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선대들이 치러 온 ‘학병’과 ‘지원병’
(작성 중 : 징용시리즈 2회)
사전에서 ‘학병(學兵)’은 ‘학도병(學徒兵)’의 준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학도병(學徒兵)’은 ① ‘학도’로 조직된 군대 또는 그 군인, ② ‘학도의용병’이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그리고 ‘학도의용병(學徒義勇兵)’은 학도의 신분으로 지원하여 조국을 위해 군대에 복무하는 병사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위키백과에서는 ‘학도병(學徒兵, student soldier)’은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가한 병사로 좁은 의미로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강제로 징집된 학생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본천황(日本天皇)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 참전(參戰)한 학생들은 제외한다는 뜻이다.
이랬던 저랬던 일제 당시에는 일본이 우리의 조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도병(學徒兵)’ 자체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일제 때의 조선인 학병들
(친일 인사들의 자식들이다. 친일 인사의 자식들은 '학병'으로
지원할 경우 장교로 임관되어 조선국내 등 후방에 근무했었다)
6·25전쟁 당시에는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이 있었는데, 이들 ‘학도의용군’은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공산군(北韓共産軍)의 침공을 막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자진 참전했던 중학생들을 이르는 말이다.
6.25 전쟁 당시에는 입영(入營) 대상도 아닌 중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있었지만, 대학생들로 구성된 ‘학병(學兵)’이나 ‘학도병’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징집(徵集) 대상이 된 대학생(大學生)들이 중학생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군대에 지원(志願)을 하거나 징집(徵集)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25 때의 학도의용군
6.25가 발발하여 전국토가 북한공산군(北韓共産軍)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후방부대(後方部隊)에서 중학교를 찾아와 ‘지원병’을 모집할 때 손을 들고 지원하여 기성부대(旣成部隊)에 편성되어 전투에 참가한 학생들도 스스로 자신들을 ‘학도병(學徒兵)’이라고 지칭했지만, 학생들로 구성된 부대원으로서의 ‘학도병’은 아니었다.
군인으로 지원(志願)하면, 학생이든, 시골 머슴이든 그냥 군인(軍人)이 되어 소정의 훈련을 받고, 전장(戰場)에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중학생으로 연령이 미달(未達)되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아 16~19세의 청소년(靑少年)들이 군대에 지원하는 예가 허다했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학생으로서 집단(集團)으로 지원했거나, 징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제 때의 ‘학병(學兵)’과도 차이가 있었다.
참고로 당시의 중학교 학제(學制)는 4년제와 5년제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급 중학생(상급생)의 경우 당년나이로 18세가 되기도 하고, 당시에는 제때 취학(就學)을 하는 것이 아니어서 20세 이상의 중학생들도 많았다.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慶州市)에 위치한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도 6.25전쟁이 발발(勃發)한 1950년 6월 1일자로 4년제 학제(學制)를 실시한바 있다.
어쨌든 6.25 당시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징집(徵集)을 하지도 않았고, 거의가 군대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때의 것과 같은 ‘학병 또는 ‘학도병(學徒兵)’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스스로 지원하여 입대한 일부 대학생과 중학생들의 경우 ‘학도병부대(學徒兵部隊)’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경우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전시학생증’제도가 있어 사실상 징집이 보류되었고, 대학교 1-2학년과 중고등학생들은 징집연령에 미달되어 일제 때와 같은 ‘학병이나 ‘학도병’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지 않고, 법령에도 없는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이들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들은 병역법의 규정에 의하여 정식으로 징병된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계급도, 군번도, 제복도 없었다.
그냥 옛적 임진왜란 때의 의병들과 같이 조국을 적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의분에 북받쳐 모여든 존재였을 뿐, 법령에 의하여 정식 영장을 받고 입대하던 일제 당시의 학병(學兵)과도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이들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전쟁 이듬해인 1951년 2월 28일 모두 해체되어 수도사단(首都師團) 1연대에 배속됨으로써 ‘학도의용군’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어쨌든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어 100여만 명이나 되는 국민들이 북괴군(北傀軍)의 총탄에 죽어 넘어지는데도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제도와 ‘전시학생증제도(戰時學生證制度)’를 통한 병역면제조치로 군대에 가지도 않았고, 그래서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전시학생증
이스라엘이 아랍권과 ‘6일전쟁’을 할 때 미국(美國)이나 서구지역에 유학 중인 이스라엘 대학생들이 스스로 귀국하여 전쟁에 참전했는데, 100여 만 명이나 죽은 우리나라 6.25전쟁에서는 대학생(大學生)들에게 아예 병역을 면제해 주고, 고졸이하의 저학력자(低學歷者)와 ‘무지렁이’들을 징집하여 전쟁을 치른 것이다.
어쨌든 6.25 당시에는 일본식의 '학병(學兵)'이나 '학도병(學徒兵)'제도는 없었고, 피난길에 스스로 지원한 대학생들이나 후방 중학생들로 구성된 '의병' 즉, '학도의병(學徒義兵)' 제도만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들의 고향이자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시를 수호하기 위하여 당시 포항여자중학교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학생들도 16세 이상의 중학생들과 24세까지의 대학생 지원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스스로 '학도의병(學徒義兵)'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옛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놈들을 물리치기 위해 스스로 지원한 '의병(義兵)'들과 같이 스스로 지원했고, 정규군(正規軍)이 아닌 '의병'들과 같이 별다른 무기지원(武器支援)도 없이 싸웠다는 의미에서 선택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생존자들로 구성된 단체의 명칭도 ‘대한학도의병동지회(大韓學徒義兵同志會 : 회장 윤병국)’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때의 '학도의병'들은 자신들의 부대를 '학도호국대(學徒護國隊)'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다른 명칭을 붙일 형편이 못되어서였다. 포항전투(浦項戰鬪)에서 전사한 학생 49명 중 35명은 이름도 소속(학교)도 남아 있지 않다. 입대할 때 노트에 이름을 적었는데, 전쟁통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북괴군(北傀軍)이 퇴각한 후 시신(屍身) 수습 당시 신분증(학생증)이 나온 사람들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학도의용군'을 '학도의병(學徒義兵)'이라고 한다. 포항전투와 '학도의병(學徒義兵)'에 대해서는 뒤에서 구체적으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전시학생증
('전시학생증' 자체가 '병역면제증'이나 마찬가지였다. 6.25 때
이 학생증을 갖고 군대에 입대하거나, 끌려간 학생은 없었다)
----------------------------------------------
말이 나왔으니 당시의 대학생(大學生) 병역혜택제도와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 제도, 그리고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 제도를 소개하고 넘어간다.
6.25 당시에는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생(大學生)이 되어야 했고,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에 등록한 후 학교에서 실시하는 군사훈련을 이수하여 ‘전시학생증’을 발급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노릇은 돈다발을 배띠에 차고 피난 나온 서울을 비롯한 도시 부유층(富裕層) 자식들에게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시골의 ‘무지렁이’들이나 서민(庶民)들의 자식들은 화중지병(畵中之餠 ; 그림의 떡)에 불과했었다. 당시의 제도를 살펴본다.
1951년 5월 4일, 일제 당시 ‘학병제도(學兵制度)’를 찬양하던 친일분자들이 담합하여 만든 문교부령(文敎部令) 제19호로 공포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이하 조치령)은 전 세계 교육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를 남기며,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 체제를 출범시켰다.
‘전시연합대학’은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백낙준(白樂濬)이 유진오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민국 교수단’과의 협의에 따라 발족한 것으로 유진오(兪鎭午)는 이 대학의 학장(學長)에 임명되었다.
이때의 ‘조치령(措置令)’은 또 전화(戰禍)로 인해 정상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생들이 그 기간 중 타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한편, 단독으로 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은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에서 합동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조치령(措置令)’은 특히 대학생의 총 수업시간을 7백20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게 하고, 매학기 3∼4학점의 군사훈련을 이수토록 했으며, 이들에게는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을 발급하고, 병역을 연기해 주었다.
1951년 전시학생증
‘전시연합대학(釜山戰時聯合大學)’은 먼저 부산(釜山)에서 발족하여 점차 광주·전주·대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부산전시연합대학(釜山戰時聯合大學)’에는 4,268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았다.
대전(大田)에는 3백77명, 전주(全州)에는 1천2백83명, 광주(光州)에서는 5백27명이 참여하여 수강학생이 6천4백55명에 이르렀고, 강의를 담당한 교원도 4백44명에 달했다.
물론 거의가 병역을 면탈(免脫)하고자 하던 남학생(男學生)들이었다.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은 1951년 9월, 이화여대(梨花女大)가 단독 개강을 하고, 10월 중순부터는 부산대(釜山大)가 이탈하면서 1952년 3월에 해산되었다.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에 등록한 대학생들에게 병역혜택이 부여된 법적(法的) 근거는 문교부령(文敎部令)으로 발령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 제4조와 제14조의 규정이었다.
大學敎育에 關한 戰時特別措置令
제4조 단독으로 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은 정상한 수업이 가능할 때까지 전시연합대학의 명칭으로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합동수업을 실시할 수 있다.
제14조 대학은 매학기 3학점 내지 4학점(매주 6시간 내지 8시간)의 군사훈련(체육을 포함함)을 실시한다.
|
이와 같은 근거에 따라 당시 학생들은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에 들어가면 군사훈련을 받는 대신 징집(徵集)을 피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51년 11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군사훈련(軍事訓鍊)에는 24,700 여 명의 학생이 참여해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을 발급 받았고, 이들에게는 병역의무가 일단 연기되었다.
