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모두가 좋아하는 본당 신부의 주보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인데,
주일이 겹쳐 기념일이 없음으로 축일표에 나왔지만, 마음으로 성인의 이름을 불러본다.
위의 글과 그림은 며칠 전에 LA에 사는 교우가 "신부님도 성인되셔요,
사막에 성인되기 위해 기도하러 가셨잖아요!" 하면서 카카오톡으로 보내온 것이다.
정말 부족하고 죄많은 나를 저 성덕이 뛰어난 성인과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답장을 보냈지만, 성인이 하신 말씀이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다.
의역하면, "성인들은 처음 시작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가 끝은 다 좋았다."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을 세번 배반했던 베드로,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바오로,
향락과 사치와 쾌락에 빠져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
마니교를 신봉하며 사생아까지 두었던 아우구스티누스,
현세적이며 명성욕에 빠졌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로욜라의 이냐시오 등등
모두가 주님을 제대로 모르고 영적으로 철들지 못했을 때에는
한마디로 엉망징창, 좌충우돌, 대소변을 못가렸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제대로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영접한 뒤에는
180도 완전히 다른 삶으로 변했음을 안다.
이러한 것들이 부족하고 죄많으며, 연약하고 변덕스러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는지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그들도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니
나도 그들처럼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1786~1859)은 집이 너무 가난했고,
신심깊고 성실하며 애덕이 깊은 부모 아래 영향을 받아 일찍이 기도 생활에 맛을 드렸고,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졌지만 경제가 바쳐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기도가 에쿨리 마을의 바레이 사제를 통해 관철되어 그 길을 걸어가지만,
벨리오르 소신학교에서의 성적이 이해력은 있었으나 기억력이 매우 부족해
몇 번이고 퇴학당할 뻔 하였다.
하지만 그의 두터운 신앙심과 품행의 단정함이 전 학우들의 모범이 되어
겨우 신학부에 진급하고 사제서품을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은사인 바레이 사제에게 맡겨졌지만,
판단력과 분별력이 필요한 고해 성사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은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난 뒤에야 주어지도록 되었던 것이다.
같은 사제인데, 고해성사권이 없는 사제라는 불명예와 무시를 어떻게 신앙으로 극복했겠는지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는 진정으로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과 더불어 모든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학문적으로도 노력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은총과 은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기도하고 고행하면서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에 맡겼던 것이다.
그는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부임해서 주일 미사도 판공성사도 보지 않고,
주일날 일하며 세상 쾌락만을 쫓는 본당 신자들을 하느님께 오롯이 맡기고,
본인은 열심한 기도와 고행으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은사로부터 배운 속죄 생활이 몸에 배여서
끊임없이 단식하고 감자 하나만으로 식사를 떼우고,
겨울에도 딱딱한 침대에 담요 한벌로 버티며,
돈이 생기면 성당 장식이나 빈민에 대한 자선으로 일관하는 삶을 산다.
그리하여 이러한 죄인들의 회개를 지향하는 희생적 삶이 널리 퍼져
그를 방문하고 면담하며 고해성사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오게 된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는 열심한 기도와 고행을 통해 많은 은사를 받게 되는데,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는 은혜를 받아 그들이 말하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해서 말하게 하였다.
그는 장시간 하루 평균 15시간, 17시간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일년에 그가 고해성사를 준 사람은 2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악마의 유혹과 공격을 받았으며,
그를 모함하고 악평하는 황당한 투서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평상심을 잃지 않았고,
매일 솔직하고 유효한 설교를 충실히 하여 불신자들도 회개하고
그를 조소하던 자들도 그의 성덕에 감동되어 신덕이 깊어졌다.
그는 이렇게 부단한 기도와 고행과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기를 41년간,
1859년 7월 29일 17시간이나 고해 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면서
"나는 이제 그만이다!" 하고 외치고는 과로로 쓰러져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노자성체를 영하고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고는 5일 후에 눈을 감는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가 공부가 부족하고 분별력이 없어
사제가 되었어도 고해성사권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그 시련의 시간을 얼마나 잘 준비했으면
결국에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 고해성사를 가장 잘 주는 사제가
되었는지를 깊이 묵상할 일이다.
실패와 시련과 부족함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은총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어린 시절 그렇게 사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말대로 사제가 하느님을 대리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니
인간 사제가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제직 수행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것을 말했다.
복음에 첫째가 말째가 되고, 말째가 첫째가 된다는 예수님 말씀이 있고,
욥기 8장 7절에 "자네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라는 말씀도 있지만
성인들의 삶은 다 하느님안에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성소라는 것은 자신이 있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유 의지의 협력관계처럼
죽는 순간까지 관속에 들어갈 때 까지 아무도 살아주지도 않는
자신의 성소를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고 잘 관리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순간 순간 하느님의 은총의 도우심을 구할 때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 사제 운동의 창시자 스테판 곱비 신부님께서
"왜 저를 이 길에 불렀습니까?" 하고 성모님께 여쭈었을 때에
성모님께서는 "네가 성소받기에 부족하고 부당한 자이기 때문에 불렀노라."고 답변하셨다고 한다.
우리 중에 성소받기에, 감히 주님의 사제되고 봉헌된 삶을 살기에 적합한 자가 어디있는가?
주님 대전에 너무나 부족한 나는 지금도 사제, 봉헌된 수도자, 피정 지도자 같은 명칭이
나에게 따라오면 솔직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주님 대전에 성서적 표현을 빌어 표현한다면 벌레, 구더기 만도 못한 죄인이
감히 하느님 운운 하며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염치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 이 길을 들어섰고, 이제 성령 체험 이후 영적으로 철이 조금 들어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제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가 좋아 프랑스를 갔을 때
파리에서 리옹으로, 그리고 리옹에서 아르스까지 택시를 타고 힘겹게
두번이나 성지 순례를 했다.
성인이 쓰던 침대와 가난하고 소박한 방과 부엌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데,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르스의 본당에는 지금도 수단에 중백의를 입은 사제가 성인의 모범을 따라
순례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려고 온종일 고해소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고해성사 보는 이는 하나도 없으니 성인의 정신이 어디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지
프랑스의 교회를 걱정하며 발길을 돌린 기억이 난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여!
저희 모든 사제들이 당신처럼 주님만을 사랑하게 빌어주시고,
이 시대 가톨릭 교회를 지켜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