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장 음모(陰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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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독마군(白毒魔君) 음무위(陰武韋).
그는 백독곡(百毒谷)의 교주이자 사도제일의 독의 명인이며 나이
는 백삼 세였다.
그는 독인(毒人)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수만 가지의 독을 자유자
재로 쓰며 무형(無形) 중에 사람을 독살시키는 공포의 대마왕이었
다.
그의 백독마공(百毒魔功)은 독공(毒功)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었
다.
깡마른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 모습인 음무위의 앞에는 한 명의 자
면(紫面)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백독마군 음무위는 독광이 감도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칭
자부신군 무영종이라는 사나이가 느닷없이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음무위는 괴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가 노부를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영종은 신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자문을 구할 게 있어 왔소이다."
"나에게? 흐흐흐... 뜻밖이군. 천하의 그 누구도 감히 내 곁에 오
지 않거늘."
음무위는 음침하게 내뱉었다.
"나는 무형중에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그러나 무영종은 추호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담히 웃었다.
"당신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소이다."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음무위가 오히려 기이한 빛을 띄웠다.
"음, 그대가 자문을 청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오."
무영종은 품 속에서 접지를 꺼냈는데 그것은 매군으로부터 받은
가루약이었다.
"이 약의 성분을 알려고 왔소이다."
음무위는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가루약을 조금 집어 혀 끝으로 맛
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안색은 급변했다.
"이, 이것은......!"
무영종은 급히 물었다.
"무엇인지 아시오?"
"으음, 이럴 수가! 남만에서만 나는 이것을 그대가 갖고 있다니."
음무위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무영종을 무섭게 노려보며 추궁 했
다.
"자네는 이것을 어디서 얻었나?"
무영종은 담담히 대꾸했다.
"수라궁의 인물에게 얻었소."
"수라궁!"
음무위의 안색이 삽시에 일그러지더니 입가에 으스스한 괴소를 흘
리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이제 보니 수라궁 놈들은 이것으로 우리들의 힘을 꺽
으려 획책했군!"
"그렇소이다."
"후후훗! 그러나 나 음무위가 있는 이상 잘못 생각했다."
음무위의 두 눈에서 무서운 녹광이 뻗어 나왔다.
"오독비마 구우령! 그 노마가 분명 이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음무위는 무영종을 주시하며 음산하게 말했다.
"좋다. 그대는 내일까지 이것을 노부에게 맡겨라. 내 반드시 이
약의 해약을 만들겠다. 후후후... 오독비마 그 놈의 구겨진 얼굴
이 보고 싶군. 흐흐흐......."
침상이란 애초 잠을 자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잠뿐만 아니라 남녀가 일을 치르는 도구로도 사용될 수도
있었다.
"학... 하학."
흥분을 일으키는 신음소리, 그것은 남녀가 교합(交合)을 할 때 자
연적으로 발해지는 희열의 교성이었다.
침상 위에는 세 명의 남녀가 엉켜 있었다.
일남이녀(一男二女). 그것도 모두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한 남자가 두 명의 여인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통천마군(通天魔君) 흑고. 이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는 사파의 일교(一敎)인 통천교를 이끄는 일대지존으로 지금 그
의 털투성이 몸 아래 깔려 있는 두 나체여인은 그의 방중술에 연
신 숨 가쁜 교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흑... 흐... 응!"
절정으로 치닫는 모양이었다. 두 여인 모두 절색으로 흑고의 시중
을 들기 위해 배정된 수라궁의 시비들이었다. 마침내 여인들은 전
신을 부르르 떨며 환희의 절정에 올랐다.
흑고는 두 여인의 육봉을 주무르며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꽤 쓸 만한 계집들이군. 본좌가 이곳의 개파대전이 끝
나면 필히 너희들을 통천교로 데려 가겠다."
그의 손은 우악스럽게 두 미녀의 젖가슴과 비밀스러운 곳을 주물
렀다.
"아이... 나으리도."
두 미녀는 또다시 몸이 뜨겁게 달아 올라 그의 품 안으로 파고 들
었다.
"흐흐흐... 귀여운 것들."
흑고의 정력은 왕성하여 다시 한 차례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일남이녀의 음탕한 행위에 침상은 온통 후끈한 열기에 타버릴 듯
했다.
흑고는 두 번째의 행위를 마치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안색이 변했다.
