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일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가리고 살았던 한국인들이 그나마 이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대두한 식민지근대화 이론이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그 이전에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없었더라도 조선사회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로 발전해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창작해내는 등 일본 통치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이는 기회주의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미리 준비된 결론에 역사를 꿰맞추는 곡학아세의 전형이었다.
1987년 교토대학 나까무라(中村哲) 교수의 제안에 따라 안병직 등 한일연구자 16명이 참가한 한국근대경제사연구회가 생겨나 식민지근대화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안병직은 1980년대 남한 주사파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라는 이론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미국의 착취를 받는 반봉건사회이므로 노동자 계급을 앞세운 정통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반식민지 민족해방혁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초 서울대에서는 김영환 함운경 등을 중심으로 자생 주체사상파들이 생겨나 이후 삼민투 전대협 한총련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목격한 안병직은 식민지근대화 이론으로 급선회, 일본이 침략을 위한 목적이긴 했지만 그것을 계기로 조선사회의 자본주의와 근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식민지근대화 이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는 기존 한국 사학계의 주류였던 수탈이론이나 자본주의 맹아이론에 비하면 한층 진일보한 입장으로서, 일본을 옹호하는 어떠한 이론도 백안시되었던 국내 학문 풍토를 감안하면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수탈이론이란 비록 일제시대에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근대화가 있긴 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수탈을 위해 생겨난 것이고 또한 일제시대에는 엄청난 자원과 인력, 생산물 등의 수탈이 자행되어 조선인의 삶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시대의 많은 통계 자료를 조작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50%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는 둥, 일제시대에 조선 지역 총생산의 80%가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등의 무리한 수치를 만들어낸 뒤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한 반일 책동의 근거가 되었고 이 허무맹랑한 수탈이론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일선 학교에서 교육되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먼저 자금 유출입과 관련, 일제가 패전 때까지 조선에 투여한 자금이 60억 내지 70억 엔인데 비하여 유출된 자금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통계에 의해서만 보더라도 302억 엔이고 물자 유출분 140억 엔을 합하면 440억 엔이 넘어 유입자금의 7배에 이르렀으며, 이렇게 식민지 전 기간의 추정 GDP 550억 엔의 80%이상이 유출 또는 파괴됨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것이다.(정태헌, 1996,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 조세정책을 중심으로』 (서울: 역사비평사), pp. 61.
식민지 근대화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식민지 전 기간 동안의 추정 국내총생산액 550억 엔의 80% 이상이 일제로 유출 내지 파괴되었다고 주장하나, 일제시대 연평균 3.7%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발생했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의 마술 같은 이야기이다. (조석곤,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p. 358.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를 남김없이 착취한다고 했던 맑스도 착취율을 50% 정도로 보았는데, 만약 일제의 착취율이 80% 이상이었다면 조선 사람들 모두는 벌써 굶주려 멸종했을 것이다.(안병직, 「식민지 시대 연구, 단견 버려라」 시사저널 1996. 7. 4
일제시대 초기 토지조사 사업에 대해서도 서울대의 신용하 등은 이 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약 절반 이상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 주인을 확인할 수 없어서 조선총독부 소유가 된 토지는 전체 국토의 4%에 불과했으며, 1920년대 들어 총독부는 본토의 일본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선이주정책을 취하면서 조사사업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를 유무상으로 불하해주었지만 이 또한 전체 토지의 10%를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권태억 등 한국의 주류 학자들은 식민지 시대의 1인당 쌀 소비량이 1910년에는 약 0.71석이었다가 1919년에는 0.62석, 1929년에는 0.44석, 그리고 1944년에는 0.56석으로 감소했다는 통계 수치를 들먹이면서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식량사정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상인등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의 쌀 소비량은 평균 0.58석 수준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했으며 일제시대 후반기에는 오히려 소비량이 약간 증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에게 자신의 판단을 위임하게 마련이므로 역사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어 같은 사실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면서 글을 읽게 되면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1990년대 들어 시작된 식민지근대화 이론은 일제시대에 대한 이전의 평가에서 한 걸음 발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일제시대에 이룩된 산업화라는 것이 당시 한반도에서 가능했던 유일하고도 최선의 발전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이 '서유럽이 장기간의 이행과정에서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를 순전히 외래적인 형태로,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이영훈)고 말한다. 12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p. 95.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근대적 관료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를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교육제도나 재정, 금융제도 및 교통, 통신시설과 같은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조처들은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과정에서 일제가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제는 한국을 비롯하여 자신이 통치하던 식민제국 전부를 함께 동원하고 근대화시키는 발전전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전상인)13Yong Sug Suh, 1991, ?Class and Colonial Path to Modernity in Korea, 1910-1945,? PhD Dissertation, Department of Soci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참조.
