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후한의 혼란과 공손도의 자립
02【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고구려와 공손도
03【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삼국시대와 고구려
04【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고구려와 위, 백제
05【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관구검 기공비문 내용
06【고구려와 후한】고구려의 건국과 초기의 영토확장
07【고구려와 후한】고구려 초기의 영토확장
08【고구려와 후한】고구려와 후한 및 요동반도 상실
09【고구려와 후한】태원 공략과 요서십성
10【고구려와 후한】고구려, 선비, 부여의 후한 공격
11【고구려와 후한】부여와 후한의 결탁
12【고구려와 후한】선비의 강성과 고구려 후한의 각축
13【고조선과 중국】고조선과 중국의 정치 교섭
14【고조선과 중국관계】고조선과 중국의 문화교류
1. 【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후한의 혼란과 공손도의 자립
<< 공손도의 자립 >>
후한말의 혼란
1. 1) 후한에서는 AD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황보숭, 조조,유비등이 황건적을 파해 그 괴수 장각을
죽였다. 당시 환관 장양 등이 13인이 정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2. 189년에 영제가 죽자 원소가 환관(십상시)들을 죽인후 동탁이 진유왕을 헌제로 옹립하고 스스로 상국이 되었다.
3. 2) 선비가 185, 186년에 유, 병주를 쳐들어왔고 AD 187년에 장거가 장순, 오환(烏丸)대거 구력거[遼西에 있었음]
와 함께 우북평, 요동군을 쳐서 2군의 태수를 죽이고 오환교위〔烏桓校尉:49년에 영성(현재의 萬全)에 설치했었다.
(한배달 10호)] 를 잡은후 요서의 비여(肥如)에 거하며 스스로 칭제라 하고 유, 기주를 쳐들어 왔다.
4. AD 188년에 장순이 청, 기, 서, 유주를 쳐들어오자 공손찬(公孫瓚)이 석문에서 이기나 요서의 관자성에서 오환의
구력거에게 포위당해서 패했다.
5. 유주목(幽州牧) [후한은 188년에 주의 자사를 牧로 바꾸었다] 이 된 유우(劉虞)는 남흉노와 함께 장순(張純)을
죽이고 오환을 평정했다.
공손도의 독립
6. AD 189년에 서영이 동탁에게 공손도(公孫度)를 천거해 요동태수(遼東太守)로 하였는데
AD 190년에 동탁(董卓)이 낙양의 왕릉을 도굴하고 궁궐을 불사른 후 장안으로 천도하자 18개주가 원소(袁紹)를
맹주로하여 동탁을 쳤다.
7. 요동태수인 공손도는 현도군의 작은 관리였다가 발탁되어 부임해 오자 그 군의 호족중에 자기를 공경하지 않은
백여가(家)를 죽여버리는 살벌한 정치를 하여 그 반대파를 제거해 요동지방의 후왕처럼 행세하였다가
이러한 혼란한 정세를 틈타 요동에서 자립하여 요동군(遼東郡)을 나누어서 요서군(遼西郡), 중요군(中遼郡)을
만들어 각군에 태수를 두고 동으로는 고구려(高句麗) 서로는 오환(烏桓)을 쳤다.
8. 또 동래(산동반도 지역)의 여러 현을 쳐서 영주자사(營州刺史: 이 당시 營州란 熱河지방이 아니라 山東지방이였다.)를
두었으며 스스로 요동후평주목(遼東候平州牧)이 되었다.
9. 이로서 고구려가 AD184년 차지했던 요동지역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공손도의 평주(平州)의 치소는 양평(襄平)으로
현재 노룡(盧龍)현의 서남쪽에 있었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 공손씨 위의 각축, 한배달 1988.5, P.162-177
<< 고구려와 공손도 >>
원소와 조조
1. 1) AD 195년에 공손찬이 유주목인 유우를 죽이자 그의 아들이 오환, 선비, 원소와 합해 공손찬을 파하여 원소
(袁紹)가 대군(代), 광양(廣陽), 상곡(上谷), 우북평군(右北平郡) 등을 얻게 되었다.
2. AD 199년에 원소가 오환의 답둔(踏屯:요서지방), 난루(難樓:상곡지방), 소복연(蘇僕延:우북평지방) 등에게
선우의 인을 주었는데 그 후 난루와 소복연이 그 백성을 이끌고와 누반(樓班:丘力居의 아들)을 선우(禪于),
답둔(丘力居의 조카)을 왕으로 받들었다. 丘力居가 5천여부락, 난루가 9천여부락, 소복연이 천여부락,
오연이 8백여 부락이였는데 丘力居가 죽은 후 아들 누반이 어리므로 頓이 섰었다.
3. 2) 조조(曹操)는 AD 195년에 여포를 쳐서 연주를 탈환해 연주목이 된 후 196년에 헌제(獻帝)를 모시고 낙양
에서 허(許)로 천도한 후 스스로 대장군 무평후라 칭하고 198년 여포를 죽였다.
4. 3) AD 200년에 원소가 기, 청, 유주의 70만 대군으로 조조를 치나 관도(官渡)에서 대패하였고 이 전투에서
조조가 북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AD 202년에 원소가 조조를 다시 치다가 패하여 죽고 셋째아들인 원상 [기주의 치소인에 있었음]이
서자 203년에 원담이 원상을 치다가 패하여 조조에게 구원을 청해 204년에 조조가 원상을 쳐서 이기자
그는 원희(袁熙)가 있던 유주로 달아나고 조조가 업(業)에 들어가 기주지역을 차지했다.
고구려와 공손씨
5. 1) 발기의 난 : AD197년 후한에서 난리가 나서 혼란하자 고구려로 투항해오는 자가 많았다.
이해 고국원왕이 죽고 산상왕(山上王)이 서자 그의 형인 발기(發岐)가 불만을 품고 소노부의 장수와 3천여명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도에게 투항해 3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쳐들어 왔다.
이에 산상왕은 동생인 계수( 須)를 보내어 설득하자 발기가 뉘우쳐 배천(裵川)에서 자결하였다.
6. 고구려본기는 산상제 원년에 동생인 계수를 보내 공손도를 공파하여 현도(玄도), 낙랑(樂浪)을 정벌하고
이것은 AD 233년에 오(吳)의 사신이 공손연에게 왔을 때 그들의 현도군이 요동군의 북쪽 200리에 있었으며
그 호수가 200호 였다고 하였다.
7. 이것을 후한서 지리지에 현도군이 1594호 였음을 비교해 본다면 이때 전투에서 공손도가 대능하 동쪽∼요하
사이의 현도군, 낙랑군 지역을 고구려에게 상실하고 현도군이 요동군 내로 교치(僑置)되었음을 알 수 있다.
8. 2) 대방군의 설치 : AD 204년에 공손도가 죽고 그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서자 그는 낙랑군(樂浪郡)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두었다.
9. 이것은 공손도가 자립하기전인 146∼189년 사이에 요동지역의 한예(韓濊)가 강성해져 군현이 제압할 수 없게
되자 그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어 갔는데 이때 공손강이 둔유(屯有) 현 남쪽의 황지(荒地:옛 상하운장인
육율하부근으로 현재 도지명) 로 대방군을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파견해 그 유민을 모았으며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한예를 정벌하자 옛백성들이 모여 들었으며 그 이후로는 왜와 한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10. 왜(倭)의 여왕 비미호(神功)는 그 38년에 대방태수 유하에게 사신을 보냈으며 240년에는 대방태수 궁준이 왜에
사신을 보낸후 243, 24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대방군에서 왜까지는 만이천리로 대방군에서 연안을 따라 한국
(韓國:마한)에 둘러서 남쪽으로 가다가 동족으로 가서 구야한국(가야지방)의 북안까지 7천리를 간 후 이곳에서
대마도까지 천리, 다시 일지도까지 천리, 또 다시 천리를 가면 말로국 (九州의 당진)에 다다른다고 하였다.
[일본서기의 분석 (한배달, 5호)]
11. 또 여기서 나타난 예(濊)는 의무려산(단단대령) 동쪽에 있던 예이고,
한(韓)은 요동반도 남부지역인 옛날 진한(辰韓:진조선)에 속했던 지역 [고구려와 후한(한배달,10호)] 을 말한다.
조조와 공손강
12. AD 205년 조조가 청주(靑州)를 치자 원상과 원희는 패하여 요서의 오환답둔에게로 달아났는데
이당시엔 기, 유주에서 도망해온 자가 많아 10여만호가 되었다.
13. 206년 원소의 부하인 병주자사 고간이 조조를 치다가 죽고, 오환이 조조를 치자 조조는 AD 207년에 노룡새
(盧龍塞)로부터 나가 서무산(徐無山:옥전현동북이십리[독사방여기요, 권11])에서 500여리인 백단(白檀:密雲
縣南 [독사방여기요, 권11]), 평강(平岡)과 선비(鮮卑)의 정(庭)을 거쳐 동쪽의 유성(柳城) [정인보, 조선사연구]
으로 향하여 200여리를 못 가 범성(凡城) [熱河 平泉境內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의 백량산에서 오환의 답둔을
죽이고 20여만명을 사로잡자 원상, 원희, 누반, 오연 등이 요동의 공손강에게 달아났다.
