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
2. |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
3. |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
4. |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시21:2, 요5:14, 시145:19 |
5. |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6. |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
7. |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
8. |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
9. |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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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잠언 20장 전문
○ 의인이 가져야 할 행실
1.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2. |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
3. |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
4. |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찌라도 얻지 못하리라 |
5. |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찌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잠18:4 |
6. |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눅18:8 |
7. |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
8. |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잠16:10 |
9. |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
10. |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
11. |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마7:16 |
12. |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
13. |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
○ 속히 잡은 산업에 대한 교훈 | |
14. |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
15. |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
16. |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찌니라 |
17. |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
18. |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찌니라 눅14:31 |
19. |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찌니라 |
20. |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잠28:20 |
21. |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
22. |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
23. |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잠20:10 |
24. |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16:9, 렘10:23 |
25. |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
26. |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 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 |
27. |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
28. |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
29. |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
30. |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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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①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 : 대한민국의 국보
지정번호 국보 2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 공원
제작시기 조선시대(1467(세조 13) 원각사탑 준공)
1962년 12월 20일 지정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 공원에 있는 조선 시기의 석탑이다.
국보 제 2호이며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3층의 기단(基壇)과 10층의 탑신(塔身)으로 되어 있고 인물과 화초 무늬 따위가 양각되어 있는 것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 공원 안에 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2000년에는 표면 훼손이 심각해 유리 보호각을 씌워 놓은 상태다.
(두산백과사전.2009)
②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 [요약] 중앙탑이라고도 한다.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7층석탑.
지정번호 국보 제6호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시대 통일신라
크기 높이 14.5m
종류 석탑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국보 제6호. 통일신라시대.
[본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14.5m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탑이다.
기단은 각부를 여러 개의 석재로 쌓았으며 상·하층 기단 모두 면석에 탱주(撑柱) 4주(柱)씩을 세웠다.
탑신부 역시 각부를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했으며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들었다.
상륜은 노반을 2중으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 복발(覆鉢)·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세부 수법에 있어서 약식(略式)과 섬약한 경향이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도 높이에 비해 너비의 비례가 적어 지나치게 고준(高峻)한 느낌이다.
1917년 보수시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 장치가 나왔는데 6층 몸돌에서는 경감(鏡鑑) 2매, 칠합(漆盒) 1개, 은제사리병(銀製舍利甁)과 그 안에 들었던 유리제 사리병 각 1개씩이 발견되었고, 기단에서는 청동제 유대합(有臺盒) 1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 경감은 고려시대의 거울로서 창건 이후 두 번째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탑은 한국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하여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전설에는 785년경, 즉 신라 원성왕대에 세워진 것이라고 전한다.
(두산백과사전)
③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처형(1955) : 박헌영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서 고문을 받다 1955년 12월 20일 처형됐다.
박헌영은 1919년 3월에 당시의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를 졸업하고, 1920년 9월에 일본 동경을 거쳐 곧바로 중국 상해로 망명, 그곳의 기독교청년회(YMCA) 강습소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 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공부의 첫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1921년에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쯤 후에 사회주작 차 귀국하다가 당시 중국의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의 연구소에서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일금 1백 원의 자금을 받아 공의 법원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복역했다.
1924년 1월에 출옥,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으나,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쫓겨났다.
사회주의에 대한 박헌영의 이론적 정리는 1926년 4월 26일 신의주 형무소에서 쓴 '공산주의' 라는 제목의 문건에 나타난다.
이 문건은 그가 양면 괘지에 잉크로 쓴 27쪽의 소논문인데, 형무소 당국이 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표현자체가 설교식 어조로 돼있다.
해방 후 박헌영은 공산당을 재건, 대구폭동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 등 커다란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
핵심공산당 간부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으로 검거가 임박하자, 박헌영은 1946년 9월 5일 동료들과 함께 관속에 누운 채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해 북한으로 탈출한다.
북한에서는 남조선 노동당을 지도하며 외상 겸 부수상이라는 요직에까지 오르지만, 남쪽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으로 체포되어 처형에까지 이른다.
④ 우리나라 광원 서독 첫 진출(1963) : 1963년 오늘 !
서독으로 진출하는 광원 250여명이 결단식을 치렀습니다.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뽑힌 젊은 광원들은 서독의 채탄 기술을 배워 돌아올 것을 다짐했습니다.