식민지 시대 일본은 스스로의 자본주의 발전이 불충분하였고 또한 서구가 지배하는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국적(national) 산업화 전략이 아니라 일본과 인근 식민지들, 특히 조선을 포함하는 지역적(regional) 산업화 전략을 선택하였다. 곧,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방식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모델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도 동시에 해당되는 것이다.(서용석)Yong Sug Suh, 1991, ?Class and Colonial Path to Modernity in Korea, 1910-1945,? PhD Dissertation, Department of Soci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참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보호국이 되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 생각해볼 때, 일본은 당시로선 감당하기 벅찬 러시아와 무리한 전쟁을 수행한 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 경제회복에 투입하는 것인데, 일본은 10억엔의 전비와 40만 이상의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로부터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받지 못한 채 대신 조선과 사할린, 쿠릴열도 등 몇몇 영토를 넘겨받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들 새로운 영토를 잘 활용하여 손해를 만회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이미 대만을 10년 간 통치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저개발 상태의 식민지를 키워 뭔가 빼먹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 통치 첫해인 1896년에만 일본 정부는 정부 예산의 11%라는 막대한 돈을 대만에 쏟아 부어야만 했다. 그 뒤 대만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대만 경영은 계속 적자였고 1905년에 와서야 대만 식민지 정부는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대만 통치 초기 일본은 대만에서 사탕수수 농업을 발전시켜 외화를 얻어내는 데 주력했는데, 1920년대 일본에 쌀이 모자라게 되어 쌀값이 오르자 대만의 농민들은 사탕수수 대신 쌀 농사를 지어 일본에 수출,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농업은 몰락했을 뿐 아니라 대만의 사탕수수 생산량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대만의 쌀 생산을 줄이고 설탕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는 땅이었다. 변변한 지하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후가 따뜻해 플랜테이션 농업을 할 수 있는 지역도 아닌 척박한 땅이다. 일본은 대만에서 따뜻한 기후를 이용해 외화획득용 사탕수수 농업이라도 육성할 수 있었지만 조선의 경우엔 이것조차 불가능했다. 일본도 당시 산업혁명 초기의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주들은 쌀과 콩을 생산해 비싼 값으로 일본에 수출해 수익을 올렸지만 이는 일본의 농업경쟁력을 떨어뜨려 경제발전에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가치란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얻었다는 점 이외에는 특별한 이점이 없었고, 이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조선 경제를 신속하게 발전시켜 일본경제와 통합함으로써 시장규모를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일본과 연계된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는 일종의 '장기투자'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던 이유는 지하자원이나 설탕 고무 같은 원료를 획득하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자원 기후 문화면에서 일본과 닮은꼴이었던 조선은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을 기초부터 착실히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정책은 통치 초기인 191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난잡한 토지소유관계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편하는 일이었고, 1920년대에는 그 성과를 기반으로 산미증산운동 등 토지의 생산성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같은 단계를 통해 조선에 기초적인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게 되자 1930년대에부터 일본으로부터 대규모의 자본이 투자되어 본격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안병직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식민지 경제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 세계 경제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장기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었다.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수산업의 생산 비중이 80%에서 43%로 하락하고 대신 공업생산의 비중이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공장이 많이 세워짐에 따라 노동자의 숫자도 1943년 175만여 명으로 늘어나 19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초기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는 일본 전체 공업시설의 25%를 한국에 배치하였고, 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한 이후에는 중화학공업까지 유치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지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한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일본의 조선 경영은 현지에서 오히려 산업화를 역행해 농업사회로 퇴보시켰던 영국의 인도 경영과 비교해볼 때 매우 대조적인 일이다.(브루스 커밍스, The Lagacy of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및 문화면에서도 단일한 단위로 묶였다. 일본은 꿈에라도 나중에 한반도가 독립할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물량의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한반도에 들어선 흥남의 질소비료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진남포의 공업단지 등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첨단 중화학 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이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이 조선의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투자한 관개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 역시 다른 식민지의 경우에는 절대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적극적인 식민지 경영의 모습이었다.(브루스 커밍스, 같은 책)<></>
