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대관식 복음서 중에서 성 마태의 초상, 약 800년, 양피지에 금박과 잉크, 32.4×24.9㎝,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파뉘르주와 양떼
악한 파뉘르주(Panurge). 16세기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Fransois Rabelais 1494~1553)의 풍자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나오는 일화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파뉘르주는 교활하고 잔인하며 사악한 사내로 거짓말과 비꼬기를 잘 하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며, 죽음 외에는 두려워하는 게 없었습니다. 머리도 총명하고 위트가 풍부했지만 그는 그런 장점을 좋은 쪽으로 살리지 못하고, 못된 짓거리만 일삼았습니다.
어느 날 한 상인이 양을 배 가득히 실었습니다. 갑판 위에까지 양이 꽉 찼습니다. 그 배에 파뉘르주가 타고 있었습니다. 상인은 이 사나이의 인상이 좋지 않아 그를 멸시하는 말을 했습니다. 파뉘르주는 상인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시침을 떼고 양을 한 마리 사겠다고 흥정해 양떼 중에서 두목격인 가장 큰 놈을 시가보다 훨씬 비싼 값에 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양을 번쩍 들어 물속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양은 레밍턴 쥐처럼 맹목적으로 두목의 뒤를 좇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파뉘르주의 예측대로 갑판 위의 양떼가 울부짖으며 모조리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양들은 끝내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두 물귀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상인은 얼굴이 노랗게 되어 마지막 한 마리의 꼬리를 잡고 늘어지다가 함께 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파뉘르주의 복수는 이처럼 잔혹했습니다.
동물들의 집단 자살 행위는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5년 11월 터키 동부의 밴 지방에서는 1,500마리의 양들이 줄지어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 400마리가 즉사했습니다. 2012년 10월 1일 오스트리아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운전자들은 한순간에 벌어진 새떼의 습격에 혼비백산했습니다. 한 무리의 새들이 전선에서 뛰어내려 자동차 앞 유리를 향해 돌진했기 때문입니다. 충돌 사고로 100마리 이상의 새들이 죽었습니다.
이밖에도 2009년 미국 서부 해안에서는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인 펠리칸 수백 마리가 달리는 자동차나 바다 위의 보트와 충돌해 사망했습니다. 2011년 11월 뉴질랜드 남섬 북쪽 해변에선 돌고래 61마리가 숨진 채 모래톱에 밀려왔고, 숨이 붙어있는 것들도 물속으로 밀어 넣는 사람들의 노력을 거부한 채 숨을 거뒀습니다. 2009년 8월 스위스 라우터브룬넨 고원지대에서 풀을 뜯던 젖소 28마리가 수백 미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숨졌습니다.
인간에게도 양과 같은 습성이 있을까?
라블레보다 훨씬 앞서 <영웅전>을 쓴 로마의 플루타크(Plutarch 46?~120?)는 로마인의 성향을 양떼의 습성에 비유했습니다.
“로마인은 양과 같다. 양은 혼자서는 목동의 뒤를 따르지 않지만, 떼를 지어 있으면 서로 간에 애정이 생겨 앞장서는 두목의 뒤를 열심히 따라간다. 그처럼 제군들도 떼를 지어 끌려가는 것이다.”
20세기에 벌어진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의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 자살은 양떼의 습성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일제 군부 정권은 전쟁 말기 무조건 항복을 거부한 채 ‘1억 옥쇄’ ‘1억 특공’(당시 일본 인구가 1억 명 정도였음)을 충동질했습니다. 태평양에 널린 섬들의 뭇 기지에서 미군의 공격에 옥쇄나 만세돌격(평균 96% 사망)으로 수십만 명이 죽었습니다. 무기도 식량보급도 끊긴 상태에서 할복이나 수류탄⋅청산가리 등으로 자살항거를 감행한 것입니다.
1978년 11월 18일 남미 가이아나에서는 미국인 912명(어린이 276명 포함)이 집단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56년부터 백인과 흑인의 차별을 반대하는 기독교파 인민사원(Peoples Temple)을 세운 교주 짐 존스가 신도 전원을 독극물 주사나 총격으로 떼죽음 한 초대형 자살사건입니다. 미국에서 남미로 근거를 옮긴 인민사원의 참상을 살피러 온 상원의원 리오 라이언 일행을 사살한 존스가 보복이 두려워 사주한 범행입니다.
동물학자나 사회심리학자들도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진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집단자살 배후에는 정치적⋅종교적 사주가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생을 포기하고 자살을 택하는 것은 상식이나 일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의 옥쇄는 천황의 신국(神國)을 수호하겠다는 군국주의자들의 망령이, 인민사원의 참극은 유토피아 망상에 몰입한 사이비 교주의 독선이 빚은 결과물입니다.
