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 후 4차시 습작품 합평작 (2023. 9. 2 토)
1. 겨울, 팽나무의 기억 / 최정란1
① 가을이 제법 깊어진 11월 하순의 주말, 울산 남구 문화원에서 주관한 폐사지 답사에 참여했다. 탐방지는 강원도 원주 남한강변의 부론지역이었다. 옛날 영남지역 사람들이 한양으로 향하던 길목이며 충주에서 흘러든 남한강 줄기와 경기도와 강원도 횡성을 지나 온 섬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뱃길을 이용하는 물자가 집결되던 은섬포에 흥원창이란 조창이 있었다니 포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 시절을 번성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② 첫 목적지는 신라 후기인 9세기에 창건되고 고려 초에 중창되어 전성기를 누린 후 조선 전기까지 유지되었다고 추정되는 거돈사터였다. 차에서 내리자 절터는 보이지 않고 큰 나무와 그 옆으로 길게 이어진 돌담만 보였다. 다가가자 표지판에 느티나무이며 수령이 천 년이 넘었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높이 가지를 뻗고 선 나무를 올려다보고 바닥에 수북이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늙은 고목에 이렇게도 많은 잎이 달렸던가 싶어 놀라운데 현장 설명을 나온 사람이 봄이면 파란 새싹을 틔우는 모습이 해마다 경이롭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③ 함께 온 일행 중 숲 해설가인 분이 설명을 시작했다. 느티나무는 은행나무, 팽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자목 중 하나로 토속신앙의 지주이며 선조들의 혼이 담긴 나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태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전에 살던 마을의 노거수가 떠올랐다.
④ 나는 결혼하면서부터 남편이 나고 자란 집에서 어머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님은 마흔이란 늦은 나이에 나의 남편을 낳았고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며 살아온 분이라 내겐 어머니라기보다 할머니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거주지는 울산 언양의 어음이라는 동네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니리미라고 불렀다.
⑤ 마을에는 노거수가 두 그루 서 있었는데 팽나무와 회화나무였다. 나무 앞 표지판에 수령이 150년 내지 200년, 높이가 각각 15미터와 13미터, 둘레가 2.4미터씩이라고 표기되어있는 오래되고 큰 나무였다, 나무 곁에는 당집이 있었고 당집 안 비석 위에‘於音下理理社神 之位’라는 글도 새겨져 있었다. 집에서 어머님 밭을 오가려면 이 나무 아래를 지나야 했다. 노거수가 있는 마을에 사는 일이 처음인 나는 지나칠 적마다 한 번씩 나무를 쳐다보았는데 이백 살이나 되었는데도 봄마다 싹을 틔우고 무성하게 잎을 뻗었고 여름이면 매미 울음소리가 온 골목을 채우곤 했다.
⑥ 결혼하고 몇 해 뒤 어머님이 그 해 동제 준비를 맡았다고 하셨을 때가 되어서야 정월 열나흘 밤 그 나무 아래서 제사를 지내는 마을 풍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사 비용에 대해 여쭙자 필요한 것을 적어주면 선출된 제관이 마을의 돈으로 장을 보아다 줄 것이라 하시면서 제물을 살 때는 절대로 값을 깎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우리에게 동제를 마칠 때까지 함부로 나다니지 말 것, 언행에 주의할 것, 술을 삼갈 것 등 주의사항을 이르셨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대문에 걸린 금줄을 보고서 이것이 보통 엄중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며 보니 노거수가 있는 곳에도 금줄이 쳐져 있었다. 어머님은 가마솥에 불을 때며 두부를 만들고 묵을 쑤는 등 바쁘게 움직이셨고 당일에는 빻아온 쌀로 백설기를 쪄내셨다.
⑦ 섣달 보름 전날 밤이었다. 평소 일찍 잠자리에 드시던 어머님이 대문을 닫지 말라 이르시고는 밤늦도록 누군가를 기다리셨다. 깊은 밤 어머님 방 쪽 출입문에서 두세 사람의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와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신기하고도 놀라운 밤의 낯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깨어있었다. 나무 밑 풍경을 궁금해하다가 ‘오래 걸리네, 겨울 한밤 얼마나 추우실까.’ 걱정도 해가며 어머님의 발기척을 기다렸다.