1960년대에 서독으로 진출한 많은 수의 광원들은 발전된 기술을 배우고 외화을 벌어들이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⑤ 미국, 파나마 침공(1989) : 12월 20일 미국은 파나마의 군부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체포하기 위해 파나마를 침공했다.
파나마는 중남미의 좌익세력을 막는 미국의 전초기지이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파나마 운하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1968년 이후 파나마의 정보책임자로서 활동하던 노리에가는 미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미국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있던 조지 부시와도 협력관계에 있었으나 그가 파나마를 마약조직의 중간 거점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과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노리에가가 미국의 첨단기술과 첩보를 공산권에 팔아넘겼다는 증거가 드러난 데 이어 파나마 운하조약에 따른 조차 지대의 반환에 즈음하여 최고조에 달했다.
결국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저스트 코즈'(Just Cause)라고 명명된 이 작전을 통해 미국은 노리에가의 체포라는 군사적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소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미국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비난의 소리도 높았다.
⑥ 미국 DC-3 여객기 첫 운항(1935) : 1935년 오늘 !
미국의 한 공항에서 20여명의 승객이 첫 운항에 나서는 DC-3 여객기에 오릅니다.
DC-3기는 시속 3백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민영 여객기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중에는 군용기로 개조돼 군수송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DC-3기는 조종과 정비가 쉽고 짧은 활주로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해 1945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세계 여객기의 주요 기종이었습니다.
⑦ 유대인 학살 전범재판(1963) : 1963년 오늘 서독 프랑크푸르트의 한 법정 !
2차 세계대전동안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가담했던 22명의 나치 전범들이 차례로 법정에 출두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이들 모두에게 사형과 종신형등 중형이 선고됐습니다.
⑧ 종신 복역수, 64년만에 석방(1963) : 미국 시카고 교외에 있는 한 교도소 !
1963년 오늘 64년동안 복역 해온 한 노인이 풀려납니다.
84살의 리차드 호넥!
호넥 노인은 20살때인 1899년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던중 모범수로 인정받아 풀려나게 됐습니다.
⑨ 히스 영국총리 합창 지휘(1970) : 1970년 오늘!
에드워드 히스 영국총리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캐롤 합창을 지휘합니다.
합창단원들의 캐롤이 교회당에 아름답게 울려퍼집니다.
복잡한 국정을 잠시 잊은 채 음악에 취해 있는 히스 총리!
히스 총리는 1943년부터 27년동안이나 주말마다 교회에서 합창을 지휘해온 노련한 음악갑니다.
1950년 보수당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에도 히스는 성가대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⑩ 북아일랜드 종교 갈등 격화(1971) : 1971년 오늘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거리가 공포에 휩싸입니다.
건물들은 부서지고 화염과 연기가 거리 곳곳에서 피어오릅니다.
1921년 영연방의 일원으로 자치정부를 수립한 북아일랜드는 기독교 신교도와 구교도의 갈등으로 혼란이 계속돼왔습니다.
다수를 차지하는 신교도가 구교도에 차별정책을 실시하자 구교도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1971년 8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구교도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자 구교도의 비밀결사대인 IRA 즉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무력으로 저항했습니다.
⑪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결성(1960) : 12월 20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atinal Liberation Front/NLF)이 결성되어 비(非)공산주의자인 구엔 후 토가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미국을 패배시킨 주역은 농민군에 가까운 게릴라 집단이었고, 그 상부조직은 NLF였다.
NLF의 군사조직인 베트콩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1955~75) 줄기차게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베트콩의 병력은 주로 남베트남에서 충원했으나 무기, 행동지침, 보급품 등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았다.
NLF의 결성으로 남베트남 공산주의 계열이 공고히 결속되자 미국은 고 딘 디엠 정권을 돕기 위해 병력을 증강했는데, 1967년에는 38만 9,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전쟁을 일으켰으나, 생경한 게릴라전에 따른 피해와 남의 나라의 내전에 개입했다는 도덕적 정당성의 결여에 따른 국론 분열로 곤경에 몰린 끝에 1973년 휴전협정 조인 후 철수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과 NLF의 총공세 앞에 남베트남 정권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⑫ 동서독 첫 이산가족 상봉(1963) : 매서운 바람. 회색빛 콘크리트 벽은 차갑고도 높았다.
