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 속 김유정 선생님과 증기차 관계
삼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띄어라 노다 가서
증기차는 가자고 왼고동 트는데
정든 님 품 안고 낙누낙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낼 갈지 모레 갈지 내 모르는데
옥시기 강낭이는 심어 뭐 하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만무방에서
만무방 - 일정시대 삶 속에서 극빈 유랑 농민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 이 아라리를 부른 주인공의 고향은 정선 임계 쪽으로 추리해 본다.
그 이유는 첫째 아라리가 끝나고 갑작스레 강릉이야기가 나온다. 일정시대에 임계까지 열차가 다녔다. 생선 맛을 보려면 임계에서 삽당령이나 백봉령을 넘어야 강릉이나 삼척을 갈 수 있다. 임계에서 삽당령을 넘으면 눈이 많이 온다는 왕산 대기리가 나오고 성산 강릉에 치닫는다. 삼척방향은 호랑이와 담배를 피우며 산길을 넘었다는 백봉령, 이 령에 올라서면 물결이 넘실거리는 삼척 동해가 보인다. 이 고개 자락은 한라 옥계광산이 자리를 잡아 시멘트의 원료 규석 채취 작업 현장이 보인다.
‘펄펄 뛰는 생선 출렁거리는 바다의 물결을 떠들어 대인다.’
고 소설에 적고 있다.
두 번째로 또 한 가지의 원조는 아라리이다. 아라리 하면 전 지역에서 산재하고 있지만, 옥시기 강낭이의 발음을 보아서 정선 임계 여량으로 보고 있다. 강원도를 나누면 영동과 영서로 나누는데 한쪽에서는 옥수수 열매를 강냉이, 다른 쪽에서는 장난이 섞인 말투로 강나, 강낭이라 부른다. 임계 여량은 거의 강릉 사투리를 닮는다. 소인배가 임계 여량사람 하고 지내본 결과다.
세 번째로 김유정 선생님이 만무방을 소설로 담은 이시기에는 춘천에 증기차는 다니지 않았다. 이유는 알겠지만 소설 속 아라리를 먼저 해석 해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아리랑이 아니라 아라리다.
‘아리랑 물에 띄워 놀다 가서.’ 여기서 가서, 가소, 오소, 옵시다. 갑시다의 사투리는 영동지방 사람들이 사용한다. 증기차는 가자고 빵빵 거리는데 정든 님 품 안고 낙누낙누. 낙누는 낚시질 할 때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낚시질 하는 사람을 만나면, “오늘은 뭘 낚았 누?” 하고 물어본다. 어업생활은 강이나 바다다. 고로 낚는다는 이야기는 어촌생활에서의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속으로 오가는 말투다. 또한, 산골의 농업생활에서 나올 수 없는 언어이지만 어린 시절의 습관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습관적 언어일 수도 있다. 물고기를 낚는다. 물고기를 잡는다는 의미로 직역을 하면, 낙누가 반복되었으므로 부정적인 의문형으로 본다. 쉽게 말해서, “증기차는 가자고 난리 부르스를 치는데 정든 님 품 안고 왜 떨어질 줄 모르냐?!” 이야기다.
2절에 낼 갈지 모레 갈지 내 모르는데---여기서도, “내일 갈런지 모레(이튼 날) 갈런지 모르는데 옥시기 강낭이 심어 뭐 하리!” --이 말은 그 당시 일정시대의 사회구조를 비꼰 것으로 본다. 전쟁이건 갱 작업이건 인력동원이 되는데, “증기차를 타고서 내일 갈 런지 모레 갈 런지 모르는데 옥수수 강냉이는 심어서 뭐하느냐?! 아리랑 물에 띄워 놀기나 하자!”는 것으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하는 식이다.
강낭이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유형의 언어가 있다. 언년이 간난이, 간난, 간나다. 간난이란 여자 이름도 있다. 소인 할머니 함자가 김 간 난이다. “간나” 라는 것은 어린 여자 아이라는 뜻으로 이북 사투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영동 지방에서 많이 애용한다. 잘 아는 아가씨보고도 친숙하게 부른다. 또한 이북에서 어린 남자 아이 보고 욕할 때 간나 새끼라 한다. 그러나 직역을 하면 여자의 몸속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라는 뜻으로 실제 욕은 아니다. 춘천과 강릉은 이북 사투리가 많다. 일정 이전 이후에 남하하여 정착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카 커피 할까! 간나야, 요번 명절에 뭐하누 이이? 이바구 좀 해 보소!”
이 아라리는 전쟁 또는 갱 아니면 벌목 작업에 거의 강제 인원 동원으로 인해 문제시되는 그 시대를 반영했으리라 본다. 지금도 여량에 가면 아라리 뗏목 행사에서 현 사회를 비꼰 아라리를 들어볼 수 있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최초의 경춘선은 1939년 7월 25일 성동에서 춘천 간 개통이다. 1926년 1월 13일 동아일보를 보면, 춘천시민은 도청 이전 반대와 아울러 경춘 철도 개설을 요구 했는데 실제 개통 시기는 1939년이다.
