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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 배치도(자료제공:달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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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 전경(사진:홍정기)
달성 삼가헌
(達成 三可軒/중요민속문화재 제 104호/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달성에는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한분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삼가헌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둘째 아들 광석光錫이 벼슬을 물러난 후 1826년 초가를 허물고 현재와 같은 정침과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은 광석의 손자인 규현奎鉉대에 파산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누마루를 달고 연못을 만든 것을 1874년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하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는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삼가헌은 별서를 가진 구조이다. 별서를 구성하는 방식은 같은 집안에 있느냐 조금 떨어져 있는가로 구분되며, 연못이 있는가, 아닌가로 나뉜다. 이곳은 본채와 같이 붙어 있으면서 연못을 앞에 두고 있다. 별서의 이름은 하엽정荷葉亭으로서 하荷는 연꽃이라는 뜻이 있다. 즉 하엽정은 “연꽃잎 정자”라는 뜻이다. 하엽정은 연꽃으로 유명한 곳이라 한다. 주손冑孫은 “사진가들의 연꽃을 찍기 위해 많이 찾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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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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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하엽정(출처 : 문화재청 싸이트)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는데 지금은 연엽이 우거져있어 가운데 섬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엽정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이어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하엽정은 집안에 혼사가 있을 때는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주손의 말씀에 의하면 처음 이 집에 온 며느리는 바로 안채로 들어가지 않고 시댁의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이곳에서 얼마간 머무른다고 한다.
평대문인 문간채를 지나면 바로 앞에 사랑채가 바로 눈앞에 맞닥뜨린다. 사랑채는 여태까지 보아온 다른 사랑채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던 건물이다. 사랑채 몸채는 전면 다섯 칸 측면 4칸이고 뒤쪽으로 두 칸 날개채가 있는 ㄴ자형 건물로서 원기둥에 익공으로 지은 당당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건물이지만 대문칸에서 보면 지붕이 높지 않아 편하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그러나 대청에 앉아 보는 모습은 밖에서 보는 모습과는 다르게 집이 주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부재도 튼실하고 부재를 다루는 솜씨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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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모습
이런 느낌의 이유는 서까래 결구에 있었다. 사랑채는 오량집으로서 오량집은 중도리를 중심으로 주심도리 쪽 즉 바깥쪽으로는 장연長椽이라고 불리는 긴 서까래를 걸고 종도리 쪽으로는 단연短椽이라는 짧은 서까래를 건다. 일반적으로 장연은 경사가 완만하고 단연은 경사가 급해지면서 지붕이 높아지지만 이 집에서는 삼량집과 같이 하나의 서까래로 지붕을 만들었다. 결국 집은 오량집이지만 서까래는 삼량집의 구조이다 보니 지붕이 같은 오량집에 비해서 낮아진 것이다. 지붕구조도 좌우가 다른데 대청 쪽은 팔작지붕이고 중문 쪽은 맞배지붕에 맨 끝 한 칸은 부섭지붕(한쪽으로 만 경사가 진 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런 지붕 구조는 옆 마을에 있는 태고정과 같은 구조로서 태고정을 참고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뒤쪽으로 돌출된 두 칸 중 한 칸은 마루, 한 칸은 작은 사랑이다. 마루 한 칸은 벽감을 만들어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당이 없을 경우 안채 대청에 벽감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신주를 모시는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주손 말씀에 의하면 작은 사랑은 장례가 있을 때는 시신을 모시는 제청으로 쓰였다고 한다. 작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는 禮義廉恥孝悌忠信라고 쓰여진 현판이 있는데 영의정을 지낸 남인의 영수 허목의 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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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서까래 모습
사랑채는 측면이 두 칸인 겹집으로서 대청이 4칸 규모로 널찍하다. 큰 사랑채는 전면 두 칸인데 앞쪽에 반 칸의 퇴칸이 있어 방 깊이는 한 칸 반이여서 다른 집 사랑채 방보다는 훨씬 널찍하다. 사랑채 뒤쪽으로는 처마 밑으로 반의 반 칸 규모의 반침을 들였는데 지금은 막혀있지만 예전에는 이쪽에 문이 설치되어 있어 안채와 왕래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전면 중문 쪽 한 칸은 앞쪽에 시봉하는 동자가 머무르는 던 상방이 뒤쪽으로 부엌이 있는데 부엌에도 쪽문을 달아 사랑방과 직접 연결되게 되어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3칸 규모의 중문은 초가로 세 칸 중 중문 반대쪽 칸은 방앗간으로 쓰였는데 중문이 초가로 된 집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주손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부터 초가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선비의 검소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가 하였다.