'요즘 들어 계속 이런 증상을 느낀다. 그것도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대체 어찌된 일이기에......?'
그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수라궁에 들어온
이래 음식과 술, 물 따위를 절대로 그대로 들지 않고 통천교의 제
자 중 독(毒)에 능통한 수하에게 엄밀히 검사를 시킨 후에야 들었
다. 그러므로 절대로 중독될 염려는 없었다.
흑고는 여전히 알몸인 채로 침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흔들었다.
한 비녀가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또 한 비녀는 여전히
나체인 채로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알맞게 퍼진 육감적인 둔
부를 흔들며 사뿐사뿐 탁자로 걸어갔다.
그 비녀는 탁자에 놓인 술병과 잔을 들고 돌아왔다.
"나으리, 술 한 잔 드시겠어요?"
비녀는 혼을 앗을 듯 교태를 지었다.
"음, 좋지."
흑고는 비녀의 젖가슴을 바라보며 잔을 받았다. 비녀는 술을 따랐
다. 그런데 흑고의 귀로 한 줄기 가느다란 전음이 들려왔다.
(흑고, 그 술 속에는 독은 아니되 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들어있
소. 그것은 서서히 뇌를 마비시키고 힘을 빼는 것이오. 이미 당신
은 알게 모르게 많은 양을 먹었으니 더이상 먹는다면 큰 위험을
당할 것이오.)
흑고는 안색이 홱 변해 급히 청력을 기울여 주위 십 장(十丈)을
살폈다. 그러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흑고의 안색은 다시 기이하게 변했다.
'누가 나에게 이런 경고를?'
그는 비로소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었다.
'그렇다! 분명 이 이상한 증세는 수라궁에 와서 얻은 것이다. 그
렇다면?'
갑자기 그의 안색에 음침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술잔을 들더니
두 비녀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춘앵(春櫻), 추요(秋姚)! 너희들이 이 술을 마셔라."
"넷?"
춘앵과 추요는 안색이 금새 굳어졌다. 그러나 곧 추요가 교태롭게
웃으며 그의 목에 두 손을 감았다.
"아이,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는 술을 못마
시......."
"흐흐흐... 계집년들! 이 안에 무엇을 넣었느냐?"
"나, 나으리!"
춘앵, 추요는 대뜸 안색이 창백해졌고 이를 본 흑고는 음침하게
말했다.
"감히 나 흑고에게 이런 유치한 수작을 부리다니!"
"아악!"
흑고의 목에 두 팔을 걸고 있던 추요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
녀의 매끄러운 아랫배 속으로 흑고의 손이 푹 뚫고 들어갔던 것이
다.
그것은 실로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흑고는 손을 뗐다. 그러
자 그의 손에는 시뻘건 창자가 한 움큼 뽑혀져 나왔다. 침상은 온
통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아악! 나... 나으리......."
쿵!
추요는 바닥에 떨어지고 춘앵은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흑
고는 술잔을 들고 서서히 일어나며 물었다.
"흐흐... 춘앵, 이 술 속에 무엇을 넣었느냐?"
"소, 소비는 무슨 말인지."
"너를 죽여버리겠다."
흑고는 잔인하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춘앵의 얼굴은 완전
히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문득 날카로운
교갈이 터졌다.
"찻!"
그녀는 갑작스럽게 옥수(玉手)를 들어 흑고를 공격했다. 정녕 뜻
밖의 급습이었다.
펑!
그녀의 옥수는 정확히 흑고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러나 흑고가 누
구인가?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흐흐흐... 나 통천마군 흑고가 어떤 인물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이 수라궁의 못된 계집!"
휙!
흑고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악!"
춘앵은 비명을 질렀다. 흑고의 손에 그녀의 가녀린 두 발목이 잡
힌 것이었다. 그것은 춘앵의 생의 마지막이었다.
"아아악!"
처참했다. 피보라가 튕기는 가운데 춘앵은 무참하게 사지가 찢기
고 만 것이었다.
흑고는 알몸에 온통 두 시비의 피를 뒤집어 썼다. 그것은 전설상
의 흡혈악귀와 같은 모습이었다.
"흐흐흐... 감히 이 흑고에게 수작을 부리다니!"
흑고는 바닥에 흩어진 춘앵, 추요의 인육(人肉)을 내려보며 으스
스한 괴소를 흘렸다. 그야말로 강호의 대마군 통천교주다운 모습
이었다.
