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에페 2,19-22; 루카 6,12-19 /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2020.10.28.(수); 이기우 신부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소명기사가 알려진 경우는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요한 1,40), 야고보와 요한 형제(마르 1,19-20) 이 네 사람과, 필립보와 그의 친구로서 나타나엘이라고 기록된 바르톨로메오(요한 1,43-51) 그리고 세리 출신 마태오(마태 9,9) 정도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야고보를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형제로 일컫고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시몬과 유다의 이름까지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역시 예수님의 형제일 가능성이 큽니다(마르 6,3; 마태 13,55). 물론 유다는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형제들’이 친형제들인지에 대해서는 성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따져보아야 합니다. 우선 당시 쓰이던 언어인 아람어의 표현에는 대가족 제도를 반영하면서도 ‘사촌’이라는 말조차 없을 정도로 ‘형제’라는 말이 친척 형제들을 두루 포함하는 뜻이 담겨 있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심지어 사도행전에는 여러 곳에서 사도들 모두에게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가족 제도에서 집안 어른을 모시는 관습은 매우 엄격했기에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예수마저 출가하자 친척 형제들이 홀몸이 되신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고약한 소문이 들려왔을 때 그 친척 형제들이 예수님께 달려왔던 적이 있었는데 자신들이 평소에 모시고 지내던 마리아를 앞장세웠습니다. 아마 정말로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있었다면 어머니를 앞세워서 그분을 뜯어 말려서라도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시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하다가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리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세 사람의 가족이 겪은 이야기만 나오지 다른 식구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친동생이 있었다면 언급이 되었었겠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장년이 되신 예수님께 대해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를 그분의 형제들로 언급하는 대목에서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일컬어 ‘마리아의 아들’(the son of Mary)로 불렀지, ‘마리아의 아들 중 하나’(a son of Mary)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유다도 포함된 ‘예수의 형제들’은 친척이지 친형제간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그 친척 형제들은 그분에 대한 믿음은 물론 의리도 없었기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맡겨 드릴 친동기간이 없었기에 그나마 가장 아끼시던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만약 그분의 친동생이 있었다면 당시 이스라엘의 관습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그 ‘형제들’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데 비해, 야고보와 시몬과 유다는 열두 제자에 포함될 정도로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친형제지간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친척으로서 어려서부터 그분을 지켜보며 잘 알고 지내던 처지에서 그분을 하느님으로 알아보고 제자가 되어 따르기까지 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른 친척 형제들이 냉담한 심정을 지니고 있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 사도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출신 배경에 대한 추론만으로도 그 두 사도의 성품과 신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복음화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것은, 혈연관계에서 같은 신앙을 지니는 일이 과연 그토록 어려운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에서 친가족이든 친척이든지간에 혈연이 신앙의 인연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이겠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초세기 역사에서도 그러했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창기 역사에서도 신앙은 가족 단위로 퍼졌습니다. 그러했기에 백 년에 걸친 박해 속에서도 교우촌을 이루어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제의 강론에서 가정의 성화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가정 안에서 부부가 그리고 자녀들이 태어나 어린 시절에도 또한 성장기간 내내 부모가 모범을 보이면서 신앙생활을 함께 해나갈 수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 수도성소나 사제성소는 대개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싹이 틉니다. 또 혼인 성소라 하더라도 같은 신앙을 지닌 배우자를 만나겠다는 원의와 실제로 혼인 성사를 통해 성가정을 이루게 되는 과정도 이런 가정환경에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를 전제로 합니다.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이에서도 신앙을 거절하거나 다른 교파 또는 다른 종파를 신봉하기로 하는 경우에는 달리 강요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조차도 친척 형제들을 설득하지 못하셨겠습니까? 신앙의 모범을 보이면서 기다려주되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그 친척 형제들이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당신을 미친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 주효합니다.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들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인연을 맺은 이들과의 관계를 새로운 가족관계처럼 서로 믿을 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라면 더욱더 뜻을 합쳐서 주변의 인간관계를 하느님의 가족으로 삼는 일이야말로 복음화의 첩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