특히 정부나 권력자의 선동은 국민의 참화를 더 키울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게이오의숙(慶應義塾:게이오대학의 전신)을 세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는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관존민비 사상을 먼저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국민이 국가를 걱정하는 것은 정부이고,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독립의 기력을 잃으면 겉으로 문명의 이기를 갖춰도 이는 민중을 위축시킬 뿐”이라고. 그리고 상비군의 제도화, 학교 설립, 철도 건설 등 메이지(明治) 신정부 이후의 눈부신 발전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이런 국가 우위 현상을 이렇게 비교했습니다. “△옛 정부는 무력만 사용했으나, 지금의 정부는 무력과 지력을 병용하고 있다 △옛 정부는 민중의 힘을 눌렀으나, 지금 정부는 민중의 마음을 빼앗았다 △옛 정부는 민중의 육체를 지배했으나, 지금 정부는 민중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옛 정부는 민중에게 귀신처럼 보였으나, 지금 정부는 하느님처럼 보인다”라고.
그러면서 후쿠자와는 “씩씩한 모습의 상비군 모습은 박수의 대상이지만, 민중 위압의 수단으로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정부가 설치한 학교와 철도는 진보의 증거라며 자랑함이 당연하지만, 국민은 오히려 정부의 은혜라 생각하고 더욱더 관의 시혜에 의지할 뿐이다”고 경계했습니다. 어쩌면 만주국을 만들고 중국⋅러시아와의 전쟁에 이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훗날의 일본에 대한 경고였는지도 모릅니다. (저서 <학문의 향기>에서)
우리나라는 안전지대일까?
1980년대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존 A 위컴은 한국인의 속성을 쥐에 비유해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한국 국민들에게는 아직 적합하지 않다. 한국인과 한국 언론은 전두환 정권을 재빨리 지지했다. 한국인은 쿠데타를 일으킨 반역자라도 지도자로만 세우면 무조건 따라간다. 한국 국민성은 쥐와 같아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이 (줄지어) 따라갈 것이다”
항의가 잇따르자 그는 북극지방에 사는 레밍턴 쥐의 습성을 일컬은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시궁창이나 일반 들쥐와 달리 레밍턴 쥐는 천적이 없어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먹이사슬의 균형이 깨집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개체 수 조절을 위해 밤중에 줄지어 빙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집단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집단 자살하는 땬 짐승이나 새와는 다르지만 생사를 가리지 않고 우두머리를 따라 내닫는 속성은 같습니다.
새 정부 들어 집단적 요구와 행동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국민적 저항’이라고 선언했는데도 민노총과 전교조는 우리가 촛불집회를 주도했다며 응분의 대가를 내놓으라고 주장합니다. 대통령의 최저임금 10,000원 공약에 초중고 구내식당 근무자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학생들은 빵을 사 먹거나 짜장면을 시켜 먹고 있습니다. 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부적격’ 발언을 한 의원에게 문자폭탄을 화살처럼 쏘아댑니다.
먹이사슬의 변혁을 외치는 집단의 선두에 만에 하나 선동가⋅위선자⋅아첨꾼⋅사이비가 끼어든다면 자칫 국민은 희생양이 됩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다운 나라 건설은 물 건너가고 맙니다. 정부가 약속한 원칙과 방향에 어긋남이 있을 때 제동을 걸 수 있는 깨어 있는 국민만이 자유민주주의 조국을 지키는 원동력입니다.
[펌] / 필자소개; 김홍묵(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 2017년 07월 04일 (화) 00:00:39
100일 동안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구글X 최고기술자의 행복론
예나 지금이나 많은 철학자들이 행복에 대해 탐구하고 사색했다. 사상가, 철학도만이 아니었다. 종교인 문인 예술가들도 그렇고, 무수한 장삼이사들도 무엇이 행복이며 어떤 상태가 행복인가를 고민했다. 짧은 단상이 아니라 체계화된 저술로 ‘행복론’도 허다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톨스토이), “적당한 외모, 한 사람은 이기고 둘에겐 질 정도의 체력, 먹고 입고 살기에는 약간 부족한 듯한 재산, 내 생각보다 절반 정도만 인정받는 명예와 말솜씨가 행복 조건”(플라톤), “부모구존,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보며 부끄럼 없이 사는 것, 천하 영재를 모아 가르치는 것”(맹자), “좋은 글 읽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좋은 벗과 술 한잔이 군자삼락”(추사),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 파리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알랭), “객관적인 삶의 방식에 자유의 정신과 사랑, 다양한 관심과 열의를 가진 이가 행복한 사람”(러셀), “필요한 것 이상의 부는 우리의 행복감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재산 유지에 쓸데없는 걱정으로 행복감이 방해받는다”(쇼펜하우어).