코트 깃을 올려 세운 수많은 인파. 그들이 내뿜는 입김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가족을 만난다는 희망의 풍선처럼.
1963년 12월 20일 독일 베를린.
동서를 갈라놓은 장벽의 유일한 통로, 브란덴부르크 문. 4000여 명의 서독 주민이 경계선을 넘어 동독으로 들어섰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지 2년 여. 동서독 정부가 허가한 최초의 공식 방문이었다.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게 피붙이의 정. 벽 하나에 막혀 만나질 못했으니 애절함은 더했다.
부둥켜안은 어머니와 아들, 가족과 친구. 터져 나온 환호는 감격이 되고 이내 곧 눈물로 흘렀다.
두 번 다신 놓치지 않으리라.
기쁨은 찰나. 현실이 끼어들었다.
확성기의 거북한 인사가 허공을 갈랐다.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동독) 수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인사는 애교였다.
대대적인 프로파간다가 펼쳐졌다.
선전 책자가 주어지고 친절한 장벽 안내가 이어졌다.
제국 자본주의자들을 막는 방패 인민을 보호하는 고마운 존재라고 했다.
제대로 정을 나눌 새나 있었나.
황망하게 서독으로 돌아온 주민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서독 우파가 준비한 2라운드가 시작됐다.
동독 체제선전의 수단 분단을 고착시키려는 정치적 이용물. TV와 신문은 연일 몰아쳤다.
히스토리닷컴은 회상한다.
방문객은 냉전이 얼마나 삶의 내밀한 부분과 인간의 감정까지 관여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베를린장벽은 미소 냉전시대의 상징이었다. 피와 눈물과 이념을 먹고 자랐다.
월담하던 1000여 명의 동독 주민이 사살됐다.
1989년 장벽의 철거는 냉전 시대의 종말, 즉 소련의 붕괴 이후에야 가능했다.
장벽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일부 남겼을 뿐 아니라 최근엔 좀 더 확장해 재건했다.
관광코스로 인기란다.
브란덴부르크 문 위의 조각상 니케(빅토리)는 누구를 위한 승리의 여신이었던가.
벽 안엔 또 다른 벽(Another brick in the wall․핑크플로이드 곡)이 있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2006)
⑬ 미국 제조업의 탄생(1790) : 12월20일,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강가에 설치된 거대한 수차를 타고 회전축이 빠르게 돌아갔다.
동력을 탄 방적기에서 쉴 새 없이 실이 감겨나오는 광경을 본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미국 최초의 방적공장이 가동된 순간이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공장주 모제스 브라운의 편지를 받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듬해 연방 의회에 ‘1년이면 미국 전체의 수요를 채울 수 있는 섬유공장과 기계들이 곳곳에 설치될 수 있다’는 ‘미국 제조업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방적공장은 미국 북동부 지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유속이 빠른 강이 많다는 지리적 장점 덕이다.
첫 공장이 세워진 지 30년 후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섬유산업국으로 떠올랐다.
미국 제조업이 빠른 시일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완벽한 제조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 영국 더비셔 출신 기술자인 21세 청년 새뮤얼 슬레이터가 섬유기계와 기술자 해외유출 금지를 위반, 직업을 농부라고 속인 후 미국에 들어와 정착한 덕분이다.
기술자를 알아본 자본주 브라운(미국 브라운대학교 설립자 존 브라운의 동생)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년 만에 최신형 공장을 만들어낸 슬레이터는 사망(67세ㆍ1835년) 당시 13개 공장을 운영했다.
120만달러(요즘 가치 2억5,300만달러ㆍ비숙련공 임금상승률로 환산)라는 유산도 남겼다.
슬레이터는 돈보다 더한 명예도 얻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1833년 뉴잉글랜드 공장지대를 순시하면서 그의 공장을 방문, ‘미국 제조업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내렸다.
반면 영국에서는 ‘죽일 놈’이다. ‘슬레이터, 영웅인가, 반역자인가’라는 책자와 영상물을 만들어 도둑질당한 과거를 곱씹고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2007.서경.한국아이닷컴)
⑭ 마카오 442년 만에 반환 : 1999년 오늘 새벽, 마카오에서 포르투갈 국기가 내려지고 중화인민공화국 오성홍기(五星紅旗)가 게양됐다.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삼파이우 포르투갈 대통령과 악수한다.