14. 이에 공손강이 원상(袁尙), 원희(袁熙) 등을 죽여 그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니 그가 공손강을 양평후(襄平侯)에
봉하였다.
15. 한편 대군의 오환 보부로(普富盧)와 상곡의 오환 나루(那樓)가 조조에게 내조하였다.
16. 조조는 208년에 스스로 승상(承相)이 되었고 손권과 유비에게 적벽(赤壁)에서 대패하였다.
고구려의 상황
17. 고구려는 AD 209년 (산상왕 13년)에 국내성(國內城)에서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하였다.
18. 환도성은 통구평원으로 뻗은 두줄기의 도로인 북치도(산성자촌->노령->대청하->위사하->통화)와 남협도
(환인현->부이강구->신개하->소판석령->석묘자->마천구->칠성산->국내성)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로 국내성의 위성이다.
19. AD 217년 평주(平州)인 하요(夏搖)등 천여가가 고구려로 투항해오니 책성(柵城:현재의 春)에 두었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 공손씨 위의 각축, 한배달 1988.5, P.162-177
3. 【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삼국시대와 고구려
<< 삼국시대와 고구려 >>
후한의 멸망과 삼국(三國)
1. AD 220년 조조가 죽고 아들 조비(曹丕)가 서자 헌제를 폐하여 위(魏)의 황제가 되어 낙양으로 천도함.
2. 유비는 221년에 촉(蜀), 손권이 222년에 오(吳)의 황제가 되어 삼국시대가 시작됨
선비와 오환, 남흉노
3. 1) AD 221년 위(魏)가 선비교위(鮮卑校慰)를 창평(昌平)에 오환교위(烏桓校慰)를 유주(幽州:계)에 두었다.
4. 2) 선비(鮮卑)를 하나로 통합했던 단석괴(檀石槐)가 184년에 죽은 후 그의 아들 화련(和連)이 섰으나 후한을
치다가 죽고 아들 건만(騫曼)이 어려서 형의 아들 괴두(魁頭)가 섰다. 그후 건만이 장성해 서로 다투자
그 무리가 흩어져 버렸고 괴두가 죽은 후 그의 동생 보도근(步度根)이 서자 그 세력이 점점 약해졌고 그의
중형인 부라한(扶羅韓)도 다른 부중의 대인이 되었다.
5. 이로써 당시 선비는 가비능(軻比能:중부대인)의 3부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가비능이 222년에 부라한을 죽였고
AD 233년에 보도근과 같이 위(魏)를 공격하나 진랑(秦郞)이 이들을 격파하자 막남(漠南:사막의 남쪽)으로
달아나서 가비능이 보도근을 죽이고 선비를 하나로 통합해 강성해져 서로 운중, 오원에서 동으로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6. 3) AD 235년 위의 유주자사 왕웅(王雄)이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죽이니 그의 부중이 흩어져 강한자는 멀리
숨고, 약한자는 위에 항복해왔다. 이것은 단석괴(156-183년경)이후 선비가 가비능에 의해 재통합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가비능의 후예가 우문씨(宇文氏)에게 패하여 흩어져 거란(契丹), 고막해(庫莫奚), 실위(室韋)가
된다.
7. 4) 남흉노의 호주천(呼廚泉)선우가 AD 216년에 조조에게 내조하자 조조는 그를 가두고 우현왕(右賢王) 거비
(去卑)를 돌려보냈으나 그가 죽은후 그 무리를 오부(좌,우,전,후,중)으로 나누고 병주(幷州)에 거하게 하고
그 성을 유(劉)씨(오호십육국의 시발을 일으킨 劉淵 (前趙)의 선조이다.)라 하였으며 한인인 사마로 평양(平陽)
에서 감시하게 했다.
공손씨와 위, 오, 고구려
8. 1) AD 220년 공손강이 죽고 동생인 공손공(公孫恭)이 섰는데 221년 위(魏)가 그를 평곽후(平郭侯)에 봉했다.
9. AD 227년 공손연(公孫淵)이 공손공을 밀어내고 요동태수가 되자 위나라가 그를 양렬장군(楊烈將軍) 요동
태수에 봉했다.
10. 2) AD 232년 오(吳)나라가 주하, 배잠 등을 공손연에게 보내 말을 구하여 백척의 배로 싣고 돌아왔는데
이때 공손연은 숙서, 손종을 사신으로 딸려보내 초피와 말을 바치고 칭번하였다.
11. 위가 여남태수 전예를 바다로 유주자사 왕웅을 육지로 보내 공손연을 치나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자
전예를 공손연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12. 위(魏)가 오의 사신 주하를 성산(成山)에서 죽이자 배잠, 숙서, 손종만이 오에 도착했다.
13. AD 233년 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공손연이 연왕(燕王)에 책봉되었음을 알렸는데 이당시 오나라의 장미,
허안의 관속이 종자 400명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공손연이 그들을 요동의 여러현에 나누었는데 진단, 장군,
두덕, 황강 등 60여명은 현도군에 두었다.
14. 이때 현도군(玄도郡)의 태수는 왕찬(王贊)으로 200호 정도의 약체[현도군은 전한 때 45006호, 후한때 1594호
였다.] 였으므로 이들이 봉기하려다가 발각되어 달아나 고구려로 가자 고구려는 그들을 보호해 오(吳)로 돌려
보냈다. 이에 공손연이 오나라의 나머지 사신인 장미, 허연을 죽여 그 머리를 위에 보내니 위가 공손연을
대사마란 높은 벼슬을 주고 낙랑공(樂浪公)에 봉했다.
15. 3) AD 236년 오(吳)가 고구려에 호위를 사신으로 보내자 그를 죽여 그 머리를 위(魏)에 보냈다.
16. 이것은 234년에 오의 사신이 안평구(安平口) [泊河口로 현재 압록강의 하구] 에 이르러 마중나온 고구려의
사신 일행을 인질로 잡아 조서와 뇌물을 받아가지고 돌아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7. 4) AD 237년 위의 유주자사 관구겅( 丘儉)을 쳐서 요대(遼隊:盧龍의 靑龍河 또는 난하 부근) 에서 싸웠는데
10여일간 비가 내려 요수(遼水)의 물이 크게 불어나 불리해지자 우북평(右北平)으로 돌아와 버렸다.
18. 이에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백관을 설치한 후 선비에 사신을 보내 선우의 이늘 주어 회유하고
오(吳)에 사신을 보냈다.
19. 위의 명제(明帝)가 청, 연, 기주에 명을 내려 공손연을 치기 위해 전함을 건조하게 하였으며 고구려는 위에
사신을 보냈다.
공손씨의 멸망
20. AD 238년 위의 사마의가 공손연을 치러 6월 요동에 도착하자 공손연이 비연, 양조로 수만으로 요대(遼隊)
[고구려의 태조왕은 AD 121년 요동을 공격해 요동태수 채풍을 죽인 일이 있었다.]를 방어하게 하자 사마의
(司馬懿)의 부장인 호존이 이를 돌파해 동남으로 나아가다 동북으로 돌려 공손연의 수도인 양평(襄平) [양평
부근에 있던 梁水는 현재의 靑龍河로 현사학계에서 太子河를 양수로 보나 이당시 고구려는 태자하 부근의
梁貊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틀린 것이다 (곽창권, 한국고대사 탐색, 일선기획, 1987.12, P.273, )] 을 쳤다.
21. 비연이 양평의 수비가 허술한 것을 알고 수산(首山)에 진을 쳤으나 위의 군사가 이를 격파해 양평을 포위하였다.
30여일동안 비가 내려 요하(遼河) [난하(윗책)]의 물이 불어나자 위가 수군으로 공격하니 양평성중의 식량이
떨어져 죽는자가 많았다.
22. 8월에 양평이 함락되자 공선연의 부자가 포위를 뚫고 달아나다가 죽어 그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고 성중의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명과 공손연의 관료 2천여명을 죽였다.
23. 이 당시 위는 육군과 수군의 양동작전을 썼는데 육군은 사마의와 관구검이 양평을 치고 수군 [위는 237년
공손씨를 치기 위해 전함을 개조했었다.] 은 새로 부임할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
太守)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공손연의 배후인 낙랑과 대방을 친 것으로 이러한 수군(水軍)의 활동은 오(吳)의
세력(수군)이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로써 위는 공손연을 멸해 요동, 현도, 낙랑, 대방군을
차지해 현재의 대능하(의무려산 서쪽)까지를 차지하였다.
고구려, 선비, 오와 위
24. 1) AD 238년 고구려는 위를 돕기 위해 천명의 군사로 공손연의 배후를 쳤다.
