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60
5월17일[부활 제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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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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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UA-XcrfjBk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봉담성당 주입)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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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연인들 사이에 생기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수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한 두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우리를 총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 옛날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던 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거듭 던지고 계십니다.
“○○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역시 베드로 사도처럼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 고백은 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제대로 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대 앞으로 나아가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정성껏 파스카 성제에 참여하고 몰입할 때,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묵상할 때,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과 죽음, 인류 구원 사업의 전체적인 여정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풀톤 쉰 대주교님(1895~1979)의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묵주기도가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성체성사나 기도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미사와 기도의 핵심 정신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될 때,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고백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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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e_PmR76Z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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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정의>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근친혼으로 이복동생과 혼인했지만 로마 제국을 점령한 카이사르와 연을 맺었습니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를 물리치고 이집트에서의 정권과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자신이 그저 노리갯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정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기는 편이 이집트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했지만, 전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장군직을 내려놓고 평민으로 클레오파트라와 내 가족을 살아가게 해 달라.”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처형될 것이란 옥타비아누스의 회신에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합니다. 죽어가던 중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단 소식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 만났지만 결국 그녀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에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란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기 위해 로마의 두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목숨을 목숨으로 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투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 대상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하느님은 본래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에 베드로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 베드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공부를 목숨 걸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유혹이 끼어듭니다. 나의 목숨을 나에게 생명으로 되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내어놓는 일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고 아담은 하와에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마치고 중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시험은 그저 형식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마지막 시험인데 자신도 점수를 잘 맞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러면 지우개에 해답을 적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걸려버린 것입니다. 손짓이나 뭐 그런 것으로 했다면 증거가 없었겠지만, 지우게에 답을 다 써 놓았으니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딴청만 피우고 있던 선생님은 시험지를 찢고는 저의 따귀를 수십 차례 때렸습니다. 저는 좀 지나치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고 그런 부정한 행위는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저에게 매우 미안해하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등록금을 대주고 고생해서 공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우개에 정답을 적어준 친구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돌려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나의 목숨은 해답이 적힌 지우개였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살면서 자기 목숨을 어디엔가는 투자합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결혼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생명으로 되돌려 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더라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고 그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내어놓는 삶이 가장 합당한 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 삽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이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유혹에 빠져 의미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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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란의 긴장 때문에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처음 다녀왔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 유명한 맛 집을 한 번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제가 주로 가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대박집, 금성가든, 제주도, 곱창이야기, 병천순대, 나주곰탕’을 자주 갔습니다. 자주가면 ‘단골’이 되고, 단골이 되면 특별한 서비스를 주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으면 ‘이스라엘’을 가려고 했습니다. 다른 성지도 많지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복음을 선포한 곳이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곳이고,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10번 이상은 다녀왔습니다. 저는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하였습니다. 매년 공동체는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제가 함께 했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서 일 할 때입니다. 매년, 신문사 주최로 성지순례가 있었고, 저는 함께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에 여러 성지가 있지만 저는 그 중에도 ‘갈릴래아’를 사랑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에는 베드로의 집터가 있습니다. 그곳에 배 모양의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행복선언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여라. 나도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내가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갈릴래아 호숫가에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3번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3번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는 3번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는데 예수님께서 3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저도 그 해석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 바위 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도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확신에 차서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내년에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번 넘게 ‘그리스도의 식탁’을 찾았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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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절)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다른 사도들을 제쳐 놓고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다른 사도들보다도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자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같은 곳) 하고 대답하였다. 