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로 낙하중인 연합군 제 1 공수군 병사들
마켓 가든 작전 2 - 위험을 내포한 작전
네덜란드 탈환전은 두 작전으로 나뉘었는데 공수부대 낙하의 <마켓>작전, 영국 제 2군 제 30군단이 선두에 서서 제 69호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는 <가든>작전이었다.
공수부대는 루트 사의 주요 교량을 확보, 지상부대는 3~4일안에 독일 - 네덜란드 국경부근까지 단숨에 북상한다는 것이었다.
라인 강을 넘어 북부에 있는 마을인 아른헴을 점령하기만 한다면 지그프리드 선을 완전히 우회하여 독일 본국으로의 진격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마켓 작전은 제 1 공수군의 5개 사단 중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주요 낙하지점은 3곳으로 남부의 아인트호벤, 나임헨, 아른헴이었다.
미군 제 101 공수사단은 영국 제 30군단의 북쪽으로 낙하하여 아인트호벤 북서지구와 교량을 확보하고 또 미군 제 82 공수사단은 더욱 북동쪽으로 이동해 그레브와 나임헨의 다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영국 제 1 공수사단과 폴란드 제 1 독립 낙하산여단은 아른헴의 철교와 일반교량을 확보하기 위해 작전지역의 북서쪽에 낙하하기로 했다.
아인트호벤 지역의 다리는 거의가 운하에 놓인 다리로 폭파해도 공병에 의해 가교설치가 가능했다.
그러나 나임헨과 아른헴의 3개 다리는 강 폭이 넓어 만약 교량이 폭파되어 끊긴다면 작전은 실패하는 것이었다
마켓 작전은 당시 30,000명의 공수병력을 동원한 역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이었다. 영국 제 1 공수군단장이며 연합군 공수부사령관이던 프레데릭 브라우닝 중장은 전선지휘를 위해 스스로 사령부를 제 1진의 낙하부대(제82 공수사단)에 포함시켰다.
또다른 작전인 가든 작전은 영국 제 2군의 주력인 제 30군단(기갑사단이 주력)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공수작전 전개와 동시에 국경을 돌파하여 국도 69호선을 타고 북상하여 적전 첫날에 아인트호벤의 미군 제 101 공수사단과 합류하여 이틀째에 나인헴의 제 82 공수사단과 합류 후 늦어도 3, 4일 안에 아른헴의 영국 제 1 공수사단과 합류하기로 계획되었다. 그리고 방어임무를 보병사단에게 맡기고 공수사단은 다른 작전을 위해 철수시키기로 했다.
현실적으로 4일이란 기간은 공수사단이 보급없이 전투를 벌여나가기엔 길었다. 또 공수병력들은 대전차무기도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시점에서 연합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전력이 괴멸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앤트워프에서 쉘트 강 하구 이남의 잔병섬멸에 나섰던 캐나다 군은 독일 제 15군에 장갑차량이 없고 바로 도망가버렸기에 싱겁게 독일군을 물리치고 말았다. 그래서 영국 제 30군단은 국도 69호 선상에서 한정적인 저항만을 예상했었다.
한편 독일 제 15군의 패주는 9월에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 원수가 서부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멈추었다.
발터 모델 원수 대신에 임명된 룬트슈테드는 두달 전에 이 자리에서 물러날뻔 할 정도로 히틀러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전선의 장병들 사이에선 인기가 좋았다. 제 15군은 다시 전투가 가능한 상태로 보충되어갔다.
구체적으로는 몽고메리의 영국 제 21군단의 쾌속진격에 의해 분단되었던 스헬데 강 남부와 대서양 연안에 고립된 독일 제 15군의 패잔병들은 탈환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스헬데 강 북부제방을 타고 캐나다 제 1군과 스헬데 강의 측면에서 탈출해 병력 85,000명(차량 6,000대, 총포 600기 이상 포함)을 재집결하는데 성공했다.
코블렌츠에서 부임해 온 룬트슈테드는 바로 국방군 정보부가 보고한 연합군 60개 사단에 대한 방위계획 작성에 들어갔다.