⓼ 다음 날 아침 어머님은 마루에 큰 상 두 개를 연이어 펴고 간밤의 제물들을 내어주며 상을 차리라고 하셨다. 잠시 후 이장이 마을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타났다. 다들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라도 있는 날처럼 흐뭇하고 기분이 좋으신 듯 보였다.
⓽ 몇 해가 지난 후 어머님은 다시 제주가 되었다. 분주해 보였으나 그 일을 귀찮아하시기보다는 은근히 뿌듯해하시는 것 같았다. 동네 어르신들이 두남댁이 마련한 음식이 정갈하니 그 집에 부탁해보라 했다는 게 이장의 전언이었다. 한밤의 제사가 끝난 보름날 아침, 몇 년 전에 집으로 오셔서 음식을 드신 어르신들은 그새 기력이 없고 다리가 불편해 오가기가 불편하다며 이장을 시켜 제물을 마을회관으로 실어 갔다.
⓾ 이후 동제의 제주 역할이 몇 년 연거푸 어머님에게 주어지자 남편이 불편을 토로했다. 금줄 때문에 마당에 차를 주차할 수 없고 여기저기 가야 할 곳에도 제약을 받는다며 투덜대고 있었지만 실은 몸이 벌벌 떨리는 한겨울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을 나서는 늙은 어머님의 건강이 염려되어서임을 알 수 있었다.
⑪ 그런 남편에게 어머님은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중요한 일인데 입을 댄다고 화를 내시다가 이제 마을에 동제 음식을 장만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셨다. 나는 왠지 마음이 안타깝고 쓸쓸하였다. 세월이 흘러 어머님이 노쇠해지며 그런 부탁을 받을 일도 없어졌고 동제 음식을 나눠 드시던 어르신 중 세상을 하직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⑫ 그새 두 번인가 마을에 주택개발조합이 들어와 아파트를 짓겠다며 주민들을 만나러 다니다 철수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육신을 지탱하지 못하게 된 어머님은 요양병원에 눕게 되셨다. 어머님이 그곳에 계시는 사이 남편은 매일 병원을 드나들었다,
⑬ 세 번째 들어 온 주택개발조합에 설득당하는 마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남편이 태어나고 자란 니리미 마을이 사라지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이사를 하게 된 남편은 당황해하며 평생 살 것이라 여기던 마을을 잃었다고 슬퍼했고 그렇게 쉽게 도장을 찍어 준 마을 사람들에게 분개했다. 그때 나는 울산 시내까지 출퇴근하느라 정작 마을 일에는 크게 관여할 시간도 없고 그다지 마을 행사에 참여한 일도 없던 그가 무얼 그리 애석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혼 초에 앞집과 맞은편 골목에 살던 총각 친구들도 모두 결혼하여 골목을 떠난 뒤였다. 어머님도 마을회관에 잘 드나들지 않고 마을 관광에도 잘 참여하지 않던 성격이라 마을의 어르신들과 특별히 살갑지도 않았다. “요즘 세상에 이사 한 번 안가고 사는 사람이 잘 있나? 별스럽기는. 그만 좀 해.” 남편을 핀잔했다.
⑭ 우리는 마을을 떠나왔다. 팽나무와 회화나무 노거수들도 어딘가로 옮겨졌다. 나는 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뵐 때마다 당신의 집이 사라졌다는 것도 모르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어머니의 세계는 골목과 집과 밭이 전부였는데. 그리고 어머니께 특별했던 그 나무, 밭에서 오다가 힘드시면 그 아래 잠시 앉아 쉬곤 하던 노거수가 생각났다.
⑮ 노거수, 팽나무라는 단어 하나에 어머니와 동제와 추웠던 겨울밤을 떠올리면서 이제 알 것 같다. 니리미의 팽나무가 어머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음을. 그 나무들이 어머니에게 신목이었듯 남편에겐 이웃이었음을.