인간 존재와 행복의 결부는 철학이나 종교, 예술의 전유(專有)영역도 아니다. 유행처럼 복지국가론이 나돈 이래 정치와 행정도 직접 행복을 나눠주겠다며 포퓰리즘 경쟁을 벌인 경우가 허다했다. ‘행복주택’ ‘행복센터’(행정복지센터) ‘행복한 보금자리’ 등 지방자치단체까지 가세한 한국의 정치는 뒤늦게 ‘관급 행복’ 제공에 발동이 걸린 것 같다. 국가나 정부가 자유시민 개개인에게 행복을 준다? ‘인민 낙원’을 건설하겠다는 공산국가에서나 나오는 구호다.
행복의 조건과 정의가 사람마다 제각각이듯 그런 행복으로의 도달 또한 궁극적으로 개인의 평생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팍팍한 생활 속에 ‘전문가’에게 배우고 싶고, 앞선 이들의 색다른 경험이나 깊은 사유에서 답을 찾고 싶은 게 보통사람들이다. 굳이 사상가, 대문호, 석학이 아니어도 좋다. 때로는 내 눈높이에 맞고, 답답한 내 현실에 꼭 맞는 해법이 더 좋다.
고도화된 IT시대, 4차 산업혁명 진입기의 행복은 어떤 것일까. 구글의 미래 프로젝트 구글X 신규사업개발총책임자(CBO)라면 색다른 행복관을 제시할까. 구글 CBO 모 가댓이 한경 초청으로 이번주 방한한다. 의료사고로 다 큰 아들을 잃은 직후에 쓴 행복을 풀다(모 가댓, 한경BP) 한국어판 출간에 맞췄다. 올여름, 구글 최고 브레인의 행복론은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21세기 행복은 무엇인가.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펌] / 출처; 한경닷컴 / 허원순(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7-07-04 03:16
인도양의 나무
我是汝非와 내로남불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 또는 연애 사건.’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말 ‘로맨스(romance)’의 국어사전 풀이다. 이 말은 고대 로마어로, 로마스럽다는 뜻이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에는 이 말이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유입됐다. 그 전도사는 11∼12세기에 유행한 남프랑스의 청년 음유시인을 가리키는 트루바두르.
중세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지내던 귀부인들에게 접근한 ‘아이돌스타’ 트루바두르는 참전 기사(騎士)들의 무용담을 시와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며 환심을 샀다. 학벌 좋고 집안 좋은 금수저 트루바두르의 작품은 대개 라틴어가 아닌 로마 평민들의 말, 곧 로망어로 씌어 있었다. 그래서 주로 운문으로 된 중세 기사의 이야기를 ‘로망스’라고 한 것이다. 나중에는 돈 많은 전쟁 청상(靑孀)과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제비족 트루바두르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변질됐다. 전사들의 무용담이 남녀의 애정담으로 변질된 셈이다. 이것이 영어 로맨스의 이력이다.
로맨스(ロマンス)라는 외래어가 일본 사회에 처음 소개될 당시에도 전기(傳奇) 소설 또는 공상적 문학이란 뜻으로 사용됐다. 현실과 거리 먼 내용을 가진 이야기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란 뜻이다. 현대적 의미가 아니라, 원뜻에 충실한 신어였다. 그러다가 이 말이 일제강점기에 우리말로 건너왔을 때의 표기는 ‘로맨쓰’였다. 1934년 청년조선사에서 ‘청년조선’이란 잡지의 별책부록으로 발행한 ‘신어사전(新語事典)’에 그렇게 나온다. 본래는 공상⋅모험⋅연애의 이야기가 많은 소설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주로 연애소설을 로맨쓰라 한다고 이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 당시에 벌써 오늘의 의미로 쓰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요즘 ‘내로남불’이란 말이 신문의 기사⋅논평 할 것 없이 널리 인용되고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不倫)이란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는 사자성어도 아니고, 그냥 시쳇말의 줄임에 불과하다. 굳이 사자성어가 필요하다면 ‘아시여비(我是汝非)’란 말도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틀리다)는 뜻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장에서 후안무치한 변명을 늘어놓는 후보들 이야기와도 잘 어울려 보인다. 또, 이들을 감싸고도는 여당은 고슴도치에 비길 만하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 털은 함함하다(부드럽다)고 한다니….