십자가의 처형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한(마태 26,69-75 참조) 분을 세 번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세 번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오직 베드로를 위한 것이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6.17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을 세 번 하셨다. 주님의 양 떼를 믿음의 음식으로 잘 돌보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낙인(烙印)이 찍힌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양들을 돌보게 하려고 사목자들의 머리이신 분이 베드로를 사목자로 만드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양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 구원하신 양들이므로 베드로도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다.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바로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숭배하도록 가르쳤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19절)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처음에는 그들을 가르치시려 부르신 것이고, 지금은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이제 순교는 하느님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고난을 겪는 이에게 영예이며 영광이다. 주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위치라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되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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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무리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리스 말에는 ‘사랑’을 뜻하는 낱말이 세 개가 있습니다.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호의적 감정과 끌림을 뜻하는 ‘필로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는 ‘아가파오’(‘아가페’의 동사형)가 쓰이는데, 이 동사를 통하여 ‘너를 희생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지’를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필레오’(‘필로스’의 동사형)를 통하여, 예수님을 좋아하고 기쁜 마음으로 따르지만, 아직 자신을 희생할 만큼의 사랑은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큰 사랑인지를 묻는 예수님의 물음과,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베드로의 대답이 두 번 되풀이되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물음의 내용을 바꾸십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 라고 옮긴 문장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는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아가파오’) 물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사랑할(‘필레오’) 뿐임을 고백하자, 세 번째로 당신을 인간적으로는 사랑하는지(‘필레오’) 고쳐 물으신 것인데, 이 상황이 슬픈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필로스’)에서 참된 사랑(‘아가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독서에서 묘사된 바오로처럼, 베드로 또한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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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1)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된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은, 사도들의 위신을 크게 추락시킨 일이었고, 교회에 심각한 위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기 상황을 미리 아시고, 최후의 만찬 때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19-20)
이 말씀에서 ‘일’은, 제자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지는 등 예수님 수난 때에 사도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일들을 미리 예고하신 것은, 당신의 수난은 모르고 당한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당신이 사도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신 일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 사도에게 물으신 것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잘못 때문에 가장 크게 상처를 받으신 분은 예수님이지만, 베드로 사도 자신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원래 죄라는 것은, 죄인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남깁니다. 고해성사는 죄의 용서와 죄의 상처 치유를 겸하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치유의 성사’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알려 주신 일이고, 그의 상처를 치유해 주신 일이고, 그를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신 일, 즉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이 취소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고해성사로 표현하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는 ‘보속’을 주는 단계에 해당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직후에 곧바로 크게 통회했습니다.(루카 22,62) 고백과 용서는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만 나타나셨을 때(루카 24,34; 1코린 15,5)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너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느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보속을 주신 말씀입니다. 그 보속은 베드로 사도가 평생 실행해야 할 보속입니다.
3) 예수님의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을 보면, 처음 두 번은 사랑이라는 말에 ‘아가페’를 사용하셨고, 세 번째는 ‘필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다 ‘필리아’로 대답했습니다. ‘아가페’는 성경에서만 사용된 단어이고, 주로 이타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필리아’는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하던 단어이고, 사랑을 말할 때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가페’와 ‘필리아’가 그렇게 엄격하게 구분되어서 사용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이 ‘아가페’에서 ‘필리아’로 바뀐 것과 베드로 사도가 ‘필리아’로만 대답한 것 자체에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실 때 ‘필리아’를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0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라는 말씀의 ‘사랑’에 ‘필리아’를 사용하셨고, 또 요한복음 16장 27절,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라는 말씀에도 ‘필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중간에 단어를 바꾸셨지만 뜻이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어를 바꾸신 것 자체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사랑 실천’을 보속으로 주셨고,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비록 겁에 질려서 잠깐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자신의 믿음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보속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과 고백에 대한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슬퍼한 것은, 자신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에 대한 죄책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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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나궁렬 요셉 신부님]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사랑하느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장담을 하던 베드로였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베드로는 죄와 허물이 많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틈만 나면 하느님 곁을 떠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첫마디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그분은 베드로의 잘못을 책하지 않으셨다.
나는 40일의 피정을 한 적이 있다. 마지막에 그분을 감히 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데 내가 만난 그분은 나의 과거를 알고 계셨고 놀랍게도 40년 전 내가 당신을 애타게 찾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나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누었던 사랑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분은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세상의 부모들을 보라. 자녀들이 자라면서 잘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기껏해야 “네가 자랄 때 내 속을 좀 썩였느니라”가 아닐까?
