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경복궁으로 소풍을 갔던 때로 기억합니다. 외국인 관광객들한테 궁터를 소개하는 가이드 옆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뽕나무 이야기를 들었는데, 며칠 전 문헌검색을 하던 중에 뽕나무[桑]가 키워드로 나와서 갑자기 그때 경복궁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라 한 번 찾아서 정리해 봤습니다.
앞서 온주귤과 유자나무를 이야기할 때에는 ‘토양의 산성도’라는 자연환경을 근거로 내세웠었는데요, 여기서는 조금 각도를 달리 해서(다른 외적인 입지조건..) 논해볼까 합니다.
중간에 ‘조선은 육류 소비량이 엄청난 나라였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송계선생님의 동영상 강의에서 그대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
한국사 공부를 제법 했다고 자부하는 수능시험, 한국사능력시험, 혹은 공무원 수험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보고 싶다.
“고려시대 때 도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禾尺]과 조선시대 때 도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白丁] 중에 어느 쪽이 그 수가 더 많았겠는가?”
이렇게 지엽적인 문제라도 어디서든 기록을 찾으면 답은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런데 정답과 그 이유가 뭐냐를 떠나서, 현행 역사관련 시험문제들과 그걸 준비하기 위해 듣는 소위 ‘노량진 일타강사’들의 강의가 어떠한지를 보면, 그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십중팔구 ‘배운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기껏해야 화척(禾尺), 백정(白丁)이라는 말의 뜻이나 외워서 아는 게 고작이다.
‘조선이 아무래도 시간적으로 나중이니까 인구 수가 많아져서 백정들도 많아지지 않았겠나.’라고 대답했다면 그나마 상식이라도 있는 것이고,
‘도축을 한다는 건 가죽이나 고기, 뼈, 뿔 등을 얻기 위해 동물을 잡아야 했다는 말인데 그 수요가 늘거나 줄어들었다면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혹은 인접국과의 불평등조약과 같은 외교관계 등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답했다면 상당한 통찰력을 갖춘 학생이라 할 만하다. 점수 따는 공부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지만 사실은 이런 접근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질문자가 생각하는 것 외에도 여러가지 답이 나올 수도 있다. 다만, 역사는 인문학이면서 과학이기 때문에 올바른 근거를 갖추어 주장한다면 문제를 던진 사람과 생각이 달라도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인정할 줄 아는 자세는 필요하다.
이게 대단한 문제라서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이런걸 알고 있다고 으스댈 하등의 이유도 없다!(제목과도 관련 없는 얘기같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왜 이렇게 시작하는지를 알게 된다. 뽕나무와 밤섬 이야기가 아니라 그에 관한 왕조실록 기록을 사례로, 더 본질적이고 고질적인 폐단을 드러내려 한다는 게 차라리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물리나 화학 같은 자연과학과목을 제외한 모든 교과목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이런 글을 작성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는 있지만, 어떤 현상이나 행위를 흐름으로 분석하고 인과관계로 엮어서 유추하고 검증하는 훈련이 건전한 메타인지로 이어진다는 생각만큼은 흔들리지 않는게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 대륙조선사와 같은 진실을 밝혀내는 힘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을 보면 ‘뽕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왕실과 사대부들이 애용하는 고가품이었을 뿐, 일반 하층민들의 생필품이라 볼 수는 없었던 ‘비단(緋緞)’의 원료다.
나무가 하필이면 ‘뽕나무’다. 기껏해야 13만평에 불과한 삼청동 경복궁 세트장과 그 옆동네 창덕궁터, 그리고 서강대교가 가로지르는 한강의 밤섬에 심었다는 말인데..
이게 어째서 개짖는 소리인지를 밝혀본다.
“터가 좁아도 까짓거 심을 수 있잖아! 못할게 뭐있어?”
뒤에서 후렴구로 한 번 더 얘기하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개돼지가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거다.
