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세계각국은 인구의 노령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65세 이상, 특히 75세나 8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급증하고 있다(Martin Feldstein, 1997).
최근 대두되고 있는 국민연금의 재정문제도 전세계적인 노령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노령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연금 지급이 본격화되는 2020년대 중반부터는 연금급여가 보험료 수입을 초과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립되는 액수보다 지급되는 보험금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노령화는 국민연금제도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국민연금제도를 설계할 당시 인구의 노령화를 예측할 수 없었을까? 국민연금이 시작되던 1988년은 이미 노령화가 상당히 진행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현재와 같이 낮은 보험료율과 높은 급여의 지급을 약속했을까? 연금기금의 고갈을 예견하면서도 왜 계속 비효율적인 자금운용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은 국민연금제도를 비롯한 모든 사회보장제도의 운영이 정치적 속임수political manipulation와 무관할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Oscar Godoy and Sal-vador Valdes-Prieto, 1997, p.58). 이것은 대중민주주의라는 동전의 뒷면과 같은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치가(보다 엄밀히 말하면 정치집단)들은 국민 다수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하는 강력한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각종 연금의 혜택도 이러한 문제와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은 보험료를 내고도 터무니없이 큰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국민연금의 모순을 잘 설명해 준다.
국민연금제도의 또 다른 속임수는 소득재분배의 명분이다. 국민연금의 가입자들은 소득재분배 기능을 통해 만약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자신의 노후를 충실히 지켜줄 것으로 믿게 된다. 그러나 과연 국민연금이 추구한다던 소득재분배는 달성될 수 있는 것일까? 애당초 국민연금제도는 저소득층은 물론 고소득층도 자신이 적립한 금액보다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되었다. 다시 말해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연금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소득재분배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사 합리적인 연금제도를 설계했다고 하자. 그것이 기금의 효율적 운용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당사자들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연금기금을 이용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연금기금은 연금 가입자들의 이익과 전혀 관계가 없는 방향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의 국민연금은 물론 세계 대다수 국가의 국영연금제도가 파산위기에 빠진 이유는 이처럼 국영연금이 이해집단들의 정치적 압력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이 시행된 1994년부터 국민연금기금의 대부분이 공공부문에 투입되어 일종의 준조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연금급여와 보험료가 미래에 발생하게 될 연금기금의 고갈문제를 고려하기보다는 다양한 계층의 가입자(투표권자)의 구미에 맞도록 결정되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그리고 기금의 운용이 정치적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국민연금제도를 비롯한 국가독점적 국영연금제도의 근본적 문제인 것이다.
국가가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국민연금제도의 또 다른 모순은 국가가 연금가입자와의 약속을 어겼을 때(예를 들어 보험료를 인상하고 급여를 낮췄을 때) 연금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없는 국민들이 국가의 방침에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는 필요에 따라 약속을 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연금의 소비자인 국민들도 연금 서비스의 질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견제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연금개혁안은 민영화이다. 민영화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금융기관을 선택해 자신의 연금을 운용하게 하는 것이고, 연금의 관리·운용자였던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연금이라는 상품에 대한 독점적 권한이 사라진 것이다. 민영화를 통해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연금의 관리·운용자는 경쟁을 통한 효율적 운용의 동기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적연금제도의 근본적 모순은 해결될 것이다.
이 글이 제시하고 있는 민영화의 구체적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는 국민연금의 설계, 운용상의 모순을 인정하고 급여지급의 최초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밝힌다. 또 국민연금을 개인구좌식 적립방식으로 이행하여 모든 가입자가 자신이 적립한 금액에 일정한 수익률을 더해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 국민연금관리공단과는 별개로 금융기관들이 국민연금을 관리·운용할 수 있도록 하여, 가입자가 국민연금과 금융기관이 관리·운용하는 민영화된 연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민연금관리공단의 독점적 연금 관리·운영의 권한은 사라질 것이다. 또한 공공자금관리기금의 예탁을 차단할 수 있다.
셋째, 가입자들의 적립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공공자금관리기금 예탁금을 상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되어 있는 공공자금관리기금 예탁금의 상환을 위해 일시적인 재정적자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러한 재정적자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정부소유의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
넷째, 민영화된 새로운 제도는 칠레의 PSA와 유사한 개인연금저축구좌를 통해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섯째, 가입자들은 자유롭게 연금 관리·운용 기관들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국민연금보험료는 소득의 일정 비율로 의무화한다.
일곱째, 최소한의 사회보장, 즉 공적부조는 재정부담을 통해 해결한다.
이상의 방안들을 통해 국민연금의 민영화는 많은 경제적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저축의 동기가 높아질 것이며 자본시장의 성숙에 이바지할 것이다. 특히 외환위기나 주식시장의 붕괴와 같은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막대한 양의 국내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경제의 펀더맨털fun-damental을 건실하게 할 것이다. 물론 국가가 운영하던 국민연금제도에 경쟁자를 허용하는 민영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 민영화는 반드시 추진해야 할 것이다.
1. 시작하는 말
국민연금의 보험료가 또 인상된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급여는 내려가고 그나마 지급시기는 늦추어질 태세이다. 그래야만 기금의 고갈을 지연시켜 정상적인 국민연금의 운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제야 그런 사실을 털어놓을까?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등도 심각한 재정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제 국민들은 모든 공적연금제도를 사실상 불신하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별도로 가입한 민간보험회사의 개인연금도 국민연금과 같이 이런저런 이유로 보험료의 인상이나 급여의 인하를 요구했다면 가입자들은 당장 보험을 해약하고 다른 보험회사에서 취급하는 연금에 가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경우에는 보험료가 인상되고 급여가 인하되어도 해약이 불가능하다. 가입자들은 그저 결정된 방식을 따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국민연금 외에 다른 ‘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은 궁금해하는 국민연금의 모든 문제를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설계되었으며, 어떻게 운용되었길래 기금의 고갈에 직면하게 되었을까? 복지국가의 실현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이제 이런 궁금증들을 풀어줄 국민연금 민영화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2. 국민연금 무엇이 문제인가?
