 데서 연유한 듯하다. 무우정(舞雩亭)은 특히 우담(雩潭)이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모시고 심양으로 떠날 때 지은 한글가사 「봉산곡(鳳山曲)」의 산실이기도 하며, 귀국하여서 이 정자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고 세상에 나가지 않자, 효종(孝宗)이 화사(畵師)를 시켜 이곳의 경치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보면서 지난날 고초를 함께했던 군신간의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따라 심양으로 갈 때 지은 「봉산곡(鳳山曲)」에 보면
가노라, 옥주봉아, 잘 있어라, 경천대야.
요양 만 리 길이 멀다 해도 얼마 멀며
복관에서 1년이 오래라 하지마는
상봉산의 별세계가 처음 눈에 들어올 제
- 중 략 -
잊어라, 가리라 가노라, 있어라.
무정한 갈매기는 내 맹세를 비웃지만
성은 하 망극하시니
갚고 다시 돌아오리라.
와 같다. 이처럼 「봉산곡(鳳山曲)」은 우담(雩潭)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모두 101구로 되어 있다.
이처럼 무우정(舞雩亭)은 당대 문인들과 수많은 문사들의 시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쓴 「무우정기(舞雩亭記)」에 보면
정자의 이름이 무우(舞雩)인 것은 물론 우담(雩潭)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채군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에 두루 통하면서 이리 저리 휘젓고 다니면서도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제자리로 돌아와 안식을 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무우(舞雩)라는 이름 역시 공문(孔文)의 풍영(風詠)의 낙을 뒤쫓아 올라가 그 본원(本源)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여겨진다.
낸 생각에 군의 선대부(先大夫)께서 기(沂)라는 글자를 가지고 군의 이름을 지은 것 역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점지해 준 것은 아닐까 하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산수의 멋진 경치를 군 홀로 독점하고 무(舞雩)의 정취를 군 스스로 터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한두 마디 말이 아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우담(雩潭)이 기문을 요청해와 글을 썼다고 하였다. 이 기문에서 보듯이 우담(雩潭)은 무우정(舞雩亭)을 통하여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교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 호연정(浩然亭)
호연정(浩然亭)은 함창읍 윤직리 689-10번지 동두산(東頭山)기슭에 자리 잡은 정자이다.
『함창군읍지(咸昌郡邑誌)』 누대조(樓臺條)에는
호연정은 군 동쪽 5 리에 있으며, 진사 신유가 지었으며, 자영시(自詠詩)가 있다. 후손 진사 진원이 중건하였고 수암 권상하가 현판을 썼으며 후손 황(榥)의 기문(記文)이 있다.
고 하였다.
호연정(浩然亭)은 신유(申裕, 1496〜1541)가 간신을 논핵(論劾) 후 귀향하여 독서와 휴양을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신유(申裕)는 신사임당(申師任堂)과는 재종간이었으며, 낙향 후에 나라에서 9번이나 예를 갖추어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을 높이 산 대유(大儒)들이 그와 벗하고 교류하며 학문을 궁구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정자의 이름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호연(浩然)하게 돌아온 뜻이 있다는 말뜻으로 호연정(浩然亭)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현판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썼다.
신유(申裕)가 지은 「원운(原韻)」이 있다.
조용히 살아 할 일 없어 읊고 읊조리니
흥미가 유연한 것은 비온 뒤에 많구나.
앞뜰에 이끼 가득하니 사람이 오지 않고
수풀사이에는 꾀꼬리 노래만 들리는구나.
라고 시를 읊으면서 독서에 증진하고 유유자적하였다.
권섭(權燮)은 「호연정 팔경시(浩然亭 八景詩)」를 지었으며,
1경 학가신월(鶴駕新月, 학산에 떠오르는 새 달), 2경 금대낙조(金臺落照, 금대의 석양 빛), 3경 만지조하(萬池朝霞, 만지의 아침노을), 4경 당교모우(唐橋暮雨, 떼다리 저문 비), 5경 화천어화(花川魚火, 꽃내의 불치기 불), 6경 용담연주(龍潭蓮舟, 용담의 연꽃 배), 7경 물계수유(勿溪隨柳, 물계의 버들을 따라), 8경 영야관가(穎野觀稼, 영순(永順)들의 모내기를 보고)
를 팔경(八景)의 시제(詩題)로 하였다.
