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맨발이다
우산을 쓰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다
최후의 지점은 어디일까
비 오는 토요일
눈 오는 일요일
컵이 깨지지 않아 심심한 공휴일
종일 길거리를 쏘다닌다
뒤집힌 우산과 풀어진 두루마리 화장지가
골목 입구에서 나뒹군다
유리컵 위 유리컵
유리컵 속 하늘
거미줄을 타고 내려온 시간들이
발목에 휘감긴다
어디에선가 종이배가 침몰한다
나는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컵을 깨뜨리는 사람
비는 눈물
결국 너라는 지점에서 흘러내린다
젖은 네 눈동자 속에서 버둥거리는 나를 본다
목마름은 일상
저녁이 비에 젖는다
나는 누구의 우산일까
이쯤에서 우산을 접어야 할까
우산 안에 얼굴을 묻고 계속 걸어야 할까
창문 아래 어항
어항 속 금붕어가 헤엄친다
어항 밖 금붕어가 파닥인다
비를 걸어 잠근 우산
조금 남은 일요일을 닦는다
저녁이 흘러넘친다
파리지옥
손이 닿는 곳마다 무덤이 도착했다 천국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덫이 되어 제 목을 졸랐다 시험에 든 이정표는 몇 년이나 서 있을까? 잘 풀리는 집*을 앞세워서 아는 집을 방문한다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이웃이다 빛을 잃은 별이 복도 끝 작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잘린 꼬리는 열쇠였다 그런 날이면 손전등은 별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불빛이 연거푸 동그라미를 쳤지만 반응이 없었다 〇와 Ⲭ에 대한 편견은 대개 예의가 없었다
청춘이 황색점멸신호등처럼 깜박거렸다 손을 대는 곳마다 실금이 생겼다 백색소음이 기승을 부리는 깊은 밤
*두루마리 휴지 이름
서랍을 비우는 시간
자 이제는 서랍들을 위로할 시간, 낡은 서랍에게 서랍은 힘겨운 주머니가 맞습니다 감정은 나눠진 칸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넘치기 쉬운 감정을 넣은 당신은 가벼운 걸음의 행인쯤으로 생각할까 고민 중,
나는 비울 줄 모르는 서랍이다가 비우는 서랍이 되기로 작정했거든요
잊히길 좋아하는 서랍 속 내용물은 습식의 습성을 닮았습니다 신문지를 펼치면 횡단보도 앞, 울고 있는 서랍 좌우로 두 개의 서랍이 웃고 있다니, 감정이 인간적이란 소문은 믿을 수가 없네요
무료급식소 앞을 메운 고향을 등진 서랍들, 내려다보니 서랍들이 빠져나온 집은 새장을 닮았네요 한 무리의 사람이 새가 되는 오후입니다
서랍을 빼낸 후 무너진 가슴으로 내가 울고 있네요 루돌프는 12월의 산타를 열고 거리로 뛰쳐나왔어요 오늘밤은 서랍에다 물 먹는 하마라도 집어넣어야겠어요 하마의 입속으로 울음이 사라진다는 소문을 믿으며 지금쯤은 서랍을 비우고 싶은 시간입니다
난시
홍차가 생각을 우려낸다
붉은 응접실엔 처음부터 푸른 색깔은 없다
앙리 마티스의 생각이 나뭇잎을 물들인 것처럼,
찻물에 잠긴 찻잔의 내면은
당신의 머릿속을 물들일 음모
홍차가 점점 더 붉어진다
지금 찻잔은 붉은 것들의 작업실
찻물을 젓는 당신의 이 순간은 숨이거나 쉼
붉음은 찻잔 가득 번져보는 혼자만의 노동
회오리친 찻잔 속에서 홍차가 홍차일 때
귀뚜라미는 오래 울며 밤을 식히고
달을 씻은 연못이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간다
급정거한 오토바이가 길을 막은 생각에 부딪혀 쓰러진다
치킨 두 마리가 종이봉투를 뚫고 나와 껴입은 튀김옷을 벗고 맨살로 해체된다
찻잔 속 충혈된 눈동자는 새벽녘에야 눈을 감는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2224455E183EA106)
현대시 기획선 27 『파이 데이』
김사리_본명 김현미. 경남 밀양 출생. 2014 계간 시와사상에 「헐거운 햇빛의 내력」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첫댓글 비울 줄 모르는 서랍이여서 채울 길 없나봅니다..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시집 출간 축하드려요~
천국일지 모른다는생각이 덫이 되어 제목을 졸랐다 시험에 든 이정표는 몇년이나 서 있을까 잘풀리는 집을 앞세워서 아는 집을 방문한다
ㅡㅡ 오늘 나는 덫인줄도 모르고 천국인줄아는 집을 방문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