⑯ 거돈사 터에서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 온 느티나무는 거돈사의 번성과 영화를, 소실되고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거돈사는 사라졌지만 거돈사 느티나무라도 남아있다. 부론이 번성에서 한촌이 된 것과 반대로 조용했던 마을 니리미는 대단지 아파트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제 니리미에 200년을 서서, 한 젊은 새댁이 중년을 지나 노년까지 긴 세월 골목을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노거수들은 그곳에 없다. 멀리 차를 타고 찾아간 원주의 폐사지. 과거의 흔적만 남아있는 곳에서 만난 느티나무로 인해 나는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신 어머니와 마을에서 사라지고 없는 나무들을 다시 만나고 돌아왔다. (2021. 11. 21)
뒷 이야기.
니리미 마을의 노거수였던 팽나무와 회화나무는 신축된 아파트 단지의 그늘진 뒤편으로 옮겨 심어졌다. 그러나 새로 입주한 아파트 주민들은 그 나무의 의미나 사라진 마을의 시간에 대해 알지 못한다.
2. 선인장 / 문성미1
1. 「자유론」 초등반 수업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인류의 삶이 더 나빠지지 않고 발전될 수 있었던 까닭으로 ‘자정능력’을 들었다. 자정능력은 잘못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이다. 배운 것을 생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오류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그 오류를 어떻게 고쳤는지 나누었다. 한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초등학생일 때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2. 어느 여름, 언니, 오빠가 학교에서 오기를 기다리다 장독대 담장에 올라갔다. 학교 운동장 철봉 위를 곧장 걷기도 했기에 담장은 쉬울 것 같았다. 내 키보다 높아서 물통을 뒤집어서 짚고 올라갔다. 재미가 나서 짧은 거리를 오갔던 중 화분 하나를 떨어뜨렸다. 놀라서 내려다보니 토분은 박살이 났고, 한창이던 꽃대도 부러진 것이 보였다.
3. 담장에 나란히 놓여있던 선인장 중 하나였다. 오랜만에 꽃이 피었다고 아버지가 반가워하던 화분이었다. 급히 담에서 내려왔다. 수습하고 싶었지만, 깨진 화분을 붙일 수도, 가시투성이 선인장을 만질 수도 없었다. ‘화분 속에 이렇게 흙이 많았나?’, 감당하지 못할 것은 화분만이 아니었다. 담에 올라간 것만도 위험하다고 야단맞을 일이었다. 학교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4. 늦게까지 운동장에서 머물다 집에 오니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우물가에서 작은오빠가 아버지께 야단을 맞고 있었다. 엄마는 오빠 야단맞는데 나까지 늦게 왔다며 손을 잡고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학교에서 먼저 도착한 작은 오빠가 화분을 깼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다. 집에 오니 깨져 있었다고 오빠가 말했지만, 아버지는 무거운 화분이 그냥 떨어졌겠냐며 다그치셨다.
5. 내가 했다고 털어놓고 싶었지만, 부엌에서 나갈 용기도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니 말보다 울음이 먼저 터졌다. 막내딸인 나에게 늘 너그러웠던 아버지라도 내가 울 때는 감정이 격해지시곤 했다. 아버지 반응에 늘 울음을 누르던 나도, 울지 말라며 달래는 엄마도 그치지 않는 울음이 당황스러웠다. 왠지 그날은 아버지가 화내지 않으셨다.
6. 야단 대신 아버지는 물통을 들고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달구어 바닥에 구멍을 냈다. 심한 냄새가 나면서 구멍이 생기는 과정이 신기해서 눈물을 닦고 지켜보았다. 열에 녹아 구멍이 난 물통을 보니, 내 마음도 구멍이 난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바닥에 돌을 깔고 흙을 채워 다친 선인장을 심었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 올렸다.
7. 아버지는 식물을 좋아하셨다. 마당에 작은 꽃밭을 만들어 백일홍과 채송화를 심었고, 감나무 접붙이기를 하면서 어린 나에게 설명해 주셨다. 아버지가 가장 부지런히 돌본 식물은 장독대 담장에 나란히 올려진 선인장들이었다.
8. 선인장들이 처음부터 장독대 담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펌프가 있던 우물과 꽃밭의 경계에 줄지어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선인장을 돌보면서 이름을 알려주고, 가시가 있으니 가까이 가지 말라는 주의도 주셨다.