제도설계의 모순:적은 보험료와 큰 급여
연금제도를 먼저 실시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젊은 세대의 보험료로 노인세대들을 부양한 것과는 달리 우리 나라의 연금제도는 보험료를 적립한 사람만이 급여를 지급받을 수 있다. 즉 국민연금제도의 재원조달방식은 기본적으로 기여원칙에 따른 적립방식funded system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연금제도를 먼저 실시했던 선진국들이 채택했던 부과방식pay-as-you-go-system과 대조가 되는 방식이다. 두 가지 방식을 비교해 보면서 현재 우리 나라의 방식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선진국들이 채택하고 있는 부과방식이란 젊은 층에게 돈을 걷어서 노년층에게 주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노년층의 노후생활을 젊은 층이 책임지는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 문제점은 인구구조의 변화에 유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구구조가 노령화됨에 따라 젊은 층이 부담해야 할 몫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에서 볼 수 있는 연금재정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점이다.
선진국들보다 늦게 출발한 국민연금도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적립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즉 자신들이 낸 돈으로 노년층을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적립한 돈을 자신들이 노년이 됐을 때 지급받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적립방식을 따를 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보험료로 지급한 금액만큼을 급여로 지급받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연금보험료수준과 급여수준의 결정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양자를 연계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입자들이 원하는 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들은 불행하게도 양자가 잘 연계된 합리적 제도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 보험료를 내고 많은 급여를 탈 수 있는 제도를 선호한다. 우리 나라에 1988년 국민연금이 도입될 당시를 회상해보자. 상당수의 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국민들은 복지국가의 환상에 젖어 모순 투성이인 국민연금의 도입을 환영하지 않았던가?
국민연금의 모순은 다음에 서술하게 될 일련의 사실들로부터 보다 명확하게 될 것이다. 우선 국민연금 가입자의 보험료 수준과 약속된 급여의 수준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험료가 인상된다 하더라도 급여의 수준은 상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국민연금의 가입자 A의 경우 보험료는 월보수의 6%로 적립된다. 월소득이 100만 원인 사람은 6만 원이 될 것이고, 200만 원인 사람은 12만 원이 된다. 만약 이 금액에 이자를 가산하여 연금을 지급한다면 문제가 있을 리 없고, 적립방식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는 것이 될 것이다. 보험료를 많이 낸 사람이 많은 급여를 지급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민연금의 규정은 연금급여의 지급을 가입자 A의 월소득의 70%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상은 전국민의 노후소득을 보장한다는 명목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약속이 현재의 보험료 적립금으로 충당할 수 없을 정도의(보험료 납입액에 비해) 과다한 금액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국민연금의 구조가 매우 공평하지 않은 제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득을 파악하기 어려운 농어촌 가입자의 경우 신고소득을 기준으로 보험료를 부과하므로 봉급생활자에 비해 보험료는 적게 내고 소득재분배의 원칙하에 상대적인 급여는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소득재분배라는 명분이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를 살펴보자. 국민연금은 소득재분배를 위하여 연금급여를 균등부분과 비례부분으로 나누어 산정한다. 즉 보험료의 다소에 관계없이 일정한 액수를 항상 보장하는 항목과 보험료에 비례하여 다소가 결정되는 항목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례부분이 적립방식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균등부분은 소득재분배의 명목을 위한 부분인 것이다.
<표 1>을 보면 가입년수가 20년 된 저소득층의 경우(배우자 혜택을 포함하면), 보험료의 5.56배까지를 지급받을 수 있고, 고소득층은 보험료의 2.17배를 급여로 받게 된다. 저소득층과 고소득층 간에는 상대적인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소득층마저 상당한 정도의 급여를 보장받고 있는 소득재분배인 것이다. 이미 자금의 상당부분을 공공부문에 운용하고 있어 수익성이 오히려 악화된 상태이고 멀지 않은 장래에는 기금의 고갈마저도 우려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급여지급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방법이 있다면 현재세대의 연금지급을 위해 미래세대를 희생시키는 것 뿐이다. 즉 연금보험료를 점차적으로 인상하고 급여를 인하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이러한 문제들이 속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연금제도의 방식, 즉 적립식 방식이 부과방식에 비해 우월하다던 부담 전가의 문제로, 경우에 따라서는 부과방식 못지 않게 심각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마틴 펠드스타인Martin Feldstein은 정부가 관리하는 기금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Martin Feldstein:1997, 7/8, pp.34~35).
“첫째, 정부는 정부관리기금을 통하여 예산적자를 메우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현재의 연금기금은 공식적으로는 예산 외이지만 지난 10년간 기금의 잉여는 정부의 적자예산을 메우는데 사용되었다.
둘째, 정부관리기금은 정치적 고려에 의해 투자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정부는 정부관리기금이 정치적 개입 없이 법률에 의해 관리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특정 지역의 특정사업에 기금을 운영할 수 있다.
셋째, 정부가 기금을 주식과 채권에 일정한 비율로 분산 투자한다 하더라도 결코 효율적인 자본투자가 될 수는 없다. 민간투자자들은 장래성이 있는 기업에 투자하고 경영실적이 좋지 않은 기업의 주식은 매각함으로써 자본시장을 효율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경영상태가 좋은 기업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규모를 확장할 수 있게 되는 반면,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기업은 규모를 줄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와 같이 효과적인 투자를 할 수 없다.”
국민연금기금 역시 이러한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다. 국민연금기금은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이 시행된 1994년을 기점으로 공공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자되고 있다. 각 부문별 수익률 추이를 살펴보면, 공공부문 투입이 금융부문을 앞지르기 시작했던 1994년 공공부문의 수익률은 10.25%였던 반면, 금융부문은 13.91%였다. 1997년 상반기 평균수익률도 공공부문은 10.33%였지만, 금융부문은 12.05%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부문 투자는 금융부문 투자에 우선했으며 막대한 액수의 이자손실을 자초한 것이다. 공공부문 투입이 초래한 연금기금의 총 손실액은 1996년 말 현재에 약 6,989억 원에 달하고 있다.