만무방은 1935년 7월 7일에서 31일까지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그러니까 1935년 전에는 춘천에 열차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정 시대의 중앙선을 보자. 만무방을 쓴 시기가 1934년 김유정 선생님 나이 27세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경성에서 임계로 이어지는 열차 노선은 만무방 소설 속에 등장한 아라리로 추리해 보면 1934년 전에 개설이 되었다는 논리다.
소인배 아버지께서 여덟 살. 그러니까, 26년생 부유했던 어린 시절 고향 뒷산 넘어 동화, 원주반곡 금대리 똬리터널 철목 철로 신설을 보았다고 한다. 왜정말년에는 청춘시절 서곡 판대리 용수골에서 대 자귀로 철목 만드는 일에 품삯을 받고 참가했다고 한다.
경성(서울)-양수-양평-원주-제천-영월-정선-여량-임계까지 되어있었다.
양수, 지금의 양수리 여기서 철로 노선이 춘천으로 가게 되는데 노선 경로를 보면 경성(서울)-양수 대성리-청평-가평을-춘천역이다.
춘천은 삼거리 역으로 화천-북한의 김화-회양-창도가 종착역으로 금강산에 매장된 중석 채취 운송이다. 제 2 해금강 하면 춘천이요, 장전하면 바닷가에 청어요, 금강산이면 중석이라 한다. 또 한 노선인 춘천-소양강 줄기 따라-양구-인제-현리가 종착역은 소나무와 양양부근의 철광석 운반이다.
일정시대 춘천에는 중요한 삼거리 역으로 외부에서 인구유입이 많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덕두원과 방동 일대에는 금방아 두 개가 있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
며칠 전에 일하면서 귀한 사람을 만났다. 해방 후 덕두원 금광을 인수하여 운영했었다는 사장을 만났다. 지금도 연락이 가능하며 현재까지 광 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미칠 광에 미쳐 덕두원 금광에서 수평 굴진으로 거의 팔백 미터 굴착 작업하다가 타임캡슐처럼 갱 속에 바가지 차와 착암기를 갱 속에 그냥 놓아두고 폐광을 시킨 상태라 하는데 훗날 갱을 개봉하면 알 것이라 한다.
철로 역사를 보면 1899년 인천 노량진 경인선이 개통이 되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된다. 1906년 경성 신의주간 경의선이 완공되고 1937년 김유정 선생님이 세상을 등진 후 1939년 경춘선이 개통 된다.
일제 강점기를 나눠보면, 제 1기는 무단통치 시대로 1910년에서 1919년이고, 제 2기는 문화정치 시대로 1919년에서 1931년이다. 제 3기는 1931년부터 1945년으로 병참기지화와 전시동원 시기다.
만무방의 탄생 시기는 최후의 제 3기 1934년이다. 김유정 선생님은 경성과 춘천을 오가는 경춘선 열차를 타 보지도 못하고, 소설 속 등장인물의 언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증기차 아리랑으로 그 시대를 풍자한 강원도 아라리라 결론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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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참고서적과 자료---1985년 이선영 자료, 1939년 조선이 포함된 일본노 지도, 1924년 판 계룡산 상제교대본원 동경대전 룡담유사, 일제강점기 농춘부흥야학 교본집. 1926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 1949년 24인의 명작 집 김유정 편. 이석훈의 자료, 이 상의 자료. 일정 시대와 해방 후 살아온 증언자의 자료.
연대별 흐름과 생활사 탐구, 신막역두 미담, 시국과 생업보국, 일제 강점기 시대의 조선 철도노선과 광물질 분포도 지도, 생물표본조사 교본, 그 외 참고도서. 약 이십년에 걸쳐 독학으로 자료 수집하여 탐색하다.
이 세상 영원한 비밀은 존재할 수 없다. 불과 물, 바람과 천둥 천지개벽이 일어날지라도 어딘가에는 반드시 역사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위 내용은 자료에 의한 추리의 글로서 읽어보기 바랍니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자료에 의거 최대한 접근해 봅니다. 중요한 자료는 먼 훗날 기회가 되면 공개합니다.
----다음에는 충청도 어느 금광에서 일을 했다는 김유정 선생님, 광쟁이 하면 빛 광이 아니라 미칠 광에 광부로 소설 속 등장하는 “큰골과 번동”이란 지명 집중 조명한다. 금광이 있던 자리는 버럭이 있다. “버럭”하면 금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버럭이 현장을 증명한다.
번동 포농이 쫓아 호미를 내어던지고 강변으로 개울로 사금을 캐러 달아난다.
실레에서 오리 그러니까 반경 2km내 물골을 찾아가보자.
“노다지가 뵐 때면 오징어 먹물 나오듯 검은 수분의 물이 나타나고 이빨을 닦지 않은 누런 금색이 수정 돌 속에 뭉쳐있어! 이걸 집에 가지고 와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쇠절구로 밤샘 몰래 콕콕 찧고는 수은을 이용하여 금만 색출 하는데, 칠색이니 구색이니 금의 질을 평가하지.” --외삼촌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