그는 뒤이어 갈라진 음성으로 외쳤다.
"구살(九殺)!"
"넷!"
우렁찬 대갈과 함께 방 안에 아홉 명의 흑의인들이 들어왔다. 그
들은 모두 안색이 음침한 중년인들로, 그들 또한 방 안의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인간계(人間界)가 아닌 처참한 풍경에도 그들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흑고는 냉혹한 음성으로 물었다.
"밖에 서황견(西黃犬)이 있느냐?"
한 중년인이 대답했다.
"넷! 세 마리 모두 튼튼하게 있습니다."
흑고는 아수라귀처럼 웃었다.
"홋홋홋... 이 계집들의 시체를 서황견의 오늘밤 먹이로 주어라."
"넷!"
구살은 대답과 함께 방 안에 흩어진 인육을 모아 밖으로 끌고 나
갔다.
"흐흐흐... 나 흑고를 우롱한 대가다."
흑고는 침상에 걸터 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때 어디선가 분
노성이 울렸다.
"잔악무도한 놈!"
가벼운 경풍 소리와 함께 방 안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금악비였다.
금악비의 두 눈은 피투성이인 방 안을 둘러본 후 무서운 살기를
폭사했다.
흑고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음소를 흘렸다.
"흐흐흐... 조금 전의 말은 네 놈이 씨부렸느냐?"
금악비는 치를 떨었다.
"그렇다. 노마!"
"크하하하핫!"
흑고는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금악비의 소매가 펄럭이며 금빛이
번쩍 빛났다.
쐐액!
무림을 공포에 떨게 한 한 자루의 금마비(金魔匕)가 날았다. 흑고
의 목구멍이 정통으로 꿰뚫릴 찰나였다.
그러나 흑고는 과연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신형을 흔들하는 순간
그는 이미 귓전으로 금마비를 스쳐 보내고 있었다.
"애송이 놈! 네 놈도 갈기갈기 찢어 개의 먹이로 만들어 주겠다."
흑고는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쌍장을 무섭게 뻗었다. 금악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노마! 그 전에 네 놈이 먼저 죽을 것이다!"
그는 양 손을 칼처럼 세우더니 휘둘러 뻗었다. 두 줄기 장력이 격
돌했다.
콰쾅!
지붕이 들썩이고 방이 무너질듯 울렸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두
사람은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금악비는 뒤로 세 걸음, 그러나 흑
고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호호호......!"
이때 느닷없이 사내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마력(魔力)의
교소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 들었다.
"호호호... 사형, 그만 둬요. 어차피 개파대전은 오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때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하세요."
방 안에는 어느새 한 백의미녀가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천
하우물(天下尤物) 백화미(白花美)였다.
백화미는 미태가 잘잘 흐르는 옥용을 무슨 까닭인지 면사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드러난 두 눈 만으로도 온 천하 남성의 혼
백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금악비는 안면을 씰룩였으나 백화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흑고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좋다, 흑고! 두고보자. 나 금악비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그
때 가서 똑똑히 보여주마!"
금악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홱 돌렸다.
흑고는 음흉한 괴소를 흘렀다.
"흐흐흐... 수라궁 따위를 안중에 둘 이 통천마군이 아니다. 노부
가 이곳에 온 이유는 노부의 애첩 애향향(愛香香)을 죽인 자를 찢
어죽여 개 먹이나 만들기 위해 온 것이다. 흐흐흐......!"
흑고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광이 줄기줄기 뻗쳐나오고 있었
다. 그러나 금악비와 백화미가 사라진 후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그는 음침하게 말했다.
"친구, 이제 그만 모습을 보이시지!"
"하하하... 역시 통천교주답소."
낭랑한 음성과 함께 방 안에 한 인영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자
부신군 무영종이었다.
"그대가 방금 노부에게 깨우침을 줬소?"
흑고의 의문스러운 말에 무영종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조금 전 내가 전음을 보냈소이다."
무영종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조심하시오. 이미 수라궁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개파대전 전까
지 모든 군웅들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소. 조금 전의 그런 방법
도 여러 가지 계략 중 하나인 독계(毒計)와 미인계(美人計)요."
흑고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무영종은 몸을 돌렸다.
