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을 빛낸 예술인
통영 르네상스 - 통영문화협회회원 야유회
한국 창작음악의 활화산 정윤주
정윤주(鄭潤柱, 1918년 ~ 1997년)는 대한민국의 작곡가로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원을 거쳐 영 필하모니에 관계했으며, 임동혁을 사사하였다.[1]
그의 작품으로는 관현악 무용 모음곡 〈까치의 죽음〉, 〈사신의 독백〉이 있으며, 교향 모음곡으로는 〈초추의 스케치〉, 〈교향곡 제1번〉, <교향시: 관세음보살>〈관현악 4중주곡 제1번〉 등이 있다.
한국작곡가협회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연극계의 거장 유치진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사실주의극을 여러 편 썼다. 호는 동랑(東朗).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큰아들로 태어났다. 동생 치환(致環)은 시인이고, 아들 덕형(德馨)은 연출가이다. 1918년 통영보통학교를 마치고 부산 체신기술양성소에서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뒤 통영우체국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중학[豊山中學]을 거쳐 1931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1년 김진섭·서항석 등의 해외문학파 동인들과 극예술연구회 를 창립하고 이 단체에서 주관하는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기도 했다(→ 색인 : 극예술연구회). 1938년 3월 일제의 탄압에 의해 극예술연구회가 해체되자 서항석과 함께 극연좌 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압박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1년 만에 해체되었다. 1940년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극문화협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41년 극단 현대극장을 조직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아 친일극을 공연했다. 8·15해방 이후 잠시 침묵했다가 1947년부터 좌익연극을 반대하는 우익민족극을 주도했으며, 그해 이해랑과 함께 극단 극예술협회 를 조직했다.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하여 초대 원장에 취임했고, 6·25전쟁 때는 은거하며 희곡 창작에 전념했다. 1950~52년 국립극장장, 1958년 국제연극협회 한국본부 위원장, 1959~69년 동국대학교 교수, 1962~65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62년부터 죽을 때까지 드라마 센터 소장으로 있으면서 배우·연출가·극작가 등을 배출하는 데 힘썼다.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
김용주 화백은 1910년 10월 14일 통영시 태평동 617번지에서 탄생, 통영공립보통학교와 일본 도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거쳐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 양화부에 입학했다.
1934년 5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후 학교 인체연구실에서 6년간 소우주(小宇宙)인 인체의 구조를 해부학적으로 분석 파악, 종합하는 방법의 표현기법을 연구했다.
1940년 귀향한 그는 항남동 9번지의 언덕위에 화실을 마련, 그해 선전(鮮展) 양화부에 '추억'이, 이듬해 '투계(鬪鷄)'가 입선됐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 일제가 보국미술을 강요하자 모든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투계(鬪鷄), 사냥, 승마(乘馬)에 몰두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통영중과 통영여중 미술교사로 재기하면서 다시 화필을 잡게 됐다. '통영문화협회' 창립회원으로도 참여, 전혁림(全爀林)과 함께 미술부를 맡아 새 조국 건설에 앞장섰다.
또 '경남미술연구회'를 결성하고 방학을 이용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며 전시회, 강연회, 사생대회를 개최하는 등 미술계몽과 분위기 조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데생을 중시했으며, 자신의 완벽한 데생력을 통하여 회화는 결코 속임수가 아니라는 강렬한 인상을 제자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는 인물화, 특히 누드를 즐겨 그렸는데 그 시절에 자기 아내의 누드화를 전시, 공개하는 것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다.
1949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가세가 급속도로 기울었다.
그런 속에서도 화필을 놓지 않고 1952년부터 해마다 시내 호심다방에서 3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림을 팔기 위한 전시회라기 보다 자기화업의 경과보고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1953년에는 피난 왔던 이중섭(李仲燮)을 산양읍에 있던 그의 집 사랑채에서 이태규와 함께 기거하게 하며, 나중 항남동 성림다방에서 열었던 이중섭의 개인전을 준비하게 도와주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불편한 몸으로 작품제작에 몰두하다가 1959년 1월 15일 천재적인 기량을 다 펼쳐 보지도 못한 채 49세의 나이에 불꽃같은 예술적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선전(鮮展)2회, 경남미전 1회, 총 3회의 공모전에서만 출품했을 뿐 중앙화단을 도외시하며 고향에서 조용히 작품활동을 했다.
그의 사후 1959년 9월 부산미술가협회가 부산시 광복동 빠리장 다방에서 유작전을 열었고, 1963년 서울 미공보관에서 개최한 제1회 한국 현대작가 유작전에 '해바라기' '백합' '나부'가 출품됐다.
평생 300여점의 작품을 제작, 국립현대미술관에 '방위' '누드' '소녀상' '아내의 초상' '옥잠화'가 소장돼 있다.