그 외 교육면에서는 6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한제국 말 2.5%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78%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전체의 17%가 12년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석탄통계연보) 이 같은 교육이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한국전쟁 후 남한에서 본격적인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역사를 해석하면서 종종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과거 대륙을 통일한 여러 왕조들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조공을 받으면서 군신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자주정신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별로 점령할 가치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좋은 것도 아니고 토지가 비옥한 것도 아니요,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구태여 정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19세기 말 얼지 않는 항구에 한이 맺힌 러시아나 대륙진출에 한이 맺힌 일본 정도가 군사적인 이유로 조선을 원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조선을 인수받은 일본은 초기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해 철도를 놓고 신작로를 만들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근대적인 관료 제도를 이식했으며,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식민지로서 최악의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측면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로 당시 조선이 기후가 따뜻하지도 않고 별다른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둘째 정치경제 문화적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이었던 데다, 셋째로 그나마 동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교근본주의가 뿌리박힌 사회로서 이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맞는 신사상을 보급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통치한 일본이 최초 10년 동안 해마다 일본 예산의 10%가 넘는 엄청난 자금을 대만의 기반정비를 위해 쏟아 부었던 것을 생각할 때, 지정학적인 중요도를 제외하고도 조선은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덩치가 컸기 때문에 매년 일본 정부 예산에서 엄청난 자금이 조선총독부에 대한 국고보조금으로 투입되었다. 일본정부가 조선에 투입한 보조금은 많을 때에는 2천만 엔이 넘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렇게 조선에 투입된 자금은 관공서와 학교를 신축하고 교사와 공무원에게 봉급을 지급하며 도로와 철도 항만 전력 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이례적인 투자는 조선을 키워 잡아먹으려는 웅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는 한반도가 우리 땅이다, 즉 이제는 여기도 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면서 특히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이 시기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본토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들을 대거 조선으로 초빙하여 일선 학교에 투입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사범학교 체제에 따라 교사를 양성했는데,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범학교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우수한 엘리트 교사들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거 한반도로 부임하여 조선인들의 문명개화를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1906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근대화의 기반을 닦은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근대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이토가 부임한 1906년까지 11년이 지나도록 전국의 소학교는 4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같은 사정을 파악한 이토는 부임하자마자 정부 관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그동안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서 질책한 뒤 학교 건설 사업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개가 넘는 각종 학교가 들어서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이토는 해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조선을 일본의 엔 통화권으로 통합하고 역사상 최초로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이후 조선의 물가는 안정되고 현대적인 화폐경제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제시대 힘들게 구축된 조선의 경제기반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파손되어 한반도는 다시 원시시대로 회귀하고 말았다. 특히 해방 전 조선에 있던 일본인 60만 명이 모두 일본으로 귀국한 것이 남북한의 발전에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되었다.