전시연합대학 학생들의 군사훈련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대학생(大學生)에 대한 병역연기(兵役延期)와 면제(免除) 혜택을 가져오면서 대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를 부채질했으며, 무리하게 진학률(進學率)을 높이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었다.
때문에 이 당시의 대학교육(大學敎育)은 교양이나 인격을 갖추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고, 사회적 지위(地位)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變質)되면서 점차 교육열정이 퇴색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1953년 전시학생증
---------------------------------------------
일제 당시의 ‘학병(學兵)’이야기로 돌아간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하와이 진주만에 집결해 있는 미국 해군함대를 기습한 일제(日帝)는 여세(餘勢)를 몰아 남방(南方)의 필리핀, 타이, 버마, 불령인도차이나(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을 점령하면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하다 보니 보급이 끊기고 고립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반면에 전열(戰列)을 정비한 미군(美軍)은 전쟁 발발 5개월째인 1942년 4월 18일, 일본본토에 접근한 항공모함(航空母艦)에서 발진(發進)한 B-25폭격기(爆擊機) 16대가 처음으로 일본의 수도(首都) 동경(東京)과 나고야(名古屋), 고베(神戶)를 공습(空襲)하여 폭탄과 소이탄(燒夷彈)을 투하하였다.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본토 방위는 완벽하다고 호언(豪言)하여온 일제는 심리적(心理的)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1941년12월 7일 새벽, 진주만에서 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미국 전함 ‘애리조나 호’
이어 1942년 6월 3일 하와이제도 북서쪽에 있는 ‘미드웨이’에서 미해군(美海軍)과 일본해군이 격돌하게 되었다.
일본해군(日本海軍)의 전력은 항공모함 4척을 포함한 연합함대(聯合艦隊)였고, 미국해군은 항공모함(航空母艦) 3척을 주력으로 하는 함대간의 결전장(決戰場)이었다.
전력(戰力)으로는 일본해군이 단연 우세했으나, 사전에 암호(暗號)를 해독한 미군이 대승을 거두고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군기의 공격으로 침몰 직전의 일본 항공모함 아카키함
1942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3일간에 걸친 ‘미드웨이’ 해전(海戰)의 승리에서 주도권을 잡은 미군은 1942년 8월에는 남방작전(南方作戰)의 최전선인 ‘과달카날’섬을 점령하고 육군(陸軍)도 모든 전투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미드웨이’ 해전(海戰)에서의 양측의 피해는 일군(日軍)에서 항공모함(航空母艦) 4척과 전함 2척이 침몰되고, 항공기(航空機) 332대가 손실되었다.
미군(美軍)에서는 항모(航母) 1척과 전함(戰艦) 1척이 침몰했고, 항공기는 147대가 손실되었다.
침몰하는 일본 순양함
1943년 가을부터는 미군(美軍)이 일본본토를 주야(晝夜)없이 폭격하였으며, 일제는 거의 무저항상태(無抵抗狀態)로 당하기만 했다.
일제는 날이 갈수록 전쟁에서 수세(守勢)에 몰리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1943년 11월부터 병력보충수단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학병(學兵)이라는 이름으로 자진 입영(入營)하도록 유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말한 ‘내선일체(內鮮一體)’란 1937년 일제가 전쟁협력(戰爭協力) 강요를 위해 취한 조선통치정책을 말한다.
그리고 ‘내(內)’라 함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전, 그들의 해외식민지를 ‘외지(外地)’라 부른 데 대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내지(內地)’의 첫 글자이며, ‘선(鮮)’이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이다.
강제 지원으로 입영하는 대학생 지원병
그들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공을 개시하자, 당시의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는 이 대륙 침공에 조선을 전적으로 동원·이용하기 위한 강압정책으로 ‘내선일체’라는 기치를 들고 나섰다. 한민족의 저항을 초기부터 말살·차단하려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이었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일제는 우리나라 청년들에 대한 지원병제도를 추진하면서 처음에는 자유의사(自由意思)에 의해서 지원(志願)하는 제도라고 선전하다가 실적이 저조(低調)해지자 조선인 유명인사(친일파)들을 내세워 분위기를 바꿔나갔다.
지원병 입대를 촉구하고, 일본천황(日本天皇)에의 충성을 선동한 것이다.
이광수
이들 유명인사중에는 교육계(敎育界)를 대표하는 김성수(金性洙 ; 보성전문학교 교장)와 문학계를 대표하는 이광수(李光洙)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성수교장은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하고 학병지원(學兵志願)을 최고의 영광(榮光)이라고 에둘러서 권유하곤 했었다(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가 수여하는 작위나 훈장은 받지 않았다).
김성수(1914년 당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고려대학교 전신)를 비롯한 전문학교 선생들은 총독부(總督府)의 지시를 거역하지 못하고, 2인 1조가 되어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학병지원(學兵志願)을 권유했으며, 부민관(府民館 : 지금의 서울시 의회 건물)에서는 지원자들을 위한 장행회(壯行會 : 큰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을 격려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었다.
일제시대 때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유복(裕福)한 집안의 자손들이었으며, 조선인 가운데서도 엘리트 계층에 속했다. 1944년 1월 20일, 그들 엘리트 4.385명이 일제히 일본군의 지원병(志願兵)으로 입대하였다.
1944년 1월 20일, 일제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입대하는 조선대학생들
서울지역에서는 학병지원자들의 집결지인 용산역(龍山驛) 광장에 모이게 했는데, 일군(日軍)의 군복대신 전문학교 교복인 검은 학생복에 사각모(四角帽)를 눌러쓰고 있었다.
주최 측에서 앞쪽에는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쓰고, 뒤에는 ‘축 입영(祝 入營)’이라고 쓴 어깨띠를 대각선(對角線)으로 웃저고리에 둘러주었다.
학도병 복장
일제의 앞잡이를 자처하는 친일인사(親日人士)들과 그 자식들로서의 학생들은 천황폐하만세(天皇陛下萬歲)를 외치고, 일장기를 흔들면서 일본군가(日本軍歌) “덴니 가와리데 후기오 우쓰”(하늘을 대신해서 불의를 친다), “성전(聖戰)을 위해서 싸우러 나가자”를 부르며 선동을 계속했다.
당시의 친일인사(親日人士) 최남선(崔南善)은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 보람있게 죽자"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志願兵) 입대를 선동하기도 했었다.
지원병입대를 선동하는 최남선의 신문기사
그러나 어디인지도 모를 이역만리(異域萬里) 사지(死地)를 향해서 떠나는 조선학생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 젊고,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물론 친일인사들의 자식들은 경성(京城 :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안이나, 일본본토(日本本土)에 배치되어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일본육사(日本陸士) 출신들과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 군관학교(軍官學校) 출신들과 손을 잡고 국군창군(國軍創軍)의 주역으로 행세하는 등 끝없는 출세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었다.
학병으로 떠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배웅하는 조선의 어머니
어쨌든 그렇게 발을 들여놓은 ‘학병(學兵)’들은 한반도와 중지나(中支那 : 중국의 중부지역), 북지(北支 ; 북중국)와 만주국(滿洲國), 대만(臺灣)과 일본본토 등 각 주둔부대(駐屯部隊)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때 미군(美軍)은 1944년 6월, 태평양(太平洋) 중서부에 있는 ‘사이판’섬에 상륙(上陸)했고, 1945년 3월10일 새벽에는 B-29 300여대가 도쿄(東京) 하늘을 뒤덮었다.
폭탄(爆彈)과 소이탄 100만발을 3시간동안 도시(都市) 전체에 퍼부었다. 사람, 건물, 강, 전 시내가 기름 불바다가 되었다.
이어서 미군은 ‘오가사와라’군도의 ‘유황도(硫黃島)’를 점령하고, 2개의 비행장을 확보했다.
1945년 6월에는 미 육군, 해군, 공군이 합동작전(合同作戰)을 감행하여 최후의 결전장인 ‘오키나와(沖繩)’에 상륙, 장거리 공습의 항공기지(航空基地)를 확보하고 B-29를 동원하여 일본 내 대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미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무저항 상태가 되었으나, 군부에서는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면 죽창(竹槍)이라도 들고 싸우자”면서 최후발악을 계속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죽창으로 조선인을 살해하는 왜놈경찰과 자경단
지진이 났는데 왜 우리 민족을 죽이는가. 우리들이 지진을
만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더러운 왜놈들, 그때 지진보다
수백 배나 더 심한 2011년 3월 11일 '센다이'의 지진에는
언제 어느 나라 사람들을 얼마나 어떻게 죽이려는가. 저주
하는건 아니지만, 일본은 지금 그시절 우리 선대들을 더러
운 죽창으로 무참하게 학살한 '천벌'을 받고 있다고 본다.
일본 당국에게 당부한다. 지금이라도 그 때의 학살행위와
식민통치를 사좌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를 비는 자만
용서한다는 진리를 한 '획'이라도 부정하려해서는 안된다.
필자의 말이 허언인지의 여부는 다음 번 지진과 스나미가
여실히 증명해 줄것이다. 지금이라도 무릎꿇고 사죄하라)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美軍)의 B-29편대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히로시마시(廣島市)’에 ’little boy’라는 이름의 고농축우라늄 원자폭탄(元子爆彈)을 투하했다.
원자탄(元子彈)은 570m 상공에서 작렬(炸裂)했다. 그리고 이 원폭투하(原爆投下)로 일본인 24만 명이 사망하고, 시가지 92%가 폐허(廢墟)로 변해 버렸다.