그분이 지금 나에게 물으신다. “마태오의 아들 요셉아,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느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고백을 하는 베드로가 무척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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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에레미야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 있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이 같은 대화는 세 차례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는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사랑하다) 동사가 쓰이는데, 베드로의 응답에서는 우애 또는 인간적 친밀함과 더 연결되는 ‘필레오’(사랑하다, 좋아하다, 친구가 되다) 동사가 쓰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는 예수님께서도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같은 단어로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높이를 맞추신 듯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과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다른가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연결되고, 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수님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는 것’에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을 보살피고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에서 완성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나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도 그것을 몸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신 구원자이시며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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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21,17)
예전 어르신들은 가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문제를 잘 봐야 한다. 문제 속에 답이 들어 있다’고. 살다 보니 수긍이 가는 말씀이라 생각하고 저 또한 그래서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는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 깨어 살아가기 위해 거듭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향해 던져야 할 질문들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지금 어디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혹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21,16.17)라는 질문들 말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를 자주 흔들어 깨우는 무겁고 진지한 삶의 질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붙들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보이기 시작하고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삶의 질문과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찾아야만 하고요.
사도 요한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4,16)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뽑아 당신에게 보낸 사람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살려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진리인 말씀 안에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맹세를 다짐하듯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라는 존재를 몰라서, 혹은 베드로에게서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하시기 이전보다 베드로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고 더 주고 싶어서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가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런데도 베드로의 단순하고 주님께 향한 사랑의 강도에 있어서는 어떤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더욱 베드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 싶고 더 이상 스승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도 이유도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21,17) 하고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내어 맡기지 않습니까?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표현처럼 사랑도 사랑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잘하게 되고, 그 사랑의 소중함을 잘 안다고 봅니다. 베드로에게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단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주신 사랑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치 하느님 사랑의 저수지로 베드로에게 준 사랑이 흘러넘쳐 세상에 사랑을 목말라하는 모든 사람, 곧 베드로에게 맡겨질 양들에게 전달되리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을 겁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고,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21,15.16.17) 하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느낍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께서 저에게 향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제 서품 때의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듯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 것이며, 사랑이신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그 자체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응답이라고 봅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한 서품식의 제 대답은 제 사제직 전체를 좌우하는 실존적인 응답이었으며, 이 결심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러기에 오늘의 질문과 응답이 제 삶의 해답을 찾는 질문이며 응답이라고 동감하며 공감합니다.
“주님은, 제가 당신에게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저의 응답을 들으시기 전부터 제가 당신을 사랑함을 알고 계십니다. 굳이 이 대답을 다시 듣고자 하신 까닭은 오늘도 주님은 저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너에게 맡긴 양 떼를 잘 돌보아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살라는 당신의 바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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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까면 위대한 건축가의 작품을 보게 됩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 공원,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등등…. 맞습니다. 위대한 건축가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입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건축에 온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우디는 하루의 건축 일을 마치면 오후 5~6시까지 긴 거리를 산책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던 중 전차와 부딪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이때의 나이 73세. 그런데 형색이 초라했던 그에게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꽤 긴 시간을 사고 장소에 그냥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지나가던 택시 기사 한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병원에서는 입원 처리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 후 3일이 지나고서야 그의 인부들이 병원에서 그를 찾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뒤라서 수술하고 3일이 지난 뒤에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우디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웃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입으로는 너무 쉽게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하는 내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행색이 형편없다고,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외면한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이 물음을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답변에 곧바로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이웃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고 미워하고 또 단죄한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들은 화려하고 멋진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행색이 초라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한 사람 역시 주님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제외 없이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어떻게 사랑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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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어느 날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 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사세요!” 하시며 격려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했습니다. 지켜지지 못할 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결심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약한 의지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상처 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완벽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를 입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 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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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요한 21,15-19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
당신이 믿고
당신이 바라며
당신이 사랑하는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나의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며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돌보는
당신의 사람이
있을 뿐
당신이 믿고
당신이 바라며
당신이 사랑하는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나의 일은
없습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며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이루는
당신의 일이
있을 뿐
당신이 믿고
당신이 바라며
당신이 사랑하는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나의 길은
없습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며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걷는
당신의 길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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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삶의 좌우명>
“주님은 당신 성전에서, 하늘의 어좌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느니라,
당신 눈은 인생을 살피시느니라.”(시편11,4)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진 지 10년째 이지만 그 순례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2014년 그해 7.11일에 저는 25주년 서품은경축을 지냈고 이어 8월말부터 10월초까지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고 10년 흐른 내일은 제 후임 빠코미오 원장수사의 25주년 은경축 미사가 내일 오전 11시 수도원에서 있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마침 지난밤 잘 아는 열심한 자매가 보내준 아들과 며느리가 신혼여행 기념으로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부부가 사이좋게 하나되어 활짝 웃는 표정의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아들 부부 참 멋집니다. 멋진 아드님-며느리 두신 자매님, 축하드립니다. 아들 부부 위해 기도드립니다.”
