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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일 냉수리 고분
종 목 도기념물 제95호
지 정 일 1994.04.16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산78-3외 5필
한강 이남에서 발굴조사된 6세기 전반의 신라 때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구조는 매우 큰 편이고 특이한 내부 형식을 갖추고 있다. 돌방무덤에는 옆방(측실)이 설치되어 추가장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널길(연도)의 옆면에 부실이 딸리고 현실 안에는 2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도굴된 상태였으나 관장식, 달개(영락), 금반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냉수리 무덤들 주변에는 이 무덤외에도 86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5.남미질부성
종 목 도기념물 제96호
지 정 일 1994.04.16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성리,중성리,망천리
남미질부성은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남쪽 평지 위에 돌출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성벽은 흙을 이겨서 쌓은 토성이며, 성벽 둘레는 약 2㎞정도로 대형규모의 성곽이다. 성 안에는 남성리의 ‘못산마을’이 있고 이 마을의 서편 구릉지에 성주의 무덤으로 전하는 것이 7∼9기 정도 남아 있다. 기록에는 1개의 못과 3개의 우물이 있어서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1개의 못과 1개의 우물이 남아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9월에 사람들을 모아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등 12성을 쌓았다고 한다. 여기서의 미실성이 이 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성곽의 축조가 이때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6.영일 일월지
종 목 도기념물 제120호
지 정 일 1997.03.17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일원
이 곳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 전설이 있는 곳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에 신라 동쪽 일월동 바닷가에 어부인 연오랑과 베를 짜던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고기를 잡고 바위에 앉아 해초를 따던 중 갑자기 바위가 움직여 동쪽으로 흘러가 일본의 섬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곳 사람들은 이를 신비하게 여겨 왕으로 모셨다. 한편 세오녀는 연오랑을 찾아 헤매다가 그의 신발을 발견하고 바위에 서니 바위가 다시 움직여 연오랑이 있는 섬에 도착하여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신라에는 해와 달이 없어져 천지가 어두워졌는데, 아달라왕이 그 이유를 알아보니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다를 건너가고 없어 빛을 잃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은 연오랑과 세오녀에게 신라에 돌아오도록 명령했지만, 그들은 하늘의 뜻으로 이곳에 와서 왕과 왕비가 되었으니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세오녀가 짠 비단을 주며 하늘에 정성껏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이에 제사를 지내니 해와 달이 다시 환하게 빛이 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제사를 지내던 곳을 일월지라고 부르며 지금도 이곳을 일월향이라고 부르고 있다.
7.영일향교 대성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효자동 407
향교는 지방에 세운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 등 성현에게 제사 지내는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연일향교는 조선 중종 2년(1507)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 숙종(재위1624-1720) 때 대용면 지좌동에 다시 세웠는데, 고종 4년(1867)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 향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25분을 모신 곳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소박하고도 단정한 느낌을 주는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8.흥해향교 대성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87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132
흥해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지었다고 전하나, 연혁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한국전쟁 때 대성전과 동무만 남고 모두 불타 없어졌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복원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등이다.
대성전은 1970년에 기와를 새로 고치고, 1971년에 단청보수를 통해 복원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의 끝을 날카롭게 하였고, 위에는 구름 모양의 장식을 입혀 섬세하고 화려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위쪽의 무게를 받기 위해 당초무늬와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꽃받침<화반 (花盤)>을 설치하였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9.봉강재
종 목 문화재자료 제201호
지 정 일 1987.12.29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기계면 봉계리 552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893∼973)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고 장성한 뒤에는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영조 28년(1752) 그의 28대손인 윤광소가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세운 것으로, 10년 뒤인 영조 38년(1762) 26대손인 윤동도가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보수하고 안동부사였던 유성대가 땅을 넓히고 고쳐 지었다.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전체적으로 ㄱ자형 평면구조로 나무를 다듬고 짜 맞춘 기법이 우수하며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10.달전재사
종 목 문화재자료 제202호
지 정 일 1987.12.29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연일읍 달전리 425
원래는 승려들이 거주하였다고 전하는 건물이지만 현재는 조선 전기 문신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로 쓰고 있다.
그는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 밀양부사를 거쳐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김안로가 물러난 뒤 홍문관교리, 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으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기며 생을 마쳤다. 그는 조광조·김굉필·정여창과 함께 동방 4현 중 한 분으로 손꼽히며 조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방향을 정립한 선구자이다.
건물은 조선 태종 2년(1402)에 세운 건물이라고 하나 근거가 될만한 자료는 없다.
앞면 6칸·옆면 6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전체적으로 ㅁ자형 구조로 건물 뒤쪽에 누각 형태의 난간이 달린 마루가 있고, 좌우 측면에는 좁은 출입문을 두어 다른 재실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11.제남헌
종 목 문화재자료 제250호
지 정 일 1991.09.06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
흥해군의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관아 건물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알 수 없고,조선 헌종 1년(1835)에 다시 지었다. 그 뒤 1925년 원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70m 떨어진 흥해읍사무소로 옮겼다가 1976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 지었다.