이어서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두 번째로 플로토늄 소형(小型) 원자폭탄 ‘fat man’이 ‘나가사끼시(長崎市)’에 떨어졌다. 이때도 7만 여명이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원폭투하 장면
(오른쪽은 '히로시마', 왼쪽은 '나가사끼')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천황(天皇)의 울먹이는 목소리(옥음방송 : 玉音放送)가 Radio를 통해서 전국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일군에 끌려간 조선인 ‘학병(學兵)’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만주(滿州)에 배속된 사람 중에는 탈출하여 조선 광복군(朝鮮光復軍 : 1940년 9월 창설)에 합류한 사람들도 있었고, 평양사단(平壤師團)에서는 조선학병이 집단 탈출을 시도한 사건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금강산(金剛山)으로 피신해서 숨어 있다가 해방직후에 귀가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죽거나 길이 막혀 귀국(歸國)과 귀가(歸家)가 늦어지는 가정에서는 하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단골 무꾸리집이나, 점(占)집을 찾아다니며 치성(致誠)을 드리기도 했었다.
원폭을 투하한 당시의 B-29
돌아온 이들 중에는 부상병(負傷兵)으로 돌아온 이들도 많았다.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는 눈 한쪽(오른쪽)과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고, 우측 복부에 전상(戰傷)까지 입고 귀가한 이도 있었다. 서울 유학 중에 학병(學兵)으로 강제징집 된 분인데, 이야기로만 들었다.
그는 북지(北支 : 중국 북부)에 배속되어 철도경비대(鐵道警備隊)에서 근무하다 부상을 입고 일본 동경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종전 후에 가죽으로 만든 의수(義手)를 끼고, 전상자증명서(戰傷者證明書) 한 장 받아가지고 고향집을 찾아 왔다고 했다.
목숨을 부지(扶持)하고 돌아온 것은 다행이라 해도 패전국(敗戰國)에서 보상(補償) 받은 것도 없고, 불구자(不具者)의 몸으로, 실업자의 몸으로, 평생을 살다가 20여 년 전에 별세하셨다.
지원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학생들
(목총으로 훈련을 받고 있다)
어쨌든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일제에 의해 강압(强壓)으로 끌려갔거나, 탈주(脫走)하여 망명한 전문학교(專門學校) 재학생과 1943년 졸업생들이 상당수 살아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망명(亡命)했다는 것은 당시의 우리나라가 일본의 영토였고, 학병 역시 일본군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학병’부대를 탈주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소속인 ‘광복군부대(光復軍部隊)’를 찾아가 투항(投降)한 것을 말한다.
1942년 당시의 일본영토(대일본제국)
그러나 불행하게도 강제로 징병(徵兵)되었다가 돌아 온 ‘학병’출신들 가운데는 공산주의(共産主義) 이념에 동조하는 학생들도 상당수였다. 이들로 결성된 단체가 바로 ‘조선학병동맹(朝鮮學兵同盟)’이었다.
‘조선학병동맹’은 8·15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일에 조직된 단체로, 사상적(思想的)인 배경이 공산주의였기 때문에 급진적(急進的)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강령(綱領) 전문은 “강제학병제도로 인하여 사선(死線)을 넘은 동무들의 친목을 도모하며, 견고한 단결을 통해 ① 제국주의(帝國主義) 세력을 철저히 구축(拘縮)하여 민족해방의 완전을 기할 것, ②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추진력이 될 것, ③ 현 과도기에 있어 치안유지(治安維持)에 협력하고 장차 국군창설에 노력할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군창설(國軍創設)에 참여할 수 없었다. 조직의 사상적 배경이 공산주의(共産主義)여서 미군정당국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고, 일본군(日本軍) 출신 장교들이 선수를 쳐서 국군창설에 착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학병동맹(學兵同盟)’의 조직체계(組織體系)는 위원장 왕익권, 부위원장 이춘영 등을 중심으로 총무부·기획부·문화부·선전부·경리부·실천부 등 6개 부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선학병동맹’은 그의 대변지(代辯紙)로 ‘學兵’ 창간호를 발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창간호(創刊號)에 구보 박태원이 작사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학병의 노래’를 싣기도 했다. 가사를 일별해 본다.
學兵의 노래
朴泰遠 作詞
金聖泰 作曲
虛妄의 論理믿은바 않이었만
正義와 邪惡分揀은 하면서도
손발을 묶고 앞으게 매질하매
피눈물뿌려 銃자루 잡었었네
銃을 겨누어 누구를 쏘려하며
칼을 들어서 누구를 치려했나
더러운 이름 千秋에 남겨두고
뜻없는 죽엄 하마 이를뻔했네
오오 그러나 天道가 무심찬타
邪는 마침내 正義를 못犯하고
平和의 노래 天地에 가득할 때
解放의 旗ㅅ발 이땅에도 날렸네
아아 기쁨아 가슴은 미어지고
아아 感激아 눈물은 쏘다진다
젊은 우리들 이제야 길찾았네
갈길은 한길 새朝鮮 建設일레
祖國을 爲해 우리는 일하려네
同胞를 위해 우리는 죽으려네
발을 맞추어 동무야 나아가자
두손을 들어 부르자 獨立萬歲
|
조선학병동맹의 기관지 '학병'
‘조선학병동맹(朝鮮學兵同盟)’은 학병기념일로 정한 1946년 1월 20일 전국학병대회를 개최하고, 전장(戰場)에서 희생당한 학병들의 추도제(追悼祭)를 지내는 등 순수기념행사를 거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신탁통치반대운동(信託統治反對運動)에 가담한 학생들이 ‘조선인민보’, 조선인민당, 서울시 인민위원회 등을 습격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하여 이른바 ‘학병동맹사건(學兵同盟事件)’이라는 유혈극을 벌이기도 했었다.
여기에다 우익학생(右翼學生)들에 대한 계획적인 테러 행위를 자행하는 등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외곽단체 또는 전위대(前衛隊)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더 치중했다.
----------------------------------------------
일본군 ‘학병(學兵)’ 얘기로 돌아간다. 1943년 10월 20일 일제는 육군성 명령 제48호인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계획’에 따라 전문학교(專門學校)와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이미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들이 ‘학병(學兵)’이란 이름으로, ‘지원’의 형식에 따라 전쟁에 동원되었다. 당시의 ‘학병’ 지원현황을 알아본다.
1943년 조선인 학도지원병 지원현황
구 분 |
대상인원 |
입영자 수 |
비율 |
조선 내 전문대 재학생 |
1,000 |
959 |
69 |
일본, 중국, 만주국 유학생 |
2,929 |
2,150 |
77 |
1943년 미취업자 |
2,574 |
941 |
60 |
졸업자 중 기취업자 |
700 |
335 |
48 |
합 계 |
6,203 |
4,385 |
70 |
당시의 ‘학병(學兵)’들은 일제의 강압(强壓)으로 징집되기도 했지만, 일본천황(日本天皇)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자원한 학생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해방(解放) 후 잽싸게 변신하여 우리나라 국군창설에 참가했고, 일부는 군 최고수뇌부(最高首腦部)로까지 출세하기도 했다. 일본군 ‘학병(學兵)’ 출신 군수뇌부 인사들의 명단을 살펴본다.
일본군 학병출신 군수뇌
구 분 |
대수, 계급, 성명 |
비 고 |
육군참모총장 |
12대 중장 최영희
14대 중장 장도영 |
일군 학병(소위)
일군 학병(소위) |
합 창 의 장 |
5대 중장 최영희
12대 대장 심흥선
14대 대장 노재현
15대 대장 김종환 |
일본군 학병 |
국 방 장 관 |
최영희
노재현 |
일본군 학병 |
당시의 ‘학병’시절에는 소위 민족지도자(民族指導者)라는 자들이 앞 다투어 일제가 자행하는 조선인(朝鮮人) 학생들의 학병지원(學兵志願)을 선동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스스로 작성한 격문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일제 천황(天皇)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학병’에 지원하여 침략전쟁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선무(宣撫)했었다. 춘원 이광수의 학병지원 선동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의 학도여
- 그대는 벌써 지원하는가 - 내일 지원하려는가 -
공부야 언제나 못 하리.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만은 전쟁은 당장이로세.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날 일. 승패의 결정은 지금으로부터 시각이 바쁜지라 학교도 쉬네. 한 사람도 아쉬운지라 그대도 부르시네.
1억이 모조리 전투배치에 서랍시는 오늘 그대는 벌써 뜻이 정하였으리, --- 나가리이다, 나가 싸우리이다--- 싸워서 이기리이다--- 미영(미국, 영국)을 격멸하고 돌아오리이다.
조국의 흥망이 달린 이 결전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루판 단판일세, 다시 해볼 수 없는 끝판, 그대가 나가서 막을 마루판 싸움.
아시아 10억 --- 칠흑 같은 머리, 흑보석 같은 눈, 황금색 살빛, 자비와 인과 맑은 마음과 충과 효와 정열과 예의와 겸손과 근면과 화평과, 이러한 정신, 이러한 문화, 온유하고 순후한 10억의 운명이 달린 결전,
거룩한 우리 향토 아시아의 성역을 짓밟아 더럽히던 적을 쫓으라 --- 하옵신 결전이 사정 저 형편 궁리하리, 제만사 제잡담하고 나서라. 조선의 학도여! 그대들의 나섬은 그대들의 충의 가문의 영예, 삼천만 조선인의 생광이오.
