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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故鄕
고향은 노고지리 초록빛 꿈을 꾸는 하늘을 가졌다.
풀풀 날리는 아지랑이를 호흡하며 신냉이도 자라고
할미꽃 진달래 송이송이 자라고 태고적 어느 신화의 여신이 속삭였다는
사랑의 밀봉의 울 안처럼 왱왱 풍성하다.
언덕을 지내고 시내를 건너고 봄은 노래 맞춰 고향으로 간다.
고향은 아직도 내 마음에 너그럽다.
― 김수영
나는 오랜만에, 근 10여 년 만에,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아마, 그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이었으니까 어머니 제사 때문에) 송정리 고향집에 내려갔다. 내가 막 지나온 10여 년간 세월을 새삼 돌이켜보면 내 삶은 지리멸렬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느리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으니 그 긴 터널을 겨우 빠져나왔고 뒤늦게나마 가까스로 결혼도 했으며 직장도 잡았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이제는 한시름 놓았다.
내가 고향에 내려오면 언제나 꿈과 몽상에 젖어 그리워했지만 그러나 이미 가슴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가는 남쪽 바다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한반도 남단 고흥 반도의 끝.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소록도 부근 바닷가가 고향이다.
바다는 위안이고 심연의 상처이다.
멀리서 어떤 목소리가…… 바다 쪽에서…… 울부짖었다.
돌아오라고! 돌아……! 고향으로……!
네 고향은 바로 바다인 거야.
초겨울 바다에 돌풍과 같은 강한 바람이 불었고 파도는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렸다. 작은 어선이 통통거리며 거친 파도를 헤치고 풍남항 부두로 귀환하고 있었다.
나는 해안선을 따라 만의 동쪽 끝 동백나무 숲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오랜 세월 바닷물에 씻겨 반들반들해진 바닷가 자갈들을 밟으며 걸었다. 하늘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오후의 따스한 햇빛이 구름을 뚫고 황금색 사선처럼 수평선 위로 쏟아졌다. 한나절 동안 나는 들뜬 채로 바닷가를 서성이면서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깊고 푸른 바다의 염분 냄새를 흠뻑 들여마셨다.
…… 달에게 그 가슴을 드러내 놓은 바다여!
…… 밀려와라, 그대 깊고 검푸른 바다여!
나는 아주 슬프지도 않았지만 아주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 바다가 내게 무슨 말을 했었던가, 바다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무슨 말인가를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은퇴하고 이곳에 내려와서 바다만 바라보며 살 수 있을까. 언제나 늘 파도 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던가. 파도는 수평선에서부터 아주 멀리서 밀려와 가까이서 철썩거렸다. 파도 소리가 너무 다정했고 그 소리는 깊이 파묻혀있던 어린 시절 과거로부터 되살아나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날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적이었다. 나는 공연히 인적없는 해변에서 파도에 쓸려가는 젖은 금빛 모래를 한 움큼 쥐고 허공으로 뿌렸다.
나는 건너편 이름도 없는 무인도인 작은 섬을 바라다보았다. 그 외로운 섬. 내가 어렸을 적에는 두 가구가 염소를 키우며 살았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그러나 그 섬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으리라. 나는 그들의 고립되고 힘든 삶을 상상했다.
내가 그때 어리석게도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바다와 함께 오순도순 사는 단순한 삶 속에서 행복했을 수도 있다.
나는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불가해하고 희미한 장면들을 이것저것 떠올렸다. 그렇지만 내가 유치한 감상에 젖어있었던 건 아니다. 그때 무슨 심각한 또는 애잔한 생각을 했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부질없이 눈물을,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할 것이다. 내 눈에서 그것은 아주 옛날에 말라버렸지 않았던가.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나는 생각했다.
전쟁의 상처가 무어 대단하다고. 그게 언제적 일인데. 이제는 삶에 대한 강한 의혹으로 그 지긋지긋한 어둠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무엇이 그토록 불안하고 두려운 것인가. 도대체 뭐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가. 이제는 철이 들 만큼 들 나이가 되었는데 이 세상을 향한 냉소주의도 버릴 때가 되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끊임없이 변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희망의 출구가 보이고 있다. 지금 당장 자신감과 함께 당당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한테도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함까지.
월남전 참전의 긴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은 정상적인 경로로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많이 지체되었다.
