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교회 5인방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
행 13:1-3
미국에 아주 돈 많은 백인들만이 주로 다니는 귀족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흑인 한 명이 찾아와서 이 교회에 다니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망설이면서 이 문제에 관해 기도해 보고 다시 오라고 겨우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그 흑인이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기분이 별로 내키지 않던 목사님이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 보셨습니까?”
“물론이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던데요.”
“어떤 말씀?”
“얘야, 나도 지난 20년간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아직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미국에는 아직도 백인 교회가 있고 흑인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인이 흑인 교회에 갈 수 없고 흑인이 백인 교회에 갈 수 없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느 곳에 있는 외국인 교회에 가서 예배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기에 예배가 안되기에 갈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는데도 갈 수 없는 교회가 있고 환영 받지 못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의 시작은 예루살렘교회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은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를 못했습니다.
유대에서의 박해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더 큰 이유는 그들은 유대인들로 구성되면서 유대인의 범위를 벗어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교회가 있는데 안디옥교회입니다.
이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교회는 세계 선교의 길을 개척하며 복음을 세상으로 번져 나가게 했습니다. 세계 선교의 중심에 안디옥교회가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로마시대때 로마제국 전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으며 기독교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초대교회 일곱집사중 하나인 니골라가 이곳 출신이었고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많은 성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교회가 탄생하면서 이방선교의 중심으로까지 커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교회 다운 모습이 확실히 보여지게 되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그정도로 유대종교와 확실히 다르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여기에서 보여주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루어 간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행 1: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이 마지막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던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유대를 벗어나서 땅끝을 향해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던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중심이었으며 사도들도 다른 전도여행을 갔다가 예루살렘 교회로 모여서 그들의 선교 보고를 하며 여러 가지 대책들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를 활발히 하며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행 1:8절의 말씀을 삶으로 잘 실천하는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선교 뿐 아니었습니다.
약해진 예루살렘 교회의 그 영적인 영향력까지 물려받고 온 사방으로 베풀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겁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안디옥교회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시대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던 교회가 안디옥교회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를 보면서 무엇이 특별했으며 우리가 본받을 점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왜 본받아야 하는가 찾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적지 않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양산에도 약 200여개의 교회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이 사회에서 소금되고 빛이 되어 살려고 노력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이정도로 유지되며 정화작용도 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많은 교회들 중에서 우리 양울교회가 그 중에서도 주의 말씀대로 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주의 사명 감당하며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가 제대로 된 교회의 모습을 만들 수 있는 적기입니다.
우리들만 마음을 모으면 참된 교회의 모습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일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조금씩 읽어가며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목적도 무엇이냐
이런 초대교회들을 본받자는 것이며 그러면서 이런 교회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부족한 점이 무엇이며 더 다듬어야 하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고 바르게 신앙생활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근 2천년 가까이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 한페이지를 우리 교회도 쓰기를 원합니다. 그냥 범어리 한 상가 꼭대기에서 예배하다가 어느 순간에 보니 없어진 그런 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어가는 교회로 성령의 역사를 지금도 이루어가는 그런 교회로 남기를 원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몇 가정 되지 않아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준비될때까지 기다리시던지 아니면 잔을 옮기실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정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역사에 쓰임받을 준비가 되었느냐 우리를 기뻐하시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 범어리에서 일어나고 양산에 영향을 미치며 그래서 우리의 지경이 점점 더 넓어지를 축원합니다.
우리 그런 교회 되도록 더 기도하고 말씀으로 우리를 다듬어 갑시다
그럼 이 안디옥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뛰어났느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고 소개된 5명의 사람,
이 5인방들의 면면이 눈에 띕니다. 이들이 서로 어울려서 이렇게 좋은 교회로 만들어 간 것인데 그런데 이들의 출신이 다양합니다.
먼저 바나바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에서부터 나오는 사람으로서 오래전부터 교회에서 인정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였지만 자신의 밭을 구제헌금으로 내 놓기도 하는 선한 마음이 있었고 나중에 사울이 개심하고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사람이 되었어도 사도들과 성도들이 받아주지 않자 사울을 사도들에게 변호해주던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가 만들어 졌을 때 예루살렘에서 목회자로 파송될 정도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니게르라하는 시므온, 니게르 라는 말은 검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흑인이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시므온인데 흑인 흑인 니게르 니게르 이렇게 불리다가 아예 그곳에서 흑인 이렇게도 불리던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중요 도시입니다.
로마 병정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졌던 시몬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 구레네 인데, 그 구레네 출신 중 한명이 이 루기오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흑인입니다. 그런데 흑인이라고 불리지는 않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 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이라는 말은 어릴 적 헤롯과 함께 왕궁에서 자랐다는 말입니다. 마나엔의 어머니가 헤롯을 키운 유모여서 같이 자랐던지 아니면 헤롯과 가족관계가 깊어서 그냥 어릴때부터 같이 자란 사람이란 말인데 그렇다면 이 마나엔은 적어도 귀족입니다.