마카오가 1557년 포르투갈에 영구조차된 지 442년 만에 식민지 역사를 접고 중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된 마카오는 홍콩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결합된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원칙에 따라 중국 정부가 행사하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50년 동안 자치권을 누리게 됐다.
*******1999년 12월20일 0시, 수많은 폭죽이 마카오의 밤 하늘을 수놓았다.
4개 섬으로 이뤄진 마카오 전역에서는 포르투갈 국기가 내려지고 대신 오성홍기가 올라갔다.
유럽인이 중국에 건설한 최초의 침략기지이자 마지막 식민지가 뉴 밀레니엄의 목전에서 제자리을 찾은 것이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발을 들인 시기는 1553년.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로 들어와 1557년에는 명(明)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거주권을 따냈다.
명ㆍ청조의 묵인 아래 유럽 문물 유입통로 구실을 해온 마카오는 1887년 청ㆍ포르투갈 조약에 따라 포루투갈의 정식 식민지로 떨어져나갔다.
무려 446년 만에 중국 영토로 되돌아온 마카오는 반환을 전환점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13.1%. 2007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미화 3만6,357달러에 이른다.
경쟁 상대인 홍콩도 제쳤다.
성장 비결은 중국의 고성장. 마카오를 찾는 관광객의 70%가 중국 본토에서 온다.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1국2체제’를 2044년까지 유지한다는 중국의 약속도 마카오의 자본주의를 살찌우고 있다. 중국에 넘어간 후 치안이 확보되고 40년간 독점체제였던 카지노 산업에 경쟁이 도입되며 라스베이거스까지 넘어섰다.
국내총생산의 절반, 국가 재정수입의 73%를 차지하는 카지노 산업으로 발전가도를 달리는 마카오에도 고민이 있다.
세계경제 불안 탓이다.
중국경제권으로의 편입을 회피했던 과거와 달리 오히려 위안화 경제권에 의존하려는 분위기다.
보다 큰 문제는 미래 불안.
젊은이들이 15년간 의무교육이 끝나면 바로 서비스업에 진출해 단 하나뿐인 대학이 2년째 미달사태를 맞고 있다.
마카오의 도박산업은 부를 지속적으로 창출해나갈 수 있을까.
주목된다.
(권홍우 편집위원.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
⑮ 줄피카르 부토 대통령 취임(1971) : 부토 가문은 ‘파키스탄의 케네디가(家)’로 불린다.
케네디가가 그랬듯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정치를 가업(家業)으로 이뤘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아버지와 두 남동생이 사형이나 의문사를 당하며 비극적인 퇴장을 한 점도 케네디 가문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부토 전 총리의 할아버지 샤나와즈 부토는 신드 주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이자 ‘신드인민당’을 창당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부토 가문을 파키스탄 정계의 한가운데 우뚝 세워놓은 사람은 그의 셋째 아들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1928∼1979)다.
줄피카르는 미국 버클리대에서 정치학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57년 최연소 유엔 주재 파키스탄 대표를 시작으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해 최연소 에너지장관과 외교장관을 지냈다.
1967년에는 파키스탄인민당(PPP)을 창당해 독자적인 정치 활동을 개시했다.
부농의 아들이었지만 줄피카르는 버클리대 유학 시절 심취했던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연설문엔 “이슬람은 우리의 신념, 민주주의는 우리의 정책, 사회주의는 우리의 경제”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했다.
창당한 지 4년 만인 1971년 12월 20일 줄피카르는 13년간의 군정(軍政)에 마침표를 찍고 민간인 출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가며 6년간 파키스탄을 통치했지만 1977년 대규모 선거 부정으로 민심을 잃으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줄피카르는 자신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의 쿠데타로 물러나고, 정적(政敵)의 살해를 사주한 혐의로 기소돼 1979년 4월 4일 교수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줄피카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산업의 국유화 정책으로 파키스탄 경제를 망쳤고, 동파키스탄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방글라데시 분리 독립을 자초한 점은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힌다.
반면 군정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의 최대 성과를 꼽자면 무엇보다 ‘두 아들을 제치고 일찌감치 장녀 베나지르를 후계자로 점찍어 세계적인 정치인으로 키워낸 것’일지도 모른다.
