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개인전 갑자기 목재상으로 변신한 천재 화가, 김관호
인기멤버
hanjy9713
2024.05.11. 04:54조회 3
댓글 0URL 복사
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개인전
갑자기 목재상으로 변신한 천재 화가, 김관호
요약 1916년 12월 평양 재향군인회 연무장에서 서양화 개인전을 처음으로 가진 화가 동우 김관호.
동경 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에서는 물론 국내에서도 화제의 인물이 됨.
전시회는 대부분 풍경화로, 유화작품 50점이 전시되었고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음.
개인전을 치르고 난 후, 궁중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내다 갑자기 그림을 멀리하고 목재상을 차림.
김관호 작 <자화상>
사람들의 갈채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에는 메울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서양화 개인전을 맨 처음 가졌던 화가는 동우(東愚) 김관호(金觀鎬)이다. 1916년 12월 평양 재향군인회 연무장에서 있었던 전시회였다. 그의 나이 26세 때 일이었다.
김관호는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닌 후 첫 개인전을 가졌던 그해 3월 동경 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그의 수석 졸업은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식민지 암울한 시대, 그의 수석 졸업은 민족적 감정을 크게 고무시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졸업작품 <해질녘>이 그해 10월 신인 등용문으로서는 가장 권위있는 일본 문부성 주최 미술 전시회에서 특선으로 뽑히자 그에 대한 갈채는 더욱 높았다. 이때 응모작수는 모두 1천 5백여 점, 입선작수는 126점, 그중 특선은 11점에 불과한데 외국인은 김관호 단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개인전은 금의환향 후 열린 것이었다. 이때 전시한 작품은 대부분 풍경화로, 유화작품 50점이었다.
개인전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관심의 표적이었다. 일본인 기관장들이 그의 작품을 사주었고, 한국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의 천재성을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눈여겨볼 필요도 없이 이런 관심과 찬사는 화가로서의 김관호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하는 것은 그가 한국인으로서 그림을 잘 그려 일본인들을 이겨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교만하고 얄미운 일본인들을 그림으로나마 눌러버렸으니 통쾌하고 대견스러운 것이었다. 춘원 이광수도 <해질녘>이 특선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문에 '아아! 김관호군이여, 감사하노라'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 <해질녘>에 관한 글은 좀처럼 찾기가 힘들다.
이 작품은 해질 무렵 평양 능라도 부근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두 여체를 화면 가득히 자리잡게 하고, 그 사이로 멀리 강의 수면과 원경의 능선을 짜임새 있게 두었다. 주제의식이 선명하고 형상화 솜씨가 뛰어난 격조 높은 작품이었다.
김관호는 어쩌면 그런 그림에 대한 평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국내의 서양화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백지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술이라는 용어 자체도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1년 전이었다. 고희동이 처음으로 서양화를 그리는 화가로 소개되면서 미술이라는 용어가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큰 반향은 바랄 수 없었다 해도, 일본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개인전을 하는 만큼 화가로서의 관심을 우선 보여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일본을 이겨준 김관호만을 추켜세워주었다. 아니, 한편에서는 왜 하필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아무리 예술이라 해도 점잖은 체면에 너무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왜놈들한테 배우더니 별볼일없다는 말도 들렸다.
그래도 그는 유명인이었다. 최초의 전시회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저명인사가 되었다. 특히 궁중에서 그의 솜씨를 인정해 특별히 창덕궁에 들어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화가를 신분적으로 대접하던 조선의 왕실에서 예술가로 대접해주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때 김관호는 연못을 그리기도 했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물론 그림은 모두 유화였다. 왕실에서는 연못 그림을 사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개인전을 치르고 난 후 그는 갑자기 그림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개인전 이후 10년 동안 그가 그린 것이라고는 궁중에서의 그림들과 풍경화 몇 점에 불과했다.
특별히 한 일이라고는 평양에서 '삭성회(朔星會) 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생을 두고 서양화를 가르친 것이었다. 연구생 중엔 그의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김관호는 삭성회를 정식 미술학교로 승격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절필하고 목재상을 차려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직 35세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월남한 그의 손자에 의해 한국전쟁 직전까지 평양에서 살고 있던 것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에게서 그림을 배웠던 아들은 일제 때 자살했다는 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개인전 - 갑자기 목재상으로 변신한 천재 화가, 김관호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