생로, 일억 국민의 기쁨과 감사, 남아 한번 세상 나, 이런 호기 또 있던가, 일생일사는 저마다 다 있는 것, 위국충절은 그대만의 행운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삼천만 동향인의 앞잡이 되라, 총후의 국민의 큰 기탁과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
다음은 친일사학자 이병도(李丙燾)가 학병지원을 권유한 글을 이 자리에 게재한다. 이병도는 “학도 출진의 대명(大命)을 받들고 특별지원병으로서 제국(帝國)의 군인이 될 수 있는 광영(光榮)의 길이 열린 것은 반도학도(半島學徒)로서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없을 것이다”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는 또 감히 신라(新羅)의 화랑도(花郞徒) 정신을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오도(誤導)하여 조선인 청년학도들의 지원병(志願兵) 입대를 독려했었다. 그의 글이 너무 길어 부록으로 싣는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문필가(文筆家)들은 신문과 잡지를 통해 일제의 침략을 옹호(擁護)하고, 조선인 청년학생들의 지원병(志願兵) 입대를 촉구하는 시와 수필, 논설(論說)을 기고하고 게재하는 등 다투어 친일행각에 나서곤 했었다.
일일이 소개할 기분도 아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말미에 도표(圖表)로 게재한다. 시간이 허용(許容)되는 외원님들께서는 틈나시는 대로 일별해 보시기 바란다.
학병 지원을 선동하는 윤치호의 '총출진하라 !' 가
실린 신문기사 (1943년 11월 18일자 매일신보 1면)
본론으로 한 번만 더 돌아간다. 어쨌든 일본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킨 후 계속해서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뉴기니아, 그리고 진주만 폭격으로 전쟁을 확대하면서 병력소모(兵力消耗)가 늘어나자 우리나라와 대만(臺灣)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대만(臺灣)을 황국 신민화(臣民化)시키고, 실업학교를 대거 증설하여 우리나라 인구 2천만에 2백만을, 대만(臺灣) 인구 8백만에 1백만을 전쟁에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일제의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에서는 태릉(泰陵)에 지원병훈련소(志願兵訓練所)를 만들어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태릉선수촌 훈련장에서 훈련 중인 조선인 지원병
그리고 그 직전에는 전문학교(專門學校)에 다니는 인문계통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앞서 말한 대로 말이 좋아 지원병이지 실제로는 강제징용(强制徵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원에 응하지 않으면 공민권(公民權) 박탈은 물론이고, 만주(滿洲)의 벽지 탄광에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 노무자로 보내거나, 가족들의 사업을 방해하고, 공무원 채용에서 배제하는 등 탄압(彈壓)을 강화하자 마지못해 지원을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까짓 일제의 관헌(官憲)이 되지 않고, 천황의 신민(臣民)이 안되면 그만이었겠지만, 조상대대로 전승(傳乘) 받은 못난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 때문에 ‘왜놈’들이 주는 총을 들고, 독립군(獨立軍)과 연합군을 쏘아 죽이는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당시의 청년학생들은 앞 다투어 일본군(日本軍)에 지원하여 침략전쟁(侵略戰爭)에 참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강제징집(强制徵集)이나 마지못해 지원하는 학생들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자원하여 일본천황(日本天皇)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청년학생들도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필자가 출생한 1942년도에는 4,077명 모집(募集)에 254,273명이 지원(志願)하여 무려 62대 1의 경쟁률(競爭率)을 보이기도 했다. 도표를 통해 그 실상을 알아본다.
조선인 특별지원병제 응모자 경쟁률
연도별 |
채용수 |
응모자 |
경쟁률 |
1938년 |
406명 |
2,906명 |
1 : 7.7 |
1939년 |
613명 |
12,348명 |
1 : 20.1 |
1940년 |
3,060명 |
84,443명 |
1 : 27.6 |
1941년 |
3,208명 |
144,443명 |
1 : 45.1 |
1942년 |
4,077명 |
254,273명 |
1 : 62.4 |
1943년 |
6,300명 |
303,394명 |
1 : 48.2 |
그리고 이들 지원병들 중 일부는 해방 후 우리나라 국군창설(國軍創設)에 참가하여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과 합참의장(合參議長), 나아가 국방장관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의 입신양명을 하기도 했고, 정계에 진출하여 일세를 풍미하기도 했었다. 일본군 지원병(志願兵) 출신 군수뇌들은 아래 표와 같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 우리나라 군수뇌부
구 분 |
대수, 계급, 성명 |
비 고 |
육 참 총 장 |
11대 중장 송요찬
13대 중장 최경록
|
일본군 지원병(준위)
일본군 지원병(준위) |
합 창 의 장 |
10대 대장 임충식
11대 대장 문형태
|
일본군 지원병 |
--------------------------------------------
다음은 앞쪽에서 잠깐 소개한 6.25당시의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을 소개한다. 6.25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징집(徵集) 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국(祖國)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자원(自願) 입대한 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총조차 없어 북한군(北韓軍)으로부터 노획한 소련제 따꽁총(아식보총 ; 구형 모신나강, 1881년 러시아 개발, 구경 7.62㎜, 길이 131.8㎝, 유효사거리 548.64m)에 그 소총의 실탄 한 두릅씩으로 무장(武裝)하는 경우가 많았다. 6.25 당시 우리 국군에는 그만큼 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식보총(A式步銃 ; 모신나강)
아식보총(A式步銃 ; 모신나강)은 6.25를 겪은 세대들은 잘 알고 있는 소련제 구형 ‘모신나강(Mosin Nagant)’ 소총으로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91년에 제작, 1-2차 세계대전의 소련군 주력 개인화기였으며, 6.25 때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사용했던 소총이다.
사격(射擊)할 때 ‘딱흥’ 또는 ‘따콩’하는 특이한 총성(銃聲)이 울려 흔히 ‘따콩총’이라 했고, 길이가 길어 ‘장총(長銃)’이라고도 했는데, 이를 노획하여 우리나라 후방 치안경찰들이 매고 다니기도 했다.
당시의 따꽁총은 길어서 중고등학생들이 메고 다닐 때는 땅에 끌리기도 하여 어깨 위에 작대기를 메듯이 메고 다녔다.
그런데 이 아식보총은 단발식(單發式)에다가 총신이 과열(過熱)되면서 총탄(銃彈)이 잘나가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때문에 전투 중에는 총신(銃身)에서 기름이 지글지글 끓기도 했었다. 계속된 사격(射擊)으로 총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물이 없는 고지에서는 급히 총신에 소변(小便)을 보아 식혀가면서 계속 사격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듯 엉터리 무장(武裝)으로 출전한 학도의용군은 6.25전쟁 당시 육군 제6사단과 해병(海兵) 제1연대와 함께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며, 중공군(中共軍) 3만 여 명을 파로호(화천댐)에 수장(水葬)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아식보총'으로 무장한 학도의용군
(전쟁터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군인지, 적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소련제 따꽁총 을 멘 중공군 같기만 하다)
어쨌든 당시의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들은 주로 후방지역(後方地域)에서 침투한 게릴라 또는 주요 시설에 대한 경계작전(警戒作戰)에 투입되어 많은 전투를 치렀다.
주요 학도의용군 전투로는 앞에서 소개한바와 같이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慶州市)의 이웃인 포항에서 전개되었던 전투(戰鬪)에서 49명이 동시에 전사한 포항여중(浦項女中) 전투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꽃다운 나이에 산화해간 '학도의병'의 포항전투(浦項戰鬪) 상황을 소개한다. 포항시는 경주시와 맞닿아 있어 당시의 포항전투는 경주에서의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38도선을 넘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하하여 신라(新羅)의 천년고도 경주(慶州)를 위협하자 '학도의병'들이 이들 북한군을 막아섰다. 그 전투가 포항여중에서 치러진 포항전투였다.
당시의 전투를 주제로 한 영화 '포화 속으로'
(이 때의 학도병들은 모두 미군의 M1소총으로 무장했었다)
이 포항전투(浦項戰鬪)에는 어린 중학생들과 대학생 일부로 구성된 '학도의병' 71명이 참전하여 49명이 전사하고, 20여명이 포로(捕虜)가 되는 비운(悲運)을 겪었다.
전투상황을 살펴본다. 1950년 경북 의성(義城)에서 재편성된 '학도의병' 71명은 포항(浦項) 사수를 위해 그해 8월 포항여중(浦項女中)에 도착했다. '학도의병'들이 소지한 무기는 M1소총과 약간의 탄약대(彈藥帶) 뿐이었다.
당시의 학도의용군이 주둔한 포항여중 신축교사(현재의 포항여고)
학생들이 도착한 포항시(浦項市) 서남쪽 근교에는 해군(海軍)마저 철수하여 국군이 한사람도 없었다. 소수의 경찰관이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 공산군(共産軍)은 별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안강(安康) 근처에서 동남쪽을 거쳐 포항(浦項)시내로 진격해 들어올 수 있었다.
'학도의병'들은 적군을 앞에 두고 ‘배수(背水)의 진(陣)’을 쳤다. 40여명의 적군이 2열종대로 시내에 진입할 때 학생들은 그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적은 20여구의 시체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그 후 20여분이 지나자 적은 학생들보다 2배가 넘는 인원으로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도 학생들은 놀라운 사격술(射擊術)로 적을 격퇴하였다. 이때까지도 학도병의 피해는 없었으나 탄약이 거의 소모되었을 때 적은 또 포격(砲擊)을 가하면서 학생들의 방어진지(防禦陣地) 200미터 전방까지 진격, 기관총(機關銃)으로 공격해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적은 병력을 보충 받아 사면에서 포위망(包圍網)을 압축해왔다. '학도의병'들은 포위망 속에서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마지막 돌격전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항여중 교정에서 마지막 돌격전을 감행하는 학생들
(그림의 북한군은 제5사단 예하 제766부대이며, 원내의 소총은 소련제
'모신나강', 중학생들의 모표는 50년대 외동중학교 모표와 비슷하다)
71명의 '학도의병'들은 하나님께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나서 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며 돌격하였다. 순간 사면에서 적의 집중사격이 시작되었다.