9. 사고가 난 것도 혼자 놀던 어느 오후였다. 내 키보다 높은 펌프 손잡이를 잡고 놀았다. 까치발로 마중물을 붓고, 팔짝대며 뛰고 매달리고를 반복하니 물이 나왔다. 신이 나서 통에 가득 물을 받았다. 아버지의 물뿌리개를 들고 꽃밭에 물을 주었다. 몇 차례 오가며 자신이 생겨서 한가득 담아 가다 중심을 잃었다. 물은 쏟아지고 주저앉으면서 선인장에 찔렸다. 엉덩이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10. 가족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저녁 밥상에 제대로 앉지 못하는 막내딸을 살펴보던 엄마가 바지에 붙은 가시에 기겁하셨다. 엄마는 엉덩이에 박힌 가시를 빼고 약을 발라 주셨다. 선인장은 눈에 보이는 가시를 뽑아도 솜털 가시가 살 속에 남아 곪기도 했다.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위험할 수 있는 선인장들을 화분에 옮겨 장독대 담장에 올렸다.
11. 선인장은 나에게 아픔과 부끄러움을 알게 했다. 선인장 가까이 가지 말라는 주의를 어겨서 시작된 아픔은 여름과 함께 끝이 났다. 그러나 야단맞을까 두려워 내가 한 일이었다고 말하지 못한 부끄러움은 살 속에 박힌 가시처럼 빠지지 않았다. 그 가시가 있었기에, 나는 정직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선택을 이어올 수 있었다.
3. 무대뽀/ 박희곤1
1 내가 태어난 곳은 가난한 시골동네였다. 면소재지가 있는 곳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도시에 있는 누나 집에서 다녔다. 그 당시 누나는 갓 결혼하여 어렵게 살고 있었다. 동생들과 부엌방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힘들게 공부를 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단과학원이다 종합반이다 하며 과외수업을 하며 진학준비를 하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부모님 사정에 과외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서관에서 그냥 공부하는 것 뿐 이였다. 아무른 계획이나 대책 없이 그냥 무식한 채 무대뽀로 밤 12시까지 공부만 하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2 겨우 대학교 시험을 치르고 난 뒤 발표를 보는 날이었다. 그 대학교는 지방에서는 국립대로서 꽤 이름이 있는 대학 이였고 특히 공대는 수재들이 몰리는 곳이었다. 발표장에 도착하여 벽보를 처다 보며 내 이름을 찾아보았으나 내 이름은 없었다. 속으로는 뭐가 이상하다 생각했다. 시험을 치를 때는 어느 정도 합격을 예상했는데 막상 발표장에 와 보니 내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비애와 슬픔이 밀려 왔다. 자신에 대한 자책과 가난에 대한 원망이 한꺼번에 몰려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떠하겠는가. 시험은 떨어졌고 그래 군대나 갈까 생각했다. 힘없는 발길로 운동장 끝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누나한데 전화했다. “누나 나 시험에 떨어졌나봐”하고 결과를 애기 했다. 누나는 그래 재수하면 되지 하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3 절망한 마음으로 정문 쪽으로 내려가는데 같은 반 시험 친 친구가 나를 보더니 와락 껴 안어며 “어이 친구야 축하 한다”하며 너스레를 떠들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내 이름 합격자 명단에 없던데” 했다. 친구는 “너 이름은 맨 위에 장학금란에 있다”하는 것이었다. 다시 가서 처다 보았다. 내 이름은 진짜 합격자 명단 맨 위에 전액 장학금란에 박00로 적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렸다. 힘들게 무식한 채 무대뽀로 공부한 내가 세상을 다 갖는 기분은 격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누나에게 다시 전화했다. “누나! 다시 보니 나 전액 장학금로 합격 했어” 했다. 누나도 우는소리로 “그래 삼년동안 된장하나로 먹여 공부시켰는데 보람이 있구나” 했다. 그 후 우리 고향동네에서는 아! 아! 알립니다. 안골 박경수 씨 차남 박00이 모 대학 4년 전액장학생으로 합격했습니다 하는 안내 방송이 온 동네를 울렸다.