공공부문 투입 비중의 증가가 계속되면 2000년대 초반에는 지급해야 할 이자만 해도 정부의 일반회계예산에 육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지 국민연금기금의 공공부문 투자 규모가 크다고 해서 정부의 상환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연금기금의 예탁은 국회의 심의나 동의를 받는 채권이 아닌 5년 만기의 ‘예수금증서’의 교부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금증서는 시장에서의 환금성이 없을 뿐 아니라 원금상환에 대한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 따라서 이미 발행된 예수금증서의 상환을 위해 또 다른 예수금증서를 발행함으로써 영원히 예수금의 규모가 증대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예수금의 원금상환과 이자상환을 위해 예수금증서를 발행하는 이러한 현상은 이미 현재의 기금운용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회의 통제가 없는 연금기금의 예탁
헌법 제58조는 “국채를 모집하거나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을 체결하려 할 때에는 정부는 미리 국회의 의결을 얻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부가 국공채 등을 발행할 때는 반드시 국회의 의결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편 연금기금은 예수금증서를 통해 차입되므로 국회의 의결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예수금증서를 교부함으로써 차입해가는 연금기금 역시 정부 채무이므로 국공채 발행과 동일한 사실상의 기채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연금기금의 예탁과정에는 정부의 기채행위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회의 사전의결권이 있어야 한다.
또한 국민연금기금은 여타 기금 및 일반회계와 합쳐져 재정투융자특별회계로 이전되고 각종 공공사업에 투자되기 때문에 사실상 일반예산과 동일하게 사용되나 기금운용계획의 수립과정에서 국회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은 국회 예·결산의 심의·의결권에도 위배된다.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의 강제예탁조항
국민연금기금이 공공부문에 집중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합법화시킨 것은 바로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이다. 1993년 12월 7일 국회를 통과한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5조는 “기금 등의 관리자는 그 기금 등의 설치에 관한 법률에도 불구하고 그 여유자금을 관리기금에 예탁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민연금의 기본적 성격과 배치된다. 국민연금기금은 가입자의 보험료에 의한 적립방식funded system으로 조성되는 사적 임금의 신탁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기금의 안정성과 수익성을 제고하여 그 실질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취지에 부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금기금의 공공자금화를 의무화시키는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의 강제예탁조항은 국민연금재정의 안정성과 수익성을 악화시켜 연금기금의 고갈을 앞당기고 있다. 즉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5조, 6조, 10조는 “기금을 관리·운용하되 가입자 및 수급권자의 복지증진을 위한 사업에의 투자는 국민연금재정의 안정을 해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해야 한다”는 국민연금법 제83조 2항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준조세가 된 국민연금
국민연금기금을 공공부문에 투입하는 것은 기금이 준조세로 간주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준조세란 정부가 가계와 기업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 이외에 정부기금, 민간기금, 그리고 기금재원의 일종인 부담금 등 또 다른 재정수입을 말한다. 이렇게 불합리한 현행 조세체계 하에서 생겨난 준조세는 도입이나 징수 과정에서 세금에 비해 저항을 덜 받는다는 이점과 조성이나 운영이 비교적 쉽다는 이유 때문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법적으로 조세가 아니기 때문에 세법에 의해 통제를 받는 국세나 지방세보다는 관할 부처(공공자금관리기금의 경우 재정경제원)에 많은 재량권이 허용되어 있고, 재원의 사용처나 적정 규모에 대한 국회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나 있다. 이와 같이 사적 임금의 신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국민연금을 재정자금으로 활용하고 있는 문제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공공성을 강조하는 금융부문 기금운용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은 금융부문에는 총 운용자금 중 약 31%인 8조 112억 원이 투입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순히 금융부문의 투입을 늘린다고 효율적 운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금융부문에 투자되는 연금기금 중 국공채 매입의 비중이 매년 증가하여 1996년 말 현재 36.1%에 달하고 있으며, 이러한 국공채의 매입은 발행시장을 통해 매수하고 있으므로 수익성 목표보다는 국공채의 강제소화라는 공공적 목표가 더욱 강한 실정이다.
주식투자 수익률 또한 1995년 6.9%, 1996년 4.89%를 기록함으로써 공공부문은 물론 복지부문(1995년 10.68%, 1996년 9.69%)보다도 현저히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투자비율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는 주식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기금을 인위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수익률의 제고가 가장 큰 목표라 할 수 있는 금융부문 운용에 있어서도 공공성만을 강조한 투자는 금융부문 투자기금 중 상당부분이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 예탁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 것이다.
연금의 관리와 운용주체
국민연금기금의 비효율적 운용이 국민연금가입자와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국민연금기금 운용은 가입자의 합의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국민연금법 제84조는 기금의 운용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동 위원회는 위원장인 재정경제원 장관을 포함하여 총 1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구성을 살펴보면 재정경제원 장관 등 5명의 장관은 당연직 위원이며, 지역가입자 대표 3명(농협회장, 수협회장, 대한변협회장), 수급권자 대표(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 관계전문가 2명(KDI 원장,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5백만 명에 달하는 사업장 가입자 대표는 노·사 각 2명(한국노총위원장, 금융노련위원장, 경총회장,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위원이 정부의 의견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 위원이 이렇게 정부주도로 구성되다 보니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정식회의를 개최하지 않고 서면회의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의 의무 예탁조항으로 인해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으며, 「공공자금관리기금법」에 의하여 설치된 공공자금관리위원회가 공공자금의 운용 결정권을 갖고 있다. 공공자금관리운용위원회는 재경원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통상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장관 8명과 한국은행 총재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연금가입자들은 국민연금이 재정자금으로 예탁되는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기금운용 구조이다.
비효율적 관리조직
국민연금을 비롯한 한국의 사회보험의 관리비와 관련하여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문제는 거의 동일한 가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보험의 관리를 별도의 관리기구를 통해 함으로써 비효율과 낭비가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 의료보험은 직장, 지역별로 400여 개의 조합을 만들어 조합별 관리운영방식을 취하고 있고,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은 별도의 관리기구를 두고 있다. 이에 반해 국민연금은 하나의 관리기구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역시 별도의 관리기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의 대상자는 거의 동일하다. 즉 한 사람의 근로자가 4개의 사회보험에 모두 가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대상자에게 원리가 비슷한 사회보험을 적용하면서 4개의 독자적인 관리운영기구를 둔다는 것은 낭비임에 틀림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사회보험 관리효율성 개선방안』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국민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 우리나라 4대 사회보험의 관리조직이 각각 별도로 운영되어 총 지출액 중 관리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선진국의 약 3배에 이른다고 지적했다(<표 3>참조). 4개의 사회보험을 기금운용은 별도로 하고 관리운용만 일원화해도 상당한 정도의 행정비용은 절약될 것이고, 그만큼 보험급여로 돌려 쓸 수 있는 재원의 양은 커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관리비 과다지출은 민간 보험회사와의 비교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국민연금이라는 상품 1개를 독점적으로 관리하므로 연금상품의 판매비용이 필요없다. 반면에 민간의 보험회사는 40여 개의 상품을 관리, 판매하는데 막대한 인원과 비용이 소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직원 1인당 사업비Operating Cost는 1996년 기준 4,570만 원으로, 6대 민간 생명보험회사들인 A의 1,820만 원, B의 1,280만 원, C의 2,470만 원, D의 1,510만 원, E의 2,000만 원, F의 1,120만 원보다 훨씬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표 4> 참조).