'학도의병'들은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며 장렬하게 쓰러졌다. 71명 가운데 김춘식 학도병 등 49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중.경상을 입은 채 적에게 사로잡힘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포항전투(浦項戰鬪)는 끝을 맺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이들 어린 중학생(中學生)들이 그 무거운 M1소총을 끌어안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야 했는지를 곰씹어봐야 한다.
집에서 응석이나 부리고 있어야 할 어린이들이 전투(戰鬪)에 나선 것은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들 외동읍(外東邑) 출신 의병장(義兵長)들과 '종놈'들과 '백정(白丁)'들이 뿔뿔이 도망간 관군(官軍)들을 대신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고 나설 때와 같은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처럼 부유층(富裕層)들이 자기 자식들의 징집을 기피하기 위해 돈을 들여 '전시연합대학'에 입학시키거나, 징집당국(徵集當局)에 금품을 상납하는 등 비리를 자행하여 그만큼 전투병력(戰鬪兵力)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지만 당시 우리들의 고향 경주(慶州)에 후퇴해 있던 육군본부(陸軍本部)에 줄을 대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부처(人事部處)에 근무하던 먼 친척 형님 한분은 그 전쟁통에 어디에서 무슨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7번국도 옆에 있는 논 한 골짜기를 사들이기도 했었다.
여기에다 전체 국토가 공산군의 수중(手中)에 떨어지고, 손바닥만 하게 남은 부산시(釜山市) 일원에 콩나물 같이 바글바글 모여 있던 서울 등지의 대학생(大學生)들은 모두들 '전시연합대학'에서 수업을 받으며,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을 만들어 병역을 피하고 있었다.
당시의 전시 학생증
그리고 북한군(北韓軍)이 밀물처럼 포항(浦項)으로 밀려내려 오는데, 충용(忠勇)한 우리 국군(國軍)은 모조리 후퇴하거나, 낙동강(洛東江) 전선으로 이동하고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육군(陸軍)도 해군(海軍)도 모두 떠나고, 소수의 경찰관(警察官)이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학생들이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狀況)을 우리 정부와 국군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대학생(大學生)도 없었고, 대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도 없었다. 어린 중학생들과 일부 대학생이 전국에서 부산(釜山)으로 모여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을 만들어 징집(徵集)을 피하고 있는 대학생 형들을 위해 대신 싸우고, 대신 죽어 주고 있었을 뿐이다.
개봉(開封) 한 달 만에 관객 300만 명을 돌파한 전쟁영화 '포화 속으로'는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71명 '학도의병'들의 감동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 '포화 속으로'
(북한군 제5사단 예하 제766부대가 쇄도하고 있다)
이름조차 생소(生疎)한 이 영화 속의 주인공(主人公)들인 '학도의병', 그들은 누구인가. 앞서 소개한 대로 이때의 '학도의병'은 스스로 학업을 중단하고 자진하여 북한군과 싸운 중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부산(釜山)의 육군 제2훈련소에서 3주간의 훈련을 받은 뒤 M1소총 한 자루와 담요, 그리고 몸에 맞지도 않는 군복(軍服)을 지급 받고는 전방에 바로 투입되었다.
이들 '학도의병'들에게는 군번(軍番)도 이름표도 부여되지 않았으며, 군복이 부족하여 교복(校服)을 그대로 입고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그들은 이름도, 명예도 없이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몸을 던졌다.
6.25전쟁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학도의용군들
(철모에, 작업모에, 그도 없는 대원은 학생모자에 학생복을 착용했다)
그리고 1951년 2월 28일자로 해체된 '학도의용군'들은 독립유격(獨立遊擊)대대, 제3보병사단 학도의용군 중대, 육군 정훈대대, 학도 포병의용대 등으로 조직 되어 약 5만 명의 대원이 직접 전투에 참전(參戰)했었다.
또 27만 명의 대원들이 후방 선무공작(宣撫工作) 등을 통해 군을 지원했으며, 그 중 7,000여 명이 조국을 위해 산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도의병'들이 참가했던 가장 참혹했던 전쟁은 앞서 소개한 대로 영화 ‘포화 속으로’에 나오는 포항여중 전투였다.
당시의 '학도의병'들은 1명 당 M1소총 한 정과 실탄 250발만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실탄이 다 떨어지고 나면 학도병들은 무방비(無防備) 상태로 저항하다가 북한군(北韓軍)의 총에 힘없이 스러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
발굴된 학도병들의 유품
최근 유해발굴(遺骸發掘) 사업으로 포항여중(浦項女中) 전투에 참여했던 이우근 '학도의병'의 일기가 발굴되었고, 이는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는 명대사(名臺詞)가 되었다. 이우근 '학도의병'의 일기를 소개한다.
이우근 학도병의 일기
어머니, 전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두고 10명은 될 겁니다.
나는 네 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적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이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전 오늘 내복을 빨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
이때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던 이우근 '학도의병'은 끝내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포항여중(浦項女中)의 운동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학도의병', 그들은 지금의 중고등학생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어린 소년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감(勇敢)한 군번 없는 군인이었다.
자신을 방어해주는 군복(軍服) 하나 없이 교복을 입고 전쟁에 뛰어들었던 '학도의병', 그들의 수많은 유해(遺骸)들이 아직도 차가운 땅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군번조차 없어 제대로 된 기록도 없이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차가운 흙 속에,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힌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그들의 값진 희생에 대한 조그마한 감사가 아닐까.
포항전투(浦項戰鬪)에서 전사한 학생 49명 중 35명은 이름도 소속(학교)도 남아 있지 않다. 입대할 때 노트에 이름을 적었는데, 전쟁통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북괴군(北傀軍)이 퇴각한 후 시신(屍身) 수습 당시 신분증(학생증)이 나온 사람들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보다 성의 있는 유해발굴 등을 통해 신원이라도 밝혀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 시절 학도의용군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1951년 2월 공식적으로 해체되면서 수도사단(首都師團) 1연대에 배속되었다.
6.25 당시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 중 포항여중 전투에서 장엄하게 전사한 49명 학도병(學徒兵)들의 충용과 무공을 기리며 부르던 '학도의용군의 노래' 가사를 소개한다.
학도의용군 노래
내 나라 없고서야 배움 있으랴
흰 날에서 서리쳐 꽃지는 아침
교복을 벗어 놓고 군복을 떨쳐
밀려 든 붉은 적을 쫓아 싸우니
그 이름 거룩하다 학도 의용군
포항에 부서진 옥 사십구 용사
내 겨레 없고서야 살음 있으랴
동해에 바람 일어 높치는 새벽
붓대를 내던지고 총 칼을 들어
밀려 든 붉은 적을 피로 막으니
그 이름 거룩하다 학도 의용군
포항에 부서진 옥 사십구 용사
|
여기에서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의 정의와 그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더 알아본다.
학도의용군은「병역법시행령」제107조의 규정에 의거하면, 19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으로 유엔군 또는 유엔군에 예속되어 1951년 2월 28일에 해산(解散)할 때까지 복무한 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1951년 2월 28일에 해체되었으며, 해체된 이후 학교에 복귀했거나, 현역편입 또는 정훈공작대(政訓工作隊)에 잔류하였다.
그리고「병역법개정」에 의하여 1958년 6월 이후 이들은 제1예비역에 편입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6.25전쟁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자진하여 참전하였던 의용병(義勇兵)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펜 대신 총을 들고 자유수호(自由守護)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던 중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직접적(直接的)인 전투 참가 외에도 경계근무지원, 탄약운반, 후방지역 선무활동(宣撫活動)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한 공산군(共産軍)의 남침 직후 최초로 창설된 '학도의용군'은 1950년 6월 29일 수원(水原)에서 고급 중학생을 비롯한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구국비상학도대(救國非常學徒隊)를 조직하고 국군과 유엔군에 종군함으로써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현역복무(現役服務)를 지원한 것이 아니고, 그 신분은 학생 그대로의 의용군(義勇軍)이었다.
다음으로 1950년 7월중 학도 7백여 명이 부산에서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을 조직 편성하여 전라도(全羅道) 지방으로 출진하였고, 같은 무렵 포항전투(浦項戰鬪)에 참전한 제3사단 학도의용군은 대구지방에서 약 600여명이 지원하였다.
또한 8월 약 1천여 명의 학도들이 대전(大田)에 비상 학도군(學徒軍)을 조직하여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편입되어 종군하였으며, 인천지구(仁川地區)에서도 약 1천여 명의 남여학도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투현장에서 버리고 간 무기와 장비를 갖고 인천방위를 결의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戰勢)가 불리하자 수원, 대전을 경유하여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편입되었다.
부산(釜山)에서는 하갑청 장군이 약 8백여 명의 학도를 규합하여 특공대(特攻隊)를 조직하여 참전하였고, 밀양·성주·고령 등지에서도 약 1천여 명의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이 국군과 유엔군 작전에 협력하여 패잔병을 소탕하였다.
강원도지구에서는 약 4백여 명의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이 유격 제6대대를 조직하고, 공산군 패잔병(敗殘兵)의 퇴로차단과 소탕작전에 참가하였다.