하지만 한 사회가 발전하는 데에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교육과 제도, 이념과 관습, 법률, 경험과 기술 같은 것들은 결코 전쟁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과 일본 경제가 그토록 신속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기적을 베풀어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선진공업국이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도의 문명을 이루어 향유한 경험이 있는 사회는 일시적인 참화로 물질 기반이 모두 파괴되어버린다 해도 다시 신속하게 일어설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란 보이지 않는 기반과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이 같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인간 자원이 훨씬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것들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반도에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공장을 짓고 사람들을 개화시켰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입헌 군주국가를 만들어 근대화를 시도했을 경우 오랜 세월이 걸려도 깨어지지 않았을 완고한 문화유산과 사회제도, 이념 같은 정신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려 5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만들어지고 갈고 다듬어진 정교한 체제였으므로 어지간한 변화와 충격에는 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토록 짧은 기간에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사회가 이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촘스키,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中에서-
Noam:사실 세계의 선진국들을 살펴보면 아주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그건 5분만 관찰해도 알 수 있는 것인데,미국에서는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그 사실이란 무엇이냐 하면 경제 선진국들은 서방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던 경험이 없는 나라들입니다.이에 비해 서방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들은 총체적인 실패작으로 끝났습니다.서방의 식민지 정책을 물리친 나라는 일본인데,경제 발전을 이룩한 전통적 제 3세계의 유일한 지역입니다.그러니까 유럽은 일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정복했고 일본은 경제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아프리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일본이 산업화 과정을 시작했을 때(1870년대),서아프리카의 아산테 왕국은 가용 천원자원,국가 형성의 수준,기술 발전의 단계 등에 있어서 일본과 대등한 수준이었습니다.그런데 오늘날 이 두 지역을 비교해 보십시오.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두 나라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일본은 서방에 의해 정복되지 않았던데 비해,아산테 왕국은 영국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그래서 오늘날 서아프리카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서아프리카 그대로이고 일본은 경제 선진국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일본도 그들 나름의 식민제도를 운영했습니다.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들 역시 발전했습니다.일본의 식민지 운영 방식은,식민지에서 일방적으로 빼앗기만 한 서방국가들의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물론 일본도 잔인한 식민지 수탈 국가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들을 경제적으로 발적시켰던 겁니다.이들 식민지는 산업화되었고,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고,교육 수준을 높이고,농업 생산을 증대하고 있었던 겁니다.한국과 타이완의 성장률은 20세기 초반 내내 일본의 성장률과 비슷했습니다.사실 1930년대에 이르러 포모사(현재의 타이완)은 아시아의 상업적 센터 중 하나였습니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일본의 식민 시스템은 분쇄되었습니다.하지만 1960년에 이르러 한국과 타이완은 예전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전후 시대에 이들 두 나라가 일본식 발전 모델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이들은 외국의 착취에 노출되지 않았고,국제적 수준으로 볼 때 상당히 평등주의적이었고,교육과 보건에 상당한 자원을 투자했습니다.아무튼 이들은 성공적인 발전 모델이 되었습니다.물론 이들 아시아 국가들은 무자비합니다.지독히 권위주의적이고 여성의 역할은 이렇다 할 게 없습니다.이 밖에도 불쾌한 사항들이 많습니다.하지만 이들은 성공적인 경제 발전 정책을 수행했습니다.국가는 산업 정책을 조정했고,자본의 해외 유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수입 물량은 아주 낮았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일본 스타일의 경제개발 모델이 성공했다는 겁니다.실제로 그것은 전 세계의 성공한 나라들이 채택한 방식이었습니다.높은 수준의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자유시장의 원칙으로부터 자국 경제를 보호했기 때문에 성공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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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으로 경제학계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대세입니다.
여기에는 하버드 대학교의 한국학 학장인 에커트 교수와 그의 스승도 포함됩니다.
참고로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이론에 맞서 경제적으로 맞선 "개발없는 개발"의 허수열 교수도
대한민국의 수탈론과 맹아론은 국내에서만 통하지만 해외에서는 인정 못받는다"
라고 인터뷰에서 인정하였습니다.
특히,2006서울 사학회에서 민족주의 역사진영의 맹아론과 수탈이론 VS 식민지 근대화론이 붙은적이 있는데 식민지 근대화론의 경제사학자들이 자본주의 맹아론과 수탈이론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압도한적이 있습니다.