현판은 호연정(浩然亭)이며 중앙마루 안쪽에 수양미헌(首陽薇軒)이라 걸었다.
호연정(浩然亭)이 있는 윤직마을은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인경(世守仁敬)의 전통을 자랑하고, 영남대로 옛 과거 길을 지나는 과객들이 마셨다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다. 수석정(水石亭)
상주시연원동 855-1 번지에 있다. 수석정(水石亭)은 흥암서원 남쪽 북천변에 연한 바위의 대(臺)로 이곳에 수석정(水石亭)이라는 해서체의 음각이 있다. 누가 새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글씨는 규천(虯川) 전극항(全克恒, 1590〜1636)의 필체(筆體)라 전한다.
『상산지(商山誌)』 정관조(亭觀條)에는 수석정(水石亭)을
노음산 동편에 한림 전극항이 세우고 당실(堂室)을 찬하(餐霞)라 하였으며, 시를 지어 남겼다.
고 기록하였다.
전극항(全克恒)은 「제수석정(題(水石亭)」에서
사방이 높고 낮은 산만 보이는데 아늑한 승지(勝地)에 터 잡아 갈며 티끌세상 멀리 하였다. 마음을 맑게 하려고 풍진이 소란한 해 밖에 나가지 않았고 흥을 쫓아 수석사이에서 자주 응대한다. 낮 익은 친한 신선과 같이 웃고 이야기하며 헌면(軒冕)을 벗어주고 나니 편안하고 한가하다. 달이 밝아 다시 꽃 보며 술 마시려고 하는데 어느 곳에서 절름거리는 나귀타고 오는고.
라고 하였다.
성헌징(成獻徵)도 「수석정기(水石亭記)」에서
수석정은 규천(虯川)이 지은 정자로 병자호란 이후 정자는 불타버리고 담장은 허물어져 그 흔적만 남아 있네. 특이 하게도 사람들이 방고(放古) 유상하는 곳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전후가 다르나 풍광은 고금이 변함이 없다.
- 중 략 -
이 좋고 뛰어난 경승지를 적막한 속에 버려두니 풍월은 주인이 없고 물안개만 자욱이 깊어지는구나. 이 어찌 안타깝지 아니한가. 내 개연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를 기(記)로 한다.
라고 적어면서 전극항(全克恒)이 남긴 자취를 세상에 알렸다.
전극항(全克恒)은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아들로서 사람들이 동방(東方)의 이백(李白)이라고 할 정도로 시를 잘하였으며 낙강범월시회에도 시를 남겼으며, 정경세(鄭經世)와 이준(李埈)을 사사(師事)하였다. 전극항(全克恒)이 1636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병자호란 중에 규천(虯川)이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했으나, 서울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고 한성으로 돌아가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순절신(殉節臣)으로 정려(旌閭)가 내려 졌다.
왕이 「정려(旌閭) 축문」에서
좋은 세상에 높은 표상을 품고 태어나, 청풍고절의 품성으로 세속의 번뇌를 벗어나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죽어 세상에 이름을 남겼도다. 의로운 충성은 천 년 동안 이어져 배움에 의로움을 지키는 길이요. 나라가 위급할 때 정의로 목숨을 바치는 불꽃같은 충절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 하면서 전극항(全克恒)의 의로움과 충절을 칭송하였다.
전극항(全克恒)은 격동기에 태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삶을 살다간 분이다. 그 숭고한 뜻을 새겨 나라에서 내려진 정려(旌閭)는 후세에 귀감이 되는 증표이다. 이러한 충신의 자취인 수석정(水石亭)은 불타 없어지고, 징담(澄潭)위 바위에 음각된 암각서(巖刻書)만 남아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4. 누정(樓亭)은 스승과 선현들이 남긴 정신세계와 학덕을 계승하는 곳이다.