이와 별도로 강원상교(江原商校)에 재학 중이던 김재천 학생은 강원상교·강원사법·강원농교 학생 5백여 명으로 의용군(義勇軍)을 편성하고 치안유지(治安維持)에 임하다가 후에 제1군단에 편입되어 북진작전에 참전하였다.
이상의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 이외에도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 주동하여 조직한 학도의용군 정훈공작대(政訓工作隊)와 멀리 일본에서 참전한 재일교포(在日僑胞) 학도의용군이 있어 총인원수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27,700명의 학도들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의 정훈공작대(政訓工作隊)는 읍면까지 조직체를 가지고, 정훈공작을 전개하였으며 공비토벌이나 귀순공작(歸順工作)에도 활약하였다.
그리고 이후 학도호국단이 창설되고부터 중앙학도호국단에서 각 학교별로 조사 파악된 학도의용군 중 전몰학도(戰歿學徒) 수가 1,394명에 달한다고 집계하였다.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은 초기에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전투에서 전황(戰況)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이끄는데 기여하였으며, 다양한 후방지역(後方地域)에서의 지원활동을 통해 국민들과 국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
얘기를 조금만 더 연장한다. 6·25전쟁 참전 학도병(學徒兵) 중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일본(日本)에서 건너온 재일학도의용군(在日學徒義勇軍)도 있었다.
재일교포 학도의용군 지원자들
교포 대학생 641명으로 구성된 재일교포(在日僑胞) 민단학생들은 바다 건너 조국(祖國)을 위해 기꺼이 참전했고, 이 중 135명이 실종되고 전사하여 이 땅의 어느 곳엔 가에 묻혀 유해(遺骸)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재일교포 학도의용군
필자의 사무실 인근에 위치한 전쟁기념관(戰爭記念館) 2층 6·25전쟁실에는 빛바랜 태극기(太極旗)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이 태극기는 6·25전쟁 발발 2개월쯤 뒤 일본 도쿄(東京)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참전결의(參戰決意)를 다지던 순간을 함께한 역사적 유물이다.
재일 학도의용군 출정식
1950년 9월 6일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民團)소속 대학생 20명가량이 도쿄 시내 민단사무실에 모였다.
누군가가 “일본에서 자라면서 나라 없는 설움을 겪은 우리가 반드시 조국을 살려내야 한다”며 참전의사(參戰意思)를 밝혔고 다른 학생들도 뜻을 같이했다.
교포학도병을 환송하는 당시의 재일교포들
당사국인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이라는 희한한 것을 만들어 전쟁에 나서지 않았지만, 당시의 재일교포(在日僑胞) 대학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6.25 참전(參戰)을 스스로 결정하고, 물설고 낯 설은 조국의 전쟁터로 뛰어든 것이다.
6·25전쟁 참전 결의를 다진 재일교포학생들의 서명 태극기
(1950년 9월 6일 일본 도쿄 지역에 살던 재일 한국인 학생들이
민단사무실에 모여 6·25전쟁 참전을 결의하면서 서명한 것이다)
이들은 어렵게 구한 태극기에 먹을 갈아 글을 써넣었다. 우국애족정신(憂國愛族精神), 공산군타도(共産軍打倒), 조국애(祖國愛) 등과 함께 당시 참석자 이름을 써넣었다.
지역별로 모였던 교포학생들 가운데는 태극기(太極旗)를 구하기 어려워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해 태극문양(太極紋樣)을 만들고, 먹을 갈아 4괘를 그려 넣기도 했다.
전투 중 기념촬영하는 재일교포 학도의용군
그리고 전선에 투입된 이들 '재일학도병'은 '의용군(義勇軍)'이라는 휘장을 달고 다녔다. 일본에 살던 민단 소속 부녀회(婦女會)가 이를 제작하여 위문품과 함께 한국에서 싸우던 '재일학도병(在日學徒兵)'에게 전달한 것이다.
미군(美軍)의 군복을 입고 싸웠던 재일교포(在日僑胞) 학도병들은 이 '휘장(徽章)'을 군복 상의(上衣) 혹은 군모(軍帽)에 달고 싸웠다.
교포 학도의용군 출정식
일본에 살고 있던 재일교포(在日僑胞)들과 그 부녀단체에서까지 북괴군(北傀軍)을 물리치기 위해 이토록 애를 썼는데, 우리나라 부녀자들은 제 자식과 대학생 아들을 군대에 내보내지 않으려는 데만 몰두(沒頭)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
지난 1960년대까지는 '학보' 또는 '학보병'이라는 것이 있기도 했었다. '학적보유병(學籍保有兵)'이라는 용어의 약칭이다.
당시의 대학재학생(大學在學生)은 '학적보유병', 교직원은 '교직보유병'으로 일반병과 달리 군번을 0001로, 0부터 부여했다. '교직보유병'은 '교보'라고 했었다.
이들은 주로 전방부대 보병 소총수(小銃手)로 18개월을 복무하고 일단 귀휴(歸休)하여 6개월 내 복학이나 복직을 하여 그 증명서를 지구 병사구사령부(兵事區司令部 ; 지금의 지방병무청)에 제출하면, 6개월 귀휴기간을 합쳐 24개월 복무한 것으로 제대특명(除隊特命)이 났다.
일반병(一般兵)으로 입대하면 36개월 이상 복무해야 하고, '학보병(學保兵)'으로 입대하면 비록 최전방부대(最前方部隊)의 보병 소총수로 복무해야 하는 조건이었지만, 복무기간이 절반정도로 짧아 '학보병'으로 입대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말이 소총수(小銃手)였지 당시로서는 귀한 대학생 출신이라 거의가 행정반(行政班)에서 근무하는 사실상의 행정병(行政兵)으로 복무시키다 제대하도록 조치하곤 했었다.
5.16혁명 직후였지만, 모조리 훔치고 뺏어 먹던 그 시절에 군법(軍法)이든 국법(國法)이든 제대로 지키는 인간들은 거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6.25 때는 대학생들에게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을 발급하여 전쟁터에 나가지 않게 해주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대학생들을 '학보(學保)'로 입대케 하여 일반병(一般兵)의 절반만 복무하고 귀가(歸家)시키는 제도가 '학보제도'였다.
전시학생증
필자는 '학보제도(學保制度)'가 끝난 뒤에 입대했지만, 당시 춘천에 있던 미군 유도탄 부대 경비부대였던 한국군 고사포부대 행정반에 근무할 때 당시 교육담당 사수(射手 ; 총을 쏘는 사수가 아니고, 단위 담당부서의 선임자를 말한다)가 '학보(學保)'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가 일등병(一等兵)으로 조기 전역하게 되자 이등병인 필자가 바로 사수(射手)가 된 일이 있었는데, 그날 자로 바로 '마이가리' 일등병이 된바 있다. 필자의 사수가 '학보(學保)'의 마지막 제대자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마이가리’는 일본어인 '마에가리(前借,まえがり)'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미리받기, 당겨받기, 가불(假拂) 등의 뜻을 가진 일본말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휴가(休暇) 나가는 군인이 더 높은 계급장(階級章)으로 바꿔달 때 많이 사용하는 은어(隱語)였다.
예전에는 '작대기' 하나 둘로는 폼이 안난다고 해서 휴가나 외출(外出) 시 상병(上兵)이나 병장(兵長) 계급장으로 바꿔 다는 것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 시절에는 하급부대의 고참(古參) 행정병들을 용이하게 통제하기 위해 상급부대(上級部隊)의 하급 행정병(行政兵)들이 한 계급 또는 두 계급 정도씩 높인 계급장을 달고 다녔었다.
옛적 직장에서는 월급을 가불(假拂)하는 '마이가리'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워낙 가난한 시절인데다, 월급(月給)이 적었고, 물가(物價)가 너무 비싸 다음 달 월급 때까지를 기다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불 봉투
----------------------------------------------
글이 자꾸만 길어질 듯 하여 이쯤에서 파일을 접을까 한다. 배경음악으로는 그 시절 황량한 만주(滿洲)벌판을 내달리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초개같이 쓰러져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상징 ‘선구자’를 게재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오늘은 바이올린 독주(獨奏)로 듣는다.
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 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지금의 일송정
-------------------------------------------
[부록]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학병권유 글
1943. 11. 26
학도 출진의 대명을 받들고 특별지원병으로서 제국의 군인이 될 수 있는 광영의 길이 열린 것은 반도학도로서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감격을 길이 빛내어 순충보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여 전통적 상무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도의 여성은 이것을 계기로 더욱 상무적인 교양에 힘써 군국의 어머니로서 손색없는 총후 여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출진하는 학도와 우리의 어머니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옛 조선 신라 시대의 화랑의 정신과 그 어머니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머니의 굳센 격려는 전투 용기를 백배나 더하게 한다.
우리는 이조 5백년의 그릇된 유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약에 빠지고, 인습적 가족제도의 폐단인 남존여비 사상과 계족(系族)을 중심으로 한 도덕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상무정신과 충군애국의 사상이 희박한 결함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일시 역사적 폐단에 지나지 않고 전통적으로 조선민족이 문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 예를 신라의 화랑에서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화랑은 원시신앙에 기원한 신라의 고유한 도이다. 원래 신라에서는 육체미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영육일체 사상, 즉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희랍 사상과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화랑은 처음에는 원화라고 하여 아름다운 여성을 택하여 단장을 삼았다. 그러나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단장이 시기하는 마음에서 질투가 일어나 서로 싸우다가 둘 다 죽어버린 후에는 이에 폐해가 있다고 해서 남성이 대신하였으나 역시 나이어린 미소년 특히 귀족계급에서 택하였다.