"당신을 통해 경고하니 모든 사도 고수들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일
으켜 주시기 바라오. 미인계와 독계, 그리고 또 무슨 계략이 있는
지 모르지만."
무영종이라는 신비의 사나이,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흑고는 방 안에 선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인계, 독계, 그리고......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천황십독(天皇十毒). 그들은 백독곡의 제일고수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칠순이 넘었으며 백독마군 음무위의 오른팔 격인 존
재들이었다.
십독은 지금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두 눈이
모두 녹색을 띄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독공(毒功)이 절정에 이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문 밖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십독! 안에 있느냐?"
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선 자는 바로 십독이 하늘처럼 섬기는
백독마군 음무위였다. 그의 옆에는 한 명의 복면인이 따르고 있었
다.
대독이 음무위에게 머리를 숙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곡주님."
음무위는 나직하게 말했다.
"음, 너희들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
십독은 모두 의아했다. 지금은 한밤중이거늘 갑자기 무슨 의논을
하러 그가 친히 왔단 말인가? 또한 그와 함께 있는 복면인은 정체
가 무엇인가?
"모두 이리 다가와 봐라."
음무위는 그들에게 손짓을 했다. 십독은 의아했으나 감히 그의 명
을 어기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복면인의 두 눈에 기광이 스쳤다.
"탓!"
그의 입에서 기합이 발해지고 검광이 무섭게 번뜩였다.
"크악!"
처절한 비명이 잇달아 터졌다. 놀랍게도 그의 단검에 십독 중 다
섯이 두 동강이가 나버린 것이었다.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었다.
"무... 무슨 짓이냐?"
대독은 분노성을 질렀다. 그러나 백독마군 음무위가 음침하게 외
쳤다.
"죽어라!"
그의 손에서 가공할 장력이 발해졌다.
"으악!"
다시 사인(四人)의 머리가 단번에 박살나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오직 대독뿐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처절하게 외쳤다.
"너, 너는 곡주님이 아니구나!"
그 말에 복면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흐흐흐... 깨닫기엔 너무 늦었다."
번쩍!
가공할 검광이 번뜩이고 대독의 몸은 정수리부터 정확히 두 쪽이
났다.
아침.
백독마군 음무위는 자신의 처소에 앉아 조그만 옥갑을 만지작거리
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지극히 만족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흐흐... 이 해약(解藥)... 이제 오독비마 늙은이의 독계는 수포
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더구나 이 해약은 놈들의 계락을 풀 뿐만
이 아니라 첩자까지도 가려낼 수 있다."
그의 상념을 깨듯 덜컹 하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응?"
음무위는 몸을 돌렸다.
"아... 아니?"
그는 대경했다.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
는데 그는 바로 십독의 막내였다.
"아니! 황곡(黃曲), 어찌 된 일이냐?"
황곡은 쓰러질 듯이 다가왔다.
"저... 적이 기습을......."
"뭐, 뭣이?"
음무위는 급히 황곡을 부축했다.
"황곡! 똑똑히 얘기해라. 대체 어찌 된... 으악!"
그의 가슴에 한 자루의 비수가 깊숙이 꽂히며 피가 푹 하고 치솟
았다. 하늘도 놀랄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큭! 네... 네놈이?"
음무위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으나 그의 눈에는 온통 경
악과 불신, 회의가 어려 있었다.
"흐흐흐... 나는 황곡이 아니다. 황곡은 이미 내 손에 죽었다."
"너... 너는 누구냐?"
"흐흐... 알고 싶으냐?"
황곡은 얼굴을 쓱 문질렀다. 황곡의 새 얼굴이 드러나자 음무위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네... 네 놈이... 네 놈이 이럴 수가!"
황곡의 얼굴은 뜻밖에도 젊었으며 또한 준수했다. 그는 사이한 음
소를 흘렸다.
"흐흐흐... 뜻밖이냐?"
음무위는 치를 떨었다.
"배... 배신자!"
음무위는 쌍장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의 쌍장에서 검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자 가짜 황곡은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고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음무위가 무섭게 노려보며 서서히 다가왔다.
"너를 죽여버리겠다!"
그의 쌍장은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가짜 황곡은 두려움을 느
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흐흐흐... 백독마공으로 너를 한 줌의 독수(毒水)로 만들어 주
마!"
음무위는 쌍장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나 창문이 박살나면서 한 줄
기 가공할 검광이 번쩍 빛났다.