[펌] / 출처; 문화일보 / 황성규(문화일보 논설위원) / 2017년 07월 03일(月)
‘영광의 가시밭길’ 차기 검찰총장
“대한민국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014년 정윤회 문건 검찰 조사 때 경찰 간부가 한 말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의전 서열 1위는 대통령이다. 다음은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순. 실제 권력 핵심인 검찰총장 서열은? 30위. 육군 참모총장보다 3단계 높다. 같은 장관급 방송통신위원장의 바로 아래. ‘의전실무 편람(외교부)’ 서열일 뿐 실제 파워는 다르다.
▷어제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가 총장 후보로 소병철 농협대 석좌교수와 문무일⋅오세인 부산⋅광주고검장, 조희진 의정부지검장을 추천했다. 이들 4명은 검찰 안팎에서 평판이 좋거나 무난하다. 서울대 법대-광주일고를 나온 소병철 교수는 4명 중 최고참(사법시험 25회)으로 지난 정권 때도 2번 검찰총장 후보군에 포함됐다. 고려대 법대-광주일고 출신 문 고검장은 특별수사에서 잔뼈가 굵어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장을 맡은 바 있다. 서울대 법대-강릉고 출신 오 고검장은 공안 근무를 오래 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있었지만 대검 근무만 9번 했을 정도로 자기관리를 잘했다. 고려대 법대-성신여고를 나온 조희진 지검장은 ‘여검사 1호 기록’을 갈아 치웠다.
▷문재인 정부 첫 조각에선 호남 출신이 약진했다. 광주일고 출신은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 등 3명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박상기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연세대 법대-배재고 출신이지만 전남 무안이 고향이다. 장관과 검찰총장을 같은 지역 출신으로 임명한 경우도 물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번 주 중 한 명을 낙점할 것이다. 지역 구도를 감안할지, 역량 위주로 발탁할지 궁금하다.
▷파워가 센 역대 총장은 노태우⋅노무현 정부 때 정구영⋅정상명 변호사가 꼽힌다. 정구영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고, 정상명은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17회)로 친분이 두터웠다. 차기 총장은 검찰개혁 바람을 정면에서 맞아야 한다. 임기 중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도입과 수사권 조정이 이뤄지면 검찰권은 크게 약화된다. ‘영광의 가시밭길’인 셈이다.
[펌] / 출처; 동아일보 / 최영훈(동아일보 논설위원) / 2017-07-04 03:08
별이 내리는완월정 | 오희재 | 전라북도 - 남원시 광한루
스마트폰 중독과 독서 불모지의 평행선
세계적인 한국의 스마트폰 열풍 / 국민들에 사대⋅모방성 강화시켜
서구문명 여러 방면서 한계 노출 / 인류 위한 새술⋅새부대 될 수 없어
요즘 지하철을 타 보면 한국인은 영락없는 스마트폰중독자들이다. 승객의 거의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스마트폰은 젊은이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 남녀노소 상관없이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스마트폰이 잠시라도 없으면 숫제 불안하기까지 하다. 전화번호를 외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하철에서 간혹 독서하는 사람을 보면 반갑기도 하지만, 마치 구석기시대의 동족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스마트폰의 효용성도 적지 않다. 정보의 대중화는 물론이고, 정보의 실시간화, 여론의 대중주도 등 좋은 점도 많지만, 분명한 것은 스마트폰으로 읽은 정보와 이미지는 스쳐가는(흘러가는) 것이기에 대뇌에서 깊게 박히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결국 독서가 가져다주는 합리적인 사고력의 증대와는 반대로 인간을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고 즉물적으로 만든다. 한국의 스마트폰 열풍은 가히 세계적이다. 건강한 정보와 상식 이외에 소문과 정체불명의 지식의 홍수 속에 한국인은 노출돼 있다. 한국인의 성격과 관련해 스마트폰열풍은 걱정을 앞서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창조성보다는 모방성이 강하고, 독자적인 사고보다는 남(구미 선진국)의 사고나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한국인에게 사대-모방성을 강화하고 그러한 문화적 종속을 당연하게 여기는 습관이 붙을까 싶다.
한국인은 빙의(憑依)의 민족이다. 빙의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나 혼이 남에게 덮어씌워지거나 빙의시킨 존재의 노예가 되거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남의 사고나 아이디어를 강하게 입력하는 것도 광의의 빙의이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빙의이다. 기독교의 성경뿐 아니라 서구의 고전도 성경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풍토이다. 서구의 근대문물은 먼저 접하고 자신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활용한 ‘앵무새 지식인들’로 인해 한국의 정체성은 망각돼 있다. 별로 창조적이지도 못한 선배학자들의 횡포와 소위 갑질이 학원사회를 병들게 한 지 오래다.
