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 참여
자금의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온통 정치에 대한 관심과 몸살로 사회가 들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새로운 잇슈로 대두되고 있다.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의견은 너무도 분분하다.
교회가 사회에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정치를 움직이는 것이 소금과 빛된 의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세속 정치에 교회가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지 않으며 교회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쪽의 주장은 나름 대로의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주장하면서 그 의견을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양쪽의 주장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가.
먼저 우리는 이 양쪽 의견에 대한 칼빈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옳으리라 생각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러한 정치적 두 입장에 대해, 아주 균형 잡힌 의견을 제시한다.
먼저 칼빈은 교회가 정치 세력화 되는 것에 대한 칼빈의 주장을 보자
그는 교회가 세속 정치를 움직이기 위해서 정치 세력화 하려는 것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정치 세력화는 중세 로마 가톨릭이 보여주었던 교훈처럼 반드시 타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가 권력의 맛을 보면 그 부폐는 막을 수없는 상황이 된다.
즉 권력화 된 교회는 자동적으로 부폐한 교회를 지적하는 올바른 신앙을 탄압하는데 권력을 사용하며, 그 권력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사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마 가톨릭이었고, 또 영국 국교회였다.
다음으로 교회가 세속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정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오로지 종교적 영역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에 대한 칼빈의 주장도 단오하다.
칼빈은 두 '통치'(교회와 국가)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는 관계라고 본다.
이에 대한 칼빈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이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국가 통치의 본질이 완전히 부패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해선는 안 된다. 이것이바로 아무 데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 방종한 상태를 즐기는 '특정한 광신자들'이 외치고 떠드는 것이다."(기독교강요 4권 제20장 2절)
다시 말해서 칼빈은 정교가 분리되었으니 세속의 정치는 교회가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하며,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는 생각은 성과 속을 나누길 좋아하는 '특정한 광신자들'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정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옳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정교 분리가 아니라, 정교 구분이라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께서 종교적인 영역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외이 모든 영역도 창조하시고 본존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고로 교회는 정치의 영역에 있어서 직접적인 권력 추구를 지양할 뿐만 아니라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이승구 교수의 지적처럼 '교회는 정치 발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교회는 정치와 종교의 구분됨을 잘 인식해서 정치에 관심을 갖되 직접적인 정치 기구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정치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정치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낸시 피어시의 말처럼 "하나님은 친히 구원의 일 뿐만 아니라 창조의 세계를 보존하시고 유지하시는 일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관점으로 말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 극단적으로 보이는 주장 속에서 교회가 정치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 첫째는 교회의 영적 각성과 도덕성의 회복이다.
왜 이것이 세속 정치를 개혁하는 첫 번째 조건이 되는가?
그 이유는 세상의 정치를 개혁하는 주체는 정치가들이 아니라 정치가를 뽑아주는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변하기 전에는 구태의연하고 부정과 부패로 가득한 정치는 결코 개혁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유권자들의 도덕성과 바른 의식의 주도를 교회가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정치의 혼란이 야기된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정직하고 올곧은 정치가를 국회에 보내면 국회가 개혁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 분위기 안에서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
뿐만 아니라 국회에 입성한다고 해도 그가 올바른 정치를 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도리어 도덕적이고 의식 있는 정치가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느끼는 것은 절망과 심각한 회의감만 느낄 뿐이다.
왜 그런가?
국민들(유권자들)이 욕심이 많고 너무도 이기적인 나머지 권모술수와 대중선동에 능숙한 소인배 정치가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가 점점 '포퓰리즘'이라는 '대중 선동정치'에 쉽게 휘둘린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말로는 도덕적인 정치가, 의식있는 정치가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선거철만 되면 지연과 학연과 혈연과 비현실적인 공약에만 귀를 기울이고 도무지 자격이 없는 사람을 찍어주곤 한다.
그러므로 정치의 개혁을 위해서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부터 영적으로 각성하고 사회의 도덕성 회복과 성경적인 의식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두 번째로 교회가 정치 개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진리에 헌신된 올바른 정치가들을 배출해 내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교회는 정교 분리가 아니라 '정교 구분'을 원칙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정교 구분의 원칙을 추구하는 방법은 교회가 세속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당리당략이나 정치 생명에 휘둘리지 않고 도덕적 존경을 받는 정치가를 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는 이러한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원리를 이해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이다.
윌버포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영국에서 얼마나 탁월한 정치 개혁을 일궈 낸 사람인지 잘 알 것이다.
그는 영국의 의회에서 '영국의 양심'이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본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영국의 양심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탁월한 도덕성과 정치 의식을 보여준 데에는 기독교 신앙이 절대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본래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기 전에는 유흥과 도박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부폐하고 타락한 부르주아의 대명사였다.
그러던 그가 회심을 하고 난 후에 영국의 흑인 노예들과 영국 사회 약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회심을 통해서 변화된 그는 자신의 변화된 마음과 소명을 느끼면서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Amazing F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로 유명한 작사자 존 뉴턴 목사에 의하여 그 마음을 정치에 헌신하도록 독려를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회심한 심령을 가지고 영국의 의회에 입성한 그는 당리 당략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길(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일관성 있게 정치를 했다.