앞서간 사람들이 남긴 덕행과 학문적 성과, 삶의 철학 등은 후학들에게 많은 점을 선사한다. 후대 사람들은 그들이 남긴 역사와 글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대비한다. 선비들의 공부는 선현들이 남긴 글 속에 숨어있는 참뜻을 해독하여 유교가 이상향으로 삼는 대동사회를 실천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스승과 선현이 남긴 정신세계와 학덕을 계승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별도의 제사 공간에서 추모의식을 올리기도 하는데, 누정(樓亭)은 일상과 가까이에서 늘 그 정신세계를 기억하고 이어져가고자 지어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 청월루(淸越樓)
청월루(淸越樓)는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번지에 있는 옥동서원(玉洞書院)의 문루(門樓)이다. 누각의 정면 중앙 처마 아래에는 회보문(懷寶門), 대청에는 청월루(淸越樓)란 편액을 걸어 누(樓)와 문(門)의 명칭을 확실하게 했다.
옥동서원(玉洞書院)은 한성부윤 황맹헌, 홍문수찬 황효원 등이 방촌(尨村) 황희(黃喜) 영정을 봉안하고 공부하던 글방(書堂)이 효시이다.
1508년 방촌영당(尨村影堂)을 건립하고 향사하였으며, 1789년 청월루(淸越樓)를 이건해 왔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는 「옥동제영 19제(玉洞題詠 19題)」에서 청월루(淸越樓)를
청월루여 청월루여!
누상에 두 재실 마주 보며 칭송하도다.
도가 밝고 덕이 확립되어 기상이 남달라
겉과 속은 맑고 맑아 빙호추월 같구나.
동쪽은 윤택하고 서쪽은 세밀하다 이름하나
어디서든 옥의 결은 원래 하나였다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팔음이 연주되는 곳에 옥음이 울려서
낭랑하게 곧은 종소리와 시종 함께하는 것을
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정종로(鄭宗魯)는 「옥동서원명당제기(玉洞書院名堂齋記)」에서
서원의 정문을 회보(懷寶)로 하며 그 의미는 장기이대(藏器以待)로, 그 재능과 도량을 길러 이를 쓸 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2층의 누마루는 청월(淸越)로 하였으며, 그 의미는 옥성청월이장지(玉聲淸越以長之)의 의미로 옥성(학문의 소리)이 멀리멀리, 그리고 오래토록 퍼져나간다는 의미이다.
누마루의 왼쪽 방을 친밀료라고 하고, 오른쪽 방을 윤택료로 한다. 이는 모두 옥을 그 의로 취함으로, 진밀은 학문의 정미(精微)를, 윤택은 학문의 아름답고 여유로움을 말한다.
라고 명명한 이유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회보문(懷寶門)에 대해서는
청월루 아래 회보문
회보라는 문 이름 뜻도 좋아라.
선비의 장기(藏器)가 곧 회보이니
사용하면 금고를 조제할 수 있네.
평소 내가 쓰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다만 일심으로 포부를 감추어야 한다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고인이 상자 속에 넣어두고 진가를 기다리면
옥을 자랑하여 팔려고 성인께서 번뇌하는 것을
라고 문(門)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청월루(淸越樓)는 이외에도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 올라 만남과 이별의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그 안타까운 마음들을 시나 노래로 표현하였다.
또한 34구(句)로 이루어진 청월루 가(淸越樓歌)가 있다.
누여 누여 청월루여! 귀덕(歸德)의 서남 경계에 있도다.
오량가로 얽어매니 어찌 그리 높다랗고
상쾌하고 엄숙하니 다른 누와 다르다.
제월풍광에 다함없는 경관이
나의 가슴 넓히고 나의 성품 기르도다.
- 중 략 -
승당과 입실에 차례로 공을 들여
다리는 마땅히 굳세고 척추는 들보같이 굳세야 한다.
또한 7월 16일에 여러 벗들과 함께 청월루에 올라 부른 「칠월기망여제우등 청월루 가(七月旣望與諸友登淸越樓 歌)」도 있다.
이처럼 청월루(淸越樓)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또한 이곳에서 학문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행동해야할 규범들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면서 승당과 입실로 가는 마음들을 다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청월루(淸越樓)는 서원의 정문 문루(門樓)로서 서원의 교육과 유상공간으로 활용한 정자이면서도, 서원에서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녀야할 마음가짐과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야할 상징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하겠다.