서구 종속적 학원사회의 분위기에서 자란 한국의 기성세대가 갑자기 자주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를 향해 스스로 묻고 판단하고 스스로 쓰고, 역사적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절실한 오늘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 따르면 한국인의 읽기능력은 15∼19세 중⋅고등학교시절까지는 세계에서 1위, 2위를 다투고 있으나 그 후 점차 떨어져 불혹의 나이인 45세부터는 세계에서 최하위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는 독서가 학교수업과 연관되는 것이 많고, 성인이 될수록 스스로 읽고 생각하는 힘이 떨어짐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암기위주 교육정책과 선진국에서 지식을 배워서 쓰는 사대-종속적 사고와 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독서를 하지 않는 국민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한국인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서구의 문물들이다. 심지어 생각은 서구인들이 대신해주고 우리는 그들의 생각과 물질문명을 따라가는 것이 선진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다. “머리 아프게 생각은 왜 해? 저들이 생각한 것을 받아먹으면 되지.” 우리는 농담처럼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성인 10명 중 4명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 인문학 독서가 붐을 이룬 것은 1980∼ 90년대였다. 소위 민주화열풍이 전국에 불던 시기였고, 개발시대의 권위주의에 맞서 특히 마르크시즘 계열의 책이 대학운동권과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때였다. 덕택에 이념서적으로 재미를 본 출판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거대한 물결이 사라졌다. 마르크시즘 붐도 바로 모방의 결과였다. 현재 한국인에겐 남은 것은 지식기술모방과 감정밖에 없다.
서구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한국적으로 걸러짐이 없이 그대로 지배적이 되는 곳이 한국이다. 세계적으로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의 본래모습을 보려면 한국에 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공자의 나라 중국은 석전제(釋奠祭)의 원형을 잃어버려서 한국에서 배워가 복원했을 정도이다. 선불교의 원형도 한국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한국의 사찰에 유학 오는 외래승려도 적지 않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가 성황을 이루고 있는 곳도 한국이다. 로마교황청에 한국가톨릭의 입김도 세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교회가 있는 것도 한국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서구문명도 과학기술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여러 방면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서구의 인문학도 저들의 과학기술사회를 정당화하고 선전하고 지원하기에 바쁘다. 서구문명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는 새 술과 새 부대가 될 수 없다.
한국인은 외래사상의 이입과 자신의 감정이입을 통해 살아온 ‘정(情)의 민족’이다. 그래서 독자적인 철학이나 사상과 역사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문화의 종속적 상황은 독서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해외번역물이 판치고, 자생적인 책이라고는 문학류가 고작이다. 스마트폰의 세계 제1수출국은 지식의 세계 제1수입국이다. 요즘은 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가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기계인간과 인간신을 예고하는 지독하게 서양적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책이다. 지금도 우리는 감탄하며 무작정 쫓아가고 있다.
[펌] / 출처; 세계일보 / 박정진(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 2017-07-03 21:37:34
'반환 20년' 홍콩의 내면
지난 1997년 6월 30일 홍콩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는 날 홍콩에는 비가 왔다.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던 첸지천(錢其琛)은 자서전에 '주권 이양식이 열리던 날에 온종일 비가 내렸다. 그러나 나는 하늘 아래 모든 중국인이, 이 비는 중국인의 치욕을 씻어주는 비라고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적었다.
중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홍콩은 특별한 곳이다.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빼앗기며 중국이 서양 오랑캐의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스러운 역사가 시작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성공을 위해 서구와의 충돌을 가급적 피했지만 홍콩⋅대만 문제만큼은 예외였다. 덩은 세 번째 숙청에서 복권된 직후인 1978년 4월 국무원 산하에 홍콩사무판공실부터 설치했다. 20년쯤 뒤에나 닥칠 홍콩 반환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덩이 창안한 홍콩 통치 방식인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1982년 6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당시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대처 총리는 기세등등하게 홍콩에 대한 영국식 통치의 연장을 요구했지만 덩은 '일국양제'를 앞세워 이를 일축했다.
덩이 홍콩에 50년 동안 고도의 자치를 약속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홍콩은 더 단단하게 중국에 붙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제와 외교 측면에서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덩샤오핑도 지금 홍콩 젊은 세대(18~29세)의 94%가 자신은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라고 답변하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콩 반환 20주년 행사가 열린 지난 1일에도 홍콩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이날 오후 빅토리아공원 잔디밭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6만여 명이 모여 폭우와 폭염을 뚫고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다. 일부는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란 우산을 들었다. 그러나 시위 2시간 전 시진핑 주석은 민주화 요구에 대해 "중국 안전을 위협하는 어떤 시도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에 서구식 경제 자유는 보장하지만, 서구식 정치 자유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덩샤오핑 시대 중국은 홍콩을 통해 서구 자본이 중국에 들어오는 것을 간절히 원했다. 반면 시진핑 시대 중국은 홍콩을 통해 서구식 자유가 중국에 유입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
공산당을 대체할 정치 조직이 없는 중국 현실로 볼 때 일부의 민주화 요구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 일당 독재가 경제 위기와 빈부 문제 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통치 정당성에 상처를 입는다면 홍콩 젊은 세대의 민주화 외침이 중국 내부로 옮아 붙을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국내 일부 세력은 "앞으로는 중국의 시대"라며 반미(反美)를 외친다. 중화 민족주의를 강화하면서 민주화 요구에는 귀를 닫는 중국의 시대가 어떤 것인지 따져나 보고 하는 말인가.