왕족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귀족 이상은 되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사울, 당대 최고의 유대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바리새인이었고 유대교를 철저히 신봉하여 스데반의 재판에도 증인 역할을 하며 많은 성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데 열심이던 젊은 지도층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으로 교회를 박해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다메섹에서부터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고 그 이후 아라비아에서 2년 정도 그리고 고향 다소에서 10년 정도 지내며 자신을 다듬으며 복음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이 함께 어울려 안디옥교회를 섬겼는데 각자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흑인이 두명이고 백인이 3명입니다.
귀족도 있고 부자도 있고 정통 바리새인도 있고 저 아프리카 출신도 있습니다.
교회 초기부터 지도층으로 인정된 사람도 있고 교회를 박해하다가 나중에 지도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칼 같은 사람도 있고 온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서로 함께 교회를 잘 섬겼고 이들로 인해서 교회는 누구나 품어줄 수 있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런 교회로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야기 할 때 모든 교회의 본 받고 싶은 그런 교회다 합니다.
초기에 보여준 예루살렘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고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던 교회 언제 읽어도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가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약점이 있었는데 다양성이 없었습니다.
이방인이 그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유대인 중심이며 생각들이 유대인 적이어서 이방인을 품을 가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를 리더하던 5인방조차 다양하여서 누구나 들어 올 수 있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고 어떤 모습이던 다 받아주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다양성이 있는 교회, 그래서 누구든지 품어줄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교회이며 말씀이 잘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부담이 없이 올 수 있고,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쉽게 하나될 수 있는 그런 교회, 나이 많은 사람이 와도 젊은 사람도 와도, 누가 오더라도 쉽게 동화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 할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도 언제나 이런 모습이 나타나야 하겠지만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다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 어떤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받아들여주고 하나 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 할려면 무엇이 없어야 합니까?
없어야 하는 것은 나랑 다르게 생각하고 사는 것에 대한 비판이나 정죄가 없어야 합니다. 나랑 다르다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정죄하면 결코 하나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있어야 하는 것은 나랑 다름에도 사랑하며 이해해 줄려고 하고 어떻게 해서던 하나 되어서 교회를 주의 말씀대로 사는 교회로 만들어 갈려는 그런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 교회가 그냥 하나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판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어도 하나되어 갈려고 사랑하며 이해해 줄려고 하고 품어 줄려고,노력하고 견뎌줄 때 하나되어 가는 겁니다
이 성경시대에 귀족과 평민의 사는 것과 생각하는 기준이 얼마나 달랐겠습니까?.
사는 집이 달랐고 입는 옷조차 달랐습니다. 어떤 사물을 생각하는 그 생각조차 달랐습니다.
그러다보니 귀족은 평민을, 평민은 귀족을 서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자들이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부럽다 하면서 저것은 사치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며 입는 옷을 보며 꺼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다양한 계층의 5명부터 서로 어울려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될 정도로, 시므온은 흑인, 흑인 하며 불리다가 아예 이름이 되어버린 사람인데도 지도자가 되어 가르치고 있었고 그 사람과 함께 귀족도 있고 바리새인도 있는데 서로 어울려 교회를 아름답게 잘 섬기더란 것입니다. 그게 교회죠
지금도 마찬가지죠
세대간에 차이가 많아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지금 아닙니까? 옷을 왜 저렇게 입냐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생각을 그렇게 하냐 하는 것도 있고 특히 요즘 20대들 친구들끼리 밥 먹으러 갔어도 돈은 각자 내고 자기 먹을 것 자기가 챙긴다고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친구랑 밥으러 가면 내가 밥 살게 아니면 누군가가 밥 값을 먼저 내고 이러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요즘은 아예 각자 자기 먹고 싶은 것은 비싸더라도 주문하고 자기가 계산한다고 합니다.
저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그게 편하다고 하며 그래도 가끔씩 사주기도 해요 그럽니다. 저희랑 많이 다릅니다. 그런 것을 비판하며 고쳐주어야 합니까?
제가 잘 아는 교회 목사님 딸이 디자이너를 꿈궜습니다. 그래서 패션 디자인의 여러 구상도 하면서 그런 옷도 입고 책도 보며 했는데 그러다보니 입는 옷은 남들 보기에는 화려했고 좀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습니다.
디자이너를 꿈꾸다보니 그런 옷이 눈에 들어오고 자기에게는 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찬양도 잘했기에 그런 옷을 입으며 특송을 종종 했습니다.
그것을 보기 싫하던 어떤 나이드신 분이 거의 매주일, 옷이 그게 뭐냐며 긴 치마 좀 입으라고 단정하게 입으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목사 딸이지만 다른 교회 다니고 싶다고 종종 이야기 하더랍니다.