먼저, 관련자료들을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2024년 현재 율도(栗島)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총 7군데다. 인천광역시 서구에 있‘었’다던 두 군데의 율도는 그 정확한 위치도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여기서부터 모순점이 하나씩 드러난다!) 아직은 심증 뿐이지만 태종실록과 고종실록에 나타나는 부평부(富平府)의 율도가 그곳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이곳은 차후에 다음 글에서 파헤쳐 볼 것이다.
보다 정확한 관련내용을 추려내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에서 '栗島'로 검색을 해 보면 총 32건의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뽕나무 혹은 누에[蠶]라는 키워드가 나타나는 율도는 앞뒤 맥락을 보았을 때 경복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타 지역은 될 수 없다고 보았고, 결론적으로 한강의 밤섬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별론이지만 ‘감초(甘草)’를 심었던 율도도 두 차례 등장한다. (어쩌면 일제가 한반도에 이식하지 않은 지명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조심스레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뽕나무와 감초가 같이 등장하는 율도는 아니어서 제외시켰다. 1451년 4월 기록에 율도에 뽕나무만 심고 다른 작물은 심지 말라는 명을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같은 해 11월에 율도에 심었던 ‘감초’가 무성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타 지역의 율도로 추정될 뿐이다.
정조대왕 친위대였던 장용영 병력만 2만명이다. 그런데 대동여지도 내용을 보면 서울 인구가 1만 8천명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기록이 나온다. 가구[戶] 수보다도 적다는 게 말이 되는가? 조선 후기 서울 사람들은 전부 다주택자들 뿐이었나? 멍멍이도 하지 않을 이런 천박하고 상스러운 조작질을 도대체 어떤 인간이 했는지는 몰라도,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어둠의 도시(?)에서 뽕나무를 1만 그루를 넘게 심었다면 어느 정도 규모의 인력을 어디에서 어떻게 동원해야 했을까.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는 것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예외 없는 법칙이 아닌가. 세종 때에 8천 그루를 심은 것도 모자라서 문종 때에 또 심었다는 기록이 나오는가 하면, 율도가 뽕나무를 키우는 천혜의 조건을 갖췄으니 계속 심게 해달라고 청하는 기록이 인조실록까지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 ‘개짖는 소리’라고 결론을 미리 깔아뒀는데, 경복궁, 창덕궁은 백만 번, 천만 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더 기가 막히는 건,
서강대교가 가로지르는 그 ‘섬’이 문제다..
우선,
바로 앞에서 말한 서울의 인구 외에도,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순서대로 질문들을 나열해보자.
첫째, 뽕나무 8천 그루를 심었다는 섬 이름이 밤섬[栗島]이 되려면, 밤나무는 도대체 몇 그루를 심었다는 말인가? 그 묘목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조달했을까? 송파구 잠실동에서 가져왔을까?
둘째, 더군다나 양잠업은 비단 생산으로 경제성을 담보하는 전략산업인데, 수령이 수 백년이나 되는 그 많은 뽕나무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흔적은 남아 있는가? ‘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가 반도 서울에 있는 밤섬에서 탄생한 표현인가? 혹시 일제시대 때 죄다 뽑아버렸다는 기록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교과서 쓰는 놈들 입버릇처럼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셋째, 일반인 출입마저 통제하고 있고, 외래종 한두 가지만 유입되면 생태 균형이 무너진다고 할 정도로 민감한 곳이 바로 밤섬이다. 수 천 그루의 뽕나무가 다른 수목들과 주고받을 영향은 고려할 대상이 아닌가? 조선시대 때에는 멸종위기종이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종에 대한 연구조차 없이 그냥 묘목만 옮겨 심었단 말인가?
넷째, 와우산 꼭대기에 올라가야만 깐밤처럼 보인다고 밤섬이란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는 말도 억설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걸핏하면 폭우에 토사가 쓸려가는가 하면, 장마철에 강물이 범람해서 섬의 일부가 수면 아래로 잠겼다가 다시 돌출하기도 하고, 하천이 실어나르는 퇴적물 때문에 점점 넓어진다는 섬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무쌍한 곳을 수 백년 동안, 그것도 특정 위치에서 깐밤과 비슷하게 봤다는 이유로 ‘栗島’라고 명명했다니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사투리인가?