[펌] / 출처; 조선일보 / 안용현(조선일보 국제부 차장) / 2017.07.04 03:14
디프로스
첫 한⋅미 정상회담의 계산표
韓 "北과 대화해보겠다" 하니 그간 "대북 인내 끝났다"던 美… "한번 해보라"며 유예해 줘
그러나 마냥 기다리지는 않아… 중국에 "실망했다"는 그런 뜻
트럼프, 北에 엄격해질 것
지난주 미국 워싱턴에서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하지만 상응한 대가(代價)를 치르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성공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크게 우려했던 한⋅미 동맹과 안보의 기본 틀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대가'라고 말하는 것은 한⋅미 FTA 재협상, 방위비 분담, 무역 역조 면에서 부담을 안게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동맹'에 변화가 없다고 해서 북핵이나 북한 문제에 두 대통령이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과 연설에서 북한과 대화를 강조하고 북핵의 단계적 해결을 모색하는 등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생각은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대화 통로를 열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며 그러니 대북 압박만 하지 말고 제재와 대화를 병행하는 기회를 가져보자는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대북(對北) 인내는 끝이 났다"면서도 문 정부가 해보겠다니 '한번 해보라'는 식의 유예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드 배치를 두고 밀고 당기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문 대통령은 한⋅미가 대북 관계에서 지난 십여 년간 해왔고 번번이 실패한 대화를 자신도 한번 해보겠다고 달려든 셈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서 한 급(級) 올라선 상황에서 문 정부의 대화 시도가 의도대로 풀리기는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게다가 중국이 미온적이고 미국 내에서 "한국에서 더 이상 '위험한 끈'에 매달릴 이유가 무엇이냐"는 회의론이 일기 시작한 마당에 북한이 핵 폐기는 물론 단계적 접근조차 응할 리 만무하다.
문 정부의 대화 노력을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트럼프도 아니다. 북한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계속 개발해나가고 미국을 위협하는 사태가 지속될 때에는 미국은 언제든 고삐를 조일 것이다. 한⋅미 간 안보 면의 대립과 갈등은 그때부터가 오르막인 셈이다. 다시 말해 트럼프의 아시아 정책, 대한(對韓) 안보 공약, 주한 미군 존치, 더 나아가 한⋅미 동맹의 근본적 존재 의미 등에 대해서 당분간 그 논의가 동결되는 상태로 보면 된다. 트럼프가 "중국에 실망했다"면서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과 하는 거래를 중지시키고 대만에 대한 거액의 무기 판매를 때맞춰 발표한 것은 자기를 '물렁이'로 보지 말라는 경고성 신호로 봐야 한다.
한국이 지불한 대가는 FTA 재협상이다. 백악관에서 재협상 문제가 거론되자 청와대는 재빨리 그런 논의는 없었다고 말문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미국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의 발표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 FTA 재협상 및 협정 개정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한⋅미 특별 공동위 개최를 요구할 것"이라고 나섰다. 일부에서는 트럼프의 말 바꾸기와 덮어씌우기를 거론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렇게 하기로 말을 맞춘 것' 같은 인상마저 주고 있다.
