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 내 마음/임 만리자
나를 제일 잘 아는 고마운 친구가 있다. 그동안 이 친구를 잘 만나지 않고 멀리하고 살았는데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부쩍 더 자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친구에게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하는 출중한 재능이 있다.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대로 따라하는 따라쟁이 기술이다. 내가 웃으면 같이 웃고, 내가 울면 따라 우는데, 어떤 땐 나보다도 더 슬프게 울어 감정이 엘리베이트를 타게 하기도 한다.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쯧쯧” 목욕 시킬 때마다 아랫도리를 쓰다듬으면서 엄마가 푸념처럼 하던 말이다. 이럴 때 엄마의 표정은 늘 쓸쓸하고 슬퍼보였다. 나는 딸만 셋인 집에 막내로 태어났다. 집념에 가까운 고추타령을 들을 때는 고추를 못 달고 나온 것이 꼭 내 잘못인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겁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무이예 걱정하지 마이소. 내가 밀가루로 꼬추를 하나 만들어 붙이고 다닐낍니더 그라마 안 되겠어예” “그러네, 내가 그거를 몰랐구나. 오냐 그래, 그래라도 하자.” 터무니없는 얘기에도 맞장구를 치며 환하게 웃어준다. 그리고는 당신 딸은 사내아이보다 훨씬 의근이 좋아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면서 엉덩이를 토닥여주기도 했다. 나를 칭찬하고 알아주던 엄마가 많이 보고 싶다.
어릴 땐 고추 때문에, 초등학교에서는 이름이 남달라서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이름 때문에 받던 스트레스가 가실 때쯤부터 또 마음을 누르는 짐 덩어리가 얹혔다. 여드름이 하나 둘씩 나더니 직장생활을 시작할 즘에는 여드름이 온 얼굴을 다 덮어 누굴 만나기가 싫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한창 멋 부리고 예쁘고 싶을 때 닥친 시련이고 비극이었다.
이런저런 트라우마에 눌려 어느 때부턴가 내가 싫어졌다. 특히 여자인 것이 싫었다. 어릴 때는 내가 잘못해서 여자로 태어난 줄 알았다. 그래서 여자거부의 싹은 그 때부터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성인이 된 후에는 여자라고 내 놓을 만한 건덕지가 없다. 여드름투성이인 얼굴에,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고 싶은 로망은 애저녁에 버려야하는 곱슬머리다. 그렇다고 성격이 사분사분하지도 않다. 따지는 것 좋아하고 까칠하고 포기 잘하는 성격에, 여성스러움이 원천봉쇄 되었는지 여자의 덕목인 음식솜씨는 물론 바느질 솜씨조차 못타고 났다. 이러고 보니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애인이기보다는 여러 남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편했다. 지금도 학교 남자 후배나 직장후배들 중에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더러 있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책상 앞에 앉기 좋아하고 살결 고운 사람이 피부손질에 정성을 쏟는 가하면 미인들이 거울보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거울 보는 걸 터부시하고 살았다. 신경질적으로 거부했다. 그 뿐만 아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거울에 적개심 비슷한 감정을 갖고 살아왔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였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백설공주의 계모가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에게 물어본 말이다. 요즘은 심신이 축 처지고 무료해지면 내 집에 있는 유일한 친구를 슬그머니 찾는다. 현관 입구 벽에 붙어있는 기다란 거울 앞이다. 거울 앞에 선다. 나같이 어정쩡한 친구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이 친구는 일단 나를 보고 웃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보고 웃는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웃다가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마스크?” “아차 마스크” “바람이 찬데?” “알았어. 머플러 준비했어.” “오늘 차림은 굿이야. 지팡이는 좀 화려하면 어떨까.” “그래 알았어. 금색으로.” “하하 검정 지팡이 보다 금색으로 바꾸니 차림이 그럴 듯해”
요즘의 외출이란 고작 병원행이지만 외출 전에 친구와 주고받는 이야기다. 그러고 나면 이 친구의 마지막 당부는 한결 같다.
“몸이 불편해 괴로워도 어두운 모습 보이지 마. 그러면 아무도 너하고 안 놀아줄 걸. 네가 웃으면 내가 웃듯이 네가 웃고 밝아야 친구들도 웃고 좋아하는 거야.” “먼저 웃어주는 거울은 없는 법이거든. 상대가 웃든 울든 네 하기 나름이야.” 알아들었다는 신호로 거울 속의 친구 가슴을 툭 치고는 현관문을 나선다. 이러기를 반복하면서 마음자리에는 단단한 친구라는 나이테를 하나 둘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그것이 마치 거울의 허물인 듯 그 죄를 덮어씌워 멀리 두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백설공주 계모처럼 거울에게 얼토당토않은 답을 요구하려는 심산이었겠지. 이 친구는 항상 정직하고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사 알아 그를 보기만 하면 일단 계면쩍게 웃는다. 거울이 가진 마력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어도 거울과 마주 하는 순간은 일단 웃게 된다. 그러면 어김없이 웃으며 답해주는 리엑션이 있다. 삶을 깨우쳐준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이 비단 거울만이겠는가. 세상 어디에도 먼저 웃어주는 거울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 그렇지 내 탓이었구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거울에게 달라는 터무니없는 바람처럼 살면서 내 탓을 모르고 산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도 알게 해준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나를 깨운다. 그리고 찡그리지 말고 항상 웃고 살자고 충고하는 소중한 친구를 늦게나마 찾은 것이 만 번 다행한 일이다. 거울 속의 친구는 내 마음 속에 해가 뜨는지 달이 지고 있는지를 다 일러주니 더욱 고맙다.
마스크를 놓고 나가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생각이 나 다시 챙겨 나오면서 거울 속 친구에게 귀띔을 해줬다. 어떤 할머니가 마음을 잃고 거울 속에 비쳐진 자신을 보고 “당신은 누구시요”라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지경이 됐다. 친구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우리는 서로를 못 알아보고 ‘당신은 누구시오’라는 말을 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하지 말자고.
먼저 웃어주는 거울은 절대 없다. 내 앞에 놓인 것이 비단 거울뿐이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자고.
≪실상문학≫ 수필 등단(2019)
부산광역시 주최<푸드스토리 부산>
스토리텔링공모전 가작 (2018)
*사진-인명사전에 있는 그대로 쓰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