4 군대를 제대 후 울산에 있는 대기업 H회사에 입사하여 월급쟁이로 일했다. 몇 년간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며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게 되었다. 세상살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뜻하지 않는 회사사정으로 명태를 하게 되었다. 몇 년을 방황하며 인생의 쓴맛을 보며 다시는 명태는 당하지 말기를 속으로 맹세했다. 자존심을 꺾고 친척회사에 입사하여 굿은 일 마다하고 온갖 잡일을 하며 그 힘든 세월을 견디었다. 무디어 져 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무대뽀 정신으로 다른 기업에 도전했다. 떨어지면 또 도전하고 수십 번을 반복했다. 정보가 취약한 지방에서는 무조건 공채에 응시하는 것 뿐 이었다. 수십 번 시도 끝에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기업에 겨우 취직을 하게 되었다.
5 이 회사는 건설회사로 경제발전에 힘입어 많은 건설현장을 가지고 잘나가는 회사였다. 내 전공을 살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열심히 근무했고 회사도 나의 능력을 인정하며 승승장구 하여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불행은 얘기치 않는 곳에서 왔다. 국제구제금융의 여파로 건설경기는 사라지고 우리 회사는 감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필수 요원으로 야간작업은 물론 그 흔한 줄 대기는 그림에 떡, 그저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몸으로 때우고 열심히 한 덕분으로 구제금융의 여파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6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날 내 나이 오십이 조금 넘자 회사는 아무런 이유도 통고도 없이 갑자기 내 책상이 사무실 밖, 복도에 나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이었다. 그 당시의 해고의 한 방법으로 “책상 빼”였다.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득했다. 젊은 날의 악몽이 되 살아나 끝없는 절망이 나를 깊은 수렁으로 떨어 뜨렸다.
일주일 내내 복도에 나와 있는 책상에서 하루 종일 신문을 강독했다. 까마득한 수모와 분노,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었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을 못 버티고 사표를 내고 나갔다. 누가 뭐라 하던 속으로 나는 아무른 잘못도 없고 퇴직할 이유도 없다고 쇠뇌하며 무대뽀 무대뽀를 암송하며 경을 외듯이 되뇌었다.
7 아무른 계획이나 대책 없이 무대뽀로 버티기 시작했지만 말이 몇 개월이지 지옥이나 마찬 가지였다. 가위 눌리는 꿈을 꾸기도 했고 한강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루는 야간 근무를 한다고 아내에게 거짓말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소주 한 병을 들고 북한산 너륵 바위에 올랐다. 한없는 서러움에 깡 소주를 다 마시고 바위에서 뛰어 내릴 생각으로 절벽에 올라가 도시를 바라보았다.
8 나도 모르게 뜨거운 불덩이가 목젖을 울컥하게 했고 눈에는 도시의 빌딩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비행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불 현덕 군대에서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고 있는 큰아들 생각이 났다. 내가 죽고 나면 조종사 꿈을 포기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막내딸 간호사의 눈물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가정과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약해 져서도 안 되고 울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속으로 다짐하고 뛰어 내리는 것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 왔다.
9 처자식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고 혼자만 아는 퇴직 대기자의 절망, 책상 빼을 당해 본 자 만이 아는 눈물을 몇 개월 버티고 나니, 회사에서는 중국지사의 책임자로 발령을 내어주었다. 아! 저놈 지독한 놈이구나. 저 수모를 당하고도 나가지 않는 놈, 세상 어디에다 던져 놓아도 견딜 놈이구나, 판단을 한 모양이었다.
10 중국회사의 책임자는 예산만 몇 천억을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몇 년을 근무하면서 왜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는지 이해가 갔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을 사람, 무엇을 맡겨도 최선을 다하여 목표달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 했던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중국지사에서 근무하고 국제 건설 감리사 시험도 통과하여 지금은 정년이 넘어도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되어 성실히 근무하고 있다. 견디지 못하고 사표 낸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무대뽀가 가득한 인생을 살았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지금도 아무 계획없이 무대뽀로 살고 있다. 늙어버린 아내에게 사랑받으며.
4. 검정장화 /김기모1
1. 지난봄 어느 날, 시장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이 내렸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과 같이 비도 피할 겸 오랜만에 활기찬 시장구경도 해보자는 심산으로 시장으로 들어섰다. 여러 가게 중 갑자기 내 시선이 멈추는 곳이 있었다. 신발가게 앞에 서였다. 다양한 종류의 장화가 눈에 확 들어왔다. 비가 오니까 평소와는 달리 장화를 눈에 띄게 맨 앞에 전시해 놓고 있었다. 꽃무늬, 호피무늬, 연보라, 자주색의 화려한 색깔과 길고 짧고 여러 장식이 있는 등 서로 다른 외모들을 뽐내고 있었다. 장화라면 검은색의 길쭉한 멋대가리 없는 것만 생각하던 나에게 패션장화는 고정관념을 깨는 놀라운 일이었다.