트럼프는 노련한 술수의 '꾼'임이 또 한 번 입증됐다. 그는 자신도 집권한 지 얼마 안 됐고 문 대통령은 더 일천한 처지인 점을 감안할 때 한⋅미 관계에 어떤 '실험'을 도입할 시기도, 처지도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안보 면에서 현상 유지를 한국에 주는 대신 FTA 재협상을 부각함으로써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아메리카 퍼스트'를 과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는 좋게 말해 국제적 거래를 중시하는 '전략꾼'이고 나쁘게 말해 거래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장사꾼'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있는 동안 우리는 불안할 수도 있고 그것을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중국이 북한을 책임져 준다면 그는 북한, 더 나아가 한반도에 크게 집착하지 않고 동해를 아시아 방어선으로 삼는 애치슨 라인으로 물러설 것이고, 중국의 역할이 미미하거나 중국이 이중 플레이를 한다면 그는 한국과 일본의 존재에 더 무게를 두고 이것을 지키려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북한에 엄격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은 때마침 북한의 반(反)인권적 억압으로 미국 학생이 결과적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고 트럼프가 중국의 역할이나 이중 플레이에 실망감을 표시하고 있을 즈음에 열렸다는 시기적 요소를 감안할 때, 트럼프가 대북 문제에서 취할 노선은 일단 강경 노선이다. 다만 한국 측의 요청을 감안해 현상을 유지하는 선에 머문 것이다. 자신의 반대자들을 향해 "대통령은 나다. 저들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트럼프는 정통 관점에서 보면 이단자이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쉽게 물러서거나 꺾이지 않는다는 데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펌] / 출처; 조선일보 /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 2017.07.03 23:24
민들레
평양 단란주점 외상 사건
15년 전인 2002년 6월 30일 오전 평양 고려호텔 1층 로비. 사색이 되어 나타난 북한 안내원(한국의 국가정보원 요원 격. 방북한 남한 사람들을 안내하고 정보도 캐는 사람)이 기자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저∼, 기자 동무, 어제 술값 외상 다신 것부터 좀 해결을….”
전날 평양에 도착한 남쪽 기자가 궁금했던지, 아니면 술이 고팠던지 안내원들은 환영만찬 반주부터 시작해 길거리 호프집을 거쳐 결국은 3차까지 끌고 갔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곳은 외국인 전용 노래방. 여성 접대원이 맥주 따라주고 노래 한 곡 같이 불러주는 정도였다. 남한 방문객 세 명과 북한 안내원 두 명이 일본 맥주 한 병씩 먹었을 뿐인데 물경 500달러라는 계산이 나왔다. 영락없는 바가지였다.
당시 경제부 기자였던 나는 “평양 술값이 서울 강남보다 비싼 줄 몰랐네요. 그렇게 많은 현금 안 가지고 다니는데, 혹시 비자카드 받나요?”라고 반격했다. 지배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외상을 달아줬다. 그날 밤 기자는 평양에서의 난생 첫 잠을 달게 잤지만 지배인은 ‘남한 기자가 정말 약속을 지킬까?’를 고민하며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촉이 밝은 기자라면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느리고 관료적인 사회주의 국가 국영상점 지배인의 돈벌이 욕심이 왜 그렇게 컸었는지를. 기자가 평양에 있던 7월 1일을 기해 김정일 정권은 이 노래방 지배인을 비롯해 북한 국영기업 종사자들의 임금과 물가를 크게 올리고 각자 번 만큼 인센티브를 주는 경제 개혁 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7월 3일 한국으로 귀환한 뒤 일본 언론을 보고서야 그것이 역사적인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였음을 알고 땅을 쳤다. 북한 초유의 경제 개혁 조치라는 대특종을 현장에서 놓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실감했다. 다음에 그런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그해 가을 학기 대학원 석사과정에 등록해 북한 경제 공부를 시작했다.
김정은도 비슷한 후회와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 김정일의 개혁은 순항하지 않았다. 2003년 종합시장 도입으로 속도를 더한 분권화 시장화 개혁은 2005년 평등을 앞세운 ‘북한 보수’들의 역풍을 맞고 후퇴했다. 개혁을 주도했던 박봉주 내각 총리는 실각했고 북한 경제는 2009년 11월 화폐 개혁까지 좌향좌를 계속했다.
계획과 시장을 오가다 실패한 아버지가 2011년 12월 세상을 떠난 뒤 김정은은 5년이 넘도록 시장 메커니즘을 확대하는 개혁 노선을 일관되게 걷고 있다. 2012년 화려하게 재기한 박봉주 총리는 엘리트들의 ‘줄숙청’을 비웃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6⋅28방침’(2012년)과 ‘5⋅30문건’(2013년)으로 알려진 김정은식 개혁은 36년 만에 열린 2016년 5월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우리식 경제관리 방법 전면적 확립’으로 정식화됐다.