첫댓글 어이가 없군요 근대화라니....그럼 대한민국이 일본도 근대화 함 시켜 줄까요.... 그대로 복사 한듯이~~~
댓글들 대충 예상되는데, 저 글 다 아는거잖아요. 솔직히 '한류'방인데 내용 절반이상은 다 일본내용입니다. 일본 일본 진짜 지겨워요. 솔직히 의도된거든 아니든 저는 조금 인정되는 부분도 있구요. 이런글이 더더욱 한국 사람들을 은근 피해의식 만들게 하는거 같습니다. 전 세계에 일본이 다가 아니에요. 훨씬 배울 나라들이 많습니다. 진짜 한국 사람들 일본에 집착하는거 안타까워요. 일단 시급한건 잘나가게 급선무같아요. 일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때메 단결은 이뤘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온통 일본에 집착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거 같아요. 한류까페도 다른 인터넷에서도 온통 일본이란 나라글입니다. 댓글도 늘 똑같잖아요
일본에 한국인 피해의식이 있다고 댓글을 많이 남기는데 도대체 누가 일본에 집착하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사는지 궁금하네요. 일빠들 외에는 대부분은 일본에 별로 관심없죠. 그리고 저글에 인정하는 부분없이 반박하면 한국사람들이 이성을 잃은건가? ㅡ.ㅡ
가슴이 답답하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을 찬양하거나 일본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그런 학문이 아닙니다. 일제 36년 기간은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0대때 일제 식민지를 맞은 사춘기 소년에게는 새로운 질서가 들어온 시기였으며 그의 교육환경이 그전과는 확연하게 틀려졌습니다. 20대에 일제시대를 맞은 청년에게는 새롭게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사농공상의 패해속에서 차별받던 상인들에게 성리학이론을 부시고 새롭게 들어온 일본정부는새로운 질서였습니다.이러한개인개인의노력과욕망이어떻게반응하였고그속에서배운공업화와 노력들이 대한민국의근대화에어떠한영향을끼쳤는지살펴보자는의미있는학문입니다
그니까 학문적인 접근이고 한 부류인데, 저게 다 진실도 아니고, 사람들이 무조건 일본하면 이성을 잃다보니 철저한 복습도 안돼고..그렇다고 그 웬수같은 일본이라면서 중국보다도 일본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조사 하나가 없는거. 맨날 욕만하면 뭐하나요. 심심풀이용도 아니고. 대국굴기, 중국이 몇년들여 역사적 강대국들 조사한 다큐보면서 세계서 아무도 만들 생각 안해본 강대국의 조건이란 프로를 만든 속보이는 중국에 헛웃음도 나왔지만, 한편 쟤네들 정치적으론 무시하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욕만하고 철저하게 그 대상을 공부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일단 논쟁해야하는데, 무조건 일본에 대해선 싸움이 나기 때문에 힘들죠.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성리학을 기본으로 한 조선질서를 바꾸려는 노력은 이미 있어왔고, 그 근본적 토대도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식민지 근대화론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면, 일제 식민지가 우리근대 역사에서 어떤 식으로 왜곡되게 근대화를 해나갔는가를 연구하시죠....일제는 조선이 제국으로 가는 것을 막았고, 그들의 영토적, 제국적 야욕에 의해 조선을 식민지로 이용했습니다...조선을 그들의 병참기지 내지는 식량창고로 쓰기 위해서 시설과 도로를 짓고, 효율적인 착취가 가능한 사회제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거대 담론과 논리를 만들만한 가치는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된 것이 아니고, 일본과의 근대화 경쟁에서 진 것입니다...그래서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고, 우리의 주체적 근대화 노력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1960년대 근대화 역시 일제 식민지 경험을 토대로 성공한 것이 아니고, 우리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했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역학관계속에서 미국과 자본주의를 선택했던 한국은 성공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했던 북한은 끝내 실패했습니다... 60년대 한국의 근대화는 분명히 일본, 미국, 독일등의 근대화에서 많은 힌트를 찾은 것이 사실입니다...하지만, 그것과 일제 식민지 경험과는 무관합니다....
19세기말 일본은 그들보다 한발 앞서서 근대화를 이룬 독일을 보고 몇가지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판박이 처럼 독일을 따라했습니다....그리고 성공을 하죠.....일본은 독일의 식민지를 경험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 식민지 근대화 라는 논리는 이미 발달론의 한분야로 된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그리고 당연히 그게 주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현재 세계 학문을 리드하고 있는 세력들은 당연히 선진부자 국가들이고, 그들의 이익에 맞는 논리가 주류가 되는거죠....그 진실이나 진위여부 역시 아주 좁은 공간에서만 그들끼리 주고 받을 뿐입니다.........
읽다가 숨차서 다 못 읽겠음.