2. 어린시절 산촌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봄이 다가오면서 마지막 눈이 녹기 시작하면 겹겹이 누더기를 입은 초가지붕의 처마 끝에는 길다란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다. 한낮이 되어 고드름이 녹을 때면 추녀 끝을 따라 낙숫물이 길다랗게 마당에 자국을 남긴다. 이 때면 밤과 낮을 번갈아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마당과 마을의 모든 골목길들은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3. 초등학교는 십여 리의 거리에 있었다. 해빙기에 오가는 길은 온통 진창이었다. 어려운 시절이라 또래 아이들은 모두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검정고무신은 눈덩이처럼 달라붙는 진흙의 무게를 못 이겨 벗겨지기 일쑤였다. 오래 신으라고 조금씩 큰 크기의 신발을 사 주었기 때문에 걷기는 더욱 힘들었다. 잘못 딛으면 온 발이 진흙에 빠져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4. 비가 오는 날이나 땅이 질퍽거리는 날에 매우 드물기는 했지만 장화를 신은 친구가 있었다. 장화를 신고 얕은 물 웅덩이를 보란 듯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게 너무 부러웠다. 이것은 많은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도 장화를 신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가끔씩 느꼈다
5. ‘어무이요’ 나도 장화 하나 사주면 안 됩니꺼?’
‘그래 좀 기다려 봐라’
‘기다려 봐라’라는 의미를 어린 나이임에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몇 해를 지나면서 학습된 효과였다. 유교문화가 강한 지역이라 근엄하신 아버지께는 꼭 필요한 말 이외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기가 좀더 편한 어머니를 졸라본 것이다. 경제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6. 산촌의 봄은 무척이나 고난의 계절이다. 대부분의 농가는 논과 밭이 적어 소득이 많지 않았다. 가을 추수할 무렵이 되어야 돈 구경을 좀 할 수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점점 식량이 떨어져 보릿고개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농사 준비할 돈 마련하기도 어려웠겠지만 30리나 되는 5일장까지 걸어서 장화를 사다 주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매일 신는 신발도 사기 어려운 시절에 일년에 몇 번 신지도 않는 가용비(價用費) 낮은 장화를 사주기는 어려웠다.
7. 요즘은 장화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길은 포장이 잘 되어있어 비가 와도 질적거리지 않는다. 대부분이 자가용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서 걸어 다닐 일도 별로 없다. 장화를 기능적인 면에 패션을 더한 패션레이니부츠라 부르고 있다. 화려한 색깔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패션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8. 지금까지 내 장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화에 대한 나의 꿈도 조금씩 잊혀갔다. 그러나 꿈이 완전히 사리진 것은 아니었나 보다. 세월이 지나도 가끔씩 뇌리 깊은 곳에서 검정장화에 대한 아련하고 귀한 그리움으로 남아 꿈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9. 아직도 비가 오고 있어 비닐 우산을 하나 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검정정화 대신 목이 길지 않은 예쁜 꽃무늬 장화 한 켤레를 샀다. 직장 다니고 있는 딸애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5. 어머님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 권은희
1. 5년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외 아들인 우리하고 안사시고 넷째 딸하고 사신다고 청주로 가셨다.
2.두어달 전 청주 시누이한테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말을 잘 못하고 오른쪽 팔을 못 움직여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올해 어머님 연세가 95세이시다.