다시 돌이켜보면 나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희생자가 아니었고 가해자가 된 적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또는 나 자신에게 도덕적 이중성을 해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이중인격자라는 비난을 받아도 감수하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순진하게 자기 방어적이어서는 안된다. 나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위선적이거나 위험한 변신까지도 할 수 있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나는 아주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오면 언제나 그랬다. 나는 고향에 내려오기 전 며칠 동안 무기력해지면서 발열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끈질긴 강박관념이 유령처럼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시 자신과 싸워야 했다. 그렇지만 이건 의식이 더욱더 성숙해지는 과정일 뿐이고 내가 구제 불능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선배님의 끈질긴 권유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오십 대 중반이 되어 원숙한 중년이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술을 매일 엄청 마셨다. 그는 몇 번이고 아마 수십 번씩이나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신께 믿음으로 의지하면 신이 믿음에 응답하리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나오라고 하였다.
나는 이제 보통 사람의 일상적인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안주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다.
단순성. 반복. 익숙함.
나를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던 바윗덩어리 같은 무엇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에는 여수에서 수산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와 미역과 김을 양식하면서 미역 공장을 하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오랜만에 만나 집에서 담근 독한 과실주를 마시며 통음했다. 그는 옛날부터 워낙에 술이 센 탓에 그날 밤에도 술을 마신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뜨거운 햇빛과 거친 바닷바람에 검게 탄 그의 얼굴은 세월의 그늘에 덮여 있었지만 여전히 안온했다.
그는 항상 부끄러워하고 겸손했다. 그는 미역 공장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고 성공했다. 그렇게 멀리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그리운 추억담에 빠졌다. 몹시 가난했던 그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새삼스럽게 회상하면 아름답게 느껴진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지쳐서 서로 엉킨 채 잠이 들었다.
그날 밤은 깊고 깊은 밤이었다. 마법을 부린 듯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창백한 초승달이 바다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소록도
그날은 며칠째 겨울비가 오락가락 했었지만, 맑게 개어 화창하고 상쾌한 날씨였다. 나는 고흥 읍내로 나가 버스를 타고 녹동항까지 갔고 김재수 하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나룻배를 잠깐 동안 타고 그의 고향인 소록도로 건너갔다.
나는 한동안 내 처지가 한심했으니까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고흥에 내려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래서 내가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던 소록도로 가서 김 하사의 흔적을 찾는 일이 차일피일 늦어졌다. 그랬으니 해가 갈수록 강렬했던 기억이 차츰 희미해지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아주 희미한 윤곽으로만 남아 있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나는 월남전에 백마부대로 참전했고 열대의 고약한 병에 걸려서 나트랑의 102 야전병원에 40여 일 동안 입원했었다. 그때 병참부대 영현병이었던 김 하사를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는 전사 (혹은 자살) 했다. 김 하사의 유골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나는 1년에 한 번씩 소주 한 병을 들고 찾아가서 큰절을 하고 분향한다.
나는 그때 고향이 소록도 앞 바닷가 마을인 풍남항이라는 사실, 사촌 누님이 소록도 병원에서 몇 년 동안 간호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소록도에 갔었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이 소록도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하여 입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함께 소록도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부모와 격리된 채 미감아 수용시설인 수탄장 보육소에서 자랐으며 거기서 초등학교 분교와 녹산중학교, 성실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후 섬 밖으로 나갔다.
그날 소록도에 갔을 때 도양읍 출장소와 병원 관계자들, 소록도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가 80대 중반을 넘어선 노인으로부터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는 허리가 몹시 휘어져있고 앞쪽으로 깊이 수그린 자세로 걸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주 집중해서 내 질문을 들었고 이따금씩 자기 오른손의 문드러진 손바닥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는 바깥세상의 일에도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좋은 직업이야. 가르치는 일은 신성하니까.
나는 1915년 정월생이야. 소록도에 병원이 생기기 전에 태어난 거야. 함경남도 정평이 고향인데 거기가 함흥 남쪽과 붙어 있어. 1940년대 초면 한창 전쟁 중이었으니까 모두들 엄청 어려웠지. 그때 소록도에 문둥이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자혜의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문전걸식을 하고 별의별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순전히 걸어서 내려온 거야. 여기까지 오는데 2년이 넘게 걸렸으니까 요즘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겠지.