다섯째, 이런 코딱지만한 무인도에 '주(州)'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여놓고 '율주(栗州)'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는 진짜 천인공노할 개소리로 보이는데, 조선의 1개 ‘주(州)’를 형성하는 인구 수가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천지가 개벽해도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위 다섯 가지 질문에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춘 반박을 전부 내놓는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 글을 작성하는 목적, ‘뽕나무’와 관계가 있다..
첫머리에서 언급한 문제를 다시 짚어본다. ‘고려와 조선의 도살업자’들 머릿수 문제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불교’다. 고려가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였음은 누구나 알 터, 그런 나라에서 살생을 장려할 리 만무했으리라는 것 또한 불문가지의 일이다. 가축을 함부로 죽이는 일 자체가 금기라면 짐승들을 잡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웠을 게 아닌가. 여말선초 시기에 들어서 신진사대부가 권력을 잡고 불교를 억압함에 따라 도축업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되고, 동물을 잡는 목적을 떠나서 도축업 또한 하층민들의 직업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될 거라는 걸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배우지 않은 것은 없지 않은가. 실제로 조선은 육류 소비량이 어마어마한 나라였다!
이런 간단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조차도 인과관계를 통한 추론을 요하는데, 친일개뼉따구 놈들이 싸질러놓은 현행 한국사 교육의 현주소는 그야말로 답답함을 넘어서 혀를 차게 만들고 있다!! 신분제도는 ‘사회사’에서 배우지만, 종교는 ‘문화사’에서 배운다. 정치사(政治史), 경제사(經濟史), 사회사(社會史), 문화사(文化史) 사이사이에 바리케이트를 쳐 놓고 가르치고 있으니, 그걸 연결지어서 思考하는 힘은 자연스레 퇴화되고 공부를 할수록 바보가 되어 간다. 심지어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정치사만 모조리 끝낸 다음에 경제, 사회, 문화사도 그런 순서대로 가르친다는, 이른바 ‘테마별 분류사’라는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말까지 탄생하고 말았다!
교과서 꼴아지가 이러하니,
청일전쟁[政治史]이 발생한 이면에는 청과 일본 사이에 경제적인 이권 확보[經濟史]의 목적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인구 수가 고작 500만(?!)이었던 시대의 신분제도와 군역제[社會史]를 공부해도, 윤관(20만명), 이성계(30만명), 김종서(20만명)가 이끌었던 군대의 규모[政治史]를 알면서 아무런 의심도 할 줄 모르고,
무신정권 시대 동명왕편(東明王篇)의 저자 이규보의 동기동창으로 ‘하늘의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른다’는 시(詩) 구절을 쓴 ‘진화’라는 시인[文化史]을 살펴보면, 그 작품의 한 구절만 보더라도 당연히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이었으며 서방(書房) 출신들과 뜻을 같이 하면서 사대주의자들을 경계했던 인물[政治史]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도, 그런 생각을 할 줄 모르니 텍스트만 줄줄 외워서 기계처럼 문제를 풀고,
금과 은을 만들어 수출[經濟史]하는 나라에서는 광산이 존재하며 반드시 제련소와 대장간의 흔적[文化史]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도 모른다.
人文學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 따위는 개나 줘 버린지 오래다..
이렇게 썩어문드러진 교육을 받으면서 시험문제나 푸는 기계로 전락해 버리고, 그렇게 자라난 세대가 또다시 그 후학들을 똥멍청이로 사육하고 있으니, 현 서강대교가 가로지르는 섬에 뽕나무 8천 그루를 심었다는 말마저 곧이곧대로 믿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며, 거짓말 하나가 연쇄적으로 또다른 거짓말을 낳게 되는 것이다!