베나지르는 옥스퍼드대 유학 후 귀국하자마자 아버지의 몰락으로 수년간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가 창당한 PPP당을 지켜냈고 1988년 35세의 나이에 이슬람 국가의 첫 여성 총리가 됐다.
그는 두 차례 총리에 취임하고 두 번 모두 부정부패 혐의로 실각했으나 8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10월 귀국한 이후 여전히 높은 정치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버지만큼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베나지르가 내년 1월 8일 총선에서 비자금 의혹을 딛고 부토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지 주목된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2007)
⑯ 아폴로 계획 종결(1972) : 인간에게 우주의 새 지평을 열어준 미국의 「아폴로」유인 달 탐험계획의 6번째이자 마지막 주자인 「아폴로」17호가 12월20일 새벽 3백여 시간의 달 여행을 마치고 귀환. 금세기내의 인간의 달 여행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⑰ 필리핀 도나파즈號침몰(1987) : 1987년 크리스마스를 5일 앞둔 밤.
필리핀 마닐라 남쪽 150km 해상을 지나가는 여객선 ‘도나파즈’ 안은 고요했다.
다음 날 새벽 마닐라에 내려야 하는 승객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선장이 지휘하는 방인 선교에는 선원 한 명만이 남아 계기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장은 다른 선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머지 선원들도 선실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파도는 높았지만 날씨는 맑아 항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마닐라 도착을 5시간 30분 남겨둔 오후 10시 반 도나파즈의 평화는 끔직한 재앙으로 바뀌었다.
8800배럴의 가솔린을 싣고 가던 유조선 벡터호와 충돌한 것. 충돌 직후 벡터호의 가솔린에 붙은 불은 곧바로 도나파즈로 옮겨 붙었다.
충돌에 따른 폭발음과 연기에 눈을 뜬 승객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불을 피해 바다로 뛰어들려 해도 벡터호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바다는 이미 불로 뒤덮여 있는 데다 상어까지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 10명과 함께 탑승했다 3km를 헤엄쳐 극적으로 구조된 한 생존자는 “바닷물을 마실 때마다 가솔린 냄새가 났다”며 “대부분 승객이 아이들을 남겨두고 탈출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충돌 2시간 만에 도나파즈는 승객들을 태운 채 물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그로부터 2시간 뒤 유조선 벡터호도 침몰했다.
필리핀 해안 당국은 사고 발생 8시간 만에 사고 사실을 알았고 구조작업은 그로부터 8시간이 더 지난 뒤에 시작됐다.
이 때문에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극적으로 구조된 승객과 선원 26명은 때마침 사고 해역을 지나가던 일반 선박에 의해 구조됐다.
사고 다음 날 도나파즈의 소유사는 사고 당시 여객선에는 승객 1493명과 선원 60명이 타고 있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복도에서 잠을 잔 승객이 많았다며 사고 당시 4000명 이상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실제 사고 5일 후 신원이 확인된 21명의 사망자 중 단 한 명만이 발표된 탑승자 명단에 있었고 탑승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2000명 이상의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사고 12년 후 필리핀 대법원은 도나파즈가 400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우고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도나파즈 침몰 사고 이전까지 최악의 해상 사고는 1503명이 숨진 1912년의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였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2008)
⑱ PLO, 레바논 트리폴리 철수(1983) : 1983년 오늘 !
PLO 즉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대원 4천여명이 레바논 북부 트리폴리항에서 철수를 단행합니다.
아라파트 PLO의장을 비롯한 PLO 대원들의 레바논 철수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중부 산악지대에서 철수를 완료함에따라 이뤄지게 됐습니다.
PLO의 레바논 철수는 지난 1982년 이스라엘군의 압력을 받아 만여명의 PLO군이 철수한 이래 두번째입니다.
아라파트 추종세력의 이번 철수는 PLO내 아라파트 반대세력의 압력으로 가속화됐습니다.