이것은 위의 군사가 공손연을 멸한 후 대능하를 넘어올 것에 대비한 것이다.
25. 2) 선비의 모용막호발(慕容莫護跋:慕容嵬의 증조부)은 위를 도와 공을 세워 솔의왕(率義王)에 봉함을 받아
극성(棘城) [?原지방, 이들의 선조인 慕容은 단석괴 당시의 中部大人이였다.] 의 북에 거하게 되었다.
26. 3) AD 239년 오(吳)가 양위, 정주, 손이를 보내 위의 요동지방을 공격해 장지, 고려 등의 수장과 백성들을
잡아 갔다.
27. 4) AD 239년 요동군 동답현(東沓縣)의 관리와 백성들을 바다 건너 제군(齊郡:산동반도) 의 경내에 와서 살게
되었으므로 옛 종성(從城)을 신답현(新沓縣)으로 만들어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28. AD 240년 요동군의 문현(汶縣), 북풍현(北豊縣)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 유량하여 이사해 오니 제군(齊郡:산동
반도)의 서안(西安), 임치(臨치), 창국현(昌國縣)을 조절하여 신문(新汶), 남풍현(南豊縣)을 만들어 유랑민을
그곳에 살게 하였다.
29. 이것은 위(魏)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238년의 1-2년 사이에 그의 영토였던 요동(遼東)지역에서 동답, 문, 북풍현
의 관리와 백성들이 배를 타고 산동지역으로 유민(流民)이 되어 집단이주하게 된 것으로 고구려의 세력이 요동
지역으로 강력히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 공손씨 위의 각축, 한배달 1988.5, P.162-177
4. 【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고구려와 위, 백제
<< 고구려와 위, 백제 >>
고구려와 위
1. 1) AD 242년 고구려가 위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였다.
2. 서안평은 서자목륜하(西刺木倫河) 서북지방으로 고구려에서 요서, 우북평등지와 요동만의 서쪽을 치려면
이곳에서 남하 해야 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3. 2) AD 245년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의 예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4. 산국지 동이전 예조에 "단단대령 서쪽은 낙랑에 소속되었고 영의 동쪽 일곱현은 (동부) 도위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이지방 백성 모두 예(濊)땅 백성인데 지금의 불내예(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그러나 한(후한)말년에 다시 와서 (고)구려에 소속되었다."
또 동옥저 조에 '한무제 원봉 2년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쪼개서 비군을 만들었다.
5. 그리하여 옥저성(서옥저)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그러나 이 현도군은 그 뒤에 이맥(고구려)에게 침입당하여 군을
구려(고리국) [부여사와 열국시대, 한배달 7호] 의 서북쪽으로 옮겼으니 옥저는 도로 낙랑(樂浪)에 소속되었다.
한(漢)나라는 토지가 너무 넓다해서 단단대령(의무려산)의 동쪽을 쪼개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영동(嶺東)
에 있는 일곱 현을 다스렸는데 이때 옥저도 역시 현이 되었다." 고 하였다.
6. 이것은 단단대령(單單大嶺)인 의무려산에서 요하사이의 땅으로 전한시대에 1차 현도군과 낙랑의 동부지역이었던
곳으로 공손탁이 197년 고구려에게 상실하였다가 이때 위(魏)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쳐서 이 지역을
빼앗은 것이다.
7. 3) AD 246년 8월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대방태수 궁준(弓遵)을 거느리고 만여명의
군사로 현도(玄도) [의무려산 - 요하 사이의 북쪽 산악지역으로 245년 위에게 빼앗김] 로 나와 고구려를 치니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은 보기(步騎) 2만으로 비류수에서 싸워 3천을 죽이고 양맥곡에서 3천을 살획하였으며
다시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치다가 크게 패하여 만팔천명이 죽은지라 동천왕은 일천여기로 압록원
(鴨錄原)으로 달아났다.
8.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고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동천왕을 추격하자 왕은 북옥저(北沃沮:
置講婁:농안, 장춘지역으로 이들이 동천왕을 추격해 숙신의 경계에 다달았다고 한 것을 보면 동천왕의 퇴각
경로는 남쪽 요동반도의 남옥저가 아니라 북쪽의 북옥저로 "읍루남여북옥저 (삼국지)"라 한 것이 증명해 준다.) 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러 군사가 거의 다 흩어지니 동부의 밀우(密友)가 결사대를 모집하여 싸웠다.
9. 이에 왕은 사잇길로 나아가 북옥저에 이르렀으나 위의 추격이 그치지 않으므로 유유(維由)가 거짓 항복을 하여
그 장수를 찌르고 함께 죽으니 위의 군사가 혼란해졌다. 이때 동천왕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의
군사는 낙랑(樂浪) [의무려산 - 요하 사이의 남쪽 해안지역] 으로 달아났다.
10. 이당시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수군으로 요동반도 남부지역에 들어와 이곳은 본래 진한 및 낙랑국의
땅이었으니 고구려로부터 독립시켜 주겠다 [요동반도 남부지역으로 AD 37년에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멸망당한
후 잔존했던 세력으로 AD 44년에 후한에게 회유 점령 당했었다. (최동 조선상고민족사)] 고 회유하였는데
부종사인 오림이 통역을 잘못해 한(韓)의 신지(臣智)로부터 임시로 설치했던 기리영(崎離營) [낙랑, 대방군에
없는 현의 명칭으로 위가 일시적으로 요동반도 남부지역에 설치했던 교두보를 말한다.] 이 공격당해 궁준은
전사하여 일시적으로 요동반도 남부에 설치한 낙랑, 대방군은 사라지게 되었다.
11. 그곳에 세운 것으로 불내성의 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일이 없고 환도성의 기공비는 청의 광서 31년(1906년) 집안현
환도성 내에서는 굉장한 규모의 궁전 건축유지, 전망대, 저수지, 군사숙소지 등의 유적이 남아있고 적석묘, 방단계
단석묘, 봉토석실묘 등 37기의 묘장이 있다.
12. 현재 이비는 요령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적갈색의 석영입자를 함유한 암석을 깎아 새긴 것으로 남아있는
부분은 왼쪽 윗부분으로 표면은 광택이 나도록 가공했는데 잔편의 길이는 35cm, 너비 30cm, 두께 8.85cm로
한자는 음각으로 7행 48자를 볼 수 있고 예서체의 단단하고 소박하며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 공손씨 위의 각축, 한배달 1988.5, P.162-177
5. 【고구려,공손씨,위(魏)의 각축】관구검 기공비문 내용
<< 관구검 기공비문 내용 >>
1. 위지 관구검전에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라 한 것은 환도와 불내가 동일한 곳이라는 것이 아니라
247년, 248년에 걸친 위의 고구려 공격이 모두 유주자사 관구검의 지휘 계획하에 수행된 것이므로 그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석비를 환도의 산과 불내의 성 (영동의 예)두곳에 세운 것이다.
2. 즉 환도산의 비는 왕기가 환도에서 서쪽으로 퇴각할 때 세운 것이고 불내성의 비는 247년 관구검의 지휘를
받은 낙랑, 대방의 양태수가 불내예 등의 읍락을 공격한 후 그곳에 세운 것으로 불내성의 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일이 없었다.
3. 환도산의 기공비는 청의 광서 31년(1906년) 집안현 환도성 북쪽 1Km 지점의 소판석령(小板石嶺)에서 발견되어
소판석령 부근의 산이 환도산맥임이 증명되었다.
4. 지금 환도성내에서는 굉장한 규모의 궁전건축유지, 전망대, 저수지, 군사숙소지, 등의 유적이 남아있고, 적석묘,
방단계단석묘, 봉토석실묘 등 37기의 묘장이 있다.
5. 이 비는 요령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적갈색의 석영입자를 함유한 암석을 깎아 새긴 것으로 남아있는 부분은
왼쪽 윗부분으로 표면은 광택이 나도록 가공했는데 잔편의 길이는 35Cm, 너비 30Cm, 두께 8.85Cm로 한자는
음각으로 7행 48자를 볼수 있고 예서체의 단단하고 소박하며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正始三年高句驪 (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遺冠六年五月旋
討冠將軍烏丸單于
威冠將軍都侯
行裨將軍領玄
○裨將軍
6. 이 비에 대한 고증은 왕국유(王國維)의 것이 가장 철저한데 1행은 정시 3년 (242)에 고구려가 반함(서안평 공격)을
말하고 그 이하는 결손되어 있지만 관구검의 직함이 있었을 것이고 2행은 7아문을 독려하고 고구려 5를 토벌
한다는 내용이며 오(五)자 아래에 없어진 부분은 무(無)자(이 글자는 상행 끝에 있다)가 있었을 것이고,
선(旋)자 아래도 없어진 부분인데 수(帥)자가 있었을 것이다.