나. 정허루(靜虛樓)
정허루(靜虛樓)는 상주시 도남동 175번지에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의 문루(門樓)이다. 정허(靜虛)라는 문루의 이름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지었다. 정허루(靜虛樓)는 1606년(선조 39)에 창건하여 1676년 사액을 받은 도남서원(道南書院)의 문루로서 교생들의 교육여가의 유상(遊賞)과 시인 묵객의 유상처(遊賞處)이었다. 정허루(靜虛樓)는 낙동강에서 가졌던 시회(詩會)의 연원은 멀리 고려의 이규보(李奎報)에 의해 시작된 낙강범주유(洛江泛舟遊, 1196)에서 1862년의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낙강범주시회(洛江泛舟詩會)까지의 51회의 유명시회를 비롯하여 많은 시회를 가졌다. 이 시회들이 대부분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정허루(靜虛樓)에서 이루어졌다.
정종로(鄭宗魯)의 「정허루중수기(靜虛樓重修記)」에서
정허루(靜虛樓)는 도남서원(道南書院)의 문루이다. 그 터는 고을의 동쪽 낙연(洛淵) 뒤에 있는데 강산의 빼어남이 있으니, 지난 선조 임금 때에 나의 선조인 우복(愚伏) 선생과 고을의 여러 현인들이 이 서원을 창설하시고, 포은(圃隱)·한훤(寒喧)·일두(一蠹)·회재(晦齋)·퇴계(退溪) 다섯 선생을 모시고 도정사(道正祠)라 하였다. 그 뒤 서애(西厓)·소재(穌齋) 두 선생과 나의 선조((愚伏)을 추배하였다.
사당 앞에는 일관당(一貫堂)이 있는데 당의 왼쪽 방을 경재(敬齋), 오른쪽 방을 의재(義齋)라고 하고, 앞의 서원의 문루는 입덕(入德)이라 했다. 그러나 문루를 만든 것은 근대의 일인데 그 이름을 정허(靜虛)라고 한 것은 청대(淸臺) 선생이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라고 하면서 정허(靜虛)라고 명명한 사유와 정허(靜虛)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또한 강세진(姜世晉)의 「정허루중수기(靜虛樓重修記)」에서도
정허(靜虛)라는 문루의 의미를 물었다. 그래서 내가 “이 말은 염계(濂溪)의 통서(通書)에서 나온 말이다. 정허(靜虛)라는 것은 바로 공부의 지극히 높은 곳을 말하는 것이지 초학자들이 능히 도달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서원에 걸린 편액을 보니 전부가 공부하는 순서와 관계되는 것이므로 학자는 우선 입덕(入德)의 문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다니면서, 쉬지 않고, 보고 즐기면 수양하여, 공경에 거주하여 인의 바르게 하고, 의를 가지고서 바깥을 곧게 하여, 체와 용을 서로 담고 동과 정이 함께 나아가게 되도록 하면 본연의 천성에 사물로 인한 구속은 모두 사라지게 되어 맑은 물과 거울 같은 하늘이 될 것이다. 무릇 내가 사물에 응하고 맞이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일리(一理)가 관철되는 것이니, 정허(靜虛)의 의미는 일관(一貫)의 묘미와 함께 서로 비취지고 호응하게 되어 입덕문(入德門) 위의 한 층에 높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누(樓)의 이름을 정허(靜虛)라고 한 의미와 서원 전체의 현판에 명명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정허루(靜虛樓)는 선현이 남긴 정신세계와 학덕을 계승하는 학문의 시작점으로서 서원의 기능을 대변하면서도, 또한 시인이나 묵객들의 시문학의 창작 공간으로서 역할을 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정허루(靜虛樓)는 선비들의 방문과 선유(船遊)하는 풍류객이 많이 있었고, 당시의 감흥을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렇듯 정허루(靜虛樓)가 있는 도남(道南)은 그 경관(景觀)만이 절승(絶勝)이 아니라 유학(儒學)의 연원지(淵源地)이다.
Ⅴ. 누정(樓亭)은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 공간으로 태어나야 한다.