아라파트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투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날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⑲ 기타 오늘의 역사 ⑳
1550(조선 명종 5) 황해감사 주세붕, 수양서원 창건
1803 미국, 프랑스로부터 획득한 루이지애나주 공식 접수
1830 열강들, 벨기에 독립승인
1848 루이 나폴레옹,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880 개화추진 위해 통리기무아문 설치
1894 손문, 하와이서 흥중회 창립
1905 일본,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관제 공포
1911 협성신학교 1회 졸업식
1916 미국 월스천문대의 100인치 대망원경 완성
1916 윌슨 미국 대통령, 강화각서 발표
1917 광복단 총사령 박상진 체포
1930 중국, 치외법권을 철폐
1933 전주 지역에 진도 3의 지진 발생
1942 노기남 신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주 교 서품
1945 합동통신 창립
1949 검찰청법 공포
1956 한미우호통상조약 조인
1961 UN총회, 대기권 평화적 이용안 가결
1964 월남군부쿠데타(구엔 칸 최고사령관 주동), 최고회의 해체
1965 섬진강댐 준공(한국 첫 다목적댐 완공)
1967 서울 시청 앞 지하도 완공
1969 동서독, 18년만에 재화재개
1971 파키스탄 대통령에 부토 취임
1974 문세광 사형집행
1977 이란에 대지진, 800여명 사망
1978 제8회 아시안 게임 폐막, 한국3위
1979 계엄보통군법회의, 김재규에 내란죄를 적용해 사형 선고
1980 국내 최초 프로축구팀 할렐루야 창단
1980 조자양(趙紫陽) 중국수상 평양 방문
1981 폴란드, 계엄하 유혈사태로 2백 명 사망
1982 터키 에브렌 대통령 내한
1982 1천만 이산가족 재회추진위원회 발족
1982 터키 에브렌 대통령 내한
1983 유전자공학육성법 제정
1983 코모로 북한과 단교
1983 PLO 아라파트파 4천명 레바논 철수
1987 필리핀 근해서 여객선 도나 파즈호 유조선과 충돌. 1천7백49 명 사망
1989 국방부, FX기종 FA18기 확정
1989 남북고위당국자회담 제5차 예비회담 개막
1990 소련 셰바르드나제, 보수강경파의 독재 경고하며 외무장관 사 임
1990 국무회의, 군인복무규율개정안 의결
1991 강원도 태백시 철암 2동 강원탄광갱도서 천장이 붕괴, 광원 4명 사망
1991 필리핀검찰, 전퍼스트레이디 이멜다 마르코스를 9가지 부정혐 의로 기소
1991 강경대군 치사사건 관련 유서대필 혐의로 구속된 강기훈에게 3년 선고
1994 국내 최장 슬치터널(6,128m) 착공 5년만에 관통
1994 해군함정 일본 첫기항
1997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복권 발표
1998 한국,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종합2위(금메달 65, 은
메달 47, 동메달 52)
1999 최병모 특별검사, 옷로비 의혹사건 발표
1999 국내 최초 실용관측위성 '아리랑1호' 발사 성공
1999 한국-미국 범죄인 인도조약 발효
2000 프로야구 6개 구단, 선수협의회 회장단 6명을 방출한다고 발
표
오늘의 인물
① 김영삼(金泳三 ; 1927.12.20 - 1999.12.20현생존) : 정치가. 제14대 대통령.
195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를 졸업.
6․25전쟁 당시 학도의용군. 51년 장택상(張澤相)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
54년 제3대 국회의원 당선을 시초로 제5, 6, 7, 8, 9, 10대 국회의원을 역임. 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재.
90년에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단행하여 결성된 민주자유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고, 1992.12.18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저서에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 <40대 기수론>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 <나와 조국의 진실> 등이 있다.
② 조광조(趙光祖 ; 1482.8.12 - 1519.12.20) : 조선 중종 때 젊은 학자를 중요한 벼슬에 앉혀 아름답고 좋은 사회 풍습을 기르기 위해 미신을 타파하는 등, 과격한 정책을 쓰던 조광조가 반대파인 남곤 등의 모함에 의해 1519년 오늘 귀양지에서 독살되고, 조광조를 따르던 많은 학자들이 처형됐다.
③ 변영만(卞榮晩 ; 1889.5.5 - 1954.12.20) : 법률가․학자.
자는 곡명(穀明).
호는 삼청(三淸).
경기도 출생.
1906년 법관양성소를 졸업.
변호사․판사를 역임.
한일 합방 후 중국에 망명.
귀국하여 학문에 정진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국학(國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로는 <단재전(丹齋傳)> 등이 있다.