흥해읍성과 관아 건물은 일제시대에 모두 헐리고 이 건물만 남았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에 一자형 평면을 갖춘 건물이다.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결하게 짜 놓았다.
12.분옥정
종 목 문화재자료 제267호
지 정 일 1992.11.26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1리 739
분옥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문신인 김계영의 덕업을 찬양하기 위해 순조 20년(1820) 후손인 김종한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용계정사’라고도 불리며, 1962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서쪽을 향해 있다. 배치를 보면 출입은 건물 뒤편으로 하고, 앞면은 계곡 물을 향하게 하였다.
분옥정은 주변의 풍경을 고려한 T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며, 이 지역에서 보기드문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연구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13.장기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327호
지 정 일 1997.09.29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202
장기향교는 조선 태종 5년(1405)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다. 정조 9년(1785)에 마현동으로 옮겨 지었고, 1931년 군수 김영수가 읍성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고 위패를 모셔 지금의 향교로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문경·서극인·이대임·이눌 등이 향교에 모시고 있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옮겨 놓아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향교를 옮겨지을 때 덕계 임재화가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내놓아 향교 재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중국,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4.청하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328호
지 정 일 1997.09.29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 190
청하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 서정리에 처음 지었으며, 숙종 39년(1713)에 덕성리로 옮겨 짓는 작업을 시작하여 숙종 42년(1716)에 완공하였다. 그 뒤 헌종 9년(1843)과 1923년 두 차례 보수를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천화루·신문(내삼문) 등이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은 6칸의 규모이며,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6칸 규모이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는 5칸, 휴식 공간인 천화루는 4칸 규모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5.하학재
종 목 문화재자료 제356호
지 정 일 1999.03.11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17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 문신인 손중돈(1463∼1529)의 묘 근처에 세운 재실이다.
그는 성종 21년(1489) 과거에 급제하였고 150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곳 주민들은 그의 선정을 기리고자 생사당을 마련하여 선생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중종 5년(1510) 청백리로 추대되었고 이조판서, 대사간, 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중종 24년(1529)에 그가 67세의 나이로 죽자 임금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틀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현종 4년(1663)에 그의 고손자인 손종하가 세운 이 재실은 고종 10년(1873) 고쳐 지은 바 있으며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16.칠인정
종 목 문화재자료 제369호
지 정 일 1999.12.30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홍해읍 초곡리 825 외
칠인정은 태종 9년(1409)에 장표가 지은 정자이다.
정자 준공식 때 관직에 있는 장표의 아들 4명과 사위 3명이 참석하여 두 그루의 회화나무에 인수(印綬 : 관청 또는 관리가 직무상 쓰는 도장에 달린 끈)를 걸은 것을 기념하여 칠인정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현재 있는 건물은 18세기 후반에 다시 지은 것으로, 1986년에 낡거나 부서진 곳을 보수하였고, 1993년에 기와·담·장벽 등을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에는 마루를 두었다. 앞면과 양쪽 옆면에 툇마루를 두고, 풀 모양을 조각한 난간을 둘렀다.
칠인정은 18세기 후반에 지은 것이지만, 정자·연못·조경환경 등은 15세기 조경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월동재
종 목 문화재자료 제406호
지 정 일 2001.08.20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장동 212
월동재는 임란시 창의장군 김현룡의 호를 따서 지은 재실이며 재실이 자리한 장동은 수원김씨들이 개척한 마을이라 한다.
재실과 고자채가 ㄱ자형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나 고자채는 올해 쇄락되어 무너졌다. 재실은 전퇴를 둔 정면 4간, 측면 1간 규모로 평면형은 가운데 마루가 자리하고 좌, 우에 온돌방이 배치된 중당협실형으로 재실건축에서 자주 채택되는 일반적인 평면형이라 볼 수 있다. 좌측 온돌방과 우측 온돌방은 양쪽방이 동일하게 전면과 마루쪽으로 창호를 설치하여 출입동선을 만들었다. 전면 창호는 하부에 머름을 둔 쌍여닫이 세살문이며 마루쪽은 하부에 궁판을 둔 쌍여닫이 세살문으로 전면문보다 높이가 높다. 다만 우측방은 뒤편에 벽장을 설치하였다.
마루는 2간으로 전면은 개방되고 배면만 골판벽에 쌍여닫이 골판문으로 폐쇄되어 있다. 전면에 설치된 퇴는 4간에 걸쳐있다.
기둥은 모두 각주를 사용하였고 납도리에 동자주를 세운 간결한 3량 가구이다. 그리고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주고에 비하여 처마를 많이 내밀었다. 그리구 구재를 많이 사용한 듯 부재에 헛구멍들이 많았다.
상량문에 「상지삼십구년 임인 이월십육일 신 감주상량간」이라는 묵서로 보아 1902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월동재는 20세기 초기 건물로 건축적으로는 뚜렷한 특징을 지니지 못하나, 지역의 인물사적 측면에 비중을 두어 기념물 성격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