"크악!"
음무위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그의 등이 쪼개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복면인이 서 있었다.
"너... 너는?"
그 물음에 복면인은 복면을 벗었다. 오 순 가량의 청수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음무위는 몸이 거의 두동강이가 난 채 쓰러졌다. 가짜 황곡은 그
것을 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는 자는 모두 죽인다. 이 자는
독에 능통한 자니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복면인을 향해 말했다.
"갑시다!"
휘휙!
두 사람은 방 안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때 등이 갈라져 틀림없
이 죽은 것만 같았던 음무위가 꿈틀거렸다.
"이... 이대로... 죽을 수는... 너무나 원통하다... 무... 영종이
곧... 온다....... 그가... 이것을 필히 보아야......."
음무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흥건한 피를 찍어 바닥에
썼다.
<해약(解藥)은 완성...... 첩자도 가려낼 수 있는 효능...... 날
죽인 자는...... 두 명으로...... 지무성(智武星) 석(石)......>
음무위는 스스로의 피를 찍어 그같이 썼다. 그러나 끝까지 쓰지
못하고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울분과 원한이
어려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방 안에 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는 바로 무영종이었다.
그는 방 안의 참경에 놀라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아찔해짐을 느꼈다. 그의 눈에 죽어가던 음무위가 이 세상에
서 마지막으로 남긴 피로 쓴 글자가 보였다.
그 글씨를 읽은 순간 무영종의 눈은 무섭게 번뜩였다.
"지무성 석검영(石劍英)이라고?"
지무성 석검영, 그는 복건성 석가(石家)의 소공자로써 현재 이곳
에 있는 사도군웅들의 군사(軍師)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배신자라니 실로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놀라운 일이로구나."
무영종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밤. 월광이 수라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자전신도(紫電神刀) 팽수위.
하북팽가의 이(二) 가주인 그는 요즘 들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지고 있었다. 자신이 가는 곳, 있는 곳마다 끊임없이 떠나지 않고
감시하는 주위의 눈길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 일이
흐른 지금은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람이 긴장을 한다는 것, 그것도 며칠 동안 계속 긴장에 싸여 있
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적인 균형을 깨뜨리기가 십상이 아닌
가?
자전신도 팽수위가 바로 그런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좋다, 수라궁 놈들!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
다.'
그는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되다시피한 자전신도를 집어 들었다.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의 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팽수위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월광(月光).
휘황한 달빛 아래 화원은 숨막히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화원의 곳곳에 매복자의 눈초리가 자신을 향해 번들거리는 것을
팽수위는 알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스스스!
극히 미세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그의 곤두세운 청각 속으로 들
려왔다.
'역시.......'
팽수위는 자전신도의 칼자루를 힘껏 잡았다.
'하나... 둘... 셋... 네 놈이구나.'
그는 모르는 척 화원 중심으로 걸어들어갔다. 네 명의 감시자는
계속 그의 뒤를 따라왔다.
얼마쯤 가자 그의 눈에 한 그루 교향목(橋香木)이 보였다.
휙!
팽수위는 갑자기 신형을 날려 교향목 뒤로 몸을 감추었다.
그런데 조용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감시자가 모습을 나타내거나
몸을 날려야 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던 것
이었다.
팽수위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 동안 기다렸
다. 그러나 역시 종무소식이었다.
'이 자식들이?'
"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그것도 날카롭고 뾰족한 여인의 음성으로,
팽수위는 흠칫하여 비명이 울린 곳으로 잽싸게 신형을 날렸다.
화원 깊숙한 곳, 그곳에는 키가 낮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런데
그 꽃밭 위에 끔찍한 한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여인은 강간(强姦)을 당한 듯 하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가
슴에는 비수가 깊숙히 꽂혀 있었다. 게다가 복부도 뚫려 내장이
흘러나와 있었으니 실로 너무나 잔악무도한 살인이었다.
"이... 이럴 수가!"
팽수위는 대경실색했다. 더우기 그는 간살당한 여인의 얼굴을 보
자 아연해지고 말았다.
"아니, 이 여인은 비운선자(飛雲仙子)!"
비운선자는 화산파(華山派)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미모와 검법(劍
法)이 모두 크게 알려진 일대의 협녀(俠女)로써 당금의 화산장문
인인 철검수사(鐵劍秀士) 초일비(草一飛)의 사매였다.