④ 박영희(朴英熙 ; 1901.12.20 ~ ? ) : 박영희는 일제 치하에서 진보적 문학예술운동단체인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을 이끈 대표적 이론가이다.
1921년 그는 <장미촌>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2년에는 박종화․나도향․이상화․현진건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듬해 김기진과 함께 낭만적․퇴폐적 문학을 비판하며 <백조>의 해체를 주도했다.
이어 그는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 등의 주장을 내세운 파스큘라를 조직했다.
파스큘라가 염군사와 통합되어 KAPF로 바뀐 후에는 KAPF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김기진을 상대로 KAPF 내부에서 일어난 최초의 문학논쟁인 '내용․형식 논쟁'을 벌였고 초기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 소설인 <전투>, <사냥개>, <지옥순례> 등을 썼다.
저서로는 《회월시초(懷月詩抄)》, 《문학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그러나 임화를 비롯한 소장파들이 KAPF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순수문학에 전념했다.
1934년 전향한 그는 친일문학가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일했으며, 창씨개명과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8․15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6․25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⑤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 1902 - 1968.12.20) : 미국의 소설가.
'에덴의 동쪽'의 저자.
빈민계층과 소수 민족들의 이야기와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글을 주로 써 온 존 스타인벡 !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시절부터 농장일을 거들며 고학으로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했으나 결국 학자금 부족으로 중퇴하고 문학의 꿈을 키워야 했다.
1925년부터 시간당 1달러의 건설노무자로 뉴욕생활을 시작해 '뉴욕 아메리칸'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기자로 활약했으나 객관적인 사실 보도가 아닌 주관적인 기사로 해고당해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문학의 황무지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20년대 후반 영국 해적 헨리 모건을 주인공으로 한 '황금잔'이 그의 처녀작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은 인물에 관심을 가졌고 이민노동자의 비극을 그린 '생쥐와 인간'(1937년)을 출간하자 그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분노의 포도'(1939년) 이후의 대작으로 꼽히는 '에덴의 동쪽'(1952년)은 평론가들로부터 도덕적 혼란을 준다고 비난받았지만 남북전쟁에서부터 제1차 대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에덴동산을 찾아, 미래를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스타인벡은 이후에도 도덕규범의 붕괴로 인한 사회문제를 다룬 '우리들의 불만의 겨울'로 196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퓰리처상을 수상.
1964년에 존슨 대통령에게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⑥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 ; 1887.1.28 ~ 1982.12.20) : 미국 피아니스트 아터 루빈스타인이 95세로 작고했다.
폴란드의 로지에서 태어난 루빈스타인은 50세 때인 1937년 미국에 정착하기까지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쇼팽 이후에 세(勢)를 얻기 시작한 템포 루바토(직역하면 도둑맞은 템포. 음표의 길이에 얽매이지 않고 연주 속도를 임의로 조절하는 기법)가 크게 유행하던 시대에, 루빈스타인은 엄격한 규율과 균형을 풍부한 음량과 결합하며 드뷔시.라벨. 프랑크 등 주로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정교하게 해석했다.
미국에 귀화한 뒤인 1949년에 개최한 연주회 100만 달러 트리오를 통해 루빈스타인은 유럽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둘 다 러시아 출신인 바이얼리니스트 자샤 하이페츠와 첼리스트 그레고어 피아티고르스키가 루빈스타인과 어우러진 이 트리오 연주회는 이 세 대가들 각자의 뛰어난 기교와 그 합주가 이뤄낸 완벽한 조화로 청중의 넋을 빼앗았다.
백만 달러 트리오는 이 연주회의 정식 명칭이 아니라 세 사람이 동시에 전속해 있던 RCA빅터사(社)가 음반을 내며 만든 선전 문구였지만, 그 뒤로 이들 세 연주자가 대중에게 수용되는 코드가 되었다.
피아니스트 아터 루빈스타인보다 음악 팬들에게 더 친숙한 루빈스타인은 러시아 작곡가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일 것이다.
피아노 독주곡 천사의 꿈과 페테르부르크의 야회, 오페라 네로, 가곡 페르시아의 노래 등을 만든 안톤 루빈스타인 역시 빼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 음악에 아카데미즘 전통을 확립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그는 그 나라 최초의 조직적 음악 교육기관인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을 세워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고종석,2002).