조선 세종 때에 밤섬의 넓이가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설령 어느 서지엔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까지는 모른다고 치자. 조선총독부가 그걸 가만히 놔뒀을 리도 없거니와, 기록이 존재한다 해도 어떻게 조작을 했는지도 알아내긴 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나무를 심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봤을 때 답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뽕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뽕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뭘 뜻하는가? 뽕나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뽕나무를 심어놓기만 하면 거기서 명주실이 주렁주렁 열리고 비단옷이 열매처럼 쏟아져 나오나?? 때에 맞춰 누에를 먹일 잎을 따야 하고, 누에가 고치를 뽑아낼 수 있을 만한 잠실(蠶室)을 만들어야 한다. 누에가 어떤 환경에서 잘 자라는지 파악하고 누에 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누에가 죽지 않도록 적절한 온도를 제어할 수 있는 설비도 필요하며, 전문 양잠업자들을 통해 길쌈을 하고 방직기를 돌려서 비단을 짜야 한다. 경복궁에 납품할 고가품일수록 다양한 염색 재료와 기술도 필요했을 것이다. 임금이나 왕실 비빈들이 입을 옷을 아무렇게나 만들었겠는가. 조선 최고의 자수(刺繡) 전문가가 테크니션으로 활약했을 것이고, 조선 최고의 회화(繪畵) 전문가가 디자이너로 활약했을 것이다. 그에 수반하는 시설들과 공장 부지는 어떻게 마련했단 말인가. 밤섬에서는 뽕잎만 따고 그걸 배에 실어서 송파구 잠실동까지 운반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주인 없는 야생 뽕나무도 조선 정부에서 엄중히 보호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그 값비싼 비단옷의 원료를 임꺽정 떼거리로부터 지키려면 수군 병력이라도 배치해야 했을텐데, 밤섬에 진(鎭)이나 경계초소가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있는가? 비단을 얻으려면 원산지와 가까운 곳에서 양잠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야 품질의 하락을 막을 수가 있고 운송비와 인건비도 절약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뽕나무에서 뽕잎만 나오는 게 아니다! 품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오디 열매와 상(桑)황버섯도 얻을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수령이 찬 나무에서는 상백피(桑白皮)라는 약재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뿌리부터 줄기, 잎, 열매까지 버릴 것이 없는, 그야말로 일거다득(一擧多得)의 수목이 뽕나무인 것이다! 오디가 나왔으면 착즙을 통해 차를 만드는 다점(茶店)이 있었을 것이고, 과실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었을 것이다. 상황버섯이나 상백피를 수확했으면 약재와 건강식품 등을 가공하는 약방이 있고 의료기관이 있었을 것이다. 비단이라는 상품 자체가 고가품인 만큼 인근 지역에서는 뽕나무에서 나온 생산물들을 거래하는 도매시장도 형성되었을 것이고, 수 천 그루 규모의 뽕나무 농장이라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양잠업을 배우고 구경하며 체험학습까지도 할 수 있는 관광산업의 현장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산업은 지리조건, 자연환경, 식생이 특산물을 낳고, 직업의 분화와 전문화를 유도하며, 결과적으로 그 해당지역의 경제력과 문화를 형성하고 국가나 자치단체를 지탱하는 들보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단순한 농장의 개념을 넘어서 그 모든 제반 인프라를 아우르는 경제특구가 바로 뽕밭이어야 한다.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물리적인 면적뿐 아니라 지역 경제가 순환하는 무형의 공간까지 품을 수 있는, 갑절의 갑절 만큼의 부지가 필요한 게 바로 양잠업인 것이다!
4만 5천 제곱미터를 겨우 웃도는, 8천그루의 묘목들이 뿌리내릴 자리도 부족한 한강의 밤섬에, 그 대규모 종합산업단지가 다 들어간다고????? 말문이 막힌다.
歷史가 무슨 어린애 머리맡에서 읽어주는 판타지 전래동화란 말인가!!