<표 4> 국민연금관리공단과 6대생명보험회사의 비교
(단위: 명, 개, 백만원)
총 직원수*
취급 상품수
자산
('96년말 현재)
사업비('96)**
직원1인당
사업비***
주: *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총직원수: 임원+1∼6급+기능직
생명보험회사의 총직원수: 임원(Director)+직원(Staff)+모집인(Solicitor)
**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사업비: 1996년도 예산집행실적의 지출항목 중 관리운영비+자산취득비+임차보증금+연구개발비 단, ( )안의 수치는 이중 관리운영비
생명보험회사의 사업비: 생명보험사업개항 중 사업비(Operating Expenses)
*** 직원1인당 사업비: 사업비/총직원수, 국민연금관리공단의 ( )안의 수 치는 1996연도 예산집행실적의 지출항목 중 관리운영비/총직원수
자료: 대한민국정부, 『1996회계년도 기금결산보고서』, 1997
국민연금관리공단, 「1997년도 국정감사업무보고」, 1997. 10
보험감독원, 『1996년도 보험통계연감』, 1997
이와 같이 우리 나라 사회보험의 관리조직의 비대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국가 독점적 연금제도의 문제
위에서 제시한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연금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연금제도를 독점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고, 가입자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국민연금관리공단 외에 연금을 취급하는 다른 기관이 있었고, 서로 경쟁적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가입자들은 보험료를 높이고 급여를 낮추는 기관과 연금계약을 당장 해약하고 다른 기관과 거래했을 것이다. 정부가 다음과 같은 개혁안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도 연금제도가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공급되기 때문이다.
3. 정부의 개선안
국민연금제도개선기획단이 연금개선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안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둔 채 단기적인 처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험료율 인상안 : 현행제도는 1988~1992년까지 3%이던 것을 1993년부터 1997년까지는 6%로 상향 조정하였고, 1998년 이후 9%까지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2009년까지는 현행 제도와 동일하게 실시되고, 2010~2014년은 9.95%, 2015~2020년은 10.90%, 2020~2024년은 11.8%, 2025년 이후는 12.65%까지 단계적으로 상향 조정된다.
연금의 재정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이미 보험료율의 단계적 인상안은 예상된 바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보험료율을 계속 인상해야 기금의 고갈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행 제도가 1998년을 눈앞에 두고 1998년 이후 9%까지 보험료율을 상향 조정했듯이, 2025년이 가까와 오면 다시 보험료율을 12.65% 이상으로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12.65%의 보험료율로 연금재정의 문제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처럼 기금의 비효율적 운영이 계속된다면 20%, 30%의 보험료를 받는다 해도 기금고갈의 문제를 결코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
보험료율의 인상으로 인한 보다 근본적 문제는 노동시장에 왜곡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임금에서 갹출하는 보험료율의 인상은 결국 실질임금의 하락을 의미하지만, 비탄력적인 노동공급은 이에 신속한 반응을 하지 못하게 되고, 사용자측 역시 증가된 비용 부담을 물가상승으로 전가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급여수준 인하안 : 개선안에 의하면 최하위 소득계층 20%는 소득의 77%, 최상위 소득계층 20%는 소득의 31%, 평균 소득계층은 소득의 40%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개정안은 최하위 20% 계층 100%, 최상위 20% 계층 48%, 평균 소득계층이 70%를 받게 되는 현행의 급여수준보다 대폭 인하된 안이다.
이처럼 보험료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함에도 불구하고 연금급여가 오히려 감소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모순이 불가피했던 것은 애당초 급여의 수준을 보험료와 연계하여 설계하지 않았고 단지 소득의 일정 비율을 지급 받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연 보험료율을 능가하는 급여를 지급하고도 기금의 재정이 온전할 수 있을까? 물론 ILO가 권고한 기준인 소득의 52.4% 이상을 연금으로 지급할 수 있다면 노후소득이 보장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금의 고갈을 감수하고서라도 현재세대의 노후생활은 보장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번에 발표한 정부의 개선안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제시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선안 역시 연금재정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수준까지 급여수준의 하락이 이루어져야 연금재정의 정상화가 가능할까? 이 문제 역시 보험료 인상안과 같은 악순환이 지속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개선안은 노후소득의 보장이라는 국민연금의 시행목적과도 큰 차이가 있다. 그동안 국민연금이 큰 저항 없이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은 노후생활보장이라는 달콤한 공약 때문이었다. 만약 국민연금 급여가 이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민간 보험회사 등에서 취급하는 개인연금보다도 불안한 상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많은 국민들은 국민연금의 시행에 반대했을 것이다. 민간 보험회사의 개인연금에만 가입했다면 노후를 위해 이중적으로 연금에 가입하는 불편도 없었을 것이고, 기금의 고갈이나 그로 인한 급여수준의 하락에 대한 염려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저축의 동기는 더욱 커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급연령 연장안 : 개정안에 따르면 2013년부터 5년 간격으로 수급연령을 1세씩 상향 조정하여 궁극적으로는 65세까지 연장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근로자의 평균 정년은 55세이고, 명예퇴직과 조기퇴직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수급연령을 현재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한다면 근로자들은 최소한 10여 년간 소득의 단절 속에서 노후생활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연금수급연령의 연장은 현재 노동시장의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발상이다.
물론 수급연령을 연장하는 것은 국민연금재정의 문제를 다소 완화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퇴직금 중 상당부분이 이미 국민연금으로 전환되고 있는 상태에서 퇴직 후 10여 년 이후에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은 연금재정의 문제를 근로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선안 역시 바람직한 처방이라고 할 수 없다.