그러나 김정은 개혁의 대외경제적 환경은 아버지 때보다 불리하다. 15년 전엔 한국이 북한의 최대 경제지원국일 정도로 남북 경제 교류가 활발했다. 북한은 중국과 신의주 경제특구를 도모하기도 했다. 다섯 차례의 핵실험과 수십 차례의 미사일 발사 시험으로 북한은 국제사회의 초강력 제재 레짐(regime)을 자초했다. 문재인 정부나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미사일 마니아인 김정은이 굳이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외부에서 돈과 자원이 유입되지 않는 환경에서의 개혁은 결말이 뻔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핵과 미사일만 내려놓으면 기꺼이 카드 들고 바가지 쓰러 가겠다는 국제사회의 큰손들이 줄을 서 있다는 점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펌] / 출처; 동아일보 / 신석호(동아일보 국제부장) / 2017-07-04 03:00
트럼프 8년 집권, 현실이 될 수 있다
자신의 호텔에서 재선 행사 집권 반년도 안 돼 거액 모금
계산된 발언으로 혼란 야기. 미국인들, 현혹되지 말아야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달 말 백악관 인근 트럼프인터내셔널호텔에서 2020년 대선 도전을 위한 정치자금 모금 파티를 열었다. 집권 5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미국인들은 벌써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하고 몰상식한 언행에 질려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트럼프는 “카타르 정부가 테러리스트들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은 직후 120억 달러어치의 전투기를 카타르에 팔아넘겼다. 할 말 다 했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4년 뒤 대선에서 재선될 꿈에 부풀어 있는 모양이다. 트럼프의 재선비용 모금 파티는 한마디로 ‘돈잔치’였다. 1인당 기부금 한도가 전례 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트럼프가 일관되게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다. “세계가 미국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트럼프주의’란 제멋대로 구는 독단주의를 뜻한다. 그는 미국인들을 정신없게 만들어 이 원칙을 실천한다. 느닷없이 모호한 발언을 쏟아내 국민이 이를 놓고 논쟁을 벌이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다. 논쟁이 정리 단계에 들어서면 돌연 또 다른 폭탄발언을 던져 결론이 나지 못하게 한다.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나와 그의 독대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것”이란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 말을 한 뒤 6주 만에 트럼프는 “녹음테이프 같은 건 없다”고 했다.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워터게이트 당시 교묘한 말 돌리기로 시간을 끈 리처드 닉슨을 흉내 낸 인상도 줬다.
트럼프에겐 소란 자체가 중요하다. 아드레날린과 서스펜스를 만들어야 한다. 자연히 그의 말에서 콘텐트나 무게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취임 후 반년도 되지 않은 대통령이 어떻게 자신이 소유한 호텔에서 4년 뒤 재선 자금 모금 행사를 열 수 있을까? 이미 백악관 참모진은 트럼프의 개인 비서실로 전락했다. 미국민의 혈세로 트럼프의 재선을 위한 사적 정치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쉴 새 없이 터뜨리는 트위터 메시지로 미국인들의 의식을 조종한다. 미국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빛의 속도로 거짓을 쏟아내 진실을 가리려는 작전이다. 본능적으로 사람의 주의력 한도를 알고 있기에 이런 수작을 벌이는 것이다. 독일의 석학 막스 베버는 ‘법을 통한 지배’와 ‘전통을 통한 지배’를 비교했다. 법을 통한 지배는 “지배자는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스스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반면 전통을 통한 지배는 지배자의 부하들이 지배자의 가족이나 친지로 구성된다. 자연히 객관적인 법령 대신 정실주의가 판친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인들이 만든 민주주의 틀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측근들은 상당수가 가족이나 친지다. 따라서 법을 통한 지배는 트럼프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 트럼프의 부하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은 중세 봉건 왕국과 북한이 합쳐진 인상을 준다. 트럼프가 왜 그렇게 독재 왕정국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좋아하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걱정되지 않는 측면이 없다. 특히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위의 경계를 가볍게 흐리는 행태는 심각한 문제다. 자유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사라지면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떠받치는 이성적 담화의 기반도 사라진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고 방향을 상실한 국민은 트럼프 같은 폭군을 유일한 진실의 담지자로 착각할 가능성이 커진다.
트럼프에게 시리아 문제를 풀 해법은 없다. 러시아를 다룰 묘안도 없다. 그러면서 독일 같은 유럽의 핵심 동맹국들은 하찮게 여긴다. 중국이 북한에 압박을 가하지 않는 당연한 사실에 충격받기 일쑤다. 심지어 수천만 명의 미국인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빼앗으려는 말도 안 되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71세 할아버지가 된 트럼프는 손주들의 앞날에 대한 관심도 없어 보인다. 기후변화 협약을 거부하며 지구를 함부로 다루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잘못은 따로 있다. 트럼프는 미국이 지켜온 신성한 가치를 하나씩 무너뜨리며 국민의 의식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용인하면 안 되는 것을 용인하게 만들고, 어이없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앤드루 잭슨 전 대통령에 대해 트럼프는 “남북전쟁을 본 잭슨 대통령은 ‘이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잭슨은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16년 전에 사망했다. 따라서 그는 남북전쟁에 대해 무엇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트럼프주의는 이처럼 기본적인 사실조차 무시하며 어떤 합리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트럼프의 위험이다.
◆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6월 23일 게재 .
[펌] / 출처: 중앙일보 / 로저 코언(NYT 칼럼니스트) / 2017.07.04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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