3. 의사선생님이 이번주를 못 넘길것 같으니 가족들 모두 면회하라고 해서 바로 어머님 뵈러 갔다. 어머님은 뇌경색인데 오른쪽을 못 쓰시고 목 넘김을 못 해서 코에 호스를 끼우고 소변줄을 달고 계셨다. 어눌하긴해도 말은 알아들을 수 있게 하셨다. 가래가 올라와도 넘기질 못 해 호스를 목에 넣어 가래를 빼냈다. 고통 스러워하시며 움직일수 있는 왼쪽 팔과 다리로 몸부림을 쳤다. 간호사는 우리를 쳐다보며 이렇게 빼내지 않으면 기도가 막혀서 이틀 내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4. 어머님은 기진 맥진해 눈도 못뜨고 계셨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남편은 눈물을 보였다. 면회시간이 끝나서 간다고 하니 눈을 번쩍뜨시고 눈으로 남편을 찾았다. 다음날 의사선생님하고 상담을 했다. 치료는 할수도 없고 90년 넘게 사용을 했으니 한계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침통한 심정으로 울산으로 왔다.
5. 도착하자마자 간병하는 시누이한테 전화가 왔다. 어머님 혈압이 계속 떨어진다고 했다. 혈압을 올릴수는 있는데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이 있고 연명 치료라서 보호자 승낙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시누이 5명이 계속 전화가 왔다. 남편은 중심을 못잡고 우왕 좌왕 했다. 어머님만 생각하면 안하는게 나은데 자식 입장에서 이렇게 보내긴 너무 아쉬우니 한번은 해보자고 합의를 했다. 다행히 인위적으로 올리지 않았는데 차츰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6. 그렇게 1인실에서 별 차도 없이 한달 넘게 계셨다. 면회를 가도 코로나 때문에 만날수 없어 병실 창문 밖에서 뵙고 오기를 여러번했다. 병원에서는 입원 일수가 만료돼서 퇴원을 해야하니 요양기관을 알아보라고했다. 남편과 시누이들은 그럴수 없다며 다른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한 열흘 후 지금 병원으로 재입원시키자고 했다. 알아보니 재 입원은 불가 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부랴 부랴 요양병원과 요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어머님은 치료를 요하는 상태가 아니니 요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7. 요양원 가시는 날이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시누이들이 먼저 와 있었다. 요양원으로 가기위해 엠블런스에 탔다.어머님이 충격받을까봐 아무도 요양원에 간다는 얘기를 하지 않아서 집으로 가는줄 알고 좋아하셨다. 시누이가 "엄마 지금은 집으로 못가 노인들을 전문적으로 돌봐주는곳 으로 가는거야 거기 있다가 다시 집으로 올수도 있어"라고 했다. 어머님은 소리를 지르시며 " 양로원으로 가는거니?"하며 싫다고 고개를 저으셨다. 한참을 눈을 감고 계시더니 "오늘 나하고 같이 있자"하셨다. 시누이가 그렇게 마음대로 할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나는 얼른 "알겠어요 우리가 함께 있을께요"하며 손을 잡아드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살아온 세월이 40여년이다. 다 좋을수만은 없었다. 섭섭하고 힘들게 한적이 한 두번이었겠나 하지만 모든걸 다 내 잘못으로 돌렸다. 나쁜기억 내려놓으시고 좋은 것만 기억하세요. 계시는 동안 친구분들도 사귀시고 편안하게 사세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종가집 맏며느리로 그렇게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시더니 지금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했다.누워계신 어머님 눈물이 흘러 귀에 고였다. 어머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8. 요양원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나와서 바로 어머님을 병실로 데려 갔다. 복지사와 간호사는 어머님에 관해 여러가지 물어 봤다. 그리고는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니 당분간 면회는 삼가해 달라고 했다. 어머님께 인사도 못하고 복지사한테 어머님 잘 부탁드린다고 하며 나왔다. 초점없이 누워 병실로 가던 어머님모습을 떠올리며 우리의 미래를 생각했다.
9. 시누이들 하고 헤어져 승용차에 탔다. 차라리 정신이나 없으면 좋겠다며남편은 핸들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 저리도록 아픈데 저 마음은 오죽할까, 요양원에 모시는게 큰 죄를 짓는것 같았다. 남편은 집으로 오면서 "어머님은 성격이 쾌할하시고 다른사람과 얘기하길 좋아하니 금방 적응하실거야 요양원 프로그램에따라 노래도하시고 수건접기도 하며 집에 계시는것 보다 많이 웃으시며 즐겁고 행복하게 사실거야 면회 자주 옵시다" 했다. 나역시 "그럼 그렇고 말고요 그렇게해요" 했다. 간절한 바램이 말이되어 입 밖으로 나온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