공공부문 수익률 보장안 : 정부는 1998년도 공공자금관리기금 예탁금리의 시중금리 보전을 결정했다. 개선된 예탁금리 산정방식에 의하면, 국민주택채권(5년 만기)의 유통수익률(1997. 9. 8. 현재 연 11.30%)을 매분기마다 기본금리로 지급하는 것은 현행 예탁금리(연 10.37%)보다 약 1% 인상효과가 있으며, 기본금리인 국민주택채권(1종)의 유통수익률이 국민연금기금의 운용수익률(주식 제외)보다 낮은 경우 그 차액을 사후 정산적인 보전이자로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이때 보전이자를 위한 재원소요는 재특융자계정의 이자예산에 계상된다.
그러나 재특융자계정의 이자예산에 계상하여 재원을 조달한다는 것은 재원이 기금수익외에서 조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금수익외라는 것은 곧 국민의 세금을 의미한다. 결국 공공부문의 수익률을 시중금리선에서 보전한다면 외형적으로는 국민연금기금의 재정문제가 해결되지만 국민은 그만큼의 액수를 다른 세금을 통해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4. 칠레 연금개혁의 교훈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의 개혁안은 모두 정치적 속임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단기적인 치유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칠레 연금개혁의 일등공신인 호세 삐녜라는 “정치가와 정부도 이기적인 동물일 뿐이며 이들에 의해 운용되는 연금제도는 결국 그들의 이익을 위해 운용될 뿐이므로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연금제도의 국가 독점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통한 개혁만이 그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 본 국민연금제도의 문제는 과연 국가의 독점력을 제거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국가가 설계·관리·운용하는 연금제도의 필연적인 모순은 무엇일까?
대중민주주의하에서 정치가(집단)는 다양한 이익집단의 이익을 적당하게 대변하는 외형을 갖추는 것이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연금제도의 설계와 관리·운용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연금보험료와 급여 수준이 누구에게나 이득이 되도록 설계된 것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연금보험료를 적게 받고 많은 급여를 지급하는 정책은 실천하기 어렵지만 저소득계층은 소득재분배의 달콤한 공약에 넘어가기가 쉽고, 고소득층에게도 큰 저항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연금기금을 정부재정의 일부로 사용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세를 통한 재정의 확보는 이해당사자의 저항을 감수해야 하는 데 반해 연금제도는 선심을 제공할 수도 있고, 공공기금인 연금을 재정자금으로 활용하기도 쉽다(Martin Feldstein, 1997, 7/8, pp. 34~35). 즉 연금의 이해당사자를 ‘공공성’과 ‘소득재분배’의 논리로 설득시키기가 훨씬 용이한 것이다. 기금의 고갈은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있지만, 공공성이란 명목하에 공공부문에 투입되는 기금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민연금제도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적 개입을 차단할 수 있는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러한 개혁은 연금 서비스에 대한 국가의 독점적 권한이 사라질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칠레의 민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민영화를 통해 달라지는 것은 개인의 노후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연금제도를 통한 소득재분배 기능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소득재분배 기능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비극의 발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민영화가 이루어지면 소득재분배의 환상 같은 약속이 없는 대신 더 높은 수익률이 보장되고 경제 전체는 활력을 찾게 될 것이다.
물론 사회보장의 존립을 위협하는 공적연금의 해체가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부작용을 우려한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칠레 대통령이었던 피노체트는 사회주의가 망쳐 놓은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하이메 구즈만이 주도하는 시카고학파Chicago boys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칠레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정부의 개입이라고 판단했다. 정부의 개입이 경쟁을 감소시키고 이로 인해 비효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노체트는 이에 따라 수입자유화, 외자도입, 외국인투자 전면허용, 금융자유화 등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폈고, 마침내는 칠레의 경제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칠레경제 부흥의 진정한 주역은 공적연금의 민영화였다. 민영화를 통해 연금을 관리하게 된 민간 기업들은 기금을 국가 기간산업은 물론 이웃 국가들인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아르헨티나 등에 투자해 높은 수익을 올렸다. 기금의 수익은 직접적으로는 가입자인 국민의 몫이었지만, 그 효과는 국가 전체의 건실한 성장으로 나타났다. 연금 민영화로 칠레인들의 소득은 증가했고 실업률은 감소할 수 있었다. 물론 칠레인들이 누리는 사회복지의 혜택은 소득재분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사회복지의 진정한 수혜자가 아닐까? 민영화된 칠레의 연금제도와 개혁의 결과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PSA(Pension Savings Account system)와 AFP(Pension Fund Administration companies)
민영화된 칠레 연금제도의 핵심은 PSA제도와 AFP이다. PSA(Pension Savings Account system)는 칠레가 시행하고 있는 민영화된 연금제도, 또는 이 제도하에서 운영되고 있는 개인의 연금저축구좌를 의미하고, AFP란 민영화된 연금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금융기관을 말한다. 이 제도하에서 개인은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수많은 AFP(Pension Fund Administration companies:Administradoras de Fondos de Pensions)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PSA구좌는 노후에 연금으로 지불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자산과 같은 것이다. PSA구좌를 갖게 된 근로자들은 세 달에 한 번씩 자신의 구좌에 적립된 연금의 액수, 연금기금의 운용실적과 내용 등을 통보받는다.)
근로자들은 각 AFP의 재정상태나 수익률을 비교하여 자신의 연금저축을 다른 AFP로 변경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AFP의 파산으로 인한 손실에 대비할 수 있고 AFP 또한 높은 수익률과 적은 수수료를 보장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어, 결국 고객에 대한 서비스의 질도 향상된다. 법적으로 AFP와 그들이 운용하는 기금은 독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최악의 경우 AFP가 파산한다 해도 연금지급은 보장된다(Superintendence of AFP, 1996, pp. 47~48).
민영화의 결과
PSA와 AFP를 바탕으로 칠레의 AFP들에게는 1995년 약 250억 달러의 투자기금이 적립됐다(Superintendence of AFP, 1996). 이러한 금액은 1,400만 명의 인구와 GDP 6천억 달러 규모의 개발도상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순수 국내조성 자본이다.