"이... 이렇게 당할 수가?"
팽수위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대체 천하의 누가 비운선자를
강간하고 이토록 끔찍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휘익!
한 가닥 파공성과 함께 인영이 꽃밭에 날아들었다.
그는 오순 가량의 청수한 노인으로 허리에는 한 자루의 폭이 좁고
가벼운 연검(軟劍)을 두르고 있었다. 당금 사가(四家) 중 악가(岳
家)의 가주인 섬마검(閃魔劍) 악진원이었다.
악진원은 내려서자마자 비운선자의 끔찍한 주검을 보고는 안색이
홱 변해 외쳤다.
"팽형, 이게 어찌된 일이오?"
"으음."
팽수위는 그저 무거운 신음을 발할 뿐이었다.
"아니! 이 여인은 비운선자가 아니오?"
"그렇소, 악형."
"천하에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팽수위는 드디어 눌러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아... 수라궁 놈들을... 내 오늘 밤 끝장내고야 말겠소!"
그가 몸을 홱 돌리자 악진원은 깜짝 놀란 듯 그를 만류했다.
"팽형!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그러나 팽수위의 분노는 극에 달해 이미 그는 이성을 상실하고 있
었다.
"경거망동이 아니오. 나는 이제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소. 개파대
전을 십 일 연기할 것을 허락한 것은 군웅들의 커다란 실수였소.
그 동안에 놈들은 우리를 차례로 죽일 것이오."
악진원은 눈썹을 꿈틀했다.
"팽형! 그렇지만 함부로 움직이면 역시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오."
그 말에 팽수위는 기분 나쁜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까짓 놈들이 뭐가 두려워... 으악!"
처절한 비명이 그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의 심장을 뚫고
하나의 연검이 등까지 관통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찢어질듯 부릅
떴다. 그의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 악진원... 네... 네가?"
섬마검 악진원이 연검을 뽑아내자 피분수가 팽수위의 가슴에서 뻗
쳐나왔다.
"그러게 내가 뭐랬소? 함부로 움직이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지
않았소?"
팽수위의 눈은 이미 찢어져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네... 네... 네가?"
그러나 그는 그대로 있지 않았다.
"으아아!"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혼신의 힘을 모아 악진원을 덮쳤다. 그러나
악가(岳家)의 섬마검칠십이류(閃魔劍七拾貳流)가 번개를 그렸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팽수위의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는 뒤로
일곱 걸음이나 물러가다가 쓰러졌다.
악진원은 연검을 거두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팽수위. 내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경거망동 말라고
말이다. 흐흐흐흐!"
음모(陰謀). 암흑의 십 일(十日)을 통해 무서운 음모가 거미줄처
럼 군웅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죽음의 암수(暗手)에 영문도 모른 채 군웅들의 피는 덧없이 허공
에 뿌려졌다.
독(毒).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사이에 무서운 독이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퍼져 나갔다.
색(色). 아름다운 여인의 품 속에서 희열의 극치를 맛보며 신음하
다 졸지에 하나둘 죽어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군웅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웃고 떠들며 함께 이야기하던 친구가 검으로 가슴을 쑤시는가 하
면, 차를 마시던 친구의 손이 머리통을 부수었다. 또한 한 밤중
방문한 동문(同門)이 무참히 등을 찔렀다.
불신(不信), 또 불신(不信).
미칠 듯한 불신 풍조가 군웅들 사이에 독약처럼 번졌다. 그 누구
도 이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다. 웃고 떠들지도,
술을 마시거나 차를 나누지도, 방문한 동문을 맞아들이지도 않았
다.
이 엄청난 불신과 견딜 수 없는 불안(不安), 그리고 공포에 마침
내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진짜로 자결했
는지는 모르지만.
군웅들은 개파대전이 다가올 수록 수라궁의 존재에 대해 차츰차츰
엄청난 공포심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오백십일인(五百十一人)이라는 숫자의 군웅들 중 불과 팔 일(八
日) 동안에 백육십(百六十) 명이 줄어 들었다.
가공할 음모의 주동자는 분명 수라궁이었으나 그 증거가 없었다.
수라궁도가 군웅들을 죽였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왜
냐면 죽은 자는 모두가 군웅들 자체 인물의 수법으로 죽었기 때문
이었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 군웅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