소록도는 문둥이들 한테는 마음의 고향인거야.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 죽을 때까지 갇혀있으니까 감옥인 셈이지.
흔히 일제의 강압 통치를 상징하는 존재로 소록도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네. 예를 들어 보자면…… 1935년 건립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교도소 구 소록도 지소’에 대해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유린 현장을 간직하고 있는 교도소 건축물로 건립 당시 원형이 잘 간직되어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하고 있다네.
이 시설은 한센인 가운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일반인과 동일하게 교도소에 수용할 수 없다고 하여 한센인 수용시설 안에 설치한 것이긴 하지만 문둥이를 아무런 이유 없이 무조건 탄압하고 구속하는 시설이었어.
일본인이 조선인을 괴롭히기 위해 식민지 시기에만 운영한 곳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해방 후에도 이 시설은 50년 이상 운영되다 1998년에야 운영이 중단됐지.
과연 소록도의 문둥이들이 식민지 시기에만 일본인들한테 핍박받고, 해방 후에는 아무런 탄압이나 박해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어림없는 소리야.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는 소록도 최악의 살인사건은 해방되고 나서 불과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 22일 발생한 ‘84인 학살사건’이라네.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던 상황을 이용해서 소록도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각과 부정을 은폐하기 위하여 나환자 중에서 말발이 센 지도층을 골라서 학살한 것이라네.
그 당시 나는 젊은 사람으로 지도층이 아니었으니까 해당되지 않았지. 그러나 학살 현장을 멀리서 지켜보았다네.
이 사건은 한하운 시인의「한국 나환자 학살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네. 그때 환자들이 한 줄로 줄을 서서 총을 맞고 구덩이에 떨어졌지. 어떤 환자는 기가 막히게도 총알을 세 발이나 맞고도 중심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네. 결국 그자들이 발로 차서 구덩이에 처넣었지.
소록도는 어떤 면에서는 전성기가 한참 전에 지나갔지. 그들은 다 나았으니까 환자도 아닌데도 오갈 데가 없으니까 일부는 남아 있는 거야. 옛 병사 건물은 대부분 황량하게 방치된 채로 볼품없이 썩어가고 있다네.
섬에서는 누구든지 남의 내력을 들추는 일이 없다네. 설령 내력을 알고 있다 해도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것이 섬사람들의 오랜 불문율이야. 가명을 쓰는 사람도 많고 고향을 숨기는 사람도 많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탓하는 사람은 없다네.
그렇지만 나야…… 병사 지대에서 지도소 요원이었고 장로회 소속 노인이었으니까 모를 수가 없지.
그 부모는 조금 늦게 들어왔고 그래서 치료도 늦어졌지. 치료가 끝나서 음성이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어. 다리도 절단해야 했고. 손도 오그라들고 코가 비뚤어진 다음이었지. 그렇게 되었으니 걔 아버지는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래도 낙천적이었지만 차츰 우울해지기 시작하더니 자포자기하더라고.
걔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궁금하다고 했던가? 내 기억은 정확할 거야. 아마 85년 4월 벚꽃이 한창 필 때였지. 그러니까 벚꽃이 필 때쯤…… 부부가 제비선창에 발을 디딜 때는 똑같이 30대 초반이었을 거야. 5살인가 6살 난 사내아이를 데리고 여길 들어와서 벚꽃이 필 때 떠난 셈이지. 남자가 먼저 죽고 여자는 몇 달인가 있다가 따라 죽은 거지. 그래도 문둥이치고는 살 만큼 산 거야. 그 사람들은 저세상에서도 오순도순 잘 살 거라고. 정말 부러워할 정도로 다정한 부부였거든.
걔 이름이 ‘김재수’라고 했지. 기억이 똑똑이 나는데 참 똑똑했지. 공부는 도맡아 놓고 1등만 했다니까. 그래서 문둥이 자식이 아니었으면…… 그래서 순탄하게 자랐다면…… 사관학교에 가서 장군도 되고 아니면 법대에 가서 고시합격 했을 거라고. 하여간에 개성이 강했고 고집이 셌지. 반항적이라고 할까……
여기서 분교를 졸업하면 중고등학교는 대도시이고 교육 여건이 훨씬 좋은 대구의 성심학원으로 갈 수 있었어. 그런데 걔는 한사코 안 가는 거야. 부모와 떨어질 수 없다는 거지. 나병은 유전병은 아니야. 전염성이 약하긴 해도 그래도 전염병 아닌가. 어린애가 함께 살면 전염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그래서 격리되어 살면서 한 달에 한 번씩 5분간이나 10분간 면회를 하는데 그때도 서로 접촉할 수 없는 게 규칙이야.