이와 같은 장기적 투자 자본은 다음과 같은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
첫째, 민영화로 인한 가장 큰 효과는 자본생산성의 증가로 인해 경제성장률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표 5>에서 보듯이 GDP의 실질성장률은 1970년대의 평균 2.5%에서 1980년대에는 평균 3.2%로 증가했고, 1990년대에는 평균 7% 이상의 고속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평균성장률과 비교해 보면, 1970년대에는 칠레가 라틴아메리카의 평균성장률보다 4% 정도 낮았으나, 1980년대에는 오히려 1.7% 앞서나가게 되었고, 1990년대에는 그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둘째, 국내저축은 1990년대에 들어 1970년대와 비교할 때 10% 정도 증가하여 27~29%에 도달했으며, 이 수치는 라틴아메리카 평균인 15%를 훨씬 넘어서 동아시아의 평균에 근접하고 있다(<표 5> 참조).
셋째, 실업률이 1983년에 30%에서 1993년 5%로 감소하는 등 고용상태도 매우 건전하게 되었다(조영훈, 1996).
넷째, 금융시장과 금융제도의 효율성 제고에도 기여했다. 정부가 연금제도의 민영화를 위한 비용 충당을 위해 큰 규모의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했기 때문이다. 민영화 과정에서 상승한 주식가격은 결국 AFP의 수익률을 증가시켰고, 근로자들은 생산성이 향상된 민간기업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AFP에 의해 운용되는 막대한 양의 자금은 그 수익성을 제고할 새로운 종류의 금융상품 개발을 촉진시켰고, 미완성이었던 기존 상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었다(Pin~era, 1996).
자료: Baarclays Bank Country Report, 1996.8.1, 조영훈(1996) 재인용.
다섯째, 기존의 부과방식에서는 소득재분배의 왜곡이 있었다. 즉 정치적 과정이나 소득을 파악하는 기술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소득재분배가 저소득계층으로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하에서는 오히려 소득불평등의 감소효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용과 임금의 두 가지 변수를 살펴보자. 우선 민영화는 고용을 증대시켰다. 그런데 이 고용의 증대는 주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빈곤 해소 및 소득불평등 감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과 1993년 사이에 저소득층의 취업률이 16%나 증가하였다(조영훈, 1996, p.30).
민영화는 임금을 상승시키는 데도 공헌하였다. 기존의 연금체제에서는 노동자가 연금 및 의료보험비로 임금의 17%를 납부해야 했는데 비해, 민영화된 새로운 체제에서는 이전에 지불했던 사회보장보험료 8%가 면제되고 18%의 임금인상 혜택을 입음으로써 6.46%의 실질임금 인상 효과가 발생했다(Karl Borden, 1995).
사회불평등 감소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경험적 증거는 빈곤율의 지속적 하락이다. 칠레 계획청의 조사에 따르면, 1992년 현재 인구의 32.8%인 440만 명이 빈곤층이고 그 중 120만 명은 극빈층으로 분류되었다. 이것은 1990년과 비교하여 빈곤층이 83만 명, 극빈층이 59만 명 감소한 수치이다. 또한 1990년의 수치는 인구의 44%(5백 5십만 명)이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던 1987년에 비해 크게 향상된 것이고, 다른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빈곤층이 1980년 1억 4천 명에서 1990년 2억 명 가까이로 44% 증가한 것과 대비된다(조영훈, 1996, p.31).
여섯째, 민영화는 연금기금의 효율적 운영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연금수령 가능액을 증대시켰다. 지난 10년간 AFP들은 평균 14% 정도의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그 결과 신체제하에서는 구체제에 비해 약 40~50% 더 많은 노령연금을 수령하게 되었으며, 상해 및 유족 연금의 경우에는 증가율이 70%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Pin~era, 1996).
일곱째, 민영화된 연금제도는 칠레의 정치와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민영화된 연금제도에서의 연금급여는 오직 칠레의 경제상황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기존제도에서 문제가 되었던 보험료율의 인상이라든지, 기금투자의 할당 문제에 대한 이익집단간의 정치적 세력다툼과 무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많은 근로자들은 반대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AFP로 전환했으며, 그들 스스로가 연금, 교육, 건강 등의 문제들에 대해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책임을 지는 풍토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Oscar Goday and Salvador Valdes-Prieto, 1997, pp.60~74).
칠레 연금개혁의 또 다른 의미는 많은 나라에서 개혁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개혁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1994년에 부분적으로 민영연금을 도입했고, 1997년에는 멕시코, 볼리비아, 과테말라, 엘살바도르에 민영연금이 도입되었으며, 다른 국가들도 민영연금을 계획중에 있다. 그 외 이탈리아와 뉴질랜드도 칠레와 비슷한 연금 민영화를 추진 중이며 중국, 인도네시아, 폴란드, 캐나다, 영국 등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미국 의회에서 논의되었거나 논의 중인 연금 개혁안도 칠레 사례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Peter Ferrara, 1997).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연금의 민영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이다.
5. 연금민영화가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연금 민영화는 이제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으며 바람직한 경제적 효과를 산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금 민영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민영화의 부작용으로 지적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관리비용의 증대
AFP에 가입한 국민들이 AFP의 수익률과 재정상태 등을 파악해 다른 AFP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PSA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가입자가 언제든지 다른 AFP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AFP 자신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가입자를 늘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며, 결국 마케팅 및 판매비용 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Superintendence of AFP, 1996, p.150).
그러나 <표 6>에서 보듯이 칠레 AFP들의 마케팅비용은 연금 민영화 직후인 1983년에 2,303페소에서 1984년에는
<표 6> AFP 연평균 운영비용(Operating Cost)
1995년 12월 현재 (가입자 1인당, 단위: 페소*)
내근사원임금
판매직임금
임원
연봉
마케팅비용
전산
비용
관리
비용
감가
상각
상환
기타
비용
운영비용
총액
주 : * 1$ = 400 칠레 페소.
자료 : Superintendence of AFP, 『The Chilean Pension System』, 2nd ed., 1996, p.190.