나이어린 소년을 단장으로 택한 것은 혈기 왕성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청소년이어야만 의용(義勇)심을 기를 수 있다는 데 그 연유가 있었다. 인물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은 행위가 방장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과 육의 일체를 주장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화랑은 의에 살고 죽으며 가악을 숭상하였다. 이것은 정서도야를 의미한다.
또 명산대천을 돌아다닌 것은 육체단련과 순례의 의미가 있다. 산에 들어가서 국가의 번창과 일가의 흥륭을 기도하며 천금이라도 의가 아니면 받지 않는 고결한 기품으로 대자연 속에서 연마 양성한다는 뜻을 가졌다.
전시에는 단체를 이끌고 출정하여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버리며, 의를 태산과 같이 중히 여기었다. 즉, 화랑은 전장에 나아가 패하게 되면 마땅히 죽을 것으로 알았고 죽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 돌아옴을 무엇보다 남자의 수치로 여겼다.
그런 예를 하나 들면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다. 백제와 황산에서 싸우다가 전운이 불리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을 때 백제 장군계백이 관창의 투구를 벗겨보니 후안의 미소년이었다.
적장은 가련한 생각을 금치 못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으나 재출진하여 싸우다가 죽음으로써 신라군의 울분과 사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근자에 경주에서 壬申二年六月十六日 二人 ×× 記天前書... (이하줄임) 이라는 돌에 새긴 문헌이 발견되었다.
이 글의 문맥은 임신2년 6월 13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 앞에서 지금부터 3년 동안 충도(忠道)를 닦아서 과실이 없기를 맹세하여 만일 이 맹세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죄를 얻으리라고 하였고, 또 만일 국가에 불안하고 대란이 일어나면 반드시 충도를 행하여 국난을 막기를 맹세한 내용이다.
학도 출진의 동원령 아래 장차 결전장으로 나아가게 될 반도의 학도들에게 한층 더 감명 깊은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말한 상무정신과 도의심은 화랑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의 시대정신이 일체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승려계급에도 이러한 도의정신과 상무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즉, 그런 예를 들면 원광법사라는 유불에 통한 중은 세속오계라 하여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을 가장 큰 교훈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이 교육을 받은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청년은 신라가 백제와 싸울 때 출진하여 법사의 교훈, 임전무퇴의 훈계를 지키기로 하고 만신에 창검을 받고도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에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열혈청년이 어찌 그 두 청년뿐이랴. 그리고 일반남자뿐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상무적인 시대정신이 농후하다.
김유신 장군이 16세 때 미소년의 화랑으로 무예를 닦기 게을리 하고 화류의 거리에 출입하다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뒤에 큰 공을 이룬 것은 그 어머니의 훌륭한 상무적 교양에 의한 것이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이 당병과 대방의 들에서 싸우다가 패하고 죽으려하다가 부하의 만류 때문에 죽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부친 유신장군은 국왕께 왕명을 욕되게 하였고 가훈을 저버렸으니 죽여 마땅하다고 상소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사죄로 말미암아 시골로 가서 파묻혀 지냈는데 아버지가 별세한 뒤에 어머니께 뵙기를 청하였다.
그 어머니는 원술로 말하면 아비에게 자식노릇 못하였으니 나도 그 어미가 될 수 없다고 대면하기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얼마나 화랑의 어머니가 아들교육에 엄격했던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
일제 당시 친일지식인의 잡지 기고글(필자별 주요 글)
필자 |
제 목
|
출전 잡지 |
형태 |
갈홍기 |
종교적인식의 방법 |
삼천리 1941년 12월호 |
논설 |
그리스도교의 인생관 |
녹기 1940년(5권) 6호 |
논설 |
고승제 |
전환기의 문화이론 |
인문평론 1941년 1월호 |
논설 |
곽종원 |
결전문학의 이념 |
국민문학 1944년 4월호 |
논설 |
구자옥 |
전선에서 진실 발휘 |
조광 1943년 12월호 |
논설 |
김기진 |
문화인에 격함 |
신시대 1944년 9월호 |
논설 |
대동아전쟁송 |
조광 1942년 2월 |
시 |
김동인 |
아부용 |
조광 1942년 2월 |
소설 |
김동환 |
국방관념과 상무열의 고취 |
삼천리 1940년 7월호 |
논설 |
의무를 충실히하라 |
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 |
논설 |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 |
삼천리 1941년 11월호 |
논설 |
伯林凱旋 |
신시대 1841년 1월 |
시 |
아세아 부흥과 내선일체 |
동양지광1939년 4월호 |
논설 |
징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연성 |
동양지광 1943년 3월호 |
논설 |
김문집 |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 |
조광 1943년 9월 |
논설 |
김용제 |
전쟁문학의 전망 |
동양지광 1939년 3월호 |
논설 |
내선일체의 노래 |
동양지광 1939년 4월호 |
시 |
아세아시집 |
동양지광 1939년 7월호 |
시 |
內鮮結婚我觀 |
내선일체 1940년 1월호 |
논설 |
해신 |
조광 1942년 2월호 |
시 |
御東征 |
녹기 1943년 2월호 |
시 |
민족적 감정의 내적 청산으로 |
동양지광 1939년 4월호 |
논설 |
김한경 |
동양문화와 일본정신 |
동양지광 1939년 2월호 |
논설 |
현대조선청년론 |
동양지광 1939년 6월호 |
논설 |
청년의 성격과 그의 연성에 대하여 |
동양지광 1943년 9월호 |
논설 |
김해강 |
아름다운 태양 |
조광 1942년 6월호 |
시 |
김활란 |
반도여성의 궐기 |
삼천리 1941년 12월호 |
논설 |
최대임무 |
동양지광 1942년 1월호 |
논설 |
여성의 무장 |
조광 1942년 2월호 |
논설 |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
신시대 1942년 12월호 |
논설 |
뒷 일은 우리가 |
조광 1943년 12월호 |
논설 |
노천명 |
기원 |
조광 1942년 2월호 |
시 |
승전의 날 |
조광 1942년 3월호 |
시 |
지원병에게 |
삼천리 1942년 1월호 |
시 |
동방의 여인들 |
신시대 1942년? 1월호 |
시 |
어린 날개 |
신시대 1943년 12월호 |
시 |
박남규 |
결혼의 인식 |
내선일체 1940년 1월호 |
논설 |
내선일체생활의 인식으로 |
내선일체 1940년 2월호 |
논설 |
박영희 |
황국신민의 각오를 새롭게 |
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 |
기타 |
전쟁과 조선문학 |
인문평론 1939년 10월호 |
논설 |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 |
국민문학 1941년 11월호 |
논설 |
반도신체제의 기치: 신체제와 문학 |
녹기 1940년(5권) 10호 |
논설 |
박인덕 |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 |
삼천리 1941년 11월호 |
논설 |
미영타도 좌담회-미국 부인의 전쟁관 |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
좌담회 |
동아여명과 반도여성 |
대동아 1942년 5월 |
논설 |
의식주에 관한 필승의 길 |
신시대 1943년 4월호 |
논설 |
박희도 |
신동아 건설과 우리의 사명 |
동양지광 1939년 4월호 |
논설 |
사변전도에 대한 각오 |
동양지광 1939년 7월호 |
논설 |
배영운동강화론 |
동양지광 1942년 8월호 |
논설 |
일사보국의 생각 |
동양지광 1940년 1월호 |
논설 |
미영타도 좌담회-일본은 왜 싸우는가 |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
좌담회 |
싱가포르 함락과 팔굉일우 |
동양지광 1942년 3월 |
논설 |
백낙준 |
미영의 民情과 식민 정책 |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
좌담회 |
백철 |
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 |
동양지광 1939년 4월호 |
논설 |
天皇陛下御親閱 특별관함식 배관근기 |
삼천리 1940년 12월 |
기타 |
전쟁문학 일고 |
인문평론 1939년 10월호 |
논설 |
금후엔 문화적 사명이 중대 |
인문평론 1940년 7월 |
논설 |
서강백 |
세계신질서 건설의 장래 |