그렇지만 걔는 수시로 몰래 병사 지대를 넘어오는 거야. 부모님을 만나려고…… 어떤 때는 함께 자고 가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넘어갔지. 부모와 자식 간 정을 어떻게 끊을 수 있었겠나.
그의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거든. 내 기억으론 그렇다네. 외아들이 너무 보고 싶은 거지. 밤낮없이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서, 들판에서 일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밤에 잠들 때까지 눈물이 마르는 때가 없었지. 그들 부부가 함께 살기로 했을 때는 규칙에 따라 아버지는 강제로 단종 수술을 받아야 했어.
70년 가을쯤인가 초겨울이었나 난데없이 전사 통지서가 날아들어 온 거야. 그때 걔 부모들 심정이 어떠했겠나. 식음을 전폐하고…… 우리들이 음식을 장만해서 술병을 들고 집으로 찾아갔는데…… 며칠이나 함께 있었지만 도무지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네. 그들이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일상생활로 돌아온 게 정말 기적 같았지. 특히 어머니는 금방 죽을 것만 같았거든. 그러니까 사람 목숨이란 게 질기고 질긴거라네.
녹동으로 들어오면서 간척지를 보았을 거야. 그게…… 우리가 피땀을 흘려서…… 오마도는 우리가 80프로 이상 작업을 했지만 정부는 그걸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강탈해 갔어. 날강도가 따로 없지. 그때부터 우리는 정부를 믿지 않았다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었네.
이청준 작가의「당신들의 천국」을 이미 읽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그게 뭘 말하려고 의도했는지 헷갈려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아주 애매하거든. 작가의 고의적인 의도였는지 실수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일세.
어쨌거나 조창원 원장의 시도는 올바른 방향이었어. 그러나 간과한 게 있었는데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던 거야. 고흥 사람들은…… 건강한 일반인들은…… 우리가 완전히 치료가 끝났고 전염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음성인데도 우리를 받아주고 이웃으로 함께 살 생각은 눈곱 티끌만큼도 없었지. 우리는 음성이라도 여전히 문둥이 자식이었으니까 두려운 존재였거든. 우리는 불순물이고 극단적인 혐오시설이었단 말이지.
이청준 작가나 조창원 대령은 사천 비토도 사건의 내막을 잘 검토했어야 했어. 그들은 본질을 놓친 거야.
사천 남쪽 끝에 영복원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정착하려던 음성 환자들이 바다 건너 비토섬에서 토지를 구입하여 농지로 개간하려고 했는데 섬 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27명이 학살된 사건이지. 그게 1957년 8월에 일어난 사건이었어.
그 사건은 경찰도 못 본 체했고 그래서 집단학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은 사람이 없었어. 내가 알기론 그렇다네.
젊은이는 여기까지 왔으니 실제 보고 많은 걸 느낄 수 있을걸세. 내가 알고 있는 한 김재수와 그의 부모님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이야기했으니까 말일세.”
그날 바다에는 약간 거센 바람이 불었고 파도가 밀려와 조약돌을 어루만지고 뒤로 물러났다. 초겨울이었으나 따뜻한 남쪽 소록도에는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이 낮은 산들을 물들였다. 나는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생각났다.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날리리
그날, 여수에서 출발한 녹동행 동방여객 버스가 면 경계선을 넘어 도양면으로 들어서자 차창 밖으로 오마도 간척지의 격자무늬 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하고 상쾌한 날씨였다. 햇빛이 눈부셨다. 추수가 이미 끝난 논에는 야적된 볏짚들이 띄엄띄엄 놓여있고 멀리 시베리아 툰드라에서부터 날아온 겨울 철새들이 한가로이 날개를 퍼덕이며 흩어져 있는 곡식 낱알들을 쪼아먹고 있었다.
1960년대 초에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이지만 그때 소록도의 나환자들이 격렬하게 포효하는 바다와 싸우면서 방조제를 쌓고 간척지의 논들을 일군 것이다.