1900년대 전반기는 전세계적인 "산업 혁명"의 시기 였습니다....전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나라가 폭발적인 경제, 농산물과 공산품의 생산성 증가, 과학, 인구 성장을 거두었던 시기였습니다.....그러나 한국은 쪽바리 새퀴들이 철저하게 탄압을 하는 바람에, 게다가 한국전쟁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그 나마 조금 남아있던 산업시설도 완전히 없어져 버림.....1962년 UN의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2번째로 못 사는 나라.....그 이후부터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갈수록 국력, 경제력 등등 모든 면에서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전세계적으로 근대화와 새로운 질서가 일어나는 시기에 우리나라는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세도정치의 무능한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민란과 새로운 시대에 부합되지 못하는 성리학 정치 시스템의 조선왕조는 이미 체제의 한계를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 식민지 시절에 조선은 일본과 더불어 3.7%의 경제성장을 합니다. 그때 전세계적인 경제공황이 불어닥쳐 근처 아시아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이 0.5%내외였음을 감안할때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율은 대단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조선사람들의 키가 크고 평균수명이 증가하고 어류 육루 야채류의 고기섭취량이 늘어납니다. 인구도 매년 평균 5%이상증가합니다
일본은 서양에 일찍 문물을 개방한 후, 앞선 군사 기술로 무장한 후, 주변국을 침범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지금은 끝없는 경제 침체기에 빠진 나라......반면에 주변국인 한국, 중국은 엄청나게 치고 올라오는 상태........중요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제 끝난 나라이고.....미래는 한국과 중국이라는 사실......일본은 이제 중국의 속국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언제 속국이 되냐가 문제일 뿐.
글쎄요. 진짜 속국이 될지는 되봐야 알죠. 말만 들어도 행복하군요 한국, 중국이 미래라니..근데, 그렇기 위해선 싸우던지 뭐하던지 철저히 일본에 대한 논쟁과 파헤치기를 해야할거 아닙니까. 일본점령기 한국에 대한 고찰도 물론이구요. 우린 책임없나요? 왜 우리 스스로 반성은 안하는 겁니까? 근데 일본이 암것도 아니던, 한국이 잘못이 있든 없든 무조건 무시하고 쌈나고 하기 때문에 저런 자료가 반갑지 않아요.
"철저히 일본에 대한 논쟁과 파헤치기를 해야할거 아닙니까" <--- 글쎄요. 저는 일본에 대해서 관심이 0 입니다. 물론 논쟁과 파헤치기 이런것을 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우린 책임없나요? 왜 우리 스스로 반성은 안하는 겁니까" <--- 한국은 책임이 전혀 없습니다. 반성 안해도 됩니다......."저런 자료가 반갑지 않아요" <-- 저도 저런 자료가 반갑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인터넷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문자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일본인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 눈앞에 영원히 계속해서 나타날 겁니다.....결론은 그냥 관심을 끄거나, 욕이나 한번 해 주면 됩니다.
이런 글을 퍼나르고 옹호하는 인간 쓰레기들은 친일파 처단을 못한 우리 원죄의 결과물입니다. 앞으로 두고 두고 우리 자신을 괴롭힐 겁니다. 이런 자들이 많아 질 수록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조선족만 욕할게 아니죠. 진짜 우익세력이 등장해야 합니다. 정부가 못하면 민간이 나서서 제거해야죠.
뭐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니까요. 대충 수긍할수 있는 내용아닌가요. 우리는 경제학적 관점이 아닌 전체적인 관점으로 보니까 당연히 식민지로서의 피해를 부각시키는게 맞는거죠. 경제학적인 분석이상의 의미는 없는글
경제학적으로 분석했다해도 개소리네요..다른거 다 집어치우고 자원도 별로 없는 매력적인 땅이 아니다?? 그럼 각 나라가 조선에서 사들인 금광채굴권이랑 석탄채굴권 등 온갖 빼먹은건 다 뭐란소리지?? 특히 일본이 합병이후 더 빼먹었는데 무슨 개소리하는건지..
글쓴놈(원문쓴놈 말하는거에요).. ㅡㅡ.. 웃긴넘이네.. 1930년대 일본이 한국에 중공업분야와 화학학공업까지 투자한건.. 1931년에 만주에서 전쟁이 시작되어서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전쟁물자 실어 나르기 힘드니까 한국에다가 공장 차려서 전쟁물자 댄거자나. 용산에 군수물자 기지창고 세워놓고... 지가 말해 놓고도 웃긴넘이네... 전쟁하려고 차린공장이 뭐가 세계에서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어??? 섬나라니까 어쩔수 없이 세운거지... 배로 운송하는게 편하것냐?? 기차로 운송하는게 편하것냐??? 거리상으로도 한반도에 공장 맹글어가 전쟁물자 대는게 훨씬 싸게 먹히고 빠르거덩???
그리고.. 글쓴놈 말처럼 한반도는 전쟁 전초 기지였기때문에 전쟁준비하느라 이용해 먹느라고 지하광물 많이 뽑아 먹었거덩? 그걸 일본에 왜 가져가냐?? 전쟁할때 쓸라구 뽑은것들을?? 나무는 가져 갔드라 지네 집질라구...