우리나라는 누정(樓亭)의 나라라 할 수 있다. 전국 어디에 가나 강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산이 보이는 곳이면 크고 작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만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여행 중에 누정(樓亭)을 만나면 발길을 멈추고 쉬어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누정(樓亭)은 현재까지도 활용도가 가장 높은 살아 있는 생활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전통시대의 누정(樓亭)은 용도 면에서 현재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 약속 장소이기도 했지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연회나 모임을 갖기에 적절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유휴공간으로 활용했지만, 사제·학우가 자연과 호흡하며 학문을 연마하는 야외수업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을 떠난 외로운 여행자나 과거를 위해 길 떠난 과객에게는 휴식과 성찰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는 구전되는 이야기·야담 등의 무대가 누정(樓亭)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정(樓亭)이 이야기 문화의 배경이자 생성의 공간이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조선시대 누정(樓亭)의 존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생산된 시조·가사·한시 등의 누정문학(樓亭文學)을 거론해 볼 필요가 있다. 산과 강, 바다와 계곡 등 전국 곳곳에 있는 누정(樓亭)을 배경으로 하거나 누정(樓亭) 자체를 대상으로 한 문학 작품을 통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리 잡았던 문학과 예술의 실상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정(樓亭)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이나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평민층의 문화공간은 아니었다. 유명한 누각(樓閣)의 경우 시회·강학을 주로 했던 그 지역 사대부 남성의 공간이었으며, 누정(樓亭)의 대부분은 왕실들의 인물이나 유명 사대부들이 축조하고 즐겼던 곳이다. 사대부들은 누각(樓閣)이나 정자(亭子)에서 주변 경관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대화를 나누며, 사색과 여유, 쉼을 통한 치유와 해소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누정(樓亭)은 몇 가지 특징적인 역할이 있다.
첫째, 누정(樓亭)은 자아와 사물의 소통 공간이자 자아 수련의 역할을 했다. 선비들은 누정(樓亭)에 올라 자연경물을 감상하면서 심미적인 교감을 하였다. 누정제영(樓亭題詠)의 글들이 대부분 자연 경물을 노래하거나 동행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글들인 것을 보면, 선비들은 누정(樓亭)에서 자연과 마주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독서와 수양을 통해 선현의 훌륭한 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한 학문추구와 창작의 공간이었다.
둘째, 누정(樓亭)은 선비들에게 있어서 개인과 집단의 연대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공간을 통하여 부모 형제와 정을 나누고 지역유림들의 공론을 모으며 풍류의 장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누정(樓亭) 안에서 실현하였다.
특히 조선시대는 학문을 추구하는 학파간의 치열한 논쟁, 정치적 당색에 의한 권력쟁탈전 등은 모두 누정(樓亭) 안에서 논의되고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정(樓亭)은 선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공간이었다.
누정(樓亭)이 이렇게 다양한 목적에 의하여 축조하였지만 그 근본은 자연과 소통을 통한 자신의 수양과 창작의 공간이었으며, 또한 개인과 집단 간의 공감대 형성과 동료의식의 제고였다. 선비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혼자 또는 여럿이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사적공간을 찾는 현대인들의 소망을 선비들은 이미 누정을 통해서 즐기고 있었다.
이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지난 선비들의 다양한 고민과 휴식, 풍류가 깃든 누정(樓亭)을 찾아 떠나보자. 수려한 산수 속에 자리한 작은 공간 속에서 자연이 주는 육체적 치유와 수백 년 전 그들이 남긴 편액의 글귀와 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음미하며,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여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따라서 옛 선비들의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누정(樓亭)을 유물로 간직하기보다는 현대인의 사색과 휴식과 유상(遊賞)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때, 누정(樓亭)은 그가 지닌 본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정(樓亭)이 본래의 가치를 찾을 때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옛 선현들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곳에서 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누정(樓亭) 활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정(樓亭)이 왜 이 장소에 세워졌으며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즉 누정(樓亭)의 핵심은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다. 누정(樓亭)이 단순히 물리적 실체로만 존재할 때 생명력이 없는 죽은 공간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따라서 문화재 관리에 있어서 누정(樓亭),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누정(樓亭)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모두 고려할 수 있는 인식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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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 중앙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전과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