1,002페소로 크게 감소했고, 1990년 최하 858페소까지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판매직 임금도 1983년 4,258페소에서 1985년에는 3,237페소까지 하락했다. 단 1988~89년을 전후로 해서 판매직 임금과 마케팅비용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연금 민영화의 폐단이라기보다는 시장현상의 일환이다. 시장에 이윤이 존재하는 한 AFP들은 진입의 인센티브를 갖게 될 것이고 현재는 이러한 동기를 갖고 진입한 새로운 AFP의 진입으로 경쟁이 치열해졌다.
1995년까지 모두 16개의 AFP가 진입, 활동하고 있으며 (<표 7> 참조), 해가 갈수록 AFP 시장에서는 어느 한쪽의 지배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그 힘이 점점 더 분산되고 있다(<그림 3>, <표 7> 참조). 즉 시장에 이윤이 존재하는 한 각 AFP들은 시장의 경쟁심화로 인한 관리비용의 증대를 감수했던 것이다. 따라서 관리비용의 문제는 시장에 신규로 진입하는 AFP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것이다.
<표 7> AFP의 시장점유율
AFP
보험가입자 비율(%)
총 기금의 비율(%)
Aporta
0.49
0.67
Armoniza
0.52
0.47
Bansander
2.36
4.36
Concordia
1.69
0.90
Cuprum
6.56
13.19
Fomenta
0.33
1.06
Futuro
0.13
0.31
Habitat*
20.75
16.84
Magister
1.40
1.59
Planvital
2.33
2.27
Proteccion
5.75
10.52
Provida**
31.82
20.39
Santa Maria
14.55
14.60
Summa
6.44
7.62
Union
4.27
4.55
Valora
1.62
0.62
Total
100%
100%
주 : * www.habitat.cl 참조
** www.provida.cl: 참조
자료 : Superintendence of AFP, 『The Chilean Pension System』, 2nd ed., 1996, p.80.
다른 시장과 마찬가지로 AFP 시장에는 상대적으로 점유율이 높은 AFP도 있고 낮은 AFP도 있게 마련이다. 만약 어떤 AFP가 점유율이 너무 낮아서, 또는 수익률이 저조해서 투자된 비용을 회수할 수 없을 때 그 AFP는 시장에서 퇴출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AFP들의 마케팅비용이나 판매비용의 과다여부는 AFP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FP의 과다 경쟁은 관리비용을 증가시키고 평균적인 수익률을 하락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민영화가 곧 관리비용을 증가시켜 수익률을 낮추리라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5장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민영화는 연금의 관리운영기구인 AFP를 새로 설립하는 것이 아니다. 재무구조와 영업력이 뛰어난 기존의 금융기관들이 국민연금을 관리·운영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세일즈 인력과 영업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민연금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추가로 운영하는 셈이 될 것이다. 또한 국민연금 이외에 추가로 가입하고 있던 각종 연금과의 연계 또는 통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기금 운영규모 대비 관리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연금에 대한 정부의 재정부담 증가
칠레의 경우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는 여러 가지 형태로 연금에 대한 재정지원을 계속했다. 충분한 이익을 내지 못한 개인구좌에 대한 보조, 20년 이상 연금보험료를 납부하였으나 충분한 액수의 연금을 적립하지 못한 가입자들에게 평균임금의 22~25%, 최저임금의 85%에 달하는 최저노령연금의 보장, 혹은 연금보험 미가입자들에게 평균임금의 약 12%에 해당하는 공적부조 혜택의 제공 등이 그 예이다.
이에 따라 민영화 이후 정부의 재정지원 액수는 매년 늘어갔다. 1970년대 연금에 대한 정부의 보조는 연평균 GDP의 2.6% 선이었던 반면, 민영화 이후에는 연평균 9.7%씩 늘어나 15년 동안 평균 GDP의 3.3%로 증가하였던 것이다(Superintendence of AFP, 1997, p.26). GDP에 대한 공공지출의 비율 역시 늘어나 1967년에서 1972년 사이에는 그 비율이 평균 23.6%에서 1983년과 1988년 사이에는 25.6%로 늘어났다. 현재 정부의 사회보장 관련 재정적자는 21억 달러에 이르며, 민영화 이후 재정적자의 연평균 증가율이 11.4%를 기록하고 있다(Superintendence of AFP, 1997, p.26). 그러나 연금의 민영화가 정부 재정부담의 증가를 초래한 것은 아니다. 만약 민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정부의 재정부담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칠레는 1952년에 이미 사회보장예치금을 다른 공적 지출로 전용함으로써 재정 불균형이 발생했다. 따라서 연금재정방식을 부분적립식partially funded에서 완전부과식pay-as- you-go으로 변경했으나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부과식은 정부 재정부담을 더욱 증가시켰다(조영훈, 1996, p.26).
민영화 이후 재정적자가 증가했던 것은 지속적인 재정지원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금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은 민영화의 전환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공기업을 매각하고 정부소유의 자산을 매각하는 등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소득재분배
저소득층은 연금민영화를 통해 더 이상 소득재분배의 혜택은 받을 수 없게 된다. 급여는 오직 자신이 적립한 보험금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단순히 소득재분배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잣대로 양 제도의 우월성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교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연금 민영화를 통해 저소득층의 절대소득이 향상될 수 있는 가의 문제이다.
삼성보험금융연구소의 다음과 같은 연구에서 우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즉, 1997년 현재 연소득 13,366달러의 하위소득층이 같은 연금보험료로써 현재의 공적연금제도하에서 받을 연금액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구성된 민영연금체제에서 받을 수 있는 연금액을 비교해 보았다.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표 8>에서 보듯이 민영연금체제하에서의 저소득근로자들은 사회보장연금보다 평균 1.5배 더 많은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표 7> 저소득근로자가 퇴직후 첫달에 받을 연금액 비교
(단위: $, 1997년 현재가격)
출생연도
사회보장연금
민영연금
1930
1950
1970
581
666
811
602(1.0)
1,391(2.1)
1,205(1.5)
평균비율
1
1.5
이렇게 볼 때, 연금의 민영화는 공적연금제도하에서와 같이 소득재분배의 효과는 없지만, 공적연금하에서보다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맺는말
과학과 의학 기술의 발달로 세계 각국은 인구노령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65세 이상, 특히 75세나 8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급증하고 있다(Martin Feldstein, 1997).