7. 이에 의하면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은 정시 4년에 군대를 모아 5년에 출병하고 6년에 철군한 둣하니 무복유구(無復
遺寇)의 문장은 5년에 해당한다. 잔편의 제 4행 이하는 모두 장군들의 이름으로 맨 먼저 討冠將軍魏烏丸單于는
우북평의 오환선우 구루돈(寇婁敦)이었을 것이다.
8. <관구검전>에는 청룡중에 관구검이 유주자사가 되니 구루돈이 항복해왔다고 되어 있는데 토구장군은 위에서 준
관직으로 후한 이래로 늘 외이에게 준 중국의 위호였다.
9. 제 6행 위구장군 도정후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고 行裨將軍領玄의 아래는 결손되어있으나 ?면太守 세글자가
더 있었을 것이다. 즉 행비장군 영현도태수는 왕기의 직함이었을 것이다.
7행은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의 직함이 아닌가 하나 나머지는 고찰할 길이 없다.
백제의 요서 진출
10. AD 246년 백제의 고이왕은 좌장군 진충(眞忠)을 보내 위의 낙랑군으 쳐서빼앗는데 이것은 유주자사, 낙랑태수,
대방태수 등이 고구려를 치러간 허를찔러 낙랑군의 서현 (만리장성 안쪽)을 친것으로 이것이 후일 백제의 요서,
진평군의 기틀이 된다.
선비의 상황
11. 1) AD 246년 선비 목연 (木延:慕容의 조부모)이 위를 도와 공을 세워 좌현왕(左賢王)에 봉해졌다.
12. 2) AD 248년 선비 탁발력미(拓跋力微)가 모든 부의 대인을 막하게 두고 2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261년에
그의 아들인 사마간을 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13. 탁발(拓跋:후에 北?를 건설)씨의 시조는 단석괴 당시 3부의 서부대인중 하나인 추인(推寅)으로 그는 대택(大澤)
으로 옮겼다가 인(隣)과 힐분(詰汾)때에 남쪽 흉노의 옛 땅으로 옮겨왔다가 그가 죽고 그 아들인 역미(力微)가
220년에 서자 성락(盛樂)으로 옮겼다.
망명부여의 상황
14. 1) 망명부여는 원래 현도에 내속하였었는데 [망명부여는 120-122, 136년에 후한과 밀착되었었다.(고구려와
후한)] 후한말에 공손도가 요동에서 강성해지자 그왕 울구태(蔚仇台)가 그에게 내속하였다.
15. 이당시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져 그 틈바구니에 있던 부여 [현도의 북쪽 천여리에 있었고, 서로는 선비,
남으로 고구려, 동은 읍루와 접해 있었다. (후한서)] 의 울구태는 공손도의 큰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16. 2) 정시년중(240-248)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때 현도태수 왕기(王기)가 견가를 시켜 들어 나가
그 군사를 맞게 하고 군량(軍糧)을 공급해 주었다. 이것은 위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치기 위해
요동(현도군)의 북쪽에 있던 망명부여를 회유하여 군량미를 공급받은 것이다.
고구려의 상황
17. 1) AD 247년 고구려의 동천왕이 평양(平攘)으로 천도를 하였다. 윤두서의 평양지(平攘志)에 "자록(紫麓)은
평양의 북동 30리에 있어 여러행의 새긴 글자가 남아 있는데 고구려 동천왕의 묘이며 자원(紫原)이라고도
부른다"라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조에 "자원은 고구려 동천왕이 죽자 그의 덕을 돌이켜보아 능소에
가서 자살한 자가 많으므로 자(紫)를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기에 그 지명이 되었다."고 하여 동천왕이
일시적으로 현재의 평양지역으로 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 2) AD 259년 위가 고구려를 쳐들어오나 양맥곡에서 패하였다.
위의 상황
19. AD 247년 위의 조상(曹爽)이 조정을 전횡하나 248년에 사마의에게 죽고 251년 사마의가 죽은 후 사마사
(司馬師)가 뒤를 이은후 254년 사마시가 그왕을 폐하고 고귀향공을 세우자 255년 관구검이 사마사를 제거
하려다 실패한 후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司馬昭)가 서자 260년 사마소는 그왕을 죽이고 원제(元帝)를 세우가
263년 위가 촉을 멸하였고 사마소가 진왕(晋王)에 봉해졌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 공손씨 위의 각축, 한배달 1988.5, P.162-177
<< 고구려의 건국과 초기의 영토확장 >>
주몽의 탄생과 고구려의 건국
1.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시조가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되어 있으나 모두루(牟頭婁) 묘지에는 "추모성왕(鄒牟聖王)"
이라고 하였고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始祖 鄒牟王" 이라 했다.
천남산(泉男産:연개소문의 아들) 묘지에는 "주몽(朱蒙)"으로 나와 있으며 또 여기에는 주몽이 "동명(東明)" 과는
별개인 인물로 나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만주원류고에서도 동명은 (졸본)부여,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자로 논술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보면 고구려의 건국자는 주몽인 것이다.
2. 주몽은 해모수->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로 북부여의 고구려후, 고리군왕)-> 고모수(고진의 손자)로 이어진
고모수(高慕漱)의 아들로 그는 불리지(弗離支)라고도 불리우며 위만조선을 토벌해 그 공으로 옥저후(沃沮侯:해성의
남옥저(주:海州 本 沃沮 國地(지리지, 권38, 요사)) 에 봉해져 서압록(요하)을 지키다가 그곳에 있던 하백의 딸 유화
(柳花)를 AD79년에 유혹하였다.
3. 그가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이 외딴 집에 가두어 버렸는데 동부여(東夫餘)의 왕 해부루(解夫樓(주:BC 86년에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망하자 가섭원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웠음.)) 가 그곳을 지나다가 유화를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었고 이해 5월 5일에 유화부인이 큰 알을 낳으니 사내아이 하나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그 이름을 고주몽(高朱蒙) 이라 불렀다. 그는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7세가 되자 혼자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 이었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다고 한다.
4. 주몽은 BC 59(해부루 28)년에 동부여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하므로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오이, 마리, 협부와
더불어 엄리대수 (淹利大水:송화강)를 건너 졸본촌(卒本村:졸본부여의 도읍(주:卒本은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환인(桓仁)현 서쪽 혼강 강언덕에 있는 五女山城으로 해발 820m의 험준한 산위에 있으며 석재로 쌓았는데 조기의
쌓기 방법인 간타루법(干打壘法)을 쓰고 있고 동서 300m, 남북 1,000m 이며 문은 남쪽에 하나만 있고 성안은 넓고
평탄하며 중간에 샘이 있다.
5. 혼강(渾江) 양안에 고분이 존재하며 절대다수가 적석묘(750기중 34기만 봉토분)이며 혼강과 高力墓子를 발굴한
결과 이들 모두가 고구려 조기의 고분임이 밝혀져 오녀산성이 조기의 산성임이 밝혀졌다.
6. BC 58년에 졸본부여 2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가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딸 소서노(召西努)를 주몽의 아내로
삼게 하였었는데 이때 그 뒤를 이어 즉위하니 23세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와 후한, 한배달 1990.10, P.67-68
<< 초기의 영토확장 >>
1. 1) BC 36년에 비류국(沸流國:훈강유역)의 왕 송양이 항복해오자 그곳을 다물도로하고 송양을 그곳에 봉했다.
2. 2) BC 32년 고구려는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성읍으로 삼았다.
3. 3) BC 27년 북옥저(장춘지역)를 멸망시켰다.
4. 4) BC 9(2대 유리왕 11)년에 선비를 쳐서 속국으로 하였다. 이 당시 선비는 흥안령 산맥의 북쪽인 감하(甘河)
유역의 선비산(鮮卑山)에 웅거하고 있었다.
5. 5) AD 3(유리왕 22)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여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6. [국내성]은 압록강 북안 통구(通溝)에 위치해 있었는데 국내성은 도성이요, 위나암성은 산성으로 순치 관계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성지는 당시의 궁터로 동서 약 7정(町)반, 남북 5정 반이며 성벽의 두께는 약 30cm 정도
이고 석축으로 높이 20여척을 쌓아올렸는데 아래쪽은 점차적으로 돌을 바깥으로 내쌓아 견고하면서도 안정되게
하였고 도성을 동북과 서남의 귀를 접는 형상으로 동서 성벽에 있는 문에는 옹성(甕城)을 두었는데 2개의 서문 중
하나는 성벽이 꺾인 부분을 이용하여 옹성을 쌓은 듯하다. 성벽의 사면에는 돌출된 치(雉)를 설치하여 방어에 유리
하게 하였고 성벽 밖에는 호(壕)를 설치 하였으며 성벽 위에는 여장(女墻)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7. [위나암성]은 국내성에서 3Km쯤 떨어진 험준한 산속에 있는 산성으로 산성자(山城子) 에 있는 이 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쌓인 분지에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11.5척, 두께는 3간으로 두께가 3척인 여장을 두었다.