버스는 녹동항을 향해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단장한 2차선 도로를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다. 나는 약간 졸면서 가수면 상태에서 사촌 누나를 생각하고 김 하사를 생각하고 소록도를 추억했다.
누나네 집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잘사는 부농이었다. 그랬으니 누나는 순천에서 간호학교를 나온 후 소록도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다. 나는 그 시절 몇 번이나 나이 터울이 많은 누나를 만나러 소록도에 간 일이 있었다.
누나는 술을 너무 좋아했고 어린 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술을 권했다. 누나는 술에 취하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고 그리고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다.
누나가 말했었다. “내가 순천에서 알고 지내던 남자…… 그러니까 짝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어. 얼굴에 분홍색 벚꽃이 필 때쯤 처음으로 문둥이인 줄 알게 된 거지. 그가 소록도로 갔다는 걸 알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찾으러 온 거야. 여기 와서 알게 된 건데…… 남자 독신사에서 한동안 살았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지. 견딜 수가 없으니까 탈출한 거겠지.
자존심이 강한 남자이니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수술실 근무는 너무 힘들지. 병원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야. 그래서 오자마자 몇 개월 만에 도망치듯 떠나는 거지. 그러니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는 거야. 너는 우리 집안의 기둥감인데 이해할 수 있을걸…… 하지만 여기를 떠날 수가 없단다.
문둥이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다고…… 불행하게도 나쁜 병에 걸렸을 뿐인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거야? 그들은 갈 곳이 없어서…… 그들에겐 소록도만이 마지막 안식처인 거지. 환자들과 깊이 정이 들었거든. 내가 그들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갈 수는 없을 거야……?”
그 당시 소록도 병원의 간호원들은 예전처럼 양성 환자는 물론이고 보균자가 아닌 음성 환자인 경우에도 위생복, 위생장갑에 마스크까지 쓰고 나병 환자들에게 약을 건네줄 때는 핀셋을 사용했다. 그리고 섬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는 원생들은 양성이건 음성이건 간에 건강인을 대할 때는 4, 5보 거리에서 얼굴을 반쯤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야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건 엄격한 규칙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보다는 나중 일이지만 전국의 큰 병원에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은 의무적으로 6개월씩 지방으로 파견 나가 근무하게 되어있었다. 소록도 병원에도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 정형외과 2년 차 레지던트가 파견 나와서 근무했는데 그 의사는 거의 매일 나환자들의 썩어 들어가는 다리나 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했다.
누나는 어느덧 그와 사랑에 빠졌는데 임신을 했고 그는 냉정한 얼굴로 낙태를 강요했다. 그때 그곳에서는 한센병의 전염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나병 환자들에게 단종 (남자들의 정관절제수술) 또는 낙태수술이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낙태수술은 너무나 흔해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낙태수술을 완강히 거절했고 그는 광주로 돌아간 후 감감무소식이었다.
누나는 배가 불러오자 출산하기 위해서 소록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갔는데 그 후 소식을 나는 여태 모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누나는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채로 꼭꼭 숨어버린 것이다.
수탄장은 한 달에 한 번씩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부모와 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미감아 자녀들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병사 지대와 직원 지대 중간 완충 지대에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부모와 아이들이 천형의 몹쓸 병 때문에 서로 만져보지도 못한 채 멀리 떨어져서 목소리만으로 잠깐 동안만 만나는 곳. 부모나 어린이나 모두 탄식과 울음이 끊이지 않는다 하여 이름조차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어린아이들은 부모에게 달려가려고 몸부림치며 울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눈앞에 두고도 만져볼 수 없어서 흐느껴 울었다. (철조망이 없어진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14대 조창원 대령이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한센병 환자들은 대개 흰옷을 입고 머리에도 흰 수건을 쓴다. 얼굴에 진물이 흐르는 환자들은 얼굴도 하얀 수건으로 감싸고 있어 안개 속에서 멀리서 보면 안개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수탄장 면회를 하는 날은 바람의 방향이 항상 중요했다. 아이들은 반드시 바람을 등지고 있어야 하고, 부모들은 바람을 안고 서 있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혹시 미감아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앓고 있는 한센병 균이 옮아가지 않게 철저하게 관리한 것이다.