물론 그의 이런 태도는 당시 영국 정치계 안에서는 도무지 상상 할 수 없는 이단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행보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게 됨으로써 힘을 쓸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많은 시민들과 정치가들의 호응을 받게 된 원인이 중요하다.
윌버포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정치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필자가 첫 번째로 교회가 정치를 개혁하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언급한 것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죠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리를 통해서 영국 안에 강력한 각성과 도덕성 개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각성과 부흥의 역사는 세속 역사가가 영국의 역사를 단시일 안에 뒤바꾸어 놓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렇게 개혁된 국민의 의식이 노예 해방과 약자들의 권리 보호를 호소했던 윌버포스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 됐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정치적 지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 많은 테러와 협박에도 시달려야 했는데, 그 이유는 노예제도를 정당하다고 보는 사람들과 사회적 강자들(권력자들)로부터 미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헌신된 정치가를 배출한 교회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통해서 노예 제도를 개혁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다양한 법이 영국에 시행되도록 하는데 승리했다.
이 승리는 표면적으로 볼 때 윌버포스 한 개인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교회의 승리였고, 하나님의 승리였다.
마지막 세 번째로 교회가 사회에 정치 참여를 하는 방법은 성경적 정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간혹 교회 안에서 비록 '성경적'이라고는 하더라도 정치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하여 일종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속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성경은 분명한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회가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영역은 틀림없이 사단의 영역이 될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적 정치관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단과 이슬람과 타 종교의 놀이터게 되도록 했다.
그 결과 칼빈이 국가의 정치는 교회를 보호하고 옹호하며 자유로운 신앙을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고는 점차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어려운 풍토로 변질되고 있다.
우리는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이 원인을 제공한 것은 기독교의 부패와 타락이 한 몫을 했다.
이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교적인 일에만 성경적으로 생각할 뿐, 정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는 성경과 하나님을 머릿 속에서 제거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정치의 영역을 해석할 때는 하나님과 성경을 적극적으로 부정했던 인본주의 정치이론가들(홉스, 루소, 로크)처럼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심하게는 마르크스나 레닌처럼 청지를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사회계약설의 관점에서 국가와 공권력을 바라보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나 정치란 자기 보존의 필요 때문에 일종의 계약을 맺은 관계이므로 만일 국민들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을 일으키면 기존의 권력과 국가를 무너뜨려서라도 새롭게 계약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공권력도 그런 관점에서 함부로 대하곤 한다.
이런 관점 속에는 불의하든, 의롭든 관계 없이 모든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식은 전혀 없다.
또 공권력은 이 땅에서 악과 폭력을 억제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봉사자라는 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표면적으로 보이는 철학적 방식으로(또는 특정한 사람들의 정치적 안목으로) 이 모든 것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타락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바른 정권을 세우는 것은 혁명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의식이 없다.
이러한 바른 신본주의적 안목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혁명으로 바꾸어낸 정권은 그들이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곤 한다.
이런 차원에서 다윗이라는 한 인물을 묵상해 보자.
그는 사울이라는 불의한 군주와 갈등을 했다.
그는 사울에 의하여 심각할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을 다녀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 앞에서 무엇이라고 고백했는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6)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그의 왕위를 폐하시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다.
다윗의 이런 태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권력 싸움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맛보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정말로 숙고해야 한다.
왜나하면 우리가 만일 다른 모든 영역을 포함하여 정치의 영역을 세속의 영역으로 이분화 시키면서 성경에 의한 생각을 하지 않고 세속적 가르침을 근거로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불신자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스기니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세속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그 영역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생각을 빌려오게 된다면 "도구 하나만 따로 빌려 오는 게 아니라, 각 문제에 대한 그들 나름의 특수한 편견으로 채색된 철학적 도구상자 전체를 빌려 오는 것"이라고 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끊임없이 싱클레어라는 한 신자로 하여금 자기처럼 생각하게 유도하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의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모든 면에서 생각이 달랐다.
데미안은 선과 악을 대립의 관계로 보지 않고 조화의 관계로 보았으며, 이 둘이 서로 동등한 한 몸을 이룬 즉 '아프락사스'와 같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싱클레어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성당과 가정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므로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의 원리로 모든 것을 보고 해석했다.
그러나 데미안의 집요한 유도는 싱클레어의 생각을 데미안으로 끌어오면서 그 간격을 좁힌다.
데미안은 끊임없이 싱클레어로 하여금 자기처럼 생각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데미안의 접근은 싱클레어에게 혼란과 충격을 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종의 매력을 느끼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 전쟁터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 옆에서 죽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둘의 하나됨을 선언한다.
즉 데미안은 지금 죽어가지만 이제 싱클레어가 데미안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데미안이 끊임없이 싱클레어로 하여금 자신처럼 생각하도록 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데미안처럼 생각하든데 익숙해진 싱클레어는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고 또 다른 데미안으로 살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가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 일상의 모든 영역을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교회의 운명은 싱클레어처럼 될 것이다.
성도가 세상처럼 생각하는데 점점 익숙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데미안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오스 기니스가 경고하는 위험성이다.
글쓴이 : 인천) 회복의교회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