그러한 옷을 입으면 나이 든 분들이 불편해 한다. 알면서도 내가 좋으니 내가 편하니 난 남 생각 하지 않으며 예배하고 싶다.
그런 생각에 의해서 그런 옷을 입는 것을 고집하는 것도 좋은 모습이 아니지만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만날때마다 야단친다고 변합니까?
언제 변하느냐 은혜 받을 때 변합니다.
은혜 받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눈을 열어서 남의 마음도 보게 하시면 아 내가 좋아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분별해야 하겠구나 하며 달라지게 되는 것이지 야단친다고 변하는 것 아닙니다.
왜 빨리 변하지 않느냐 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느냐 정죄하면 그런 사람은 교회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견뎌 주는 겁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때까지 마음에 말씀에 깨달음이 있고 영적인 체험도 있어서 자기 자신 만이 아니라 남의 마음까지 보여서 스스로 달라질려고 할때까지 견뎌주는 겁니다.
그게 교회를 아름답게, 누가 오더라도 품어 줄 수 있는 교회로 만들어가는 자세입니다.
바울이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는데 불쑥불쑥 바리새인적인 말투 생각으로 헬라인들의 삶을 판단하는 일들 없었겠습니까?
마나엔이 귀족인데 귀족이어서 평민의 삶 특히 노예의 삶과 아픔을 알지 못하여서 무심결에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안했겠습니까?
그런데 흑인이 두명이나 되어 우리는 흑인인데 백인들이 가끔씩 무시하는 말을 던질 때 우리를 너무 무시한다 그러며 오래된 감정이 불쑥 불쑥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볼 때마다 야단친다 그러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떠납니다.
할 수 있는 말은 니가 그런 말을 하니 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며 내가 힘들었다 하는 정도로만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외의 모든 습관과 행동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할려고 하고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사람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가르치고 내가 판단해주어서 깨닫게 해 주어야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는 하나님이 시킵니다. 우리는 그가 변할때까지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 변화 시켜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해야죠 그러나 누가 그런 사람에게 충고를 해 줄 수 있느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평소 격려도 자주하고, 사랑도 잘 보여주고, 관심표현도 잘 하던 사람이 충고를 해 줄 수 있습니다.
1년에 딱 한번 이야기 해 준다 그외는 나는 말을 잘 안한다 그런데 그 말이 충고이면 그 사람은 충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1년에 딱 한번 한 말이 충고이기에 충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회가 많은 교회들이 하나되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모습을 판단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며 이해해 주며 견뎌주는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남을 변화시킬려고 하지 말고 사랑할려고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과도 우리는 하나 될 수 있고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 이룰 수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요한1서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 사랑으로 우리를 더욱 하나되게 만들어 가는 겁니다.
책망이 아니라 사랑하며 품어주며 견뎌주며 아름다운 교회 만들어 갑시다
그러면서 이 안디옥교회는 예배에서 음성 듣는 예배공동체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참 예배가 있는 교회공동체였습니다.
아니 교회가 예배가 없는 교회가 있느냐
예배 공동체라는 것은 예배를 중요시 하는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려고 하고 예배에서 주어진 말씀을 가지고 실천하며 더욱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던 교회였다는 겁니다. 2절에서 나옵니다.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에 주를 섬겨 금식할때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를 섬기며 금식할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섬긴다는 말이 어떤 의미냐
교회를 섬긴다 직분 감당하며 사명 감당하며 주님을 섬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섬김의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인 의미는 예배입니다.
주를 섬기는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모습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라고도 표현합니다. 서비스가 무엇입니까? 섬기는 거죠 서비스는 남을 위해 돕거나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해 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서비스라고 표현합니다. 주님를 섬기고 주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 안에서 주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에배죠
그래서 이 본문에서 나오는 주를 섬겨 금식할때에 라는 말은 예배하며 주님을 섬기며 금식까지도 하고 있을 때 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말씀을 들려 주신 것이죠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더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하여서 이 두 사람을 따로 세우고 안수 기도 하고는 말씀대로 파송한 겁니다.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랬더니 이 두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들을 일으키시며 복음이 점점 더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선교 보고를 하는데 교회가 파송한 사람이 이룬 일을 보고하는데 그것은 그 교회의 열매였습니다.
그 시작이 예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던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그 꿈, 그 뜻을 이루어 가신 겁니다.
예배에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참 예배에 실패하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나아지지가 않습니다. 늘 제자리 걸음입니다.
참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깊어집니다. 예배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도 하시고 은혜도 주시고 치유도 하시고 능력도 받기 때문입니다.
참된 예배에 성공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주신 말씀 붙들고 더 기도하면서 순종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런 교회로 만듭시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 이루어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