축하 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후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제목이 삶의 여정입니다. 우리 삶을 하루로 압축하면,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있겠는가 점검할 것을 권했습니다. 일일일생 아침 6시에 시작하여 저녁 6시에 해가 진다 생각할 때, 여기에 각자 삶을 압축해보면 어느 시점인지 들어날 것이며,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역시 각자 삶의 시점이 들어날 것입니다. 물흐르듯 흐르는 세월입니다.
참 많이도 나눴던 예화입니다. 저의 경우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30분 정도,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현재의 시점 확인이 오늘 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기서 나온 제 좌우명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절실히 와닿은 제 좌우명입니다.
어제 지인으로부터 받은 “나이들면 인생은 비슷해 진다”라는 흥미있는 내용이 자신을 한없이 겸허하게 만든 느낌입니다. 더불어 어제 “공동체는 사랑으로 나를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이란 깨달음성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나이 들면서 이뤄지는 평준화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산은 낮아지고 계곡은 높아져 이런 일, 저런 일 모두가 비슷해 집니다.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미치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미치기도 하여, 이렇게 저렇게 빼고, 더하다 보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하게 되고 모두가 닮아가며 죽음 앞에서는 거의 평등합니다.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친절하고, 겸손하고, 서로 사랑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서로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저절로 이뤄지는 이런저런 평준화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부활시기도 끝납니다. 요한복음도 제1독서 사도행전도 끝납니다. 이에 걸맞는 오늘 말씀의 배치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와 사도행전에서 로마로 압송될 바오로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점차 가까워지는 순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문답이 베드로의 남은 생애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남은 삶을 위한 좌우명으로 삼아 하루하루 힘껏 주님을 사랑하며 사목자로서 양떼 사랑이 매진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이나 연거푸 같은 문답의 반복을 통해 베드로 마음 깊이 당신 사랑을 각인시킵니다.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추억이 있어 참 깊이 아프게 마음에 새겨졌을 문답입니다. 이에 곧장 주님은 결정적 중요한 당부를 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양들을, 형제자매들을 돌보라는, 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목자는 물론이요 신자들 모두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야할 말씀입니다. 바로 형제자매들 사랑이 주님 사랑이겠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늘 되뇌며 살아야 할 공통적 좌우명입니다. 이에 필히 따라야 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요한21,19)
이제 머지 않아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바오로의 좌우명은 아마도 다음 말씀이지 싶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테살4,7)
어느 자매가 남편 선종시 들었다는 마지막 유언 세 말마디를 남은 생애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내심 주님께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좌우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 중 다음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영원이,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에 담긴 영원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을,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하늘길이요 하늘문입니다. 끝으로 동방 4대교부중 한분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9-407)의 마지막 거룩하고 신비로운 죽음의 실화를 소개합니다. 결코 우연한 죽음은 없고 자비로운 주님의 섭리하에 이뤄지는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3개월 동안의 아주 혹독한 여행 끝에 순교자 경당, 바실리스쿠스에 도착합니다. 요한이 도착하기 전 순교자 경당의 주보 성인인 바실리쿠스가 나타나 요한에게 말합니다.
‘형제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일 우리는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성인은 순교자 경당의 사제 루키아누스를 불러 당부합니다.
‘요한이 올 것이니, 그를 위해 장소를 준비하시오.’
순교자 경당에 도착한 요한은 하얀 의복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입던 옷을 조용히 벗고 신발만 빼고 모두 바꿔입습니다. 다음 요한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성체를 모시고, 평소 사용하던 형태로 마지막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으로 아멘이라고 말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경주에서 승리한 선수 요한, 그의 비천한 시신은 바실리쿠스 경당으로 옮겨 바실리쿠스 무덤 옆에 안장됩니다.”-
아, 살아서보다 죽어서 영원히 사는 성인, 요한 크리스토무스요 사후 1600년쯤 지나 이렇게 동아시아 한국에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 강론에 인용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지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식사 습관도 소개합니다.