남쪽에는 성문이 있으며 여장 아래쪽에 7치에 각진 수구(水口)를 설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8. 6) AD 12(유리왕 31)년에 중국의 신(新: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왕조) 나라가 쳐들어 오매 요서대윤
(遼西大尹:대윤은 신의 태수직)을 죽이자 엄우라는 장수를 보내 고구려를 쳐 연비를 죽였다.
9. 고구려 건국후 최초로 나타나는 중국과의 기사로 중국측 기록에는 고구려후 (高句麗侯) 추(騶)를 죽였다고
하였는데(주: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이것은 고구려의 왕인 유리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던
고구려의 장수를 죽인 것이다.
10. 이당시 중국에서는 왕망(王莽)이 전한(前漢:四漢)을 AD 9년에 멸망시키고 신(新)을 건국한 후 사방의 외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동쪽으로는 현도, 낙랑, 고구려, 부여(동부여) 등에 파견했다. 위의 사실은 BC 87, 86년의 전투에서
졸본부여 (고구려의 전신)가 이미 현도와 낙랑군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주:오순제, 부여사와 열국시대, 한배달 7호, 1990.3.)
11. 7) AD 14(유리왕 33)년에 서쪽의 양맥국(梁貊國)을 쳐서 멸하고 나아가 한(新나라)의 고구려현(현도군 소속)을
쳐서 빼앗았다.
12. 이것은 AD 12년의 신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상실한 현도군의 고구려현 지역을 탈환한 것이며, 양맥국은
현도군과 비류수(훈강) 사이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현재 태자하 상류의 곡원(谷原)지방의 고력둔(高力屯)
과 성창(城廠) 일대이다. (주:정인보,조선사 연구, 연세대학교, 1983.10)
13. 8) AD 21(대무신왕 4)년 동부여를 공격했다.
14. 9) AD 22년 동부여를 쳐서 멸망시켰다.
15. 이당시 중국의 신에서는 18년에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나 소란해져 고구려는 서쪽 국경이 안정되자 그들의
동북쪽에서 괴롭혀 왔던 동부여를 공격해 멸망시킨 것으로 고려는 BC 24년에 동부여에 있던 유화부인이 죽자 사신을
보냈고, BC 5년에 동부여가 사신을 보내 태자 도절을 인질로 요구하나 거절하자 쳐들어 왔으며,
16. AD 9년에 부여가 사신을 보냈으나 사양했다. 이에 AD 13년에 동부여가 쳐들어오자 학반령(鶴盤嶺)에서 대파
했다. AD 20년에 부여가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이러한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멸망당하자 부여왕의 종제가
만여명을 끌고 투항해 오므로 그들을 연나부(椽那部)에 두고 그를 왕에 봉하고 낙(絡)씨라는 성을 하사 하였다.
17. 한편 동부여왕의 동생은 수백인을 이끌고 압록곡(압록강 상류 산악지대)에 이르러 사냥나온 해두왕(海頭王)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취하여 갈사수(曷思水:훈춘하)에 이르러 갈사국(曷思國)을 세웠다.
18. 10) AD 26(대무신왕 9)년에 개마국(蓋馬國)을 멸망시키자 구다국(句茶國)이 투항해 왔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와 후한, 한배달 1990.10, P.68-70
<< 고구려와 후한 및 요동반도 상실 >>
고구려와 후한
1. 1) AD28(문무신왕 11)년 후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國內城)을 쳐들어 오자 위나암성
(현재의 山城子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자 되돌아 갔다.
2. 이 당시 신(新)이 23년에 멸망하고 광무제(光武帝)가 25년에 낙양에 도읍해 후한(後漢:東漢)을 건국하고 27년
에는 경감을 보내 어양지역에서 연왕(燕王)이라 칭하며 우북평, 상곡군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팽룡(彭龍)을 치게
하였다. 팽룡이 29년에 평정된 것을 보면 28년에 후한이 어양, 상곡, 우북평을 제외한 요서, 요동, 낙랑현도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2) AD30(대무신왕 13)년 낙랑군의 서부지역에서 왕조(王調)라고 하는 자가 낙랑군의 태수 유헌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임 태수인 왕준에게 토벌당했다.
4. 고구려가 낙랑군의 동부지역을 빼앗았다.
5. 이것은 낙랑군의 서부지역이 소란한 틈을 이용해 28년에 상실한 단단대령(單單大嶺:의무려산) 동쪽에 있던
낙랑군의 동부지역을 탈환한 것으로 이곳은 본래 서옥저(西沃沮:의무려산~요하사이)의 땅으로 번조선의 후예들이다.
6. 3) AD32(대무신왕 15)년 낙랑국(평양지역)을 쳐서 항복을 받음
7. 4) AD33(대무신왕 16)년 후한에 사신을 보냄
8. 5) AD37(대무신왕 20)년 낙랑국(樂浪國)을 멸망시켜(주: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쳐서 멸하자 그 나라 사람 5천여
명이 투항해 오므로 6부에 나누어 거하게 하였다. (유리 이사금 14년, 삼국사기)) 동압록(압록강)이남을 차지했으나
살수(薩水) 이남의 바닷가 여러 성이 아직 차지하지 못했다.
9. 이 당시 평양지역의 낙랑국 왕은 최리(崔理)이며 그는 고구려를 가리켜 "북국(北國)" 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후한
(後漢)의 낙랑군 (樂浪郡) 태수는 30년에 왕조의 난을 토벌한 왕준(王遵)으로 낙랑국과 낙랑군은 서로 다른 지역이며
낙랑국은 왕조(王朝)이고 낙랑군 후한의 동북 변방의 일개 지방 행정 구역임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서 나타난 살수
(薩水)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동반도 북부의 해성(海城) 위에 있는 태자하(太子河)로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로 교체되는
시기에 낙랑국이태자하 이남의 요동반도를 차지했던 것 같다. (주:해성(海城)은 진조선 44대 구물단군 원년 (BC425)에
이궁을 짓고 평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 북부여, 졸본부여, 당시도 위만, 전한을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요립,
대배달 민족사(2), 1987.2)
요동반도 남부의 상실과 망명부여의 자립
10. 1)AD44(대무신왕 27)년 후한이 수군으로 낙랑(樂浪)을 쳐서 그 땅으로 군현을 삼으니 살수(薩水)의 남쪽이
후한(後漢)에 속하게 되었다.
11. 이것은 37년 이래 해성위의 태자하 이남의 요동반도 남부지역에 남아있던 낙랑국의 잔존세력이 후한의 판도에
들어간 것 (주:요양(遼陽)에 나타난 한(漢) 시대의 묘와 요동반도 남부, 요하 이서 지역의 한(漢)의 묘와 유적이 이것을
증명함(문물참고자료 (文物參考資料),
1953년 12기, 1955년 5기, 1955년 12기 :考古, 1955년 4기 : 考古, 1989년 4기, 1987년 2기) 으로 다른 기록에 보면
한인(韓人) 염사(廉斯:금주(今週) 부근)사람 소마시가 후한의 낙랑군(樂浪郡)에 와서 조공하자 후한이 그를 염사읍군
(廉斯邑君)으로 삼아 그 당을 낙랑군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을 보면 요동반도 남부의 낙랑국 잔존세력이 고구려의
침공을 두려워 하고 있었는데 후한이 이들을 회유 정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최동, 조선상고민족사, 동국문화사,1962.2)
12. 더구나 이들 중 염사치라는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20-23년 사이에 후한에 항복할 뜻을 가지고 낙랑군
(樂浪郡) 함자현 (含資縣)에 다녀온 기록(주:한전(韓傳), 삼국지)이 있는데 이 당시 이미 낙랑국의 이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매우 미약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동반도는 전일에 진한(辰朝鮮)의 땅이였음을 성경통지와 요사
지리지가 밝혀주고 있다.
13. 2) AD47(민중왕 4)년 고구려의 잠지(蠶支)부락의 만여구가 후한의 낙랑군으로 투항함.
14. 이것은 후한이 요동반도를 차지하자 그 곁에 있던 잠지(부근) 부락이 고구려를 이탈하게 된 것이다.
15. 3) AD49(모본왕 2)년 부여(망명부여)가 후한에 사신을 보냄
16. 여기서 나타난 부여는 22년 고구려가 동부여를 멸하자 투항해 온 사람들을 연나부에 두었었는데 이 당시 이들이
개원(開原)의 서북으로 이동해 자립한 망명부여로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후한과 통교한 것이다.
한편 후한은 45년 선비(鮮卑)가 요동(遼東)을 쳐들어 오자 요동태수 제융이 쳐부수었고 마원으로 하여금 상곡(上谷)의
북쪽에 있던 오환(烏桓)을 쳤으며, 역사이래 북방으로부터 항상 중국을 괴롭히고 전한의 고조(高祖:유방)를 항복시키
기까지 했던 흉노를 46년에 오환이 북으로 수천리를 쫓아내자 흉노는 그 세력이 약화되어 48년에 남흉노와 북흉노로
나누어져 남흉노는 오원(五原)으로 와서 후한에 화친을 하게 되었다.