또 호암미술관에 '자화상' '바위'가 소장되어 있을 뿐 정작 통영에는 그의 작품이 몇 점 남아있지 않다.
'깃발'의 시인 유치환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본관은 진주. 호는 청마(靑馬).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豊山中學]에 입학했다. 이때 형이 펴낸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26년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했으며,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 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경주여자중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고,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나전칠기의 명장 김봉룡
거칠고 투박한 선의 사군자·십장생·당초문 일색의 전통 나전칠기 기법에 금속세공용 손잡이톱으로 자개를 오리는 공법과 공간을 많이 두는 공법 등 섬세하고 간결·대담한 문양을 놓는 기법을 개발하여 나전칠기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명장이다. 16세 때부터 박정수에게서 나전칠기 기초를 배우고 통영칠기주식회사에 입사하여 나전칠기의 대가 전성규(全成圭)에게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1920년 전성규와 함께 일본에 머무르며 시계방에서 사용하는 금속세공용 손잡이톱을 사용하는 줄음질과 끊음질법을 익혔다. 1922년 귀국하여 전성규 공방에서 함께 일했다.
1924년 문고를 출품하여 일본 교토 세계박람회 입상, 대화병으로 1925년 프랑스 파리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 은상 수상, 문고로 1927년 일본 도쿄 우량공예품전에서 금패 수상 등 해외에서 솜씨를 인정받았다. 1930년 서울에 '고대미술나전칠기공예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34~4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10회 연속 입·특선을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1961년과 1975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로 초빙되었다.
1956년 경상남도나전칠기기술양성소 부소장으로 취임했고,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나전칠기공예를 가르쳤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칠기장으로 지정되었고, 1968년 질 좋은 옻칠의 주산지인 강원도 원주로 이전해 1969년에는 강원도 원주에 나전칠기·이조목기연구소를 설립하여 작고 전까지 작품활동과 후배양성에 힘썼다. 1952년 3·1절 기념 경남도지사 표창, 1959년 국산품전시회 상공부장관상, 1964년 경남도문화상, 1968년 신문화 60주년 기념 국무총리상, 1969년 전국공예대전 문공부장관상, 1976년 제1회 강원도미술전 초대작가상을 받았다. 2008년 원주시는 '원주시한국옻칠공예대전'에 김봉룡상을 제정했다. 작품에 〈원형 커피테이블〉·〈꽃병〉·〈당초무늬꽃병〉·〈박쥐무늬팔각반〉·〈주칠2층농〉등이 있다.
'꽃'의 시인 김춘수
서구 상징주의 시이론을 받아들여 초기에는 그리움의 서정을 감각적으로 읊다가, 점차 사물의 본질을 의미보다는 이미지로 나타냈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향·김수돈 등과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펴냈다. 1952년 대구에서 펴낸 〈시와 시론〉에 참여해 〈시 스타일 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유치환·김현승·송욱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펴냈다. 해인대학교·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64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취임, 1978년까지 재직한 뒤 이듬해 영남대학교로 옮겨 1981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하여 정계에 진출한 것에 대해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1986년 한국시인협회장, 1991년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역임했다.
'봉선화'의 시인 김상옥
1939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하였다.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80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제1회 노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시조 외에 동시·시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였다.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 구사가 특징이다.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 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
2004년 10월 30일에 26일 사망한 부인의 유택을 보고온 후 쓰러져 10월 31일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슬하에 2녀 1남을 두었다.[2]
가족관계로 형은 김상화 (시인)이고 딸은 김훈정 (패션디자이너)이다.
20세기 세게음악사의 거성 윤이상
윤이상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혔다.
시인 윤기현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어린시절을 통영에서 보냈다. 음악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17세에 일본으로 유학, 오사카[大阪] 음악원에서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되었고 8·15해방 후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국립고등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율〉·〈영상〉 등을 작곡했다. 1971년 서독 킬 문화상을 수상했고 독일국적도 취득했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고 1973에는 미국 애스펜 음악제에 작품을 발표했다. 1977년 서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81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8년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해 남북한 문화교류의 첫장을 열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서울·광주·부산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제'와 '한국창작오페라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그의 음악세계는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 한국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만나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밖의 작품으로 〈낙양 洛暘〉(1961)·〈예악 禮樂〉·〈무악〉·〈무궁동 無窮動〉(1986)·〈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등이 있다. 1995년 5월에는 민주화를 위해 분신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그의 마지막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가 일본에서 초연된 바 있다. 195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과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상, 괴테메달, 튀빙겐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꽃신'의 소설가 김용익
첫댓글 김용익은 따로 게재하겠습니다.
사진이 배꼽만 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