아 짜증난다. 공부를 뒷구녕으로 했나. 저런걸 학자라고. 근대화좋아하네. 수탈론이겠지. 6.25로 망해가던 나라 일으켜세운주제들이..쯧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토록 짧은 기간에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사회가 이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에는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동의합니다. 일제는 조선인을 수탈하고 핍박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조선의 대부분을 파괴했기 때문에 아주 다른 새로운 사회체계가 단시간에 세워질 수 있었죠. 그러나 일제가 아니었으면 발전할 수 없었다는 둥 일제가 '베풀어줘서' 조선이 발전했다는 둥 헛소리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500년의 세월이 너무 견고해서 출발은 좀 늦었지만 분명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서 '일제 덕분에 근대화가 되었다' 이건 너무 뻔뻔한 말이라는 거죠. 우리가 제3세계국가 중 비교적 빨리 근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와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한 '백지상태에서 우리의 역량으로' 일으켜세웠기 때문입니다.
제 3세계 국가라고 하셨는데 어디 자료를 봐도 한국이 제 3세계에 분류 될만한 흔적은 없고요. 실제로 제 3세계라는 말이 냉전시대때 1세계(미국을 주축으로한 서유럽,일본과 같은 자본주의국가) 2세계(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등의 공산주의국가) 이에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주축이되어서 만든게 제 3세계 였던 걸로압니다. 현재는 개도국이나 못사는 국가를 제 3세계국가다라고 할수 있는데 한국이 1세계인지 아닌지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국,홍콩,싱가폴,대만은 제 3세계라 할수 없는 국가들이죠.
한국전쟁이후에 한국이 상당히 가난했다라는 상황때문이라서 제 3세계국가와 비슷하다고 과정성인지 왜곡성인지는 알수 없는 논리로 제 3세계를 들이 대는 몇몇 회원분들이 있어서 그러는데 정치적인 관점에서보면 한국은 1세계에 가깝고 현재로서야 이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몇몇 산업분야에서 한국이 선도하고 있는 걸 볼때 제 3세계국가라고 보는게 어렵죠. 요즘에 1세계니 2세계라는 말이 없는 만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물론 몇몇 조건이 제 3세계국가와 흡사한게 있기는 있지만 그걸로 전체로 호도할수 없는 이유인게 특별히 한국은 1세계도 3세계도 아닌 다른 형태에 국가라고 봅니다.
일제덕분에 근대화 되었다기 보다 일제 덕분에 근대화가 빨리 된거죠. 그것도 무지무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 한데 과연 조선이 망하지 않고 유교가 튼튼한 상태에서 언제쯤 근대화가 제대로 되었을까 이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지도자 또는 왕이 정말 세계화에 눈을 떠서 1900년대 초부터 개혁을 하는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한 장담할 수 없죠. 갑신정변이 성공했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무능한 조선왕조를 백성이 스스로 깨어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하죠. 갑신정변같이 깨어난 엘리트 몇명이 성공할리도 없고..
징기스칸이 한 말이 있죠 고려는 굳이 가난하기 때문에 정복할 필요가 없다-_-;;
영국이 지배했던 홍콩과 지금까지의 중국은 어떻게 설명 할건데..그리고 똑같이 당한 북한과 한국의 차인ㄴ 어떻게 설명할건데..
왜 자꾸 북한 하고 한국하고 비교를 하세요 ㅡㅡ;
지겹다.. 일본.. 이제 일본하고 관련된 일이 라면 머리가 멍해져서 일본 사람 보면 꼭 걸어다니는 문자 조각 처럼 느껴짐.. 한마디루 지겨움..