김 하사는 그 당시 부모님과 떨어져서 보육소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매달 부모님과 이렇게 재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월 초여서 분홍빛 벚꽃이 만개했던 그날 동생리에 있는 병사 지대의 관문인 제비선창 쪽에서 뱃고동 소리가 아스라하게 울렸다. 녹동항은 소록도와 바로 코앞 지척이다. 녹동항에서 600미터 남짓 거리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소록도 일반 선창은 모든 사람들이 왕래하는 뱃길이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제비선창은 한센병 환자들만 들고 나는 섬 안쪽에 숨어있는 작은 선창이었다.
김 하사는 5살 때 부모를 따라서 제비선창에 내려 소록도에 왔다.
아직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는데, 그들 가족은 벌교에서부터 먼지가 풀풀거리는 신작로를 걸어서 거기까지 온 것이다.
한센병 환자들은 그 당시에는 한번 소록도에 들어오면 극적으로 탈출하지 못하는 한 다시는 살아서 나가지 못했다.
만령당은 신생리 뒷산 중턱에 콘크리트로 지은 원통형 건물로 갓 모양 지붕을 얹어 세웠다. 한센병 환자들의 유해를 나무 상자에 담아 보관하던 납골당이다. 오래전에 기구한 운명으로 이 섬에 이주해 왔다가 주인이 없는 한 줌 재로 변한 숱한 원혼들이 잠들어 있는 사자 死者들의 집이었다. 정면에 감실을 두어 참배객들이 망자에 대해 배향을 할 수 있게 하였고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유골함이 안치되어 있으며 작은 분향대가 마련되어 있다.
김 하사의 부모님들 유골은 한 줌 재로 거기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DDS를 복용하면서 사실상 완치되었지만 적절한 치료가 지연되면서 안면 기형과 신경 손상이 생겼고 손발 등에 신경 마비가 왔다. 그들은 결코 섬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바깥세상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이 끊임없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죽을 때까지 망설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섬은 천국이나 낙원이 아니었고 그들을 영원히 떠나지 못하도록 묶어 놓는 족쇄였을 뿐이다.
부모님이 살았던 담쟁이들이 마구 늘어지고 휘감기며 타고 올라갔던 가정사 건물은 이미 허물어져 폐허만 남았다. (소록도는 환자들이 사는 병사 지대 7개 마을과 병원이나 기타 관공서의 직원들이 사는 직원 지대로 나뉘어 있고, 마을에는 독신 환자들이 사는 독신사와 부부들이 사는 가정사로 나뉘어 있다.)
부모님이 살았던 구북리 집터 뒤에는 누가 세웠는지 모르겠지만 먹으로 쓴 글자들이 도저히 판독할 수 없을 만큼 비바람에 모두 지워진 나무 비석만 외로이 서 있었다.
풍남항
언제나 밤안개가 짙은 곳이다. 아침이면 해안가를 뒤덮고 있던 옅어진 안개가 여전히 뭉그적거리다 햇빛에 쫓겨 사라졌다. 마을에는 항상 어촌 특유의 악취 같은 바다 냄새와 도수 높은 알코올 기운이 풍겼다. 술 취한 어부들은 사소한 일로 자주 티격태격 싸웠다.
풍남항은 작은 어항으로 면사무소 소재지는 아니지만 (오히려 면사무소에서 남쪽 바다 쪽으로 10리쯤 더 들어가 있다.) 송정리와 풍남리로 마을이 나누어져 있는데 내가 졸업한 풍남국민학교와 고흥경찰서 지소, 농협 지소, 수협 출장소, 우체국, 한지 의사가 운영하는 의원, 버스 종점, 술도가, 어선들이 드나들면서 정박해 있는 방파제 겸 부두가 있었다. 그 부두에는 한때 녹동항이나 여수로 가는 여객선이 접안했다.
도양면의 봉암 반도와 풍양면의 풍남 반도 그 중간 지점에 오마도가 있었고, 소록도 나환자들이 1960년대 오마도를 디딤목으로 바다를 잘라 막아서 오마도 간척지를 만들었다.
그날 밤 우리가 나눴던 말이 기억난다.
“고향에는 아주 오랜만에 내려온 거지.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안 변했을 거야. 바다가 어떻게 변할 수 있겠어. 너는 많이 변한 것 같지만…….”
“그렇지 뭐. 애들은 많이 컸겠구나.”
“큰놈은 벌써 휴학하고 군대에 갔어. 넌? 왜? 알리지도 않고 결혼했지? 나중에 알고 좀 섭섭했지.”