-“그는 우아한 삶과는 달리 지나치게 검소했고, 그런 것에 돈을 쓰는 행위를 하느님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요한은 혼자 먹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이유는 술의 열기가 그의 머리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더운 날씨에 그는 약간의 장미수를 마셨습니다. 때로 요한은 먹는 일을 잊어버리고 저녁까지 식사를 미루기도 했습니다. 교회문제에 휘말리거나, 성경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영적 주제에 관한 묵상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공부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거나 아주 적게 먹는 것이 적절합니다.”(그리스도교 신앙 원천14권; 강선남 역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관한 대화 279-282쪽)-
여러분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좌우명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며,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 역시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영원한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의로우신 주님이기, 정의를 즐기시나니, 올바른 자, 당신 얼굴을 뵈옵게 되리라.”(시편1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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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고 우리 마음도 모르시기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랑 고백을 듣고 싶으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자주 확인하고 싶고, 그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꼭 귀로 듣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뜻에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 능력과 한계까지 다 알고 계시기에 지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모든 질문은 당신을 위해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질문은 베드로를 위해서 던지시는 질문이고, 우리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사랑 성찰을 하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사랑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랑 성찰이란 어찌 보면 사랑 점검인데 이 점검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새 실종되거나 방향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실종되고 없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더라도 내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한지 성찰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사랑 고백 기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재(再)고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고백을 듣기 원하심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사랑 고백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랑을 원하지 않고 사랑 고백도 듣기 싫어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내가 사랑한다고 쫓아다니고 계속 사랑 고백을 하면 그에게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 고백은 스토커의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부족한 우리 사랑을, 수없이 배반한 우리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십니다.
셋째로 이 질문은 사랑 다지기입니다. 더 사랑해야지, 다시 사랑해야지 거듭 마음을 다지게 하는 것이고, 사랑의 의지를 갱신하고 거듭 쇄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질문을 왜 또 하시냐고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 추궁이라면 짜증 나고 짜증 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성찰, 사랑 고백, 사랑 다지기의 기회를 주심이라면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이고 그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처럼 당신 양 떼를 우리에게 맡기실 때 그 양 떼를 우리도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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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17)
<아가페 사랑!>
오늘 복음(요한 21,15-19)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시면서, 사목직을 맡기시고, 장차 그에게 다가올 십자가 죽음을 언급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시면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을 예수님께서 아신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신께로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린 양들을 잘 돌보라.'는 사목직을 베드로에게 맡기시고, "나를 따르라."(요한 21,19)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던지신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사랑의 질문이 인간적인 약점이 많았던 베드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픔을 치유해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베드로, 이후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기까지 끝까지 예수님처럼, 착한 목자가 되어 그분의 양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맡기신 사목직(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해 생명을 바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아가페 사랑 안에 온전하게 머물러 있었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본받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친구의 사랑인 '필로스 사랑'을 뛰어넘어,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아가페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우리가 향해 있어야 할 사랑,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야 할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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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M4prdcQ13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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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요한 21, 19)
어떠한 길을
걸어야할지를
베드로의 삶을 통해
보게됩니다.
헤매이던 베드로가
진정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만나게됩니다.
십자가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할지를
약한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참된 사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어떠한 죽음과
어떠한 삶이란
결국 하나의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영광입니다.
삶과 죽음을 잇는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뜨거운 사랑이
뜨거운 죽음을
맞이하는 부활임을
믿습니다.
서로를 돌보는
사랑의 십자가가
죽음을 영광스럽게
해 주었습니다.
어떠한 삶으로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십자가의 사랑에서
다시 배우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과 봉사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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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것이 바로 참다운 기도입니다. 베드로는 진심어린 고백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치유해 나갑니다. 갈등을 겪지 않고서는 믿음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온전히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를 다시 물어 보게 됩니다. 주님 사랑의 거룩한 힘과 은총은 베드로를 놀라운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 확신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집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존재하시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에는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합니다. 사랑은 베드로를 다시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을 받아들일 때 변화가 이루어 집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까지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살아오면서 부끄럽고 아팠던 상처까지도 기꺼이 고백하게 만드는 주님 사랑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진실된 사랑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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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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