49년엔 오환이 후한에 내속해 오자 오환교위를 상곡의 영성(寧城:지금의 만전(萬全))에 설치했으며 선비, 남흉노가
후한에 내조한 것이다. 또 북흉노의 잔류세력(HUN 족) 은 시베리아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으로
들어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시키게 된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와 후한, 한배달 1990.10, P.70-73
<< 태원 공략과 요서십성 >>
태원 공략과 요서십성
1. 1) AD49(모본왕 2)년 고구려가 후한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공격했다.
2. 2) AD55(태조왕 3)년 요서(遼西) 지방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후한에 대비하였다.
3. 요택(遼澤) : 황하(黃河)의 북안 왼쪽.
4. 택성(澤城) : 요택의 서남쪽 50리.
5. 이들 십성의 분포지는 천진과 북경 및 만리장성을 연결한 지역으로 이곳에 요서(遼西)라고 불리어진 것을 보면
이 당시 요하(遼河)는 바로 난하가 되는 것이다.
6. 이러한 십성의 명칭을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주:임승국 역, 환단고기, 정신세계사, 1986.5.))를 통해
보기로 하자.
7. 안시(安市) : 개평(開平) 동북 70리
8. 건안(建安) : 안시의 남쪽 70리
9. 석성(石城) : 건안의 서족 50리
10. 건흥(建興) : 난하의 서쪽
11. 요동(遼東) : 창려(昌黎)의 남쪽
12. 풍성(豊城) : 안시의 서북 100리
13. 한성(韓城) : 풍성의 남쪽 200리
14. 옥전보(玉田堡) : 한성의 서남쪽 60리 (옛날 요동국이라 함)
영토의 확장
15. 1) AD56(태조대왕 4)년 동옥저(東沃沮)를 멸하여 동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다다
랐다.
16. 이것은 고구려가 개마고원(개마대산(蓋馬大山), 東蓋馬)의 동쪽인 함흥지방의 동옥저를 멸망시켜 창해(東海)에
이르렀고 남으로는 해성(海成) 위의 태자하(太子河) 에 다다른 것으로 이곳 요동반도 남부 지역은 44년에 후한에게
빼앗겼던 것인데 49년에 후한의 세력이 태원까지 밀리자 자체적으로 고구려에 대항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246년 위(魏)의 관구검( 丘儉)이 고구려의 환도성을 치면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이들을 고구려로부터 독립시켜
주겠다고 회유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7. 더구나 남으로 살수에 다다랐다고 하였는데 114년에 태조대왕이 남해(南海)를 순행한 남해도 바로 요동반도
남부지역의 바닷가를 지칭한 것이다.
18. 2) AD58(태조대왕 6)년 후한의 요동(遼東) 태수인 제융이 적산의 오환(烏桓)을 쳐서 그 두목을 죽이고 서쪽의
무위(武威)로부터 동으로는 현도와 낙랑(樂浪)에 이르렀다.
19. 이 당시 고구려는 49년에 차지했던 태원,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 낙랑, 현도지역을 이미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20. 3) AD68(태조대왕 16)년 갈사국의 3대 도두왕이 항복해 오자 그를 우대로 하였다.
21. 갈사국이란 고구려가 22년에 동부여를 멸하자 왕의 동생이 훈춘지역으로 달아나 그곳에 세운 나라이다.
22. 4) AD72(태조대왕 20)년 조나국(藻那國)을 쳐 그 왕을 사로 잡았다.
23. 5) AD74(태조대왕 22)년 주나국(朱那國)을 쳐서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로 삼았다.
24. 이 두지역은 훈춘(갈사국)과 의란(依蘭:동부여) 사이의 우수리강 유역으로 추정된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와 후한, 한배달 1990.10, P.73-76
11. 【고구려와 후한】고구려, 선비, 부여의 후한 공격
<< 고구려, 선비, 부여의 후한 공격 >>
1. 1) AD77(태조대왕 25)년 부여가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다.
2. 이 부여는 망명부여로 개원(開院)의 서북쪽인 요하(遼河) 중류 이북지역에 있었는데 후한의 현도군(의무려산-
요하사이의 북쪽지역)의 북쪽에 있어 그 서쪽엔 선비(鮮卑)와 접했고 남으로는 고구려, 북으로는 약수(藥水:
송화강)가 있는 현재의 요북(遼北) 지방이다.
3. 부여가 초기(49년)에 후한에 화친했다가 이때에는 고구려에 화친하고자 한 것은 후한이 62년에 북흉노가
오원(五原), 운중(雲中)을 쳐들어오자 남흉노와 함께 쳐부수었고 73년에는 남흉노, 선비, 오환과 함께 북흉노를
치는 등 북방 경략에 힘을 기울여 고구려쪽이 소홀해지자 고구려가 망명부여를 칠 것을 두려했기 때문이다.
4. 2) AD105(태조대왕 53)년 부여가, 고구려에게 조공을 하였다.
5. 이 당시 후한의 북방에서는 87년에 선비가 북흉노를 대파했으며 89년에는 후한이 북흉노(北凶奴)를 대파하자
북으로 달아났고 이어서 90, 91년에 북흉노를 다시 쳤고 93년에는 북흉노를 멸망시키자 그 땅에 선비(鮮卑)가 옮겨와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해져 (주:잔류하고 있던 북흉노의 10여만 부락이 스스로 선비라 하였다.) 97년에 선비가 후한의
비여(肥如:요동속국 소속)를 쳐들어 오므로 요동태수 제참이 막다가 패하자 하옥되어 죽었다.
6. 또 101년 만에 선비가 우북평(右北平)을 치고 어양(漁陽)을 쳐들어 오자 어양태수가 물리치고 104년에 후한이
요동(遼東)에 서부도위를 다시 설치했는데 이것은 전일(97년)에 선비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은 것이다.
7. 이렇듯 후한의 북방에서는 흉노(북흉노)가 사라지고 선비의 세력이 강성해 요서, 요동, 우북평, 어양군 등이
쳐들어 왔으므로 고구려쪽에는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자 부여가 다시 고구려에 화친을 구한 것이다.
8. 3) AD105(태조 53)년 고구려가 후한의 요동군(遼東郡)을 쳐서 6현을 빼앗았으나 요동태수 경기(耿夔)에게 대패
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58년에 후한에게 빼앗긴 지역을 북방이 소란한 틈을 타서 공격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9. 4) AD111(태조 59)년 부여가 후한의 낙랑군(樂浪郡)을 쳤고, 고구려가 현도군을 쳤다.
이 당시 후한에서는 106년에 선비(鮮卑)가 어양군을 쳐서 태수를 죽이자 후한이 107년에 요동군(遼東郡) 소속의
고현, 후성, 요양의 3현을 현도군 소속으로 바꾸어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을 강화시켰다.
10. 109년에 어양, 우북평의 오환(烏桓)이 대군(大君), 상곡군(上谷郡)을 쳐들어 왔고 응문의 오환이 선비, 남흉노와
함께 오원(五原)을 쳐들어 오자 대파했다.
11. 110년에는 남흉노가 상산(常山)을 쳐들어 왔다가 항복하는 등 후한이 북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고구려와 부여가 서쪽에서 현도, 낙랑군을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12. 5) AD114(태조대왕 62)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남해(南海)를 순행하였다. 여기서 남해란 전술한 바와 같이
요동반도 남부의 해안으로 이곳은 44년에 후한이 차지한 곳으로 56년까지도 고구려가 탈환하지 못했는데 이때
순행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56-114년 사이인 105년(요동군 공격), 111년(현도군 공격)에 이곳을 점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3. 6) AD118(태조대왕 66년) 고구려가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낙랑군 소속)을 공격했다.
14. 고구려는 105, 111년에 요동, 현도를 쳤으나 실패했고 이때 다시 요하(遼河) 서쪽의 북쪽에 있는 현도군을
공격하고 그 밑에 있는 낙랑군의 화려현을 친 것으로 화려현이란 현도군과 요하족 가까이 있던 낙랑군의 가장
서쪽현까지 볼 수 있다.
15. 이 당시 후한에서는 115년에 요동(遼東)의 선비(鮮卑)가 무려현(無慮縣:요동속국 소속)을 포위하고 부리를
쳐서 그 현령을 죽였으며 117년에는 선비가 요서군(遼西郡) 을 치나 요서군의 병사가 오환(烏桓)과 함께 쳐부수었다.
이와같이 선비가 요동의 북쪽에서 요동속국과 요서군을 공략하는 사이에 고구려가 서쪽에서 현도, 낙랑을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와 후한, 한배달 1990.10, P.76-78
11. 【고구려와 후한】부여와 후한의 결탁
<< 부여와 후한의 결탁 >>
1. 1) AD120(태조대왕 68)년 부여가 후한에게 조공한다.