안채는 ㄷ자 형태인데 안방에 면한 부엌 쪽이 2칸 짧다. 안채는 전면 6칸 전퇴집으로 3평주 삼량집인데 안채는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은 집이다. 다행히 건넌방 날개채 쪽으로는 불이 옮겨지지 않아 과거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안채의 특징은 부엌 쪽 벽체이다. 측면과 후면 방화장 벽체가 일반 집과는 달리 매우 두껍다는 것인데 이렇게 만든 이유는 부엌을 외부 열기로부터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추정되지만 다른 두 면이 일반 집과 같아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 집에서 가장 특색 있는 부분은 곳간이다. 곳간은 벽체는 돌과 흙으로 쌓았는데 아래쪽이 위쪽보다 두껍게 되어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곳간은 삼면이 막혀있고 전면에만 출입을 위한 판장문이 있고 위쪽에 좌우에 한 곳씩, 가운데 두 곳에 조그마한 봉창을 뚫어 보았다. 벽체는 2자인 60cm정도라고 하는데 벽체를 두껍게 한 것은 단열을 위함이다. 이런 구조는 달성과 인접한 성주 한개마을의 곳간과 비슷하여 이 지역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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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곳간
그러나 이 집 곳간이 한개마을 하회댁 곳간과 다른 점은 기둥이 있다는 것이다. 한개마을의 곳간은 안과 밖이 모두 같은 재료로 되어 있어 별도로 기둥을 세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곳간은 벽 안쪽에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들보를 받치는 두 개 기둥이 있다. 즉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지만 벽에 있는 기둥이 그리 크지 않고 서까래도 기와집으로서는 적당한 크기가 아닌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초가로 지어졌던 곳간이 나중에 기와를 얹고 단열을 위해 후에 벽체를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문간채에는 종도리를 받치는 장혀에는 개국開國 4244년에 상량했다는 명문이 있다. 이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단기檀紀 연호로서 서기西紀 1911년에 해당되는데 문간채가 지어진 때는 한일늑약이 이루어진 다음해이다. 이렇게 상량문을 단기로 기록했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무언의 거부로서 삼가헌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단기의 연호는 우리나라가 시작하는 해인 1948년 법으로 우리나라 연호로 제정한 것인데 1961년 5.16군사 쿠데타 이후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그해 12월 단기연호를 폐지하였다. 근대화라는 기치아래 사라져 버린 단기연호, 그와 함께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도 사라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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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안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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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안채 모습(출처:문화재청 싸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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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부엌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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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대청 구조
추기 :
1. 별당에서 시집에 적응하기 위해 며느리가 머물렀다는 것은 그간 여러 집을 다니면서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내당에 있는 별당은 여자들의 공간이었지만 밖에 있는 별당은 철저히 남성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나에게는 의외였다.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형화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얼마 전 올렸던 군포의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의 사당도 종손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2칸이었는데 공무원들이 그런 예는 없다고 하면서 단칸으로 지어버렸다고 한다. 이런 유형화의 오류를 이번 삼가헌에서도 다시 한 번 깊게 느꼈다.
별당의 쓰임새에서 삼가헌 가문이 사람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새 식구가 행여 적응을 못할까 배려하는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결혼풍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배려가 있는 집안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삼가헌의 건립경위와 시기에 대해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답사여행의 길잡이, 문화재청, 달성군청사이트가 조금씩 다르다. 일단은 주손의 증언을 기준으로 하여 정리하였다. 주손의 증언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는 1826년(道光 8년)에 같이 지었다고 한다. 이는 상량문에서 주손이 확인한 사항이라고 한다.
3. 곳간에 대한 것은 주손 동생분이 건축을 하기 때문에 동생 분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동생분의 의견도 나와 비슷하였다. 곳간의 벽체는 나중에 붙인 것 같다고 하였다. 안채 부엌 벽이 두꺼운 것은 추운겨울을 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였다.
4. '종손宗孫'이란 명칭대신 '주손冑孫'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집주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집주인은 '종손'이라는 명칭은 장자長子로 계속이어 왔거나, 불천위 등과 같은 분을 모시어 파를 새롭게 만들어 내려오는 경우에만 붙일 수 있다고 하시면서 요사이 제대로 호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하시며, 자신의 가문은 종손집안이 아니므로 '주손'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하였다.
5. 아래 <복권기금으로 복원 된 보물 '삼가헌'>에는 옛날 화재로 소실 후 모습이 있어 참고로 링크하였다.
참고자료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 묘동박황씨가옥 편
답사여행의 길잡이(팔공산자락)
문화재청싸이트
달성군청싸이트
EBS 한국기행 : 성주/삼복더위, 문중이 모이던 날
중요민속자료 '삼가헌'에 불
http://www.ytn.co.kr/_ln/0103_200904042328556256
[복권과 문화] 복권기금으로 복원 된 보물 '삼가헌'
http://blog.naver.com/nanumlotto?Redirect=Log&logNo=30114255756
http://www.645lotto.net/webzine9/contents/c24.asp
[블러그] 옛글의 향기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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