아 씨바 정말 피가 꺼꾸로 솟는다
저 위에 호의적으로 댓글달았는데, 아까 대충읽고, 지금 찬찬히 읽어보니...이거 은근 쇄뇌효과 대단한대요? 밑줄그은 문장들이 하나같이 은근 한국비하시키고 일본시각이잖아요. 몇몇줄은 수긍이 가는면도 있지만, 맨 밑에 대단히 틀린 글이 있네요. 서구열강이 지배한 곳은 다 착취만 당했고, 그래서 못살고, 일본이 지배한 국가들은 투자했기에 잘산다? 왜 젤로 중요한 피지배지 국민들의 능력과 성향을 빼놓고 설명하는지? 서구열강이 정복한 피지배지들은 까놓고말해 지배국과 비교할수 없을정도의 문명차이가 나는 곳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아프리카를 보면 알겠죠. 사실 아프리카인들은 지금조차 뭐가 그리 잘못됐던건지
생각않는 사람이 대다수. 백인의 탄압 문화비판과, 항의 영화,예술,흑인보호제도..등도 거의 백인내부에서 자성의 백인들이 만든게 많으니까요. 허나 지금도 한국인이 부르르 떠는건 기본적으로 한국은 일본문화개방전엔 문화도 전해주고 치고받고 경쟁국가의 형태였습니다. 근데 한순간 그놈의 서구문명개방(일본의 이점을 높이 평가하는겁니다)때문에 갭이 많이벌어져서 한국이 정체하고 있었다면 동양적인거 말고 근대화, 서구적인것 면에서 앞섰던 일본이 정복형태로 한국을 점령했고, 이를 그리 미화시키면 자존심상하죠. 사실 문명차이가 거의 없고 비슷한 기질,능력을 가진 민족이니 후발주자였지만 질주가 가능했던거지요. 또한 잘아시듯
공산화해보겠다고 한심한 북한의 남침으로 다 엎어놓고도 2007년 현재 이정도 바쁘게 달려온건 한국민의 능력을 무시한 면이 크지요. 한국이나 대만이 타 식민국과 달랐던 건, 기본적인 동북아 인들의 능력정도가 있기 때문이죠. 기껏해야 36년 지배인데, 왠 진정한 노예같은 발상인가요 안타깝네요. 그럼 지배도 없어진 경쟁시대 지금, 인류를 이끈 눈부신 기술의 서구열강에 100년, 200년..그 이상 지배받은 국가들, 또는 일본에 점령당했던 타아시아 국가들 지금의 무능한 모습은 어떻게 설명하나요. 일본,러시아가 한국점령하려할때 한국 선각자들은 세계무대로 나가 선언서 읽고 엎으려는 선각성도 있었어요. 원시국과 비교하며 자학
하는건가요? 손해나는 장사하는 나라일수 없고, 더구나 은공이랄거까지 있나요? 한국의 자원수탈과 인명손실, 또한 일본 그 작은 나라가 혼자 감당안되서 결국 전쟁에 동원하고 이용한 물적,인적 자산을 생각해보세요.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겁니까. 갠적으로 인정하고 싶은건 일본이 위협적 서구열강을 지혜롭게 받아들여 자주근대화한 유일한 당시 주변국이었다는 점 정도입니다. 권위주의, 여성천시등..사실 지금까지도 뿌리깊은 유교의 폐해로 근대화는 일본이 껴들지 않았음 요원하거나 느렸을거라는 예상은 저도 비슷합니다. 사실 한국이 미국이나 유럽 지배영향을 받았다면 모든면에서 더 나았을거란 생각이 오히려 듭니다.
경제학적으로 접근한 것이니 수긍할만 하다니...ㅡ.ㅡ....사실과 진실을 가려볼줄 아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 참 걱정이네요. 대충 데이터만 들이대고 유리하게 해석한 글들을 전부 수긍하며 따라갈것을 생각하니 참....
참 꾸준하게 이런글은 올라오는거 같아요... 분란 일으키고 탈퇴하면 또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올리고...
다 필요없고, 역지사지입니다.우리도 우리 돈 내서,,러시아,중국 등 으로부터 보호해줄테니..한-일합방 하자고 제안해야지요,.단 조건은,,과거 우리가 당했던 것 만큼만 대우해준다고 각설하구,,ㅎㅎㅎ
나도 근현대사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이 글 완전히 무시할 만한 글은 아닌것 같은데요?? 솔직히 이해못할 부분도 많았는데. 일제통치가 한국에게 치명적이긴 했지만, 어쩌면 한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이 들때가 많았거든요. 만약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졌더라면, 왠지 우리나라는 공산주의화 되었을것 같았고...일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는 식민지 상황에 꼭 처했을것 같았고. 등등. 그래서 침략한 일본인보다 무능한 정치인들이 더 나빠보임. 이 역사관이 과연 확정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근현대사 배우면서 느낀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