국민연금의 재정문제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노령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연금지급이 본격화되는 2020년대 중반부터는 연금급여가 보험료수입을 초과하게 되어 재정을 어렵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의 노령화는 국민연금제도의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제도를 설계할 당시 인구의 노령화를 예측할 수 없었을까? 인구의 노령화를 예측했더라면 왜 현재와 같은 낮은 보험료율과 높은 급여의 지급을 약속했을까? 연금기금의 고갈을 예견하면서도 왜 계속 비효율적인 자금운용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은 국민연금제도를 비롯한 모든 사회보장제도의 운영은 정치적 속임수political manipulation와 무관할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Oscar Godoy and Sal-vador Valdes-Prieto, 1997, p.58). 특히 연금제도를 채택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수결에 의해 운영되는 대중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는 한, 정치가들은 국민 다수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하는 강력한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현재 국민연금의 문제인 ‘적은 보험료, 큰 연금’은 정치가들의 이러한 행태를 잘 설명해 준다.
국민연금제도의 또 다른 속임수는 소득재분배의 명분이다. 국민연금의 가입자들은 소득재분배 기능을 통해 만약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자신의 노후를 충실히 지켜줄 것으로 믿게 된다. 문제는 저소득층은 물론 고소득층도 국민연금제도를 통해 자신이 적립한 금액보다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연금제도하에서 소득재분배의 실현은 요원한 것이다. 국민연금기금의 운용상의 비효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금급여와 보험료의 결정, 기금의 운용이 미래에 발생하게 될 연금기금의 고갈문제를 고려하기보다는 다양한 계층의 가입자(투표권자)의 구미에 맞도록 결정되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국가가 운영하는 국민연금제도의 근본적 모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연금개혁안은 민영화이다. 연금의 민영화를 통해 개개인은 노후생활을 스스로 설계하는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을 것이며 마치 맞춤양복을 주문하듯 다양한 인생과 미래를 설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199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시카고대학의 게리 베커Gary Becker가 “두 신흥국가(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사회보장의 민영화를 선도했다는 사실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Business Week, 1996. 10. 21)이라고 한탄했듯이 개혁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에서 그러했듯이 실타래처럼 엮여 있는 다수의 이해당사자가 국민연금의 개혁을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민영화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칠레의 민영화에서 지적된 관리비용, 재정적자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국민연금의 민영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정부는 국민연금의 설계, 운용상의 모순을 인정하고 급여지급의 최초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다. 또 국민연금을 개인구좌식 적립방식으로 이행하여 모든 가입자가 자신이 적립한 금액에 일정한 수익률을 더해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 국민연금관리공단과는 별개로 금융기관들이 국민연금을 관리·운용할 수 있도록 하여 가입자가 국민연금과 금융기관이 관리·운용하는 민영화된 연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민연금관리공단의 독점적 연금 관리·운영의 권한은 사라질 것이다. 또한 공공자금관리기금의 예탁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민영화된 연금의 관리를 위해 별도의 AFP를 설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금융업무가 통폐합되어 규범의 경제economy of scope를 추구하는 마당에 구태여 연금의 업무만 별도로 한다는 것은 개별 기업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관리비용의 낭비요소가 될 것이다. 칠레의 경우 관리비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연금만을 운용하는 AFP의 설립 때문일 것이다. 한편 개인연금저축구좌는 각 금융기관의 경영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는 별개의 기금으로 운영하게 함으로써 연금지급의 확실성을 보장해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예금자보호제도도 필요할 것이다.
셋째, 가입자들의 적립금을 상환하기 위해서는 공공자금관리기금 예탁금을 상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되어 있는 공공자금관리기금 예탁금의 상환을 위해 일시적인 재정적자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러한 재정적자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정부소유의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 정부의 축소는 각 분야의 효율성 향상과 경기 부양으로 인한 세수 확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민영화된 새로운 제도는 칠레의 PSA와 유사한 개인연금저축구좌를 통해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개인연금저축구좌는 개인의 예금구좌와 성격이 같으므로 단순한 연금이 아닌 자산의 성격을 갖게 된다. 현행 국민연금제도하에서는 국민연금만으로는 노후설계가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간 보험회사의 연금에 별도로 가입하고 있다. 만약 개인연금저축구좌에 가입하면 이러한 불편은 해소될 것이다. 즉 각 개인은 단 하나의 개인연금저축구좌에 현재 국민연금 갹출금액과 민간 보험회사에 지불되는 보험료를 한꺼번에 적립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 전체적으로 개인의 연금상품을 관리하기 위해 지불되는 비용도 절약될 수 있다.
다섯째, 가입자들은 자유롭게 연금관리운용기관들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입자들로 하여금 금융기관들의 수익률과 경영상태 등을 비교하여 다른 금융기관으로 연금구좌를 옮겨가게 하는 것은 연금보험시장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칠레의 경우처럼 너무 빈번한 이동이 있을 경우 오히려 혼란이 있을 수 있으므로 약 2년 정도의 계약기간이 만료된 후 수익률 등을 참조하여 연금계약을 갱신하도록 하는 방안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국민연금보험료는 소득의 일정 비율로 의무화한다. 연금보험료는 소득의 10%를 기본으로 하고 그 이상은 자율에 맡긴다. 10%를 초과하는 금액은 비과세 소득으로 인정함으로써 저축의 동기를 부여한다.
일곱째, 최소한의 사회보장, 즉 공적부조는 재정부담을 통해 해결한다. 즉 최저소득층에게는 국가의 재정부담이 필요하다. 그러나 농어민이나 자영업자의 소득을 보다 정확히 파악해 사회보장의 혜택이 남용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사회보장 지출을 줄여나가고 개인연금저축구좌를 통해 자신의 노후를 자신이 직접 설계하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 개인들에게 더 많은 수익률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와 같은 방안들을 통한 개혁은 더 이상 현재의 세대만을 위한 개혁이나 특정 이익집단의 이익에 맞추기 위한 개혁이 되지 않을 것이며, 현재와 미래 세대 모두를 위한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될 것이다. 결국 민영화는 국민연금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물론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을 건실하게 할 신약의 처방이 될 것이다. 1994년 외환위기의 광풍이 경제의 뿌리를 흔든 멕시코에서도 민간의 투자 촉진과 저축률 제고를 위해 연금의 부분적 민영화가 단행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