(실제론 49개 사단이었다) 룬트슈테드의 부임으로 겸임에서 풀려나 B군단의 사령관 직으로 돌아온 발터 모델 원수는 아른헴의 서쪽에 오스터베크로 이동했다.
B군단은 벨기에 - 네덜란드 방면을 침공, 방위하기 위한 보병위주의 군단이었지만 프랑스 침공부대(A군단)의 사실상 괴멸로 철수중이었던 SS 장갑사단도 임시로 관할하게 되었다. 또 프랑스 북부에서 철수한 제 15군(구스타프 폰 츠아겐 대장)의 잔존병력도 포함되었다.
쿨트 슈트던트 상급대장은 신설된 독일 제 1 강하저격군을 얻은 후 해안방위로 임명된 719사단(보급부대)과 176사단(부상병이 대부분)등 여기저기서 모인 병력으로 벨기에 - 네덜란드 국경선의 알베르트 운하에 방위선을 구축했다.
또 그는 독일공군의 강하저격병(공수부대)의 창설자이기도 해서 네덜란드 침공전과 크레타 섬 전투에서 실전경험이 풍부했고 직속의 강하저격병 3,000명도 당시 독일군 유일의 전투응전부대였다.
이 때문에 패잔병이라 생각한 연합군은 처음 의도와 달리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프랑스 북부에서 괴멸한 독일 제 85사단을 지휘한 쿨트 틸 중장은 네덜란드의 다리 교차지점에서 패잔병을 모아 혼성부대를 만들었다. 슈트던트는 틸이 편성한 혼성부대를 지휘하에 두고 벨기에 - 네덜란드 국경부근의 방위선을 구축했다.
빌헬름 비트리히 친위대 중장의 제 2 SS 장갑군단(제 9 SS 장갑사단, 제 10 SS 장갑사단)은 아른헴 근교에서 휴식 후 재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노르망디 상륙전에서 수반한 함포사격과 공습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는데, 병력은 노르망디 투입전의 20%, 전차 대부분은 상실한 상태였다. 또 SS사단의 장갑차량은 네덜란드 각지의 방어를 위해 전투단에 편성되었기에 사단 그 자체는 약체화되어버렸다.
제 2 SS장갑군단은 서부 유럽에서 거듭된 공습으로 격파되었기에 1943년에 편성한 부대였지만
과거 제 9 SS장갑사단은 공수부대의 낙하를 방지하기 위한 실탄연습사격을 행하기도 했었다.
아른헴 운하에 배치된 독일병사 대다수는 연합군 진영이 야간에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상황을 알고는 곧 대규모의 침공작전이 전개되리라 예상했다.
독일군의 이러한 방어낌새는 네덜란드를 통해 몇 건이나 보고되었다. 하지만 이미 마켓 가든작전의 계획은 최종단계로 들어간 상태여서 이들 보고서는 무시되었다. 정찰기에 의한 항공사진에서 아른헴 북동 15km 지점에서 독일 장갑사단의 포진이 확인되었지만 사진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말았다.
더욱 나빴던 사실은 공군 수송부대가 이용가능한 기체는 수송기 1,545대와 엔진이 없는 수송용 글라이더 478대 뿐이었다.
이는 처음 계획했던 수송능력의 거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작전 첫날에 2번의 낙하를 요구했지만 이는 정비문제 상 거부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매우 컸는데 악천후로 인한 결항도 항공지원능력을 떨어뜨렸다. 아른헴 북쪽의 데링 비행장이 있긴 했지만, 고사포의 사정거리 안이라 목표 교량의 북쪽낙하도 어려워졌다. 다른 낙하지점 후보는 교량의 남쪽이었지만 그곳은 늪지대였기에 중량이 나가는 무기를 탑재한 글라이더를 내리기엔 적당하지 않은곳이었다.
이에 다리에서 15km 서쪽에 떨어진 오스터베크가 선정되었는데 이곳은 알다시피 독일 B 군단의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마켓 가든작전은 여러가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연합군은 결국 이를 감수한 채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