춘추 1942년 2월호 |
논설 |
세계전국의 전망 |
춘추 1942년 5월호 |
논설 |
서광제 |
신체제와 영화 |
인문평론 1940년 11월호 |
논설 |
서정주 |
스무 살 된 벗에게 |
조광 1943년 10월호 |
수필 |
崔遞夫의 군속지망 |
조광 1943년 11월호 |
소설 |
서 춘 |
준선시체제에서 전시체제로 |
조광 1937년 12월호 |
논설 |
正業轉換에 대하야 |
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1월호 |
논설 |
조선과 총력운동 |
신시대 1941년 2월호 |
논설 |
필승의 신념 |
대동아 1942년 7월호 |
논설 |
송금선 |
시대도 새로운 이날 여인으로 알아둘 예절 |
신시대 1941년 1월호 |
논설 |
부인부대와 지원병 |
삼천리 1941년 1월호 |
논설 |
신봉조 |
적이여 보라 |
조광 1943년 2월호 |
논설 |
신흥우 |
태평양풍운의 전망 |
삼천리 1941년 11월호 |
논설 |
조선기독교도의 국가적 사명 |
동양지광1939년 2월호 |
논설 |
미영타도 좌담회-영국인의 민족성 |
동양지광1942년 2월호 |
좌담회 |
신가파와 공영권 |
대동아 1942년 5월 |
논설 |
신태악 |
신내각과 오인의 각오 |
녹기 1941년(6권) 11월호 |
논설 |
심형구 |
시국과 미술 |
신시대 1941년 10월호 |
논설 |
안용백 |
우리 국민성과 반도인 |
녹기 제3권 10호 |
논설 |
양주삼 |
미영타도 좌담회-아메리카는 왜 싸우는가 |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
좌담회 |
오긍선 |
의무교육실시와 교육시설확충 |
삼천리 1940년 9월호 |
논설 |
유각경 |
시국과 여성의 각성 |
삼천리 1938년 8월호 |
논설 |
유광렬 |
쫓겨가는 미영세력 |
신시대 1941년 1월호 |
논설 |
12월 8일과 우리의 각오 |
조광 1942년 12월호 |
논설 |
의무교육과 징병제 |
조광 1943년 2월호 |
논설 |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영예 |
조광 1943년 6월호 |
논설 |
징병제 감사문세와 그 의의 |
조광 1943년 7월호 |
논설 |
대동전쟁의 聖戰 의식 |
동양지광 1943년 9월호 |
논설 |
대동아전쟁의 史的 의의 |
동양지광 1943년 9월호 |
논설 |
결전 국내태세의 강화 |
조광 1943년 11월호 |
논설 |
태평양 전황과 총후의 결의 |
조광 1944년 2월호 |
논설 |
필승회의와 국민의 실천 |
조광 1944년 3월호 |
논설 |
유억겸 |
황국과 余의 심경 |
삼천리 1941년 4월호 |
논설 |
戰必勝功必取 |
조광 1942년 2월호 |
논설 |
유진오 |
소감 |
삼천리 1940년 7월호 |
논설 |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
신시대 1944년 9월호 |
논설 |
유치진 |
대륙인식 |
인문평론 1940년 7월호 |
논설 |
싸우는 국민의 자세 |
국민문학 1943년 6월호 |
논설 |
윤치호 |
조선인의 갈길을 알라 |
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 |
논설 |
내선일체 철저화를 위하여 |
동양지광1939년 2월호 |
논설 |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 |
동양지광1939년 4월호 |
논설 |
내선일체에 대한 이념 |
조광 1940년 3월호 |
논설 |
수십만, 수백만에 달하도록 |
삼천리 1940년 7월호 |
담화 |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 |
삼천리 1941년 11월호 |
논설 |
결전과 시련 |
동양지관 1942년 1월호 |
기타 |
산 역사의 주인공 |
조광 1943년 12월호 |
논설 |
이광수 |
지원병 장행가 |
삼천리 1939년 12월호 |
시 |
가끔씩 부른 노래 |
동양지광 1939년 2월호 |
시 |
신시대의 윤리 |
신시대 1941년 1월호 |
논설 |
신체제하의 예술의 방향 |
삼천리 1941년 1월호 |
논설 |
우리집의 노래 |
신시대 1941년 1월호 |
시 |
대화숙수양회 잡기 |
신시대 1941년 4월호 |
수필 |
사변과 조선-국민의식의 앙양과 지위향상 |
신시대 1941년 7월호 |
논설 |
싱가포르 함락되다 |
신시대 1942년 3월호 |
시 |
진주만의 九軍神 |
신시대 1942년 4월호 |
시 |
징병과 여성 |
신시대 1942년 6월호 |
논설 |
앞으로 2년 |
신시대 1942년 9월호 |
논설 |
전망 |
녹기 1943년 1월호 |
시 |
국민문학문제 |
신시대 1943년 2월호 |
논설 |
이숙종 |
비상시 부인보국 |
삼천리 1938년 8월호 |
논설 |
전시하의 가정생활 |
조광 1943년 1월호 |
논설 |
이종린 |
鴻恩感泣 |
대동아 1942년 7월호 |
논설 |
이창수 |
지나사전 6주년과 대동아전 |
조광 1943년 7월호 |
논설 |
중대한 시국에 처하야 |
조광 1944년 2월호 |
논설 |
이 시련을 극복하라 |
조광 1944년 8월호 |
논설 |
국민징용과 성업익찬 |
조광 1944년 9월호 |
논설 |
인정식 |
내선일체의 필연성에 대하여 |
동양지광 1939년 1월호 |
논설 |
전시체제하의 조선경제 |
동양지광 1939년 2월호 |
논설 |
동아권의 경제적 성격과 조선의 지위 |
삼천리 1941년 1월호 |
논설 |
내선일체의 문화적 이념 |
인문평론 1940년 1월호 |
논설 |
내선일체와 언어 |
삼천리 1940년 3월호 |
논설 |
감히 도시의 청년에게 경고한다. |
동양지광 1943년 5월호 |
논설 |
희망의 농촌 |
조광 1943년 10월호 |
논설 |
건전농촌과 모범부락 |
조광 1943년 11월호 |
논설 |
장덕수 |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 |
동양지광 1939년 3월호 |
논설 |
장기전을 각오하자 |
동양지광 1942년 1월호 |
논설 |
미영타도 좌담회-美英敵性의 정체 |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
논설 |
한 마음 한 뜻으로 |
조광 1943년 12월호 |
수필 |
정춘수 |
應戰의 이유 3가지 |
동양지광 1942년 1월호 |
논설 |
주요한 |
팔굉일우 |
삼천리 1942년 1월호 |
시 |
동양해방 |
삼천리 1940년 12월호 |
시 |
임전조선 |
신시대 1941년 9월호 |
논설 |
루스벨트여 답하라 |
신시대 1942년 1월호 |
논설 |
명기하라 12월 8일 |
신시대 1942년 1월호 |
시 |
상해조계 진주일에 왕군에게 보냄 |
조광 1942년 2월호 |
시 |
마음속의 싱가폴 |
신시대 1942년 3월호 |
시 |
戰必勝功必取 |
신시대 1942년 4월호 |
논설 |
첫피 |
신시대 1942년 9월호 |
시 |
최저생활의 실천- 모든 물가가 군수품이다 |
신시대 1943년 3월호 |
논설 |
12월7일의 꿈 |
신시대 1942년 12월호 |
시 |
채만식 |
문학과 전체주의 -우선 신체제 공부를- |
삼천리 1941년 1월호 |
논설 |
최남선 |
동방민족의 중원진출과 역사상으로 본 아세아제민족의 향방 |
재만조선인통신 1937년 10월호 |
논설 |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 |
재만조선인통신 1937년 11월호 |
논설 |
만주건국의 역사적 유래 |
신시대 1943년 3월호 |
논설 |
성전의 설문 |
신시대 1944년 2월호 |
논설 |
최 린 |
자기 완성이 필요 |
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 |
논설 |
대동아공영권과 고도국방 |
삼천리 1940년 9월호 논설 |
논설 |
최재서 |
전쟁문학 |
인문평론 1940년 6월호 |
논설 |
사변당초와 나 |
사변당초와 나 |
수필 |
전형기의 문화이론 |
인문평론 1941년 1월호 |
논설 |
징병서원행 |
국민문학 1943년 8월호 |
수필 |
최정희 |
5월9일 |
半島の洸 1942년 7월호 |
수필 |
군국의 어머님들 |
半島の洸 1944년 2-4월 |
수필 |
야국초 |
국민문학 1942년 11월호 |
소설 |
징용열차 |
반도지광 1945년 2월호 |
소설 |
군국모 성찬 |
半島の洸 1944년 6-7월 |
수필 |
함대훈 |
지원병제 훈련소 1일입영기 |
인문평론 1940년 11월호 |
수필 |
함상훈 |
구주대전의 신단계 |
조광 1942년 10월호 |
논설 |
歐洲戰局의 1년 |
조광 1942년 12월호 |
논설 |
조선학령아동의 의무교육 실시 |
조광 1943년 1월호 |
논설 |
현영섭 |
사변의 인류사적 의의 |
동양지광 1939년 7월호 |
논설 |
내선일체의 세계사적 의의 |
내선일체 1940년 1월호 |
논설 |
내선일체와 총후청년의 임무 |
조광 1940년 5월호 |
논설 |
내선일체 완성으로 가는 길 |
녹기 제3권 제1호 |
논설 |
국민정신운동과 우리의 임무 |
조광 1940년 6월호 |
논설 |
현제명 |
싱가포르 함락 감상 |
동양지광 1942년 3월호 |
논설 |
황신덕 |
비상시국과 가정경제 |
삼천리 1938년 8월호 |
논설 |
|
첫댓글 푸른 청춘을 나라에 바친 한이 맺힌 학도병 역사 대작입니다....저는 얘기만 여러차례 들었지만...건성으로 들어서..(죄송)...제가 역사를 잘 몰라서...들어도 금방 잊어 먹고...ㅎㅎ 이번 설에도 큰 형님(전 향우회장 우순공)께서 전국 학도병 생존자가 많이 있다면서....유명한 포항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던데요....생존 학도병의 연합회 모임을 결성하고 있다는 말씀 까지 하시던데.....그래서 연평도 경비라도 좀 맡으시려고 하시던데요..ㅎㅎ
애국자와 매국노를 구분하지 못하고...은근쓸적 지난 역사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듯....역사는 영원히 알수 없는 것이라요....평가 판단 처단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기라요....서술이라도 진솔하게 적어 놓아야 하는데.....
다른데 스크랩해 보였는데..사진이 안보인다해서 다시 좀 합니다. 감사합니다.
몰랐던 현대사 (전쟁) 기록 잘 읽었습니다. 친일파와 학도병 명확히 구분이 되어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