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포살
그렇다면 의지처가 될 만한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일상적 모습의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방종한 자기에 대한 무조건적 의지는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잘 통제된 자기, 마치 상인이 좋은 말을 조련하듯이 잘 조련된 자기만'이 귀의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을 의지할 만한 곳으로 조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法-Dharma)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귀의를 구체적으로 체계화된 것이 다음과 같은 삼귀의인 것입니다.
1) 귀의불(歸依佛) :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삼귀의의 첫 번째 의지 대상은 바로 법의 구현자인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자신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삼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2) 귀의법(歸依法) :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존재의 참 모습을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의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러러보며 그 가르침에 대해 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3)귀의승(歸依僧) :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법을 믿고 따르며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승가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서로 화합하고 실천에 힘쓰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귀의처는 자기 자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는 세상의 상식적인 의지처를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부모, 자손, 재물, 권력 등에 의지하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되는 줄 알 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참된 귀의처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귀의는 오히려 근심을 초래하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떠한 인격적인 존재도 궁극의 의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문이나 부처님 그 자신마저도 영원한 의지처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나 사문들은 다만 우리들을 인도하는 스승(導師)일 뿐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 의지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대중과 함께 반성하는 '포살
포살이란 범어 Posadha의 음역으로 출가중이 매달 보름마다 행하는 의식이다. 매달 보름과 그믐날에 모든 비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계본(戒本)을 외우고 지은 죄가 있으면 참회해서 악을 그치고 선을 기르는 의식이 포살이다. 이 포살제도는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외도의 교단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집회를 갖고 일반인들을 위해 설법을 하고 있으니 불교 교단에서도 이런 행사를 갖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부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이다. (율장대품 포살건도)에 나타나 있는 포살 의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중이여, 들으십시오. 오늘은 15일 포살일입니다. 만약 대중들의 이의가 없다면 교단은 포살을 열고 계본을 외우겠습니다. 무엇을 교단의 첫 행사라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하는 것이니 나는 이제 계본을 외우겠습니다. 대중은 이를 잘 듣고 잘 생각하여 만약 스스로 어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서서 그 죄를 드러내고 죄 없는 사람은 잠자코 있을 것이니 잠자코 있으면 여러 대덕이 청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만약 누가 물을 때에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나니 비구는 대중들로부터 세 번까지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 질문 받고도 지은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는 고의적으로 망어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고의적인 망어는 도(道)에 장애가 된다고 설하셨으니 죄 있는 비구가 청정하기를 원한다면 그 죄를 드러내십시요.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 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계율 하나 하나의 항목이 세 번씩 외어졌다. 예를 들면 '만일 비구가 촌락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나 주지 않는 것을 가져오면 이것은 비구의 바라이 죄이니 함께 살지 못한다.'
하는 식으로 계본을 외웠다. 리고 이렇게 몇 조목이 끝날 때마다 '나는 이제 여러 대덕들에게 묻노니 이 계에 대해 청정합니까?' 하고 세 번씩 물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잠자코 있으면 '이제 여러 대덕은 이 계에 대해 청정하기에 침묵하신다고 나는 알겠습니다. ' 라고 말하고 다음 계로 넘어간다. 이렇게 모든 계를 외우고 문답함을 끝낸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이 포살을 여실 때에는 지금과 같은 250계와 348계는 아니였다. 이들 계의 조목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지은 죄를 뉘우치는 이런 포살의식은 전 대중이 모여 보름마다 행하였다. 이같은 포살 법회는 불교 교단의 청정한 계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출가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불자들도 그 뜻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포살 법회는 일상 생활 속에서 참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의식으로 스스로 나쁜 악습을 버리고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반드시 초하루 보름 법회가 끝난 다음 스님의 지도에 따라 포살 법회를 열고 자신이 그동안 참다운 불자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반성하고 선근 공덕을 키워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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