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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학명
운향과 |
Citrus unshiu |
귤이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사기(古事記)》1) 라는 일본 역사책에는 “서기 60년경 다지마 모리란 이가 제주의 감귤을 가지고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백제 문무왕 때인 476년 탐라에서 지역 특산물로 헌상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러한 내용들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주도에서 재배된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에는 흔해 빠진 겨울 과일이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귤은 아무나 먹을 수 없었다. 멀리 고려 때에는 팔관회에 귤을 쓴 것을 비롯하여 조선조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기도 했다.
세조 원년(1455)에 제주도 안무사에게 보낸 공문에는 “금귤과 유감(乳柑)과 동정귤(洞庭橘)이 상품이고, 감자(柑子)와 청귤(靑橘)이 다음이며, 유자와 산귤(山橘)이 그 다음이다”라고 했다. 귤의 종류는 이외에도 당귤(唐橘), 왜귤(倭橘), 황감(黃柑) 등 여러 이름이 등장한다. 이처럼 제주도는 귤의 산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세정이 문란해지고, 관리의 수탈이 심해지자 제주 귤은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심지어 여름에 관리가 나와 익지도 않은 귤의 숫자를 세어 두었다가 가을에 바치도록 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귤 재배를 꺼렸고 아예 나무를 자르고 뽑아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점차 좋은 품종은 거의 없어져버렸다. 개화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시작된 귤 재배는 1911년에 일본에서 수입한 귤이 제주를 덮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제주 귤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제주도에서 가져간 귤을 다시 개량하여 들여온 온주밀감이다.
옛날에는 귤이 너무나 귀한 과일이라서 일반 백성들은 감히 구경도 할 수 없었으며, 임금도 끔찍이 아낄 정도였다. 중종 19년(1524)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황감을 한 쟁반씩 하사하면서 〈설중황감(雪中黃柑)〉이란 제목의 시를 지어 바치라고 했다. 귤 한 쟁반이라고 해봐야 10여 개 남짓할 터, 임금에게 바칠 시를 짓느라 골머리 꽤나 썩혔을 텐데, 귤 한 쪽이나 제대로 맛보았는지 의심스럽다. 명종 2년(1547)에는 홍문관 교리 이원록이 사표를 내고 어머니 병 수발을 위하여 떠나려고 하니, 임금이 밀감 40개를 하사하면서 노모에게 주라고 했다. 적어도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귤이라면 아무리 귀하더라도 한 궤짝은 되어야 체면이 설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게(?) 40개를 세어서 주라고 한 것을 보면 그만큼 귀한 과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명종 19년(1564)부터는 제주도에서 귤을 진상하면 매년 성균관의 명륜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나눠준 뒤, 유생들을 시험하는 황감제(黃柑製)를 시행했다. 이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하나로서 황감과(黃柑科)라고 하여 조선 후기까지 시행했다.
《동의보감》에 보면 귤껍질은 “가슴에 기가 뭉친 것을 풀리게 하고 입맛이 당기게 하며 소화를 잘 시키고 이질을 멎게 한다. 구역질을 멈추게 하며 대소변을 잘 보게 한다. 또 가래를 삭혀주고 기침을 낫게 한다”라고 했다. 지금도 민간요법으로 감기가 들면 귤껍질 차를 달여 마신다.
귤나무는 늘푸른 작은 나무로 키가 5미터 정도까지 자란다. 줄기는 가지가 많으며, 나무껍질은 갈색으로 잘게 갈라진다. 잎은 잎자루에 가느다란 잎이 나란히 하나 더 붙어 있다. 즉, 잎 두 개가 하나의 잎 대궁에 이중으로 달려 있는 셈이다. 이런 모양을 ‘홑몸겹잎’이라 한다. 이는 귤나무나 유자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모양이며, 다른 나무와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달걀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 달리고, 여름의 초입에 들면 흰빛으로 피며 짙은 향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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