“노총각이 어쩌다가 뒤늦게 결혼했으니까……. 누구에게 알리기가 그랬어. 그때서야…… 자리를 잡으니까 조용히 결혼하게 된 거지. 한때는 결코 결혼을 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거든.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생활이 안정되더라고.”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렇지. 시간강사는 그게 보따리 장사야. 신분이 보장되지 않고…… 수입도 형편없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어. 하루하루 생존에 급급했지. 이러다간 인생의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네. 그랬으니 아버지가 가끔 용돈을 송금해 주었지 않은가. 그랬는데 기회가 생겨 사립 고등학교로 간 거야. 거기서 국어 선생을 하고 있지.”
“학생 가르치는 일이 보람 있을 것 같은데…… 바다와 힘겹게 싸우는 일보다는 말이야.”
“그게 그렇지 뭐…… 난 네가 부럽지. 매일 바다와 함께 사니까 말이야. 풍남항은 변치 않고 여전하다고…… 고흥 반도 끝자락에 있지만 저기 장엄한 천등산이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천등산으로 올라가는 울퉁불퉁한 험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절에 상관없이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지. 그리고 거금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니까 둘도 없는 천연 항구이지.”
“풍남은 아주 옛날 일이야. 자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겠지만 세월이 참 빨라. 지금 20세기가 지나가고 있다네.
풍남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게 반세기 전이라네.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가 아닌가. 지금은 쇠락할 대로 쇠락해 버렸는데 그게 몰락이라네. 오로지 몰락 뿐이라네. 녹동이 발전하니깐 반대가 된 거라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매일 바다만 생각한다네. 생활의 터전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바다는 변덕이 심하다고. 한창 일할 나이인데도 …… 바다와 너무 부대끼니까 지쳤다는 느낌이 들지. 바다는 여자의 품처럼 부드럽긴 한다네. 하지만 폭풍우가 치거나 파도가 거칠어지면 괴물로 돌변하는 거야.”
“남이 들고 있는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했는데…… 그런 건가?”
“난 어차피 여기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왔으니까. 미역 공장도 그럭저럭 돌아가니까.
술이 있지. 나는 매일 마신다네. 술이 주는 알딸딸한 느낌이 너무 좋지 않은가. 그렇지만 자식들은 대도시로 진즉 떠났으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걔들은 시골을 질색하거든. 아마 지옥처럼 생각할 거라고. 이제 고향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지. 너 나 할 것 없이 잔병치레를 하고 있지.”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만…… 아버지는 지금은 동네 과부 아주머니가 잘 돌봐주시니까 건강하시지만 언젠가 돌아가신 후에는…… 너라도 남아 있으니까 고향인거지.”
“네 부친은 오랫동안 혼자 사셨지. 뵌 지가 오래되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절대 재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지 않은가.”
“나는 자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왜? 새삼스럽게 재혼한단 말인가?”
“나는 제대하고 나서 여길 완전히 떠나버렸는데…… 가끔 몰래 내려와서 하룻밤만 자고 떠났지. 그때는 지긋지긋한 고향을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었다네. 그래서 오랜 기억들을 잊고 지냈지.
그런데 역시 나이 탓인가 본데…… 얼마 전부터 옛날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네. 어린 시절의 어떤 일들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내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느닷없이 떠오르는 법이니까.
우리는 다른 반은 없었으니까 6년 내내 한 반이었지 않은가. 나는 글씨가 아주 악필인 데다가 도무지 빨리 쓰지 못했고 넌 달필에다가 아주 빨리 썼지.”
“달필이 무슨 소용인가? 요즘은 손으로 쓸 일이 없지 않은가.”
“새삼스럽게 귀소본능이란 말을 들먹일 것까지는 없겠지, 진부하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내려와서 바닷가에서 살고 싶지. 세월은 빠르니까…… 은퇴하고 말이야. 어쩐 일인지 도시에 살다 보면 생활에 너무 지쳐서 바다를 잊을 수가 없다네.”
“너무 낭만적이라고 해야겠지. 네가 여기서 사막의 은둔자처럼 살 수 있겠어? 네 마음이 자꾸 변할 거라고.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가 없는 거야. 여긴 살다 보면 너무 답답하다고.