2. 이 당시 후한에서는 118년에 선비가 상곡을 쳤고 119년에 선비가 마성(代部소속)을 치자 후한이 남흉노와 같이
격파하자 120년에 요서의 선비가 항복을 해오는 등 후한의 세력이 선비를 제압하자 그 동쪽에 있던 부여가 고구려
보다 후한을 택한 것이다.
3. 2) AD121(태조대왕 69)년 봄에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빙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백의 거수를 쳐서 죽이고 병마의 재물을 빼앗아가자 태조대왕이 그의 아우 수성을 보내 군사
2천여명을 이끌고 이들과 싸우게 하였다.
4. 수성이 사람을 보내어 거짓항복을 하니 빙환은 이를 믿었다. 이에 수성이 험한 곳에 의지해 대군을 막는 동시에
몰래 군사 3천을 내보내어 현도와 요동군을 공격해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명을 죽이거나 잡았다.
5. 4월에 태조대왕이 선비(鮮卑) 8천여명과 더불어 요대(遼隊) (주: 양평(襄平) 부근으로 양평은 노룡성 서남에
있었다.(후한서,원소열전)) 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 (주:노룡(盧龍)에 있음
(영평부,직예,권10, 동사방여기요)에서 막다가 죽으니 그와 함께 죽은자가 백여명이었다.
6. 12월에 태조대왕이 마한(馬韓)과 예맥 1만기(騎)를 거느리고 가서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夫餘)의 왕이 아들
위구대를 보내 2만으로 후한을 도우므로 고구려는 대패하였다.
7. 이것은 118년의 현도, 화려성공격에 이어 현도와 요동을 함락하고 4월에 요대, 신창(요동군 소속)을 쳐서
요동태수를 죽이고 12월에는 만리장성 안족으로 교치 우거해 있던 현도성을 치나 망명부여가 후한을 도우므로
실패하게 된다.
8. 망명부여는 120년에 고구려의 영향권에 벗어나 후한과 이미 결탁되어 있었다. 위에서 보면 고구려, 마한, 예맥,
선비와 후한, 부여가 연합 대치된 상태로 마한(馬韓)이란 9년(온조왕 27)에 망했으므로 그를 이어받은 백제(기루왕)
로 볼 수 있다.
9. 한편 후한에서는 이 전투에 대한 책임에 대한 일반의 원한이 커지자 요동도위 방분이 황제의 명이라고 속요
현도태수 요광을 죽이고 유주자사 빙환을 옥에 가두었다. 이해 7월에는 선비가 후한의 거용을 쳐들어 왔고,
11월에는 현도를 쳐들어 왔다.
10. 3) AD121년 10월 숙신(肅愼)이 고구려 사신을 보냄. 숙신이란 고조선족의 한갈래로 이 당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 4) AD122(태조대왕 70)년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치자 부여가 후한을도와줌
12. 고구려가 121년의 전투해서 차지했다가 상실한 요동지역을 탈환하려고 했으나 두 번 다 부여가 후한을 도와
주므로 실패하게 되었다.
13. 5) AD135(태조대왕 84, 후한 순제)년 부여가 후한에 사신을 보낸다.
14. 이 당시 후한에서는 124년에 선비가 현도를 쳐들어왔고 126년에는 대군(代郡)을 쳐들어와 태수를 죽였으며
127년 2월에 선비가 요동과 현도를 쳤고 11월에 현도를 쳐들어오자 오환교위(烏桓校尉) 경렵이 쳐부수자 선비
3만이 요동으로 항복해 왔다.
15. 128년 선비가 어양을 쳐들어 왔고 131년에 오환교위 경렵이 선비를 쳤다.
16. 132년 선비가 다시 요동속국(遼東屬國)을 쳐들어 오자 경렵이 요동의 무려현으로 옮겨서 지켰다.
17. 132년에 선비가 요동을 쳐들어 왔고, 후한이 현도군을 다시 설치하였다.
18. 133년 후한의 흉노중랑장 조주가 남흉노를 이끌고 선비를 쳤고, 선비가 마성을 쳐들어오자 대군태수가
막다가 패하였으며
19. 135년에 오환(烏桓)이 우중을 쳐들어오자 오환 교위 경렵이 파하는 등 선비가 현도, 대군, 요동, 어양, 요동
속국 등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20. 6) AD146(태조대왕 94)년 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요동군 소속)을 공격해 대방령(帶方令)(주:대방은 낙랑군
소속의 현이었다.) 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 잡았다.
21. 서안평은 현재의 임서(林西) (주:요(遼)의 수도였던 임황부이다.(遼史地理志, 大震國本紀)) 로 고구려가
서요하의 북쪽에서 요동군을 공격한 후 그 밑에 있는 낙랑군의 대방현을 친 것이다.
이병도는 이 사실에 대한 주석에서 나까(+++,朝鮮古史考)의 설을 받아들여 그는 고구려가 낙랑(평양), 대방(황해도
봉산군)을 친 것이 아니라 대방령과 낙랑태수의 처자가 요동을 통과할 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모순된 이론이며 식민사학자들의 발상을 맹종한 것이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와 후한, 한배달 1990.10, P.78-79
12. 【고구려와 후한】선비의 강성과 고구려 후한의 각축
<< 고구려와 선비 >>
선비의 강성
1. AD156(차대왕 11, 후한 桓帝)년 선비 단석괴가 섰는데 그는 옛날 흉노의 땅에 거하고 북으로 정령, 서로는 오손,
동으로는 부여를 쳐서 동서 만 4천리 남북으로 7천여리였다.
2. 그 땅을 삼부로 나누어 동부(東部)는 우북평에서 요동에 이르러 부여와 예맥에 접했으며 중부는 우북평에서 상곡,
서부는 상곡에서 돈항까지 이르렀고 각부에는 대인이 있었다.(주:단석괴의 중부 대인 중에서 慕容이 있으니 이것이
후에 전연(前燕) 모용씨의 시조이다.)
3. 158년 선비가 후한을 쳤고 159년 선비가 응문, 요동을 쳤다.
4. 2) AD161(차대왕 16)년 부여가 후한에 사신을 보냈다.
5. 3) AD167(신대왕 3)년 부여의 왕 부대(夫대)가 현도군을 치나 현도태수 공손역이 격파했다.
6. 부여의 태도 변화는 선비의 강성과 관계가 깊은 것 같은데 163년 선비가 요동속국을 공격했고 166년 오환, 선비,
남흉노가 반하여 후한을 치나 패하자 오환, 남흉노는 후한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선비의 단석괴는 후한이 왕에 봉했
으나 거절하였다.
7. 또 이 당시 오환(烏桓)은 상곡의 난루, 요서의 구력거, 요동의 소복연, 우북평의 오연 등이 각자 왕이라 자칭하는
등 동북 지역의 후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분위기에 있었다.
8. 4) AD168(신대왕 4)년 선비와 예맥(濊貊)이 유주와 병주를 쳤다.
9. 선비의 단석괴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후한을 공격한 것으로 선비는 병주를 고구려는 유주를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한과의 각축
10. 1) AD168(신대왕 4)년 고구려가 요동을 치나 현도태수 경림에게 지므로 화친을 청했다.
11. 2) AD169(신대왕 5)년 고구려가 대가우거, 주부연인 등을 보내 후한의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富山:현재 평천
(平泉)부근, 이 근처에는 烏桓이 거주하고 있었다.) 의 적을 토벌했다.
12. 3) AD172(신대왕 8)년 후한이 쳐들어오자 청야전(淸野戰:백성을 피난시키고 먹을것을 일체 없애 버리는 것.) 을
펴고 성안에 들어가 농성하자 회군하므로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수천기로 쫓아가 좌원(坐原)에서 대파했다.
13. 4) AD174(신대왕 10, 후한 영제)년 부여가 후한에 사신을 보냈다.
14. 5) AD184(고국천왕 6)년 후한의 요동태수가 쳐들어오자 왕자 계수를 보내나 패하자 왕이 친히 정예의 기병을
이끌고 좌원에서 대파하였다.
15. 고구려가 후한의 두번의 공격을 좌원에서 물리친 것을 보면 태자하 상류에 있던 좌원은 이 당시 매우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고구려와 후한, 한배달 1990.10, P.80-81
13. 【고조선과 중국】고조선과 중국의 정치 교섭
<< 고조선과 중국의 정치 교섭 >>
1.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에 중국은 요(堯)·순(舜)시대로부터 하(夏)·상(商)·서주(西周)·
춘추(春秋)· 전국(戰國)·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西漢) 초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조선은 위에 언급한 중국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가졌던 것입니다.
2. 고조선은 중국 이외의 다른 지역과도 문화 교류를 가졌지만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고조선과 더불어 국가
수준의 사회 단계에 이른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에 두 지역의 교섭은 서루가 주고받은 자극과 영향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컸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극과 영향은 두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발전에 기여했음은 물론입니다.
3. 고조선과 중국의 정치 교섭은 매우 일찍부터 이루어졌습니다.