⑦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 ; 1795.12.20 - 1886) : 독일의 역사학자.
19세기 전반에 활약하였다.
사료의 엄밀한 점검, 온건․ 중정(中正)의 견해, 예술적 서술을 특징으로 하는 랑케 학파를 낳게 하였다.
<독일 종교 개혁사> <세계사> 등 저술이 많다.
⑧ 월터 시드니 애덤스(Walter Sydney Adams 1876.12.20 ~ 1956.5.11) : 미국의 천문학자.
애덤스가 천문학사에 남긴 업적은 분광시차의 발견과 백색왜성의 확인이다.
분광시차란 항성의 스펙트럼과 광도의 관계를 이용해 추산하는 항성의 거리다.
항성의 거리를 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삼각시차이지만, 이것은 가까운 거리의 항성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
반면에 스펙트럼선의 절대등급효과를 이용해 절대등급과 실시등급(겉보기 등급)의 차이로 구하는 항성 거리(분광시차)는 아주 먼 항성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
백색왜성은 항성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청백색 별이다.'
애덤스는 스펙트럼선을 면밀히 관찰해 큰개자리 시리우스의 동반성(同伴星)이 백색왜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물의 13만 배, 철의 1만6천 배라는 고밀도 물질로 이뤄진 시리우스 동반성은 처음으로 발견된 백색 왜성이다.
애덤스의 이런 업적들은 그가 시카고 대학의 스승 조지 엘러리 헤일을 따라 최고의 천문대에서 일하며 최고의 망원경을 사용할 수 있었던 덕분에 이뤄졌다.
애덤스는 1901년부터 헤일이 대장으로 있던 위스콘신주 윌리엄스베이의 여키스 천문대에서 일하다가 1905년 다시 스승을 따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 북동쪽에 자리잡은 윌슨산 천문대로 일터를 옮겼다.
시카고 대학에 딸린 여키스 천문대도 당시로서는 최대였던 지름 102cm의 굴절망원경을 갖추고 있었지만, 헤일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카네기 재단을 설득해 세운 윌슨산 천문대는 그보다 더 큰 지름 152cm의 반사망원경과 지름 254cm의 탑망원경을 갖추었다.
이 두 대의 망원경은 그 뒤 수십 년 간 세계 최대를 자랑하며 천체 관측에 크게 이바지했는데, 애덤스는 스승의 뒤를 이어 1923년부터 1946년까지 이 천문대의 2대 대장을 지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고종석,2003).
⇨5월 11일.
⑨ 기타 오늘의 인물
0069 제8대 로마제국 황제 비텔리우스 암살
1480 하인리히 출생.카르투지오수도회 회원.마리아의 열렬한 숭배 자로 유명했다.그녀의 로자리오에 대한 숭배를 아주 널리 소 개했다.
1558 브룬너 종교개혁자.그는 사람들의 도덕생활과 종교 생활의 개 선에 대단히 크게 기여했다.
1626 세켄도르프 출생.독일 루터파 정치가이며 학자.
1704 아이젠멩거 사망.독일의 동양학자.
1700년 [Entdecktes Judenthum]을 출판하였다.
1822 그린 출생.영국 침례교인.그는 스텝니대학에서 교육을 받았 고,맨체스터 존 라일란드 도서관의 이사와 영국 해외 성
지냈다.
1830 푸르티에 출생.프랑스 출신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조선교 구부주교,순교자.한국성은 신.충청도 베론신학당(성요셉신 학교)의 교장,
1847 머벨 출생.자유 침례교 목사.신학적 입장에 있어서는 [생명 력있는 기독교인 경건심의 기초에 위에 모든 활동적인 기 독교인들의 친교]를 주장했다.
1863 토리 출생.회중교회 학자.그는 1900-01년에 팔레스타인의 미 국 동방탐사학회의 초대 회장을 지냄.
1865 작가 엘시 데 윌페 출생
1868 실업가 하베이 파이어스톤 출생
1895 철학자 수잔 랭거 출생
1901 핵물리학자 로버트 반 데 그라프 출생
1922 영화감독 조지 로이힐 출생
1976 고물카 폴란드 전 수상 사망
1980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 별세
1973 블랑코 스페인 수상 피살 ⑩⑪⑫⑬⑭⑮
오늘의 샘터
① 박영희의 말 :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