밤이 되면 사람이라곤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너무 적막하지. 너무 쓸쓸하니까 귀신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여기는 너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없을걸. 지금 지역 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고 있어. 그러니까 고향도, 향토애도 사라지고 있는거지. 결국 이러다간 가족관계도 희박해지겠지.”
“그건 그렇다네. 공동체나 가족이 해체되면 그런 걸 대체할 게 뭐가 있을까? 잘 모르겠어.”
“무슨 자극도 없고…… 따분하지. 결국 못 내려오겠지. 이런 외딴 시골 구석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도 괜찮은 것인지…… 자꾸 의구심이 들거라고.”
“마누라는 도시 여자니까 여길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리로 내려오자고 하면 질겁을 할거니까 말도 못 꺼낼거야.”
“그러면 정년 퇴직하고 마누라가 죽은 후에나 내려올 수 있겠군.”
“무슨 소리야. 여자가 더 오래 살지 않은가.”
그리고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끝에 이병주의 소식을 들었다.
“네가 월남 갔다 왔다는 걸…… 언젠가 누구한테서 들었던 거 같은데?”
“그랬었지. 내가 그곳에 갔다는 게…… 그렇지 뭐. 난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었지.”
“그래? 너도 알고 있겠지?”
“누구?”
“이병주 말이야. 걔는 어렵게 3사관학교 나와서 육군 장교가 됐었거든. 마지막 끝물에 월남에 갔다가 지뢰가 터져서 한쪽 다리…… 오른쪽 다리일 거야…… 무릎 위쪽까지 잘라냈지. 그렇게 됐다고 그러더라고.”
“제대하고 나니까 그 몸으로 어디를 가겠어. 결국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군대를 안 갔지 않은가. 그 당시에는 돈을 엄청 밝히는 면 병사계장한테 손을 쓰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었거든. 자네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지 않나? 워낙 유명했으니까.
그때 다리에 풀독이 올라서 습진 때문에 고생 좀 하긴 했는데 그걸 가지고 대단한 병인 것처럼 꾸며낸 거지.
그랬으니까 병주를 만나면 오금이 저리는 거야. 무슨 큰 죄를 지은 기분이 들면서 미안하더라고.”
“난…… 걔 소식을 까마득히 몰랐다고.”
“그래도 무슨 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훈장을 자랑하려고 가슴에 달고 다니기도 했지. 그게 아주 높은 훈장이라고 하더구먼. 그리고 연금을 받으니까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
처음에는 오른쪽 다리에는 의족을 끼고 목발을 짚으며 잘 걸어 다녔어. 몸을 앞으로 내밀고 목발을 짚어서 몸을 이동하는데 다시 그렇게 반복하는 거지. 그래서 휠체어를 타지는 않았어.
그때 소리소문없이 결혼도 했는데 얼마 후 여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어. 그때부터 성불구라는 소문이 떠돈 거야. 부부간의 속사정을 누가 알 수 있겠어. 여자 쪽에서 먼저 ‘나는 성불구자와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도시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 소문이 퍼진거라고 하더군.
그러더니 온전했던 왼쪽 다리 부상이 다시 도졌다면서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지. 그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어. 매일 술로 지새니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어. 나도 가끔 함께 술을 마셨지. 여기로 찾아왔었거든.
그는 늘 입버릇처럼 ‘사람 죽이는 일은 쉬운 게 아냐,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라고 말했었지.
한동안 술도 끊고 괜찮았는데…… 휠체어가 뒤로 밀리면서 바다로 빠져 죽었어. 그게 사고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었지.”
이병주는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었지만) 시절 술도가집 큰아들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자였고 유복했다. 얼굴에 언청이 수술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지만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그랬으니 단연 골목대장으로 위세가 대단했었다.
나는 어린시절 내심 그를 무척 부러워했고 시샘했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그의 소식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오래전에 읽었던, 마지막까지 다 읽은 건 아닌 것 같지만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줄거리를 떠올리면서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성불구자가 된 남자 주인공 제이크의 모진 운명을 생각했다.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 브렛은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제이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욕망을 희생하거나 억압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하염없이 방황했으나 그들에게 재생이나 구원은 없었다.
나는 이병주의 육체적 상처뿐만 아니라 영혼의 상처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이 울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차라리 월남에서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곱씹었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강한 성적 욕망을 느꼈겠지만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거지 뭐. 월남전 이야기는 이제 지겹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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