고조선은 일찍이 중국의 제순(帝舜)시대에 중국과 정치적 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납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오제기(五帝紀)] <제순유우씨(帝舜有虞氏)> 조에 의하면 서기전 2209년(제순帝舜 25년)에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숙신(肅愼)의 사신이 예물과 활과 화살을 가지고 중국을 방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 그리고 {죽서년기}과 [사기]·{상서서(尙書序)} 등에는 상(商) 말기에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백이(伯夷)와 숙제(叔帝)가 주(周)족을 방문하였으며, 서주(西周)의 무왕(武王)과 성왕(成王) 때에도 숙신의
사신이 중국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 {일주서(逸周書)} [왕회(王會)] 편에는 고조선의 거수국들 가운데 중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던 숙신(肅愼)·
예(濊)·양이(良夷) ·양주(楊州)·발인(發人)·유인(兪人)·청구(靑丘)·고구려(高句麗)·고죽(孤竹) 등의 사신이 서주의 성주
대회(成周大會)에도 참여하였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주는 동부의 땅을 통치하기위하여 제 2의 도읍인 성주를 건설하고 그것에서 각국의 대표를 초청하여 <성주대회
(成周大會)>를 가졌습니다. 성주대회는 서주의 위력을 만방에 알리는 행사였던 것입니다.
6. 고조선과 중국의 교섭은 계속되었습니다. {시경(詩經)} [한혁(韓奕)] 편에는 서주 말기 선왕(宣王) 때에는
고조선의 단군이 서주 왕실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때에 단군은 서주 선왕의 생질녀를 아내로 맞았
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주 왕실이 단군을 이렇게 환대한 것은 당시 국제사회에서 고조선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7. 춘추시대에는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사신의 왕래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자(管子)}에는 춘추시대
초기의 패자였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서기전 685∼643년)이 그의 상(相)이었던 관중(官仲)에게 주변 나라의
사신들이 중국에 오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고조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춘추시대에는 중국이 혼란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관자}와 {사기}·{설원(說苑)} 등에는 제(齊)나라 환공이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죽(孤竹)을 침략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8.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고조선과 연(燕)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함으로서 일어났습니다.
{위략(魏略)}에는 이 조연전쟁(朝燕戰錚)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싣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의 초기에는 고조선이 2천 여 리의 서부 땅을 빼앗겼으나 바로 연나라 군사를 격퇴하고 오히려 연나라
동부의 땅을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했습니다.
9. 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제국(西韓帝國) 초에 이르면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서 기자조선의 정권을 빼앗은
위만에 의하여 위만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위만은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었습니다. 고조선의 영토를 확장하는 위만조선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국과의 직접적인 전쟁은 아니었지만 위만조선이 서한의 외신이었으므로 중국과의 간접 전쟁과 같은
성격을 띠었을 것입니다.
10.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조선과 중국의 정치 교섭은 고조선 초기인 서기전 2209년부터 사신의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났습니다. 서주 말기에는 단군이 직접 서주 왕실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고 통혼 관계를
맺는 등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고조선의 사신이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면 중국의 사신이 고조선을 방문하기도 했을 것인데 이에 관하여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11. 춘추시대에는 중국 사회가 혼란하고 패자가 주주 바뀌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신의 왕래가 일시 중단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연나라의 영토 확장 욕심이 밖으로까지 이어져 고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조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고조선은 서한의 지원을 받은 위만조선과 전쟁을 치러야 했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서한과도 직접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난날 우호적이었던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점차 악화의 길을 걷게 되었
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중국의 고조선 침략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 참고자료 : 윤내현,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p. 32-35.』,민음사, 1995.
14. 【고조선과 중국관계】고조선과 중국의 문화교류
<< 고조선과 중국의 문화교류 >>
1.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는 문화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사기}[은본기(殷本紀)]에 의하면 상(商)나라를 세운
상족의 시조인 설(설)은 그의 어머니 간적(簡狄)이 목욕을 하다가 현조(玄鳥, 신성한 새)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잉태하여 낳았다고 합니다.
{사기} [진본기 (秦本記)]에 의하면 진족의 시조 대업(大業)의 어머니 여수(女脩)는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대업을 낳았다고 합니다.
2.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한반도와 만주에는 이와 유산한 난생설화들이 전해 옵니다.
고구려 주몽이나 신라의 혁거세와 탈해, 여섯 가야의 시조 등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만주족의 시조는 선녀가 신성한 까치가 물고 온 붉은 과일을 먹고 잉태하여 낳았다고 합니다.
3. 위의 설화들을 싣고 있는 문헌들의 편찬 연대로 보면 상족과 진족의 설화가 가장 오랜 것이지만 설화의 내용
으로 보아서는 주몽·혁거세·탈해·여섯 가야시조 등의 설화가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주몽·혁거세·탈해·여섯 가야의 시조 등은 알에서 직접 나온 것으로 되어 있어 원시적이지만, 상족과
진족의 시조설화는 알을 먹고 잉태한 것으로서 더 합리적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 중국 서주시대에 동부 해안 지역에 있었던 서국(徐國)의 언왕(偃王)에 관한 설화도 고구려 주몽의 설화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박물지(博物志)} [서언왕(徐偃王)] 조에 따르면 서언왕은 궁인이 낳은 알에서 태어났는데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어 이름을 궁(弓)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도 알에서 태아났는데 주몽이라는 이름은 활을 잘 쏘아서 얻어졌다고 전해 옵니다.
5. 서언왕과 고주몽은 두 사람 다 알에서 깨어났으며 활과의 인연으로 궁과 주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으나
이 두 설화의 기원은 동일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사성은 두 지역의 문화적인 교류에 의하여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서언왕은 서주 목왕(穆王, 서기전 1002∼947년)때의 사람이므로 이 설화는 고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6. 진제국시대에 이르면 고조선의 선인사상(仙人思想)이 중국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시황제가 서불(徐市)을 한반도에 보내어 선인(仙人)을 만나도록했음을 앞에서 말한바 있습니다.
{사기} [봉선서(封禪書)]에는 전국시대에 제나라와 연나라에서 선인을 찾아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중국 동해로
사람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거은 중국 문헌에 나타난 선인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입니다.
7. 이로 보아 고조선 종교사상의 선인사상(仙人思想)이 중국에 전파된 후 그 명칭이 신선사상(神仙思想)으로
바뀌어 중국 도교(道敎)의 핵심 사상의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와 진제국시대는 고조선 말기에 해당되므로 이러한 사상이 중국에 전달된 것은 고조선 말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8. 고조선 말기에 단군사화(檀君史話)가 중국에 전파되어 중국 사상 체계의 일부를 형성했음을 알게 하는 자료로
보입니다. 산동성에는 동한(東漢)시대에 만들어진 무씨사석실(武氏祠石室)의 화상석(畵像石)이 있습니다.
이 화상석에 조각된 그림의 내용에는 중국 고대사상의 요소도 있지만 적어도 8∼9할은 단군사화의 내용과 일치
합니다.
9. 단군사화의 내용은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서기전 2333년 이전에 전해 온 우리 민족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무씨사 석실이 만들어진 시기는 그 명문에서 확인되듯이 동한시대로서 고조선이 붕괴된 후 약 300년 쯤
됩니다. 이 이 그림이 중국에서 출현한 시기는 단군사화가 형성된 후 적어도 2,5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였던
것입니다. 무씨사 석실 화상석의 그림은 우리의 단군사화가 중국에 전달되어 중국 전통사상의 일부와 결합되었
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10. 고조선과 중국은 사상의 교류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자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서기전 1100년 경에 기자가 서주로부터 고조선으로 망명했는데 그들은 한자를 사용
했을 것입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주기(周紀)]에는 고조선의 거수국인 숙신의 사신이 서주를 방문했을 때 서주 성왕(成王)은
<숙신의 명(命)>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명>은 <책서(策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서기전 1100년 경에 고조선과 서주 사이에 문서 교환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담당했던 고조선의 관리는 한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1. {사기} [조선열전]에는 서한이 위만조선을 치게 된 이유를 고조선의 거수국인 진국이 서한의 황제에게 글을
보내어 방문하고자 하나 위만조선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국에서 서한에 보낸 글은 한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진국이 한문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12. {논형(論衡)} [회국(恢國)] 편에는 서주시대에 낙랑 사람들과 말을 하려면 통역이 필요하였으나 지금은 낙랑
사람들이 {시경}·{서경}·{춘추}의 뜻을 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논형}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 오래지 않은 서기 1세기 경에 쓰여진 것인데 당시에 낙랑 사람들이 그렇게 한문을
잘했다면 고조선 사람들의 한문 실력도 상당히 높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13. 고조선시대에 한문이 사용되었음은 고고학 자료로도 증명되었습니다.
요령성 여대시(旅大市)에 위치한 서기전 5세기 경의 윤가촌(尹家村) 유적에서는 한문이 새겨진 옹관이 출토되었
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깊은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줍니다.
※ 참고자료 : 윤내현,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p. 32-35.』, 민음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