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단 한 글자도 헛된 적이 없었다.
-언어의 힘을 견딘 언론인이자 소설가 김혜지를 추모하며.
본인을 포함한 세상의 다양한 삶에 이입하여 눈물 흘렸던 그를 위해. 오늘 하루만은 김혜지를 위해주었으면 한다. 날이 화창하던 5월의 봄.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를 우리는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홀로 남은 커다란 집의 어두운 고요함을 무서워하는 그를 위해 그의 숨과 생명이 희미해져 갈 때, 그의 친한 친구들과 일가친척들은 그의 옆을 지켜주었다. 삶의 의지가 강하였기 때문일까.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얼추 다 왔을 때까지 버티다가 그는 모두에게 감사하며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사후세계가 있음을 믿던 그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빨리 보내고 꿈꾸던 유토피아와 같은 천국에 가 먼저 가 있었던 부모님을 더불어, 항상 이야기하던 ‘흙과 바람으로 남은 친구들’을 만나길 바란다.
나와 혜지의 인연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소꿉친구도 아니었고, 자라던 동네가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접점하나 없던 우리는 대학교에 들어와 비슷한 취미와 웃음코드, 꿈이 유사하다는 이유로는 부족할 만큼 급격하게 친해졌다. 그는 자존감이 매우 높고 매혹적이라 나는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일을 토대로 우리가 겪어보지 않은 수많은 사회의 문제점과 비극에 대해 논하였고, 같이 술을 같이 마실 때 마다 ‘다리가 무너지거나,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그런 인간재해가 발생하면, 기자들은 그저 살아남은 사람들이 본 그 장면이 어떠했는지, 지금의 심경은 어떤지를 묻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며 어떻게 그 사람들을 구제할 것이고, 어떠한 보상을 할 것이고, 그러한 재해가 발생한 이유를 파해쳐 이후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며 자신이 기자가 왜 되어야하는지에 대해 마치 면접관에게 이야기하듯 읊조렸다. 또한, 그가 교회에서 2주가량 다녀왔던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결혼하러 오는 이주여성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베트남 봉사를 다녀온 후 여성인권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몸으로 겪으며 다녀와 술을 마시며 말하다 눈물짓던 그는 결국 사회적 소수자, 약자에 이익을 대변하며 불행함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알려 모두가 해결책을 찾아가야한다는 주장했다. 그는 언론인이 가진 언어의 힘을 알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에서 잠시 이야기하듯 천국에 있는 사람은 구태여 지옥을 볼 필요가 없지만,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천국만을 바라보며 산다. 이 구절을 읽고 그는 천국에 있는 사람에게 지옥을 알리면 어떠한 방식을 통하던지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변화가 발생하지 못하더라도 천국은 지옥과 같은 곳의 존재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그러한 역할을 언론이 해야만 한다며 주장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진 그가 방송기자로 이루어낸 크고 작은 일들을 나는 기억한다. 사회부 방송기자가 된 그는 대학교시절 유도를 해서일까, 잠시 주짓수를 배워서일까 몸을 사리지 않고 사건 사고가 생기면 뛰어다녔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름 이름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안에 있던 권위주의적 성차별과 법을 피해 교묘하게 존재하였던 노동자의 임금차별을 고발하며 기업인들의 부패를 알려 여론을 형성하고 성차별적인 행동을 하였던 사람들에게 징역과 사내 성차별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졌고, 노동자의 임금차별에 대한 회사의 사과와 보상을 안겨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그 사건만을 알겠지만, 몇몇의 기업인들에게 그는 블랙리스트로, 수많은 노동자에게는 고마운 사람으로, 성차별을 직접적으로 당해왔던 여성들에게는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름 있는 기업을 상대로 한 건 해낸 그는 그 때부터 언어의 힘이 가진 무게를 깨닫고 스스로의 글과 말에 대해 엄격하게 검열을 하였다. 확성기처럼 약자의 말을 외친다는 건, 다른 주변의 소리를 감추는 것이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바로 찾아가 취재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겪고 결국 43세에 기자를 그만두고 상대적으로 글에 대해 되돌아 볼 시간이 많은 작가를 도전하여 다양한 소설을 내며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여기까지가 삶에 대해 얕은 고뇌를 수없이 떠올린 언론인이자 소설가 김혜지의 삶이었다. 이후 그의 소설이 자극적이라, 너무나도 날 것이라 하위문화로 분류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무조건적으로 약자의 편만을 들며 여론몰이를 했다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되었든, 김혜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이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그를 위해 짧게나마 기도해주었으면 한다.