조선이 반도에 있었다면 바보도 속지 않을 황당한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경기도 안성시, 이천시로 개편된 곳이 과거에는 죽산군(竹山郡)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을 이름이 ‘竹山’이다. 거길 가면 어떤 야생나무가 자라고 있어야 하겠는가. 1912년 12월, 죽산에 대나무가 없어서 일본놈들이 대나무를 심었는데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다는, 아주 기가 막힌 기사가 있다! 그게 어떤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꿈에도 모르는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불모지에 대나무도 심어주고 종묘 담벼락과 석굴암 본존불까지 보수해준 일본놈들한테 고마워 해야 하는게 아닐까. 일제가 나쁜 짓을 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분노하면서 왜 이런건 기억하려 들지 않는가...... (眞짜 분노는 眞實을 아는 사람들의 몫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 글에서 언급한 것은 ‘4만 5천 제곱미터’의 땅에 ‘8280그루’를 심었다는 뽕나무다.
심지 못할 건 없다! 뿌리가 뒤엉켜서 고사하든 말든 빼곡하게 심으면 되는 거고,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서 농사를 망쳤다싶으면 묘목을 가져와서 또 심으면 될 게 아닌가! 뽕 따는 시즌이 오면 근정전과 인근 전각들은 싹 다 누에새끼들한테 넘겨주고 세종대왕은 바깥에 나와서 천막 치고 주무시면 된다!
.. 우리 조상들이 무슨 바보 천치란 말인가.
이래도,
“터가 좁아도 까짓거 심을 수 있잖아! 못할게 뭐있어?”
이렇게 말한다면,
다시 말하지만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개돼지가 만드는 게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해주고 싶다. 더불어, 역사와 인문학을 논할 자격도 없다는 말도 해주고 싶다. ‘불교’라는 키워드로 도살업자 머릿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줄 아는 정도의 학생이라면, 서울에 있는 밤섬이 가짜라는 진실도 충분히 간파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적 사고는 머릿속에 ‘人文’을 갖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결론,
세종실록 뽕나무 기록은 절대로 한반도 서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을 자리도 없었고, 심을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뽕나무 8280그루를 심은 밤섬도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누에 1마리가 뽑아내는 실의 길이가 1.2km에 달한다고 한다. 귀신도 모르는 걸 궁금해 해봤자 달라질 건 없지만, 세종 때에 뽕 1만 그루를 심기 전에 왕들이 입었던 옷은 국산품이었을까, 아니면 수입품이었을까. 고려시대 때도 마찬가지지만 위 그림에서 조선의 수출품과 수입품목이 뭔지를 보면 중국으로부터 비단을 수입했다고 나와 있다. 큰 나라는 자존심이 있다. 비단을 정확히 어떤 품목과 교역했는지는 몰라도, 인구 수가 수 억에 달하는 중원에서 그런 사치품을 제후국들한테 팔았을 정도라면 宋나라, 明나라, 淸나라 할 것 없이 대륙의 황제(?)들은 변방 떼놈들한테서 들여온 저질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밤섬[栗島]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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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감사합니다. 아주 심도있게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율도가 어디냐고 하면서 은근슬쩍 명나라 땅도 아닌 곳을 명나라 라고....
명나라의 북쪽은 북평 지금의 북경이지요...(북경이란 지명은 모택동이 1950년에 만든 지명 입니다. 명나라때는 분명히 북평이라고 표기 했읍니다.
그 때문에 주원장이 발행한 돈 대중 통보 배 북평전이 아주 귀한 보물이지요....)
율도와 거래 하던 시절은 청도와 왕래가 있었지요. ...
치우 천왕과 황제가 싸우던 땅에 율도란 지명이 등장 합니다....
間島란 곳에 만주국을 세우듯이 율도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면
한자 島 제되로 한문의 의미나 알고 써야 되지 안을까요.....
세종 시절 이야기 할려면
이성계가 어디의 호족과 어떤 관계냐 이야기 부터 해야 합니다..
실제 내용 다 짤라먹고 대륙 조선.... 별로 .....
이성계의 군사가 조선땅에만 있었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
선비족 역사기록 잘 찾아보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