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거나 선 사람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른다. ‘메리 크리스마스.’ 깜깜한 정글 속에서 은색 불빛들이 깨어났다. 신이 난 아들이 안내원을 따라 손뼉 치며 “많이많이…….”하고 외친다. 반딧불이들이 숲에서 나와 공중에서, 반짝이다 보트 안까지 들어왔다. 신이 난 사람들은 발까지 쿵쿵 구른다.
적도 기후로 오래된 정글 림에 덥힌 코타키나발루는 아름다운 바다 남지나해에 둘러싸여 있다. 생태가 잘 보존된 청정 환경이라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반딧불이 서식지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반딧불을 보러 가는가 싶게 일찍 출발한 차가 산속 도로로 들어섰다. ‘뚜아이 에델바이스’로 가는 1년 내내 덥고 비가 많이 와서 길옆이 온통 아름드리 정글이다. 여기가 보루네오섬이라 하니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던 ‘보루네오 가구’가 떠 오른다. 원목으로 만들어 무거우면서 탄탄하고 듬직했던 신혼 시절의 옷장과 찬장이 생각난다.
무성한 열대식물 숲속을 자동차로 두 시간이 나 달려 뚜아이 현지가옥에 도착했다. 이 나라 전통 과자와 빵, 음료가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커피 맛이 아주 뛰어나다. 카페인에 민감한 체질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정원의 레몬 나무는 예상 밖으로 빈약하고 바나나 나무는 울창한 가지 사이로 열매를 빽빽하게 달고 있다. 두리안 나무는 왜소했고 생전 처음 본 라임 나무는 가지마다 열매가 소복하게 열렸다. 신기하게 쳐다보자 인심 좋은 주인이 와서 얼른 한 개를 따준다. 귀한 라임오렌지를 선물 받고 기뻐서 요리조리 돌려가며 만졌더니 손바닥에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이 가득 베였다. 손을 입에 대고 냄새를 맡자 며칠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는다.
해가 질 때쯤 구명조끼를 입고 나무 보트에 탔다. 태국의 메콩강 같은 황색 물이 굽이쳐 흐르는 강을 타고 흘러갔다. 여행객들에는 나 같은 늙은이는커녕 중년은 없고 모두 새파란 커플들이다. 어느 곳에 배가 멈추니 숲의 원숭이들이 나뭇가지를 잡고 날아오자 옆의 젊은이가 두 팔로 덥석 받아 안는다. 나도 몇십 년 세월을 던져버리고 아들과 한 팀이 되자, “까꽁, 나는 원숭이띠다.”하며 사탕을 내보이자 한 마리가 내 가슴으로 폴짝 뛰어오른다. 껍질을 까주고 밀고 당기며 같이 놀았다.
오래전 기억의 줄기를 끄집어내 본다. 어릴 적 여름에는 불볕더위 때문에 부채를 팔 아프게 흔들어 바람을 일으켜도 땀이 종일 쏟아졌다. 온몸에 땀띠가 나서 가렵고 긁은 상처 때문에 따가왔다. 밤에 덜 더운 마당 평상에 나가 앉으면 앵~하고 모기떼들이 몰려와 온몸을 쏘아댔다. 그것들을 쫓겠다고 생풀에 불을 붙이면 메케한 연기에 목이 막혀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모기들은 요리조리 날아다니며 몸 여기저기를 물어뜯었다.
친구들과 냇가로 피난 가서 차가운 물로 몸을 씻었다. 가뿐해진 우리는 모래사장에 둘러앉아 수건돌리기를 했다. 둥글게 앉아서 술래가 도는 놀이를 시작하면 모기들은 우리를 물지 않았다. 술래를 따라 돌면서 수건 놓인 아이를 찾느라 주둥이로 찌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무도 물지 않고 모기도 우리와 같이 놀았다.
반딧불이는 한여름 밤 꽁무니에 있는 발광기가 반짝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낮에는 나뭇잎 뒤나 풀에 붙어 쉬다가 어두워지면 꽁무니에 빛을 내며 날아다닌다. 옛 어른들은 어두운 밤에 이것을 잡아 모아서 그 빛으로 책을 읽었다 한다.
밀림과 연결된 맹글로브 숲을 낀 강을 타고 달리다 배가 멈춰서면 안내원이 승객들에게 신호를 한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라 외치면 숲속 반딧불이들이 일어난다. 깜깜한 정글에서 깨어난 은빛들이 숲에서 나와 허공에 반짝인다. 반딧불이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위를 환하게 밝히다가 보트 안까지 들어온다. 일어나 손뼉 치며 반기는 사람들과 한 덩어리 된다. 쉴 새 없이 깜박이며 날아다니다 어깨와 머리에 앉는다. 두 손을 동그랗게 벌리면 그 속까지 들어온다. 오호 예쁘기도 하지.
손바닥 안 반딧불이를 들여다본 순간 믿고 내려놓는다는 의미가 내 마음을 꿰뚫고 지나간다. 어떻게 아무 두려움도 없이 사람의 손안에 쏙 들어와 앉을까. 내가 손바닥을 마주치면 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데. 불안해하지 않고 내 손안에서 깜빡이니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된 것 같다.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내가 반딧불이가 된 건지 반딧불이가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정글 속 강물 잔치에서 어린아이로 돌아가 곤충들과 같이 놀며 한여름 밤을 마음껏 즐겼다. 아름답고 화려한 손바닥 안의 반딧불이로부터 삶이 나에게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용기를 본받았다.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붙잡지 않으며 다가오는 것을 물리치지 않는 것도 배웠다. 우주의 알 수 없는 조화를 느낀다.
첫댓글 반딧불이를 쫓아 다니던 그 때가 새삼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