그는 떠나기 전 미리 연락을 못하였던 지인들을 포함하여 유년시절 연락하였다 연락이 끊긴 다른 친구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어 신문기자인 나에게 신문 광고료를 보내며 본인의 행장을 작성해 달라며 부탁하였다. 방송기자를 하며 인간답지 않은 인간에게 혐오를 느낀다며 장난스럽게 ‘인간혐오’가 생긴다 하였던 그는 모순적이게도 사회의 수많은 약자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알리며 평등에 대한 여론을 만들어갔었다. 이렇게 사람들을 애증했던 그를 위해 이 글을 읽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워하길, 그를 몰랐던 사람들은 잠시라도 세상에 남아 무엇이라도 남긴 그를 위해 애도해주시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평범한 나의 영웅 김혜지를 떠나보내며, 그의 열렬한 독자 ooo
자기소개서
<북극성주의자, 혐오를 혐오하다.>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1711256 김혜지
혐오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저 듣고 지나치기 쉬운 사회의 약자들의(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비명을 대신하여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게 된 것에는 정화여자고등학교에서 장애어린이집 봉사의 기억과 선배들과의 만남이라는 시간에 박 정 방송기자와의 인터뷰와 상담을 통해 언론인이 가진 힘에 대해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고, 사회의 어떠한 문제에 대해 공론화를 할 수 있으며 옳은 여론을 만들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더불어 사건이 생기면 바로 취재할 수 있는 실행력이 요구되는 직업이기에 바로바로 실천하는 행동력을 키우기 위해 학창시절부터 수많은 도전들을 하였습니다.
중학교시절 조선일보에서 개최한 청소년 독후감쓰기 대회에서 저는 대구교육감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시험기간에 시험공부와 독후감쓰기 대회 둘을 모두 잡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바로 행동에 옮기는 빠른 실행력으로 독후감을 완성하였습니다. 수상을 한 사람들의 독후감은 나중에 신문에 글이 실리고 매회 수상자의 글이 문집의 형태로 발행되기에 이 시기 가장 이슈가 되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려 ‘20년간의 수요일’이라는 책의 독후감을 쓰고, 시험공부 또한 제시간에 맞추어 진행하여 대회수상과 더불어 좋은 시험 성적을 동시에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후감대회를 본 순간 바로 계획하고 고민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독서토론동아리에 들어가 문집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비상’ 출판사의 후원을 받기도 하며 매년 한 권씩 문집을 집필하기도 하였고, 대구 KBS 방송에 출현해 한국의 학원중심 입시 제도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하는 등의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일단은 행동에 옮겨 도전해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물론 수많은 도전들 가운데서 실패하거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대구 MBC에서 진행하던 대구지역 고등학생 토론대회 ‘아이언’에서는 학교대표로 선출되기 위한 교내 대회에서 탈락을 하기도 하는 등의 경험도 있었지만, 이 또한 좋은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고등학교의 생활을 통해 저는 그저 어떠한 목표를 위해 행동력은 가진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의 갈등관계 내에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행동력 또한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저 강등과정이 싫어서 회피했었지만 동아리 내에서 선후배간의 갈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릴 가능성도 생기는 등의 갈등이 있었지만 대화를 통해 사람들 간의 다른 가치관과 각자의 우선순위, 이해관계를 파악하게 되는 등 사람간의 갈등상황이라는 위기를 극복하며 저의 강점이라 여겨지는 행동력은 다방면으로 강화되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저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외부장학회인 정수장학회에 가입할 기회가 생겼을 때, 바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지도교수님께 찾아가 추천서를 받고, 서울에 면접을 보러가고 합격하여 장학생으로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장학회 내에서도 저는 경북, 경남 지회 학술제에 참가해 1등을 하는 등의 성과를 내었습니다. 또한 한 번도 쉬지 않고 단기로 잠시 하는 것이 아니라 1년 정도로 장기아르바이트만을 계속하며 스스로 돈을 벌고 혼자 해외여행을 가는 등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동시에 막연히 수능공부가 끝나고 운동을 통해 체력을 키워야겠다하고 생각한 것을 대학교에 들어와 곧바로 실행하였습니다. 1월부터 화장품가게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집 주변의 요가학원을 다니며 겨울에는 주짓수를 배우기도 하고 이를 통해 학교에 유도 동아리에 가입하여 경산시장기 유도대회에 참가하는 활동을 하며 이전에 막연한 목표였던 것들을 행동으로 일구어내었습니다.
기자는 어떠한 사건이 생기면 바로 그 사건현장과 더불어 주변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파악하고 조사해야합니다. 이러한 직업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덕목인 행동력이 저는 남들보다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학교에 들어와 자본주의의 허와 실에 대한 공부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사상을 배우며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가치평가 등을 공부하며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약자를 국가와 언론이 어떻게 보호하여야 하는 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장애인 유치원에 봉사활동을 가며 막연하게 약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지만 대학에 와서 정치와 다양한 인권의 형태를 보고 저의 목표를 구체화 하는 중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 ‘북극성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북극성에 완벽히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 북극성을 향해 북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구 KBS에 입사하여 행동력 강한 방송기자로 활동하며 저는 소외되기 쉬운 약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어떠한 곳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던지 저는 당연히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발언의 무게를 알기에 확성기와 같이 언어의 힘을 가진 저는 공정